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의학과에서 삶을 찾는 아르헨티나인들
부에노스아이레스, 전 세계 정신 질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사는 사람들 모두, 적어도 거의 모두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닌다. 아르헨티나는 ‘정신건강 전문의’의 숫자가 가장 많은 나라이며, 저명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의사였던 자크 라캉의 ‘상징적 고향’이다. 아르헨티나와 유럽 사이의 역사적 관계만으로는 이 헤게모니가 길게 이어진 상황을 설명하기 부족하다. 그러나 오늘날 정신적 고통을 다루는 다른 방식, 더 나아가 자기계발이 발전하면서 지금까지의 입지를 위협받고 있다.
골목골목마다 정신건강의학과가 있다. 문학을 좋아하는 33세의 마리아 본도니는 교회 아래 작은 광장과 가까운 병원에서 노란색과 빨간색 쿠션 몇 개가 올려져 있는 검소하고 소박한 느낌의 회색 소파로 내원자를 안내한다. 다시 이곳에서 300미터 떨어진 산타페 대로에는 인스타그램 계정 프로필에서 자신을 ‘페미니스트’이자 ‘페론주의자’라고 소개한 루실라 아란다가 공황장애를 전문으로 다루는 진찰실이 있다.
아르헨티나, 정신건강의가 프랑스보다 4배나 많아
‘프로이트 빌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 작은 중산층 구역에서 찾을 수 있는 다양한 ‘정신건강의’ 선택지를 살펴보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정신건강의학과를 얼마나 즐겨 찾는지 알 수 있다. 2016년 발표된 세계보건기구(WHO)의 통계에 따르면 아르헨티나는 전 세계적으로 정신건강의가 가장 많은 국가다. 그 숫자가 무려 인구 10만 명당 222명에 이르며 이는 프랑스보다 적어도 4배 이상 많은 수치다.
아르헨티나에서 정신건강을 돌보는 일은 자연스럽다. “여기에서는 정신분석을 받지 않으면 이상한 사람이다”라고 에세키엘 베레타는 설명했다. 동네의 대표적인 서점인 레트라 비바의 직원인 그는 최근 출간된 책 『정신분석이란 무엇인가?』(카스카다 데 레트라스 출판사, 2023)를 건넸다.
아르헨티나 정신분석학자 에르난 호세 몰리나가 집필한 이 책은 ‘무의식’, ‘자기애적 상처’, ‘해제 반응’,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충동’, ‘유동적 주의’, ‘암시’, ‘재의미화’, ‘자유연상’, ‘전이’ 등 이 분야의 기본 개념을 다룬 대중서이다. 베레타에 따르면 이들 용어를 익히는 것은 포르테냐(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들의 별칭)의 삶에 동화되는 데 필수다. “궤메스 광장(지구 중심부)의 벤치에 두 시간 정도 앉아서 사람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치료받는 이야기가 꼭 언급됩니다”라고 귀띔했다.
프로이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문화생활 곳곳에 스며있다. 수도 소재의 극장 대부분이 밀집해 있는 코리엔테스 대로에서는 2011년부터 ‘라 울티마 세시온 데 프로이트(프로이트의 마지막 치료 세션)’라는 공연이 열리고 있다. 이 작품에서 아르헨티나 최고의 배우인 루이스 마친이 배역을 맡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뛰어난 옥스퍼드대학교 교수 클라이브 스테이플스 루이스에게 가톨릭으로의 개종의 부조리함을 설득하기 위해 헛된 노력을 기울인다. 대중의 호평을 받은 이 연극은 피카데로 극장에서 매 회차 매진을 기록했다.
또 다른 히트작은 정신분석학자 가브리엘 롤론이 환자 8명과 진행한 상담 내용을 담은 책 『진료실 소파에서 나온 이야기』(플라네타 출판사, 2007)다. 30만 부 이상 판매된 이 책은 2013년 아르헨티나의 <텔레페>, 우루과이의 <카날 10> 방송사가 공동 제작하여 TV 시리즈로 방송될 정도로 관심을 일으켰다.
