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칸의 영화들

2012-09-12     세르주 르구르

 

 

해마다 88개국 5천여 명의 기자와 영화 관계자들이 공식 경쟁부문에 출품된 20여 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프랑스의 칸을 찾는다. 칸영화제가 불러일으키는 반향과 영화제에 들어가는 돈은 막대하다. 수상작들의 의미와 변화를 살펴본다.

칸영화제를 두고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 감독은 '가장 아름다운 축제'(1)라 했고, 일부 영화팬들의 분석을 빌리면 '사회 현실과 동떨어진 감독들의 리그'(2)라고 말할 수 있다. 칸영화제에 대한 다소 상반된 이런 평가들은 현실을 반영한다. 해마다 칸은 마치 '정신분열증의 중심지'로 변한다. 프랑스 영화가 안고 있는 모순이 상징적 방식으로 결집돼 나타나는 것이다. 무대 한쪽에서 보면 칸 영화제는 문화에 대한 공적 지원의 필요성을 정당화하고, 다른 쪽에서 보면 할리우드식 영화산업과 마찬가지로 테크닉, 투자 프로젝트,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주는 배우들에 의존하고 있다.(3)

12일 동안 칸영화제 참가자들은 세상과 단절된 소우주를 형성한다. 하지만 그들은 이 세상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 세상이 즐거움을 가져다주지만은 않는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 영화들의 소비에 전념한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나면 파티와 화려함, 그리고 사람들이 있다. 전면에는 켄 로치가, 이면에는 베르나르 타피가 있는 셈이다. 이런 양면성이 세계 영화계에서 가장 화려한 쇼윈도로 남은 칸영화제를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면, 과연 이런 양면성이 수상작과 수상자들에게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살펴보는 것도 칸영화제를 조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칸은 문제제기보다 화려함을 선호하는 것일까? 그 반대의 경우라면 어떤 종류의 문제제기가 상을 받게 되는 것일까?

 

칸의 레드카펫, 당신들만의 천국?

먼저 칸의 양면성을 반영하는 비율에 따라 수상 분야가 정해져 있다는 점을 강조해야겠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영화들과 마그레브 영화들은 소외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이벤트성 행사, 블록버스터 영화 상영과 스타들의 레드카펫 행사는 이제 전통으로 자리잡은 반면, 장마리 스트로브나 다니엘 위예 같은 위대한 감독이나 배우들은 수상자 반열에 오르지 못한다. 칸영화제의 여성혐오증도 주목할 만하고, 이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4) 2012년 경쟁부문에 오른 22편의 영화 중에서 여성감독의 작품은 단 한 편도 없다. 1993년 제인 캠피온 감독이 <피아노>로 황금종려상을 받은 것이 유일하다. 이처럼 상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 수상작들을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일단 2004년 티에리 프레모가 칸 영화제 예술감독이 되고 2007년 집행위원장으로 임명되면서 시작된 '프레모 시대'를 살펴보는 데 만족하려 한다. 집행위원장은 공식 경쟁부문 출품작 선정을 담당하는 위원회의 수장이다. 2005년과 2006년 출품작들은 사회참여 색채가 강한 영화들이었다. 칸 영화제 단골 수상자들,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 두 형제 감독과 켄 로치 감독이 그들 특유의 작품 세계를 잘 보여주는 영화들로 각각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는 정부의 최저생계비 지원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원치 않는 아이를 낳자 아이를 내다버리고 도둑질을 하다 감옥에 갈 수밖에 없게 된다는 내용이다. 반대로 투쟁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꿈꾼다는 내용을 주로 다루는 로치 감독은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1920∼23년 점령군 영국에 대항하는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투쟁을 그렸다. 두 작품은 투쟁으로 만들어지는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회적 절망 사이의 간극을 표현하고 있다.

2007년 황금종려상은 루마니아 감독 크리스티안 문주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에 돌아갔다. 이 영화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몰락 2년 전인 1989년 독재체제하의 일상적 탄압을 그린 영화다. 2008년에는 전반적으로 정치적 성향이 강했다. 다문화사회에서 사회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학생들과 교사의 갈등을 그린 로랑 캉테 감독의 <클래스>가 만장일치로 황금종려상을 차지했다. 하지만 수상작 전체가 참여 성향의 영화들이었다. 심사위원대상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유럽의 법치국가에서 벌어지는 조직범죄를 통해 사회의 단층을 냉혹하고 치밀하게 추적한, 로베르토 사비아노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각색한 마테오 가로네 감독의 <고모라>에 돌아갔다. 베니시오 델 토로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 <체>에서 동명 주인공 체 역으로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심사위원상은 마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일 디보>가 받았다. 이 영화는 1990년대 초에 집권해 코사 노스트라와의 부패 스캔들로 물러날 때까지, 25년 동안 권좌에 있던 이탈리아 기독교민주당의 상징적 인물 줄리오 안드레오티의 지배를 그렸다. 각본상은 이민과 조직폭력을 바탕으로 사회적 굴욕의 문제를 추적한 다르덴 형제의 <로나의 침묵>이 차지했다.

