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구현한 시대정신
20세기 전환기에 투쟁의 기록을 남긴 주간지 <몽드>
전쟁 대학살, 제국의 쇠퇴, 볼셰비키 혁명, 독일 사회주의 혁명단체 스파르타쿠스단의 붕괴,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몰락…. 이렇게 한 세계의 종말과 새로운 세계의 탄생, 위협과 희망을 겪는 사이 두 차례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정치, 지성, 예술도 격동의 시대를 맞이했다.
프랑스 소설가 앙리 바르뷔스(1873~1935)는 1928년 6월 9일 창간한 주간지 <몽드(Monde)>에 전환기적 시대 상황에서 언론의 투쟁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글을 썼다. 그는 『포화(Le feu)』라는 작품으로 1923년 프랑스 공쿠르상을 수상했다. 열렬히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이 작품에서 그는 40년 이상 전선에 있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군인들이 겪는 고통을 현장감 있게 서술했다.
바르뷔스는 1917년 참전용사 공화주의 협회를 공동 창립했고 1923년 프랑스 공산당(PCF)에도 가입했다. 이후 <몽드>를 창간하여 예술, 과학, 경제, 정치 분야의 쟁점과 발전을 알렸고, 뿐만 아니라 지배 계급의 착취와 민중 억압에 대항하면서 지적 노동자와 육체 노동자의 단합을 도모할 수 있는 국제적 시각을 갖춘 신문을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재정적, 이념적 측면에서 ‘절대적인 자율성’을 주장하며, “정치적 활동에 참여하거나 다른 당과 경쟁 중인 특정 정당에 사전적인 호의를 보이는 것”을 거부했다.
공쿠르상 수상 작가 바르뷔스가 <몽드>를 창간한 이유
그러나 객관성은 중립성과 동의어가 아니다. 중립성은 “패배주의의 공식”이며, 이는 “기성 권력에 대한 복종, 나아가 공모”를 의미한다고 그는 보았다. 그는 강력한 결집 운동을 추구했다. 당시 극우 성향의 기업가 프랑수와 코티가 <르 피가로(Le Figaro)>와 <르 골루아(Le Gaulois)>의 소유주가 되었는데, 이들 언론사에 대항하여 <몽드>는 ‘모든 공정과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신문’이라고 자부했다. 그리고 우선 지식인과 부르주아 층을 겨냥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항상 ‘우리 사회의 초석이자 미래를 만드는’ 생산자인 대중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1)
정치적 독립성은 기자들의 선택에서도 드러났다.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으나 소련연방공산당(PCUS) 소속 레오 트로츠키가 주도한 ‘좌익 반대’ 운동에 동참했던 모리스와 마그델레인 파즈, 이탈리아 공산당(PCI)의 핵심 당원 아일카레 로시, 소설가 빅토르 세르주, 프롤레타리아 작가 그룹에서 활동한 앙리 풀라이와 마크 베르나르도 글을 썼다.
그러나 이러한 열린 태도는 1928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6차 대회에서 공포한 계층 간 대립 전략과 맞지 않았다. 단일한 통일전선을 지지했던 바르뷔스는 곳곳에서 공격에 맞서야 했다. 1930년 하르키우에서 개최된 제2차 혁명 작가 국제회의에서 <몽드>는 ‘부르주아’와 ‘개혁주의’ 사상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프랑스 공산당도 ‘사상적 엄격함’이 부족하고 ‘모호한 태도’로 혼돈을 야기한다고 바르뷔스를 질책했다. 그러나 바르뷔스는 공산주의에 대한 믿음을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지만 공정함을 위해서 ‘선전 언론’과 달리 ‘유일한 의견, 유일한 주장’만을 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피력했다.
<몽드> 편집위원회, 시대사상 형성에 핵심적 역할
신문은 ‘같은 신념을 추종하는 사람들을 모을 수 있도록 (...) 광범위한 동원 활동’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몽드> 편집위원회는 러시아 작가 막심 고르키, 독일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미국 소설가 업튼 싱클레어를 위원으로 영입했다. 이후 ‘몽드의 친구들’과 같이 지지자 단체가 여러 나라의 대도시에 생겼다. <몽드>와 같은 간행물들은 사람과 생각의 이동이 매우 활발해진 이 시대에 사상을 형성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해냈다.