아르헨티나에 부는 이 열풍의 연원과 관련하여, 『팜파스의 프로이트』의 저자이자 역사가인 마리아노 벤 플로트킨은 “스페인어로 번역된 프로이트 전집의 해적판이 1926년부터 아르헨티나에서 유통됐다”라고 설명한다.(1)
아르헨티나인들, 프로이트 이론을 빠르게 수용
이 작품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더 큰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부에노스아이레스가 다른 라틴아메리카 지역보다 문해력이 높았다. 이 책을 받아들일 만한 교육을 받은 대중이 있었다”라고 그는 부연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빠르게 수용했다. 1931년 초,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신문인 <크리티카>는 무의식의 이모저모에 관한 기사란을 시작했다. 1939년부터 1945년 사이에 고메즈 네레아 박사(2)의 대중서인 『모두를 위한 프로이트』는 노동계급에 큰 인기를 얻었다.
정신분석학은 페미니즘 성향의 언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1948년 초, 잡지 <이딜리오>는 주로 주부인 독자들에게 자기 꿈을 사연으로 보내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사연을 리차드 레스트 교수(3)가 해석해 ‘정신분석이 당신을 도울 겁니다’라는 기획기사로 선보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치료법은 파시즘을 피해 달아난 유럽의 정신분석가들이 다시 돌아오고 나서도 몇 년 후인 1940년대까지 확산되지 않았다. 그중에는 스페인 공화주의자인 앙헬 가르마와 오스트리아-헝가리 공산주의자로 유대인 출신이라 병원 진료가 금지돼 1936년 국제 여단에 합류한 마리에 랑헤르도 있었다.
이들은 엔리케 피촌 리비에레, 아르날도 라스코프스키, 셀레스 에르네스토 카르카모 등 다른 아르헨티나 정신분석학자들과 함께 1942년 12월 15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국제정신분석협회(IPA)의 지부인 아르헨티나 정신분석협회(APA)를 설립했다.
수도의 부르주아들은 자아 성찰에 빠졌고, 정신분석학의 영향력은 커졌다. 1955년 9월 후안 도밍고 페론 정권을 전복시킨 쿠데타 이후에 정신분석은 중산층으로까지 퍼졌다. 군부가 ‘해방 혁명’이라 주장하는 쿠데타는 부유층에게 유리하게 작용했고, 아르헨티나는 “전후 유럽과 유사한 사회적, 문화적 근대화”를 경험했다고 정신분석학 역사가인 알레한드로 다그팔은 설명했다. 지역의 상류층 사회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코카콜라, 정신분석학에 이르기까지” 상징적인 상품을 소비하기 시작했다.
1957년부터 1959년까지 5개 대학에서 정신분석학 학위 과정을 열었다. 1세대 졸업생들은 개인상담소를 열거나 병원의 담당 부서에 취직했다. 그 와중에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의 사상이 전파되면서 정신분석학은 더욱 성장했다. 당시 영국 정신과의사 멜라니 클라인의 고도로 과학적인 이론이 지배적인 IPA의 ‘정통성’에 비판적이었던 라캉은 협회에서 추방당하고 1년 후 자신의 정신분석 학파인 파리 프로이트 학교(EFP)를 설립했다.
“정신분석학자는 지식인이 됐다”
프로이트의 글을 재해석해 이를 바탕으로 설립된 EFP는 상담 시간을 줄이고 IPA의 요구 조건에 구애받지 않으면서 상담 활동을 진행하도록 했다. 1967년 라캉은 “정신분석학자의 권위는 오직 자신으로부터 나온다”(4)라고 적었다.
라캉주의는 또한 정신분석학자의 역할을 재정의했다. “정신분석학자는 지식인이 됐다”라고 다그팔은 설명했다. 1960년대 상당히 친프랑적이던 아르헨티나 출신 다그팔은 “라캉주의는 프랑스 구조주의, 그중에서도 루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 분석과 함께 도입됐다”라고 했다.
