‘문화 민주주의’로 포장된 가상현실 콘텐츠
문화 콘텐츠에 확산된 가상현실: 몰입형 체험인가, 대중적 흥행인가?
가상현실은 환상적인 감각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멋진 도구다. 최근 문화 부문에서도 점점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가상현실이 문화 접근성을 높여 주며, 마침내 문화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옹호론을 편다. 과연 정말 그럴까?
해바라기가 춤추듯 흔들리고, 까마귀 떼가 하늘을 가르며, 태양이 축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이렇게 생동하는 회화들을 감상하노라면 지루할 새가 없다. 빛의 물결이 일렁대는 가운데, 소용돌이에 휘말리듯이 캔버스의 심연으로 빠져든다. 마치 마법 같다. 관객들은 그렇게 반 고흐의 세계로 녹아든다. 이것은 바로 몰입형 체험이다.(1)
‘회화의 모차르트’ 반 고흐의 명작들은 ‘가상의 현실’에서 생생히 살아난다. 관객들은 감상할 뿐 아니라, 거장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직접 그림을 그려 느낌을 표현할 수도 있고, 창작물을 거대한 캔버스에 투영해 볼 수도 있다. 누구라도 빠져들지 않고는 못 배긴다.
2017년 개막 이래로 거의 전 세계를 대상으로 개최되는 1시간 15분짜리 몰입형 전시를 체험한 관람객 수는 약 500만 명에 달한다. 마르세유 전시는 이미 끝났지만, 로스앤젤레스 전시는 지금도 표를 구할 수 있다. 탄소 발자국을 줄이고자 한다면, 멀리 가지 않아도 다른 도시의 몰입형 전시를 체험할 수 있다.
VR 헤드셋, 공간 음향, 영상 투사, 360도 회전 영상 등 선택의 폭이 무궁무진해서 어디로 빠져들지를 정하기도 어려울 지경이다. 그중 파리 전시에서는 근대의 순간들을 체험해 볼 수 있다. 2019년 한 해 동안 <빛의 아틀리에> 관람객들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거나(120만 명 방문)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130만 명 방문)에 녹아드는 경험을 했다.
이미 밀라노, 마드리드, 로마 관객들을 매료시킨 ‘모든 연령대의 몽상가들을 위한’ 최초의 몰입형 전시 <몽상가의 집>(카루셀 뒤 루브르에서 8월 31일까지 전시)에서는 ‘내면에 남아 있는 동심’을 되찾고 ‘잊지 못할 경험’을 할 수 있다.(2)
8월 30일부터 18세 이상 입장 가능한 그레뱅 박물관에서 긴장감 넘치는 체험을 할 수 있고, <파리의 아파치>(19세기 말~20세기 초 파리의 악명 높은 범죄 조직) 전시에서는 몰입도 높은 첨단 기술이 가미된 역할 놀이에 빠져볼 수도 있다.(3)
더 우아한 전시도 있다. 7월 14일까지 열린 오르세 미술관의 <미래의 거장들이 될 무명의 화가> 특별전에서는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르누아르, 폴 세잔, 카미유 피사로, 에드가르 드가와 같은 화가들의 초상을 만날 수 있었다.(4) 실제처럼, 손에 닿을 듯이 생생한 경험을 통해 미래의 거장들과 함께하는 기분을 맛볼 수 있는 전시다.
관객들은 1874년 4월 15일, 파리의 어스름한 저녁 8시로 이동한다. 아니, 빠져드는 체험을 한다. 장소는 ‘유명 사진작가 나다르의 옛 작업실’이다. 바로 이곳에서 첫 인상주의 전시회의 막이 오른다. 1874년은 프랑스가 ‘두 차례의 대립’을 거친 시기다. 박물관 웹사이트의 전시 소개문에는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폭력적인 내전’이라고 무미건조하게 언급되어 있다.
오르세 미술관의 몰입 체험, 인상주의 화가들과 대화 나눠
파리 코뮌 설명에는 특정 시각이 반영되어 있기는 하지만 지금 다룰 주제는 아니다. 이 전시의 목적은 정치 논박이 아니라 시간 여행, 순간이동으로 과거로 날아가 매력적인 화가들을 만나는 것이니까. 이 화가들은 당시에는 ‘반항아’였지만, 찬란한 명성을 얻고 후세에는 수익을 올려주는 예술가들이 되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의 몰입 체험은 또 어떨까? 가이드 역할을 맡은 로즈가 인상주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와 대화를 나눈다. 예술가들이 바로 앞에서 작업을 하면서 예술을 논한다. 이 콘텐츠의 시나리오는 예술가들끼리 교환한 여러 서신을 참고해 만들었다.