이스라엘 감독 아리 폴만의 다큐멘터리 <바시르와 왈츠를>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영화는 레바논의 사브라와 차틸라 난민수용소에서 팔레스타인 기독교 무장세력이 자행한 학살을 증언한 영화다. 경쟁·비경쟁 부문을 떠나 공식 초청된 모든 영화 중 처음으로 영화를 만든 감독에게 수상하기 위해 1978년에 만들어진 황금카메라상은 스티브 매퀸 감독의 <헝거>가 받았다. 1981년 교도소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다 사망한 IRA 소속 보비 샌즈와 동료들의 실제 옥중 투쟁을 소재로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다. 2009년 황금종려상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하얀 리본>이, 심사위원대상은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예언자>가 차지했다. <하얀 리본>은 점점 극단적 전체주의로 변해가는 억압적인 청교도주의에 의해 황폐화한 사회의 모습을 그렸고, <예언자>는 감옥에서 진정한 '프로'가 되어가는 범죄자의 변화 과정을 그린 영화다. 2009년에는 2008년보다 정치적 색채가 덜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심사위원단은 대부분 과거에서 영감을 얻고 지난 세기를 장식한 몇몇 쟁점을 파고든 영화에 황금종려상을 주는 경향을 보여왔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을 제외하면 엄밀히 말해 오늘날의 문제를 다룬 영화는 극소수이며 사회문제를 다룬 영화들은 거의 전무하다. 물론 정치적 반발 영향도 어느 정도 있다. 크리스틴 부탱 장관은 교육영화상을 받기도 한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의 교육용 DVD 배급에 반대했지만 배급을 막지는 못했다. 알제리 독립을 다룬 라시드 부샤레브 감독의 영화 <무법자>는 극우파와 지역의원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았고, 산드라 본디 이탈리아 문화부 장관은 이탈리아의 지진과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막후 공작을 다룬 <드라큘라>가 비경쟁부문에 출품되자 칸영화제 보이콧을 선언했다. 하지만 수상작들이 다루고 있는 주제가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룬 가치와 어울리는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황금종려상이 좋아하는 영화

2010년은 전환점이었다. 황금종려상을 받은 타이의 영화감독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의 실험적 영화 <엉클 분미>는 우리가 살고 있는 비루한 이승을 벗어나는 신비한 도피, 환생이라는 환상을 다룬 영화다. 물론 정치적 측면을 곰곰이 찾아본다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과 공산주의자들을 죽인 것을 후회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불교의 영향이 느껴지는 저항의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파멸할 수밖에 없는 현세의 방황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2011년 황금종려상은 이런 유의 해석마저 허락하지 않는다. 테런스 맬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는 한 미국 가족의 삶과 세계 창조 사이의 형이상학적이고 우주적인 차이를 평범하게 보여준다. 사회·정치적 성찰은 가소로울 정도로 가끔, 우연히 드러날 뿐이다. 마지막으로 2012년에는 삶·사랑·죽음의 영원한 트리오가 수상작 중심에 서게 된다. 하네케 감독- 이로써 그는 황금종려상을 2회 이상 받은, 극히 소수의 영화인 클럽에 가입하게 되었다- 의 <아무르>는 죽음을 앞둔 부부의 노년과 죽음에 대한 고통스러운 내면의 기록을 통해 영원한 가치를 탐구하는 영화 계열에 속한다. 물론 수상작들 중에 참여 성향의 작품이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수상 내역은 그리 화려하지 않다. 두 편의 영화가 전부다. 켄 로치 감독의 <앤젤스 쉐어>가 심사위원상을, 위기에 처한 사회에서 버려진 사람들에게 텔레비전의 영광의 서광이 비친다는 내용의 영화 마테오 가로네 감독의 <리얼리티>가 심사위원대상을 받았다.

이전 수상작들과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이런 선택은 분명 미학적·예술적 기준이 차지하는 비율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장질서라는 난관에서 벗어난 인류의 미래를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현실을 도피하거나 초월해버린다고 볼 수도 있다.

 

심사위원과 사이비 전문가들의 게임

이 모든 수상작이 상업적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중요하다. 프랑스에서 <트리 오브 라이프>가 동원한 관객 수는 87만2895명, <캐리비안의 해적: 낯선 조류>는 475만5981명- 프랑스에서만 2천만 관객을 동원한 <언터처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엉클 분미>는 12만7511명, 파스칼 쇼메유 감독의 <하트 브레이커>는 38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하얀 리본>은 65만 명 정도로, 180만 관객을 동원한 파스칼 푸자두 감독의 <체인징 사이드>에 비하면 한참 뒤처진다. 물론 제임스 캐머런 감독의 <아바타>(1460만 명)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게다가 수상작들은 영화산업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큰손들과 흔히-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영화서평 담당자들의 영화 해석 코드를 벗어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시상 전날의 예측과 시상 당일의 결과가 어긋나는 것은 흥미롭다. 2012년도 그런 경우다. 모두 자크 오디아드 감독의 <재와 뼈>와 레오 카락스 감독의 <홀리 모터스>가 황금종려상이나 주연상을 받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두 작품 모두 수상하지 못했다. 덜 알려진 배우와 감독들이 수상함으로써 영화산업 내 감독과 배우들의 위계질서가 흔들렸다. 그러니 칸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심사 과정에서,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상징적·물질적 기성 질서의 수호자인 사이비 미디어 전문가들의 권위에 흠집을 내는 것에 적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글: 세르주 르구르 Serge Regourd 카피톨 툴루즈1대학 교수

번역: 김계영 canari62@ilemonde.com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화사>(2006),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1) Jacques Kermabon, ‘이미지로 나타나는 증거’, <24 Images>, 138호, p.36, 2008 참조.
(2) Philippe Person, ‘칸, 헛도는 페스티벌’,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6년 5월호.
(3) 세르주 르구르, <문화적 예외>, PUF, 재판, 2004.
(4) ‘칸에서 여자들은 얼굴을 보여주고 남자들은 영화를 보여준다’, <르몽드>, 2012년 5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