아르헨티나의 정치적 상황이 악화되자 일부 정신분석학자들은 지적 모험을 한층 밀어붙여서 활동주의로 나아갔다. 1969년 5월 29일 코르도바(또는 코르도바조)에서 일어난 노동자 반란이 후안 카를로스 옹가니아 장군의 독재정권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된 후에 APA 내에서 좌익 성향 반체제 집단이 결성됐다. 정신분석을 혁명에 활용하려는 플라타포르마 아르헨티나(5)와 APA를 민주화하려는 도큐멘토였다. 헛수고였다. APA는 중립 원칙에 충실했다.
1971년, 분열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됐다. “코르도바조가 우리를 깨웠다”(6)라고 플라타포르마의 멤버였던 마리에 랑헤르는 1971년 APA와의 결별을 알리는 선집 『쿠에스티오나모스(우리는 자문한다)』의 서문에 적었다. 그녀는 “정신분석과 마르크스주의와 혁명은 상호의존적이다”라고 주장하며 APA의 “자유주의 사상”과 “고립”, “지배 계급과의 밀약”을 비난했다.
1976년 비델라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는 혁명에 대한 희망을 잔인하게 산산조각냈다. 군사정권은 페론주의 도시 게릴라 운동인 ‘몬토네로스'를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작전을 펼쳐 약 3만 명이 사망했다. 아르헨티나의 정신분석학 역사 전문가인 우고 베세티는 병원에서 “지역사회를 위해 일하거나 집단 치료를 진행”하던 정신분석가들은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라캉은 프랑스보다 아르헨티나에서 더 인기”
마리에 랑헤르와 같이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은 독재가 시작되기 전부터 (특히 브라질, 멕시코, 스페인, 프랑스로) 강제 망명해야 했다. 197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심리학자협회의 젊은 회장이었던 베아트리스 페로시오가 납치되어 고문을 당한 후 실종됐다. 그렇지만 독재정권은 사회가 아닌 영혼을 치료하는 것만 목적으로 삼는 한 개인 차원의 정신분석은 용인했다.
1983년 민주적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개인 차원의 정신분석은 계속 확산됐다. 1981년 자크 라캉이 사망하고 그보다 1년 전 EFP가 해체된 후, 라캉의 사위이자 정신분석학자 자크 알랭 밀러는 1992년 세계정신분석협회(WAP)를 설립해 그의 사상을 국제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같은 해에 지부격인 라캉주의학파(EOL)가 설립됐다. 현재 이 학파는 아르헨티나 전역에 설립되어 있으며 다른 기관도 수십 개가 생겨났다. 다그팔은 “라캉은 프랑스보다 아르헨티나에서 더 인기다”라고 했다. 물론 그것은 “사회 변혁을 위한 모든 이상향이 제거되고 개인 차원의 사설 상담소로 국한”된 라캉주의다.
팬데믹 동안 상담 예약 4배나 늘어
독재 정권의 트라우마와 연이은 경제 위기, 보건 위기의 참화로 인해 상담소는 손님이 줄지 않고 있다. 레콜레타 구역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후안 팔로는 “팬데믹 기간 동안 상담 예약이 4배나 늘었다”라고 전했다. 여러 조치가 심리 치료를 대중화시켰다. 우선 1985년 라울 알폰신 정부(1983~1989년)가 통과시킨 법은 의료 교육을 받지 않은 심리학자가 심리치료를 할 수 있게 했다.
최근에는 페론주의자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데 키르치네르 정부가 2010년 12월 2일자 정신 건강에 관한 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정신 건강 보호’를 ‘권리’ 수준으로 승격시키고 정신 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정신의료기관이 아니라 일반 병원에 입원해도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 “대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모든 소규모 의료센터에서 정신분석학 교육을 받은 심리학자들이 소액이나 무료로 환자들을 상담한다”라고 수도 서쪽에서 정신건강팀을 이끌고 있는 팔로는 신이 나서 말했다.
