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예속’ 해부: 마르크스인가, 스피노자인가

프레데리크 로르동, 『자본주의와 자발적 예속(Capitalisme, désir et servitude ― Marx et Spinoza)』 (현동균역, 진인진, 2024)

2024-09-30     배인철 | 경제학박사

게임의 규칙, 욕망

“전 너무 행복해서 비극을 이해하지 못해요.” 2016년 이후 유행한 ‘가스라이팅’의 유래가 된영화 <가스등 (Gaslight)>의 초반 대사다.(1) 슬픈 정조의 곡을 제대로 부르지 못한 폴라(잉그리드 버그만 분)가 노래 선생에게 토로하는 대목인데, 실제로 그레고리(샤를 부아예 분)와 사랑에 빠진 그녀로서는 변명이 아닌 진심에 가깝다.

그런데 그레고리가 그녀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마자, 행복에 겨운 폴라의 말은 자신의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으로 돌변한다. 누군가 타인에 의해 조종당하는 원인을 개인의 ‘기저적 욕망’—폴라의 경우, 비극적 과거에서 벗어나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찾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은 흥미롭지만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다.

예를 들어 오늘날 (흔한 장르명이 된) 자기계발서가 서점의 서가를 점령하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독자들이 책으로부터 기대하는 모종의 만족과 충일감의 발로로만 설명한다면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가 아닐까라는 의구심은 이 책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된다. 또는 당신은 쿠팡 노동자의 과로사를 알리는 기사를 보고 얼마나 분개하는가. 택배노동자의 노동이 당신의 직무와는 직접적 관련성이 없기 때문에 화는 날지라도 안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렇게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현실에 대해 저자인 로르동은 단호히 답한다. “승진, 사회적 지위 획득, 자기실현의 달성”이란 결국 자본주의적 임노동 관계가 설치한 장치라는 점에서 노동자의 사회화다(31쪽). 우리가 누리는 로켓배송의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소비하는 대상은 다른 어떠한 ‘임노동자’가 생산한 것인데, 그 다른 ‘임노동자’는 익명성을 가지고 있고 너무도 요원한 곳에 있는 어떠한 타자이므로, 그 어떠한 제품을 생산하는 다른 노동자가 짊어지는 고통의 멍에는 소비자인 개인들의 의식에는 반향(反響)되어 울리지 않는다.”(64쪽). 물론 각자 생활전선에서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군상들이 펼치는 일상의 단면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런데 뭔가 설명이 부족하다, 노동자가 욕망하는 ‘기쁜’ 정서란 무엇이고,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이다.

 

스피노자의 강, 코나투스

‘자발적 예속’이라는 모순적 단어의 결합, 즉 대중 스스로 예속을 망각하고 체화한다는-따라서 폭군 권력의 원천은 민중의 자발성이라는-사고의 원류는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의 인문학자 에티엔느 드 라 보에시(Etienne de La Boétie)가 쓴 『자발적 예속에 관한 논설 (Discours de la servitude volontaire)』이다. 로르동은 이 격문의 중심 사상을 ‘라 보에시의 테제’라 명명하고, 신자유주의 기업이 임노동의 예속을 서열화하는 전략으로 삼는다.(2)

총3부로 이루어진 『자본주의와 자발적 예속』의 1부 제목(‘무엇인가를 하고, 무엇인가를 시키고 싶은 욕망’)은 의미심장하다. 임노동자가 “자본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봉사하는”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란 무엇일까(67쪽).

퍼즐을 푸는데 필수적인 개념은 ‘코나투스’다. 어떤 대상을 향한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의 동인으로 정의되는 그 에너지는 자본주의의 일반적 정서를 생산하고 구조화하는 동시에 포디즘(Fordism)을 거치면서 정렬되는 (포획하는 자와 포획당하는 자의) 욕망을 재편한다. 임노동을 예속 편입시키는 새로운 경영기법이 등장하고, 그 기법들의 착취대상인 ‘정서적 감수성’이 새로운 형태로 출현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자신의 규칙에 따라 자발적으로 노력하는 주체(경영자/피고용인)로 이루어진 독특한 제도가 형성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2부(사람을 ‘기꺼이’ 노동시키는 방법)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노동자의 자발적 복종은 물질적 결핍이라는 고통스럽고도 슬픈 정서를 ‘기쁨’으로 전화시키는 코나투스의 자활보존노력(自活保存努力)이다.

욕망의 대상들을 내재화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임노동 관계에서 주체는 “슬픔으로 인한 무너짐을 ‘기쁨의 재발흥’이라는 무기로, 즉 그 자신의 ‘욕망’의 재창조에 의하여 물리치려고 한다”는 점에서 자기 변용을 겪는다(128쪽). 로르동의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같이 낯선 개념들이 흐르는 ‘스피노자의 강’을 건너야 한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가 체험하고 인식하는 인간 신체의 변용과 질서 및 연관이라는 스피노자식 사유가 자본주의 고유의 임노동 관계에 투사되는 전모에 조금씩 다가갈 수 있다.

 

마르크스와 스피노자의 대면 

로르동의 주장은 3부(지배와 해방)에서 구체화된다. 라 보에시에게 있어서 모호한 것은 예속의 ‘자발성’에 대한 설명이다. 폭군에 의해 강제적으로 예속된 민중은 어째서 자유를 망각하게 되었을까. 그 현대적 메커니즘을 해명하려는 시도가 ‘라 보에시의 테제’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와 자발적 예속』은 스피노자의 신체성(신체의 복합성)(3) 개념을 가져와 지배적 욕망 하에서 작동하는 지배의 조건을 탐구한다. 스피노자는 코나투스가 어느 한 점 위에 고착화됨에서 벗어나 다양한 범위로 전개될 때 비로소 각 개인에 있어서의 유용성이 실현된다고 여겼다.