1920년 바쿠에서 열린 동방인민대회, 인도차이나에서 벌어진 폭동, 중국의 서구 열강 지배에 대한 반발은 세계 질서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도 호치민, 저우언라이, 라미네 생고르와 같은 혁명가뿐만 아니라 식민 지배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고 제국주의를 다룬 기사는 신문 지면상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주요 기고가로 프랑스에서 식민지 문제를 다룬 사회주의 작품 『식민주의(Le colonialisme, 1905)』의 저자 폴 루이와 식민지 실상을 조사했던 페미니스트 투쟁가 카밀 드르베, 그리고 철학자이자 기자 펠리시앙 샬레가 있다. 특히 펠리시앙 샬레는 ‘식민지에서 내가 본 것’이라는 글에서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신랄하게 비난했다.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가 원주민을 능멸하고, 욕설하고, 폭행하는’ 현실을 목격했고 콩고에서도 마찬가지로 ‘노예제와 다를 바 없는, 혹은 관점에 따라 그보다 더 가혹한 착취 제도’가 자행되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온 그는 식민 통치에 대해 “무자비한 계략이며 단지 경제적, 군사적 이유가 있을 뿐임을 알게 되었다.”라고 폭로했다.(2)
1931년 식민지 박람회가 개최되자 <몽드>는 식민 지배에 대한 특별호를 발간했는데 해군 장교이자 소설가였던 피에르 로티의 글을 발췌하여 실었다. 그는 『Trois journées de guerre en Annam-아남에서 3일간의 전쟁』에서 1883년 프랑스 군대가 베트남 통킹으로 파견나갔을 때 일삼은 잔인한 학살을 묘사했다. 이후 그는 프랑스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주었다는 이유로 정직 처분을 당했다.
<몽드>가 보이는 이런 성향은 창간자가 몸소 가담하고 있었던 투쟁과 무관하지 않다. 제3인터내셔널(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을 기반으로 창립된 반(反)제국주의 반(反)식민 협회(LAI)가 1927년 개최한 브뤼셀 회의에서 바르뷔스는 ‘타국을 속박’하고 의존적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관세 조약, 독점, 차관’과 같은 은밀한 무기를 사용하는 제국주의의 새로운 지배 방식을 비난했다.
“라틴아메리카인들의 저항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그는 ‘인간의 독립’을 보장하는 첫 번째 단계인 국가의 독립을 위한 투쟁에 전폭적인 지원을 했고 그의 활동은 LAI의 회보에서 다루기도 했다(1927). 바르뷔스의 이러한 행보는 리프 전쟁(1921~1926, 스페인-프랑스, 모로코의 베르베르족이 세운 리프공화국 간에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졌던 전쟁—역주)을 제외하고 식민 지배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혹은 찬반 의견이 나뉘었던 프랑스 공산당(PCF)과는 완전히 달랐다.
<몽드>는 프랑스 외 다른 지역의 제국주의 문제도 중시했다. 바르뷔스는 1928년 9월부터 편집 지침에 “미국의 침범에 대한 라틴아메리카의 저항을 보여줄 수 있도록 특별한 관심”을 요청했다. 사실 지리적으로 멀고 이미 한 세기 전부터 유럽에서 독립되어 있던 남아메리카에까지 눈길을 주던 기자와 투쟁가는 당시 거의 없었다.
그러나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자유는 환상에 불과했다. 1898년부터 막강한 미국이 쿠바와 푸에르토리코를 점령한 후 조금씩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제도로 지배력을 확장했고 도미니카 공화국, 아이티, 파나마는 원자재와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선 자본주의의 욕망에 희생당하고 있었다.