비평가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가상의 승강기를 타고 다시 이동하는데, <보자르 마가진>(2024년 3월 31일)에서는 “와, 진짜로 올라가는 기분이다!”라며 칭찬했다. 파리 교외 부지발(Bougival)로의 여행, 선술집, 백포도주 한 잔, 그리고 파리 지붕에서 감상하는 불꽃놀이는 “정말 근사하다!”(5)
하지만 <프랑스 앵포>(2024년 3월 27일)에 따르면 ‘가장 인상적이고’ ‘가장 놀라운’ 장면은 모네가 <인상, 해돋이>를 그린 르아브르의 발코니가 나오는 부분이다. 그곳에 가면 장엄한 전경이 펼쳐진다. 이 <45분간의 가상현실 산책>을 설계한 에미시브 엑스퀴리오(Emissive Excurio)의 예술감독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그 당시 화가들이 느꼈을 감정뿐 아니라 화가들의 대담함, 진지함, 진실에 대한 탐구, 그리고 남들과는 차별화되는 용기를 반영하고자 했다.”라고 밝혔다.
회화 작품은 다른 전시를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도 <인상주의의 발명>이라는 부대 전시회가 열렸다.(6) 그런데 여기에서는 고전 작품만 있고 가상의 체험 콘텐츠는 없다. “실제 작품을 보면서도 전시회 관람객에게 특별한 전율을 선사하는 것이 이 전시의 목표입니다.”
실제 그림을 보면서‘도’라니, 참으로 대단한 목표다. 문화 몰입형 콘텐츠는 단순한 오락거리로 취급되는 것을 경계한다. 물론, 몰입형 콘텐츠가 다 오락거리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오르세 미술관 전시를 비롯한 여러 몰입형 콘텐츠는 ‘지적 갈증과 유희적 욕구를 동시에 해소하는’ 경험을 표방한다.
더 없이 감각적인 자극은 물론, 학술적 깊이도 있다고 자부하며 전문 자문단의 공로를 내세우기도 한다. <투탕카멘, 파라오 체험>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마법 같은 순간’을 약속하면서도, ‘호기심과 지식을 자극하는 진정성 있는 교육적 놀이’를 지향한다.(7)
브뤼셀 도서전은 프란츠 카프카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웹사이트에서 ‘문학을 가상현실 경험으로 각색하는 접근 방식을 창조한 작가의 통찰’을 바탕으로 관객들이 ‘감각을 깨우는 서사의 마법을 체험’하게 해준다. 기획의 주안점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작가 카프카가 유럽의 가치에 얼마나 심취했는지’를 조망하는 것이었다.(8)
샤를빌메지에르 박물관에서 시인 랭보와 대화를
아르튀르 랭보는 이런 해석을 피해 갔다. 하지만 샤를빌메지에르 박물관(musée de Charleville-Mézières)에서는 AI에 기반한 랭보의 3D 초상화가 관람객과 대화를 나눈다. 한편, <빛의 아틀리에>에서는 동양 화풍에 영향을 받은 화가 도미니크 앵그르, 외젠 들라크루아, 장레옹 제롬 등 ‘유럽 표현의 거장’으로 불리는 화가들의 실제 작품을 보지는 못하지만 ‘험난한 사막을 횡단하는 고난의 여정’을 체험할 수 있다.(9)
이처럼 몰입형 콘텐츠는 교육적이면서도 경쾌하고, 복잡한 용어 대신 단순하고 생생한 본질을 전달한다. 지식의 허세를 벗고 대중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흡사 마법 같다.
프랑스 문화부는 이런 사실을 잘 안다. 문화부의 디지털 전략은 이처럼 ‘새로운 시도’를 장려해서 “더욱 풍부한 문화 경험, 작품과 유산을 홍보하는 새로운 방법, 새로운 대중을 위한 문화에 대한 접근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10)
그래서 프랑스 2030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문화의 민주화와 관객 확대를 위한’ 전시회의 제작과 보급을 목표로 하는 ‘몰입형 문화와 메타버스’ 프로젝트 공모가 진행됐다. 프랑스 국립영화애니메이션센터(CNC)는 몰입형 창작 지원 기금을 마련했는데, 세 가지 주된 목표 중 하나는 ‘관객과의 관계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CNC는 오르세 미술관과 두 민간 기업이 공동 기획한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하는 밤>을 후원했다. 프랑스 국립박물관연합(RMN)-그랑팔레(Grand Palais)는 방크 데 테리투아르(Banque des territoires), 뱅시 이모빌리에(Vinci Immobilier)와 공동으로 바스티유 오페라 건물에 ‘그랑 팔레 이메르시프(Grand Palais Immersif)’를 조성했다.
돈이 되는 문화적 몰입형 콘텐츠
민간 기업 컬처스페이스(Culturespaces)의 창립자이자 회장을 맡고 있는 브뤼노 모니에의 말처럼, “박물관에 가지 않는 사회 계층이 문화를 접할 수 있도록 하는 모범 사례”라고 보는 듯하다.(11) 사실 해당 사회 계층은 선택지가 너무 많아 곤란할 지경이다.
컬처스페이스는 파리를 배경으로 <빛의 아틀리에> (Atelier des Lumières), 레보드프로방스를 배경으로 <빛의 채석장>(Carrières des Lumières)을 선보였고, 뉴욕의 문화 공간, 서울의 극장, 보르도의 문화 공간을 비롯해 함부르크, 암스테르담, 제주, 도르트문트에서도 빛의 변주를 계속 이어간다.