“상담료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업가에게는 육체노동자보다 세 배 더 많은 비용을 청구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APA와 EOL과 같은 정신분석학기관도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상담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정신분석학과 그 헤게모니는 경쟁 학문의 치료법이 등장하면서 입지가 흔들리고 있다. 미국과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끈 행동 및 인지 치료(cognitive behavioral therapy, CBT)가 2000년대 초반부터 확산 중이다. 2019년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서 CBT가 전체 치료 행위의 11%를 차지했다.(7) 짧은 기간 동안 치료하고 더 과학적으로 여겨지는 CBT는 무의식의 존재를 반박하고 고통의 전반을 다루는 해법을 제시한다. 가령, 공황 발작을 피하기 위해 호흡법을 익히거나 항불안제를 복용하는 것이다. 팔로는 이 치료법이 “증상 완화에 불과”하다며 “우리(정신분석가)는 문제의 근원에 도달한다”라며 자신의 학파를 옹호했다.
자신에 대한 지식을 키워서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독려하는 ‘자조’ 운동도 영향력이 커지고 있다. 마음챙김 명상과 자기계발, ‘인생 코칭’의 활용하는 사례도 증가세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극장에 20세기 초 세워진 또 다른 유명 서점인 ‘엘 아테네오’에는 이 분야 서적이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서점주 알렉스 톨레도는 “문학 다음으로 가장 많은 책이 나가는 분야”라며 “팬데믹 이후에 더 그렇다”라고 설명했다. 심리학 분야는 2층에 있는 다섯 개의 서가에 조용히 꽂혀 있을 뿐이다. 톨레도는 “한때는 벽 전체를 차지했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아르헨티나의 저명한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호르헤 알레만은 이런 접근 방식이 “함정”이며 “신자유주의, 행복해야 한다는 의무, 성과에 대한 강박관념의 일부”라고 강조한다. 경쟁 학문과 달리 정신분석학은 해피엔딩을 약속하지 않는다. 상담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의미다.
TV판 ‘히스토리아스 델 디반’의 주인공인 정신분석가 마누엘 레빈은 불행해하는 한 환자에게 “우리는 행복해지려는 게 아니라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글·안도미니크 코레아 Anne-Dominique Correa
특파원, 기자
번역·서희정
번역위원
(1) 2001년에 영어로, 2003년에 스페인어로 처음 출간됐다. 프랑스어 번역본은 2010년에 『Histoire de la psychanalyse en Argentine, Une réussite singulière 아르헨티나 정신분석학의 역사, 그 기이한 성공』(Éditions Campagne Première)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2) 페루의 시인 알베르토 이달고가 사용한 가명.
(3) 실제로 이 가명 뒤에는 사회학자인 히노 헤르마니와 독학으로 심리학을 공부한 엔리케 부텔만이 있었다.
(4) ‘Proposition du 9 octobre 1967 sur le psychanalyste de l’École 1967년 10월 9일의 정신분석학자들에 대한 제안’, <Acte de fondation et autres textes 창립선언서 및 기타 문헌>, 프로이트원리학파, 1982.
(5) 1969년 로마에서 열린 국제정신분석협회(IPA) 제26회 총회에서 결성된 국제 정신분석가 운동의 한 분파.
(6) Gregorio Baremblitt 외(Marie Langer 편집), 『Cuestionamos. Documentos de crítica a la ubicación actual del psicoanálisis 우리는 자문한다, 정신분석학의 현 위치에 대한 비판적 고찰』(Granica, Buenos Aires, 1971).
(7) Doménica Klinar, Paula Gago, Modesto M. Alonso, ‘Distribución ocupacional de los/as psicólogos/as en la República argentina – relevamiento de 2019 아르헨티나공화국의 심리학자 분포도 – 2019년 설문’, 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교 심리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