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정치의 재구성과 미래

Corée

2012-09-12     박동천

통합진보당의 앞날이 불투명하다. 이 때문에 한국 진보정치 세력 전체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진보를 재구성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높은데, 어떻게 재구성해야 할지 물으면 목표도 방법도 오리무중이다.

원래 이 글은 9월 2일로 예정됐던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무슨 결정이든 내려진 뒤, 차후의 전개 방향을 전망하는 내용으로 채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현 시점까지 중앙위원회는 열리지 못했다. 앞으로 며칠 사이에 또 무슨 반전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통합진보당에 관한 논의는 접고, 좀더 일반적인 관점에서 한국 진보정치 운동의 재구성과 미래를 논하려 한다. 한국 진보정치의 재구성과 미래를 위해 나는 이 글에서 몇 가지를 제언하려 한다.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하고, 자신에게 좀더 솔직해져야 하며, 이념보다는 현실에 무게를 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제안을 논의한 뒤 결론으로 유연한 연합을 지향하는 정치의식을 강조하려 한다.

첫째, '진보가 무엇인지'에 관해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진보'라는 용어는 대체로 세 가지 의미로 사용돼왔다. 자본주의를 죄악시하는 마르크스주의적 관점, 1980년대 이후 운동권이라는 연고로 맺어진 인간관계, 그리고 외세를 배격하는 민족주의적 지향이다.

이 세 가지 의미는 한국 현대사의 흐름 안에서 각기 나름대로 적실성을 가진다. 그러나 동시에 세 가지 의미는 어느 것도 순수한 형태로 현실에서 실현될 수 없다. 기어이 실현하게 되면 사회의 진보가 아니라 참혹한 수준의 퇴영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 중에 하나의 의미를 논리적 극단까지 추구하게 되면 나머지 두 의미는 자동적으로 파괴되고 만다. 그러므로 진보정치가 세 의미를 유지하려면 서로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절충이 필요하다.

절충이 필요하다는 것은 진보라는 범주 안에서 활동하는 집단의 다양성을 생각해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에서 진보라는 기치를 내걸고 활동하는 사람들은 통합진보당 이외에 진보신당 계열, 사회당, 녹색당, 그리고 기타 세력들이 있다.

어떤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보를 추구하는 수많은 지식인들과 일반 유권자들도 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나 민주노총 이외에 각종 노동조합에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이 분포하고 있다. 각종 시민단체, 협동조합, 생태 공동체, 사회적 기업 등에서도 진보 이념을 추구하는 활동가가 많다.

시선을 좀더 넓히면 민주통합당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진보를 지향하는 것이 틀림없다. 민주통합당은 물론 진보의 순결을 독점하려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굉장한 보수 정당으로 비친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대다수에 비하면, 기득권에 대한 규제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진보적이다. 군부와 경찰과 재벌과 언론계의 일각에서 한국 사회의 극우 시각을 대변하는 상당수 인물들의 눈에는 김대중과 노무현이 모두 빨갱이로 비쳤다.

진보적 정치 이념과 지향성을 하나의 점으로 규정하려 들면, 각자 생각하는 정답을 각자가 주장하기만 할 뿐 어떤 소통도 불가능한 지점을 이내 만나게 된다. 반면 진보의 외연을 확대하는 데만 신경 쓰다 보면 알맹이는 사라지고 지향할 초점을 잃고 말 위험이 있다. 그렇지만 현재 한국에서 진보를 내세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진보를 순결한 점으로 규정하려는 경향이 팽배하다. 그 때문에 민주통합당도 보수로 배척당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왼쪽'에 위치하는 온갖 집단과 계열들 사이에서도 동맹보다는 분열이 더욱 빈번하다. '소인은 똑같은 자들끼리 서로 싸운다'는 옛말이 딱 들어맞는 상태인 것이다.

진보의 뜻이 무엇이든지, 이것이 독야청청하겠노라는 은둔자의 옹고집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든 사회를 개선해보려는 기획이 되려면, 홀로 꿈꾸는 순결을 위해 상습적인 분열을 자초하는 식으로는 안 된다. 진보가 무엇인지 규정하는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요소, 그리고 불확실한 요소를 포용하는 방식으로 사유의 폭이 넓어져야 한다.

'진보'라는 대의의 세 가지 원칙

둘째, 진보 진영의 언어가 자신에 관해 훨씬 솔직해져야 한다. 진보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사회구조를 개선한다는 대의를 주로 말하는데, 이때 대의라는 것은 기실 이익과 무관할 수 없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이익을 대의의 반대로 인식하는 무분별한 도덕주의가 팽배하고, 이것은 특히 진보 진영에서 심하다.