사실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문화적 몰입형 콘텐츠는 돈이 된다. 민간 부문에서는 특히 그렇다. 앙지와 브뤼노 모니에가 소유한 컬처스페이스는 2022년에 자산 규모가 10억 유로 이상이고 무리한 베팅을 꺼리는 두 개의 사모펀드 회사에 매각되었다.
‘물리적’ 전시는 무형의 전시, 심지어 몰입형 전시보다 비용이 더 많이 든다. 따라서 이 전시는 모든 면에서 득이 되며 흠잡을 데 없이 훌륭한 사업이다. 문화 민주화 측면에서도, 방문객 수 측면에서도, 현대 기술과 유산의 올바른 활용 측면에서도 그렇다. 그 바탕이 되는 동력은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 간의 긴밀한 협력이다.
물론 과거에도 ‘초기 버전’의 몰입형 볼거리가 있었다. 로베르 오생 감독은 이런 볼거리를 ‘연극’이라는 말 대신 ‘위대한 공연’이라고 불렀다. 오생 감독은 일찍이 관객을 ‘몰입’시키기 위해 불꽃, 웅장한 음향, 영상을 동원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재판을 재현할 때는 관객들을 투표에 참여시키기도 했다.
대중의 문화적 갈증을 새로운 예술 체험으로 상품화
1993년 마리 앙투아네트 재판에서는 관객들이 대부분 ‘추방’에 표를 던졌다. 당시 우파 성향의 앙드레 카스텔로와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시절 잠시 장관을 지낸 알랭 드코가 대본을 썼는데, 두 사람 다 역사적 순간을 대중 매체에 널리 알리는 활동을 폈다. 이 공연들은 인기를 얻었지만, 여러 언론과 전문가들은 대중 영합적이고, 감정을 조작하며 편향된 지식을 전달한다는 비판을 내놓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몰입 2.0’버전의 볼거리들을 칭송하고 높이 평가한다.
노란색 해바라기에 빠져들고, 유명한 인물들 사이를 누비고, 모험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적절히 공인된 예술 경험을 체화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런 즐거움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하지만 진정한 ‘문화’로의 ‘접근’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새로운 ‘상품 시장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물론 대중은 미술에 대한 지적 갈증을 느낀다. 하지만 ‘문화 민주화’는 유도된 감정, 최첨단 기술에 대한 경탄, 과거의 ‘소비’를 ‘체험’으로 탈바꿈시켜 포장한 환상으로 얻을 수 없다.
작품이 불러오는 진정한 경이로움과 거기서 생겨나는 궁금증이나 성찰을 막고, 단순히 화려한 감각의 충격만을 높이 사는 경향은 그저 수동성을 미화할 뿐이다. 이처럼 수동적인 체험을 해방의 이름으로 판매하는 현실, 이것이야말로 교묘한 마법 아닐까?
글·에블린 피예에 Evelyne Pieiller
작가
번역·이푸로라
번역위원
(1) 「Van Gogh. L’expérience immersive 몰입형 체험, 반 고흐전」, https://vangoghexpo.com
(2) www.houseofdreamers.fr
(3) 「Apaches de Paris. Immersion dans un bar au cœur des gangs de la Belle Époque 파리의 아파치. 벨 에포크 시대 갱단과의 선술집 체험」, www.apachesdeparis.com
(4) <Un soir avec les impressionnistes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하는 밤>, 1874년 파리로 떠나는 몰입형 가상 현실 탐험, www.musee-orsay.fr
(5) Malika Bauwens, 「Faut-il faire l’expérience immersive du musée d’Orsay, “Un soir avec les impressionnistes” ? On a testé ! 오르세 미술관의 몰입형 체험 <인상주의자들과의 저녁>을 경험해 볼 만할까요? 직접 체험해 봤습니다!」, <보자르 마가진>, Paris, 2024년 3월 31일.
(6) <Inventer l’impressionnisme 인상주의의 발명> 전시 도록, RMN – 그랑팔레, 오르세 미술관, Paris, 2024, 288쪽, 삽화 250건, 45유로.
(7) <Toutânkhamon, L’expérience immersive pharaonique 투탕카멘, 파라오 몰입형 체험>, www.toutankhamun-experience.com
(8) <Kafka adapté en réalité virtuelle 가상현실로 각색된 카프카>, 2024년 4월 5일, https://flb.be
(9) <Les Orientalistes 동양 화풍에 영향을 받은 화가들>, 앵그르, 들라크루아, 제롬 외, www.atelier-lumieres.com
(10) 프랑스 문화부, 「Politiques culturelles : la stratégie numérique du ministère de la culture. Pour un numérique culturel responsable et durable 문화 정책: 문화부의 디지털 전략. 책임감 있고 지속성 있는 디지털 문화를 위하여」, Paris, 2024년 6월.
(11) <Club Innovation & Culture>, 2022년 1월 24일, www.club-innovation-culture.f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