라틴아메리카 신세대의 보호자로 추앙받았던 사회주의자 마누엘 우가르테는 <몽드>의 편집위원으로서 종종 구독자들에게 라틴아메리카에서 만성적인 불평등과 구조적인 저개발을 고착시키고 있는 미국에 기생하며 복종하는 기득권의 행태를 폭로했다. 그리고 <몽드>는 저항 운동가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면서 니카과라의 혁명가 아우구스투스 세사르 산디노가 이끄는 투쟁을 지지했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은 새로운 인간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
바르뷔스는 산디노에게 직접 서신을 보내 “프랑스와 유럽의 프롤레타리아와 혁명 지식인을 대표하여”, “인종과 국가의 문제를 초월하여 착취와 박해의 희생자, 그리고 자본주의 권력자에 대항하는 민중의 편에 선 투쟁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미국의 학대에 맞서 봉기하는 열정적인 미국의 히스패닉 젊은이들”을 칭송했다.
이후 파리에서 직접 이들과 연대까지 했다. 1920년대 초 라틴아메리카 학생들이 대거 프랑스에 입국하는데 이들 중 대다수가 마차도 독재정권을 피해 도망친 쿠바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파리를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의 본거지로 삼았으며 바르뷔스와 <몽드>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존 듀이와 함께 바르뷔스는 1933년 2월 25일 <몽드>에 마차도가 군림하는 지옥의 삶에 대한 경험담을 쓴 『쿠바에서 벌어지는 폭정(La Terreur à Cuba)』의 머리말을 개재하면서 ‘미국의 앞잡이’에게 칼자루를 쥐어주는 이 독재자를 맹렬히 비난했다.
<몽드>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혁명에 관한 이미지 확산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창간 때부터 “모든 사람을 위한 대중 예술을 일으켜 전파”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예를 들어 토지 개혁을 위한 투쟁을 그리는 멕시코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이나 누더기를 걸치고 무기와 토지와 자유(Tierry y Libertad)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있는 혁명지도자 에밀리아노 사타파를 정기적으로 소개했다.
바르뷔스, 노동자 계급과 지식인들이 연대하여 단합하기를 기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새로운 인간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이라고 칭송했다. 그런데 이는 <몽드> 편집실 안팎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몽드> 3호는 앙드레 브르통, 장 콕토, 월도 프랭크, 빅토르 세르주 등 다양한 작가들을 취재하여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한 방대한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이 기사로 논란이 불거졌는데 1928년 <뤼마니테>에 실렸던 연재 소설 『나는 파리를 불태운다(Je brûle Paris)』를 쓴 폴란드 출신 저자 브뤼노 야스벤스키는 “프롤레타리아에 반(反)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고유한 고전 예술을 추구하려는 포부도 없는 부르주아 작가의 졸작들’에 대한 ‘무의미한’ 기사를 썼다”라고 조롱했다. 그리고 공산주의자 자크 뒤클로도 <뤼마니테>(1932년 1월 16일)에서 이와 비슷한 의견을 주장했다.
바르뷔스 작품의 전문가 장 흐랭게는 자크 뒤클로의 글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예술가들을 모아서 작품을 평가하는 문화 정책적인 면에서 <몽드>는 마침내 이들의 동조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몽드>는 사회주의 사회 건립보다 자본주의 사회 퇴치 계획을 위해 매진한다. 그리고 투쟁가들을 조직하기보다 동조자들 간의 단합을 꾀한다. 연대의 구조 속에서 노동자 계급과 지식인들이 단합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예술 분야에서 독점적 지위를 확립하려는 야망은 없다(…). 혁명주의 문학을 옹호하면서도 모든 진보주의 문학을 수용한다.”(3)
재정난과 빈번한 경영진 교체로 취약해진 <몽드>는 1935년 바르뷔스가 사망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결국 2개월 뒤 폐간됐다. 7년 동안 350호 이상 발간된 <몽드>는 해방 운동을 지지하고 지원했으며 방대한 전선을 구축하여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 모든 노력은 바로 프랑스 인민전선당 탄생의 밑거름이 되었다.
글·타리크 부아피아 Tarik Bouafia
라틴 아메리카 역사학 박사과정생
번역·정수임
번역위원
(1) <몽드(Monde)>, 1928년 6월 9일.
(2) 제2호, 1928년 6월 16일.
(3) Jean Relinger, 『Henry Barbusse. Ecrivant et combattan 앙리 바르뷔스. 작가이자 투쟁가』, 프랑스 대학 출판사, 파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