한국 사회의 구조를 개선한다고 할 때, 기득권에 기생하며 놀고먹는 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을 줄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몫을 늘리는 과제 이외에 더 핵심적인 사항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열심히 일한다'는 말은 육체적·정신적·문화적·학문적·예술적으로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활동을 망라해서 가리킨다. 이처럼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이 권장되고 보상받는 사회라면 사회 전체가 물질적·문화적으로 풍요로워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것이 진보의 대의일 수밖에 없는데, 이런 대의는 적어도 세 가지 차원에서 이익과 결부된다.

이런 개선은 물론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된다.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이 늘어나 사회 전체가 풍요로워지고, 자원과 권력의 분배를 둘러싸고 계급투쟁이 발생할 필요가 없으니 사회 평화가 증진될 것이다. 이는 공공적 이익의 측면인데, 이 밖에 두 차원은 사익과 결부된다. 먼저 이런 개선은 현재 손해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된다. 자원 분배가 개선되면 노동자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고, 권력 분배가 개선되면 사회적 약자에게 정치적으로 이익이 된다. 이것은 개인들에게 돌아가는 사적 이익이다. 다음으로 이런 비전을 제시하고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을 주도하는 지식인이나 지도자들은 자연히 명망이 높아지고, 권력을 차지하게 될 확률이 높아진다. 이 역시 개인들에게 돌아가는 사적 이익이다.

사적 이익에 대한 강박

이렇게 말했을 때 이를 부인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특히 한국의 진보 지식인과 진보운동 지도자 사이에는 자신들의 활동에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듯한 강박관념이 있다. 이 강박관념은 자기 발등을 찍는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두 가지 사례를 보자.

올해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의 공천을 '나눠먹기'로 규정하면서 단칼에 매도해버린 담론이 유행했는데, 이는 마치 새누리당이 개혁공천을 하기라도 했다는 듯한 어처구니없는 인상을 유포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리하여 나눠먹기의 본산인 새누리당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결과가 빚어졌다.

다음으로는, 통합진보당의 내분도 이런 강박관념에서 비롯된 면이 크다. 통합진보당의 출범 덕택으로 신망이 올라가 국회에 진출할 가능성이 높아졌고,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서는 공동 정부에 참여할 가능성도 커졌다. 이렇게 되자 당내의 여러 세력 사이에 지위와 자원과 지분을 둘러싸고 갈등이 표면화한 셈이다. 이 정도의 나눠먹기는 정치판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여기며 접근했더라면, 흥정과 타협에 의한 해결책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갈등 자체를 절대악으로 치부해버림으로써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무한 투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어떤 대의도 공익이 아니라면 애당초 대의일 수 없다. 공익을 주장하는 모든 운동에는, 그것이 공익으로 판명돼 사회적 지지를 획득하는 날 주도자들에게 명망과 주도권이 배분된다는 사적 이익이 결부된다. 진보정치에는 사심이 없어야 한다는 어리석은 강박관념에 빠져서 이 점을 스스로 부인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치적 미래가 열릴 수 없다. 넉넉한 유산이 있다면 은둔해서 독야청청하든지, 아니면 동굴에라도 들어가 면벽참선을 하는 편이 일관적이다. 진보의 기치를 내걸고 있으면서 이런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머무르는 한, 영원한 좌절을 맛볼 수밖에 없다.

현실의 요구를 인정하자

셋째, 진보적 정치의식은 이념보다 현실을 중시해야 한다. 이념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몇 개의 음절 또는 단어로 이뤄진 구호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주의, 진보적 자유주의, 경제민주화, 복지국가, 신자유주의 극복 등 어떤 구호나 이념을 채택하더라도, 그것이 현실에 도움이 되려면 구체적인 상황에 적용돼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현실의 삶에서 마주치는 구체적인 문제는 몇 마디 문구나 몇 권의 교과서에 담긴 내용으로 절대로 환원될 수 없다. 지식인들의 담론과 이론은 항상 현실의 변화를 뒤좇아가는 것이다.

조선 성리학자들도 나름대로 세상을 개선해보려는 진정성이 있었다. 하지만 당대에 꿈틀거린 생명력의 모든 발동이 2천 년 전의 공자와 1천 년 전의 주자가 쓴 책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기 때문에 진보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결과를 자초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 조직 대다수가 극단적으로 보수성을 띠는 이유 역시, 2천 년 전 예수가 한 말, 그리고 그보다 더 옛날에 이스라엘 족장들이 한 말에 세상의 모든 진리가 담겨 있다고 보는 환원주의가 첫 번째로 지목돼야 한다. 2천 년 전 경전 안에 무한한 미래를 가둬버린 셈이다.

세상에는 문제가 항상 많이 있다. 이 문제들이 어떤 하나의 근본적 원인에 기인한다고 보면서, 그 원인만 제거하면 낙원이 이뤄지리라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단견이자, 애당초 진보라는 지향과 정면 충돌한다. 진보적 정치의식은 세상의 미래가 열려 있다고 보는 데서 출발해야 일관적이다. '미래가 열려 있다'는 말은 곧 인류가 지금까지 알아낸 지식 이외에 미지의 영역이 무한하다는 뜻이다. 무한한 미지의 영역은 인류가 지금부터 개척할 영역이다. 이 영역으로 개척해 들어가는 길은 지식인·이론가·정치지도자 등 엘리트가 열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수많은 민중이 실생활에서 받은 영감에 따라 열릴 때가 훨씬 많다.

진보정치의 목표는 어떤 프로그램을 제시해 세상을 근본적으로 고치는 데 둘 수도 있고, 현실에서 민중의 영감을 억압하는 이런저런 제도를 더 나은 것으로 바꾸는 데 둘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한국 정치에 관한 진보적 관심들은 전자에 치중하느라 후자를 등한시한 혐의가 짙다. 예를 들어 재벌의 독점적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출자총액제한이라든지 금산분리법 등을 이른바 '개혁적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할 적에 진보 지식인 가운데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이는 목소리가 터져나온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정도의 개혁조차 재벌과 관료와 새누리당과 보수 언론의 완강한 반대 때문에 무산되거나, 아니면 물타기로 끝날 위험이 높다.

이런 현실을 단순히 거부만 하는 것은 눈앞에 괴물이 공격해올 때 그냥 눈만 감으면 괴물이 없어지리라고 믿는 것과 같다. 재벌과 관료와 보수 언론과 보수 학계와 군부가 연결돼 있는 강고한 기득권 연합에 대항해 현실을 바꾸려면, 유권자 다수에게 호소력을 가지는 정책을 개발하는 데 더해 그런 정책들이 실현 가능하다는 점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실현 가능성이란, 정책 자체의 타당성만이 아니라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누르고 본연의 취지대로 시행해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리라는 믿음까지를 포함한다.

그런데 진보의 외연이 민주통합당도 배제하고, 진보적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시민사회도 배제하며, 진보신당·사회당·녹색당도 배제하고, 이제는 통합진보당 안에서조차 경기동부 계열과 인천연합 계열, 통합연대 계열, 국민참여당 계열 사이에서 반목과 갈등만이 불거지는 상황이라면, 이들이 도대체 무슨 개혁 정책을 성사시킬 수 있겠는가.

중국의 고대 전설에 허유는 왕위를 넘겨주겠다는 순 임금의 제안을 듣고 '더러운 소리'라고 시냇물에 귀를 씻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소부는 더러워진 시냇물을 소에게 먹이지 않았다고 한다. 허유와 소부가 뭘 먹고 살았는지, 누구를 상대하고 살았는지 나는 모른다. 정치 때문에 내 인생에 굴곡이 생길 위험이 없었다면, 정치 때문에 내 이웃이 고통받는 모습을 외면해도 무방했다면, 나도 정치처럼 '더러운' 일에는 일찌감치 관심을 끊었을 것이다.

'연합'과 '연맹'의 지혜

하지만 현실에서는 수많은 '나'들과 이웃, 동료, 가족이 정치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이런 세상을 고치자는 것 이외에 진보적 가치는 따로 없다. 세상을 고치려면 멋있고 아름다운 구상과 이론도 물론 필요하지만, 동시에 그런 구상과 이론을 실제로 추진해서 달성할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그런 힘은 오직 선거를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해야만 생길 수 있다. 다시 말해, 유권자 가운데 다수를 끌어모으는 '연합'과 '동맹'이 아니면 제아무리 그럴싸한 구상이 있어도 무의미하다.

통합진보당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전망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분당이 되든 안 되든, 진보운동에 몸담은 사람들은 연합의 의미를 깊게 되새겨봐야 할 시점이다. 분당을 안 한다면 이른바 구당권파와 신당권파가 어떻게 하나의 당을 유지할지, 그리고 나아가 그 당 바깥의 어떤 세력과 사안에 관해 어떻게 연합할지 생각해야 한다. 분당을 하더라도, 분당 이후에 2개로 갈라진 세력이 어떻게 연합할지, 그리고 두 세력 이외의 다른 세력과 어떻게 연합할지 생각해야 한다. 지금 '등대정당'을 표방하는 사람들 역시 언제 어떤 기회가 찾아오면 누구와 어떻게 연합할지 생각해야 한다.

이처럼 진실로 진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동시에 연합의 기술도 체득해야 한다. 연합의 의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정치판 밖으로 나가는 편이 정치 현실의 진보를 돕는 길이다.

글/박동천 전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 일리노이대학 정치학 박사(정치철학). <플라톤 정치철학의 해체>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깨어 있는 시민을 위한 정치학 특강> 등의 책이 있다. <프레시안>에 '박동천 칼럼'을 연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