그 결과 지배는 “피지배자들의 시선을 단지 어떠한 ‘사소한’ 욕망의 대상으로만 고정시키는” 욕망의 분배 문제로 귀착된다(186쪽). 즉 자본주의는 각자의 분수에 알맞게 욕망을 분배하는 구조로 전환된다. 유용성이 실현되는 무대에 해당하는 만큼 이 구조는 필연적으로 ‘가치’의 정의와 결부되는데, 로르동은 “코나투스에 내재하는 본성적인 권리에 의하여, 그리고 뿌리 깊은 자기중심성에 의하여, 그리고 나의 것인 이 ‘욕망’이 갖는 역동성에 의하여” 요구되는 정당성을 통해 마르크스 가치론의 쓸모를 검증하려 한다(197쪽).

그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정립한 가치론(잉여가치론)은 사실상 초월성을 띤 실재론(가치의 실재는 추상적 노동으로 환원한 노동으로 환원한 노동의 시간이다)이므로 폐기하는 편이 낫다. 폐기의 반대급부로 얻는 것은 무엇인가. 다양한 개념의 주도자들(대학교수, 중간관리자, 십자군, 안무가 등)이 코나투스가 경주하는 노력들을 향해 끊임없이 욕망을 지시하는 포괄적 착취 체제다. 정념은 착취된다.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정념이 충만한 사회로 재정의된 사회의 특징은 일종의 유인이자 기만이다.

“임노동자로 하여금 지배적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 ‘꼬시는 것’이다. 즉,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그 포획을 당하고 있는 것도 자신의 ‘실현’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고,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발견하는 바로 그곳에 그들의 욕망이 있다고 믿게 하는 것이다.” (206쪽)

 

예속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정념이 착취되는 사회는 구조로서의 역사성을 갖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코나투스를 지시하는 구조가 개인의 지닌 역동성에 의해 변용된다는 점에서 그 영속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정렬된 구조의 안정성을 위협하는 요인 중 주목할 것은 새롭게 출현하는 노동이다. 개인의 창조성이 발현되는 특수한 노동의 분업(예: 예술가와 임노동자의 결합)에 의해 생산성을 증가시키는 일반적인 모델이 생성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하는 공산주의와는 다른 성격을 갖는다. 모델은 “자본주의가 그 자체의 모순에 의하여 자기초월하게 된다고 하는 변증법적 발전 방향과 다른 형태로 전개”되기 때문이다(211쪽). 새로운 가능성마저 봉쇄되어버린 신자유주의는 전체주의와 다를 바 없다, 정념적 예속이 보편화된 사회일수록 ‘공동결사기업’이라는 모델을 조직할 여지는 줄어들지만, 그러한 유형의 정치적 공동체가 조직된다 할지라도, “소위 공산주의자가 풀어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대두된다.

노동의 분업이라는 피할 수 없는 유산, 특히 구상노동과 수행노동이 분리된 상황에서의 평등성 실현이다. 마르크스와 스피노자의 공통점은 노동의 분업에 주목했다는 것인데, 스피노자는 그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의 목적론적 이상향과 구별되는 공산주의의 정의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256쪽). 그것은 모두가 자본주의의 포획 요구에 저항하는 이성을 소유할 때 도달할 수 있는 진정한 선(善)—인간적 삶—이다. 지배적 욕망이라는 모습에서 철저히 해방된 공산주의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발전을 위한 시금석’이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한 바는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해방이라는 단어를 구체화하기 위하여 가장 절실한 것은 ‘해방을 위한 위대한 밤’이라는 환상에서 탈피하는 것이다.”(338쪽)

로르동은 초월적인 관념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스피노자의 내재적 자연주의를 채택함으로써 정념으로 이루어진 지배체제를 구축한다. 지성과 의지를 구분하지 않는 스피노자의 철학이 서양에서 이단적 사유로 간주되어 왔고, 유럽 철학의 주요한 원천으로 기능해온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현대에 이르러 지성과 의지, 이론과 실천, 정신과 자연의 구분에 근거한 모델화 전통은 스피노자 이후로도 서구 사상의 주류가 되었고, 계몽사상에 이르러서는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와 함께 정정을 장식한다. 로르동의 공산주의 해석은 불만과 분노라는 활동력이 추진하는 관념으로서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천적 의의를 담보한다.

 

두 거인의 창조적 결합

스피노자의 텍스트를 참고하며 마르크스주의의 현재성을 고민한 작업목록은 제법 길다. 루이 알튀세르, 에티엔 발리바르, 안토니오 네그리, 질 들뢰즈는 각자의 생각을 점검하는 방식으로 스피노자를 준거로 삼았다. 이는 스피노자의 논리가 이데올로기, 인과성과 필연성, 속성과 실체 등 구조와 개인이 맞물리는 경계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데올로기와 관련해 스피노자에 주목한 루이 알튀세르의 말을 빌자면, 그 역동성은 체계의 내적 정합성과 별개의 문제이다.

“나는 철학이 비록 현실 대상들과 거리를 두고서만 작동하지만, 어떤 철학의 진리는 전적으로 그 효과들 속에, 따라서 철학이 조사의 행위에 열어 준 자유의 공간 속에 있는 것이지, 그 유일한 서술형태 속에 있는 것은 아니라고 썼다.”(4)

프레데리크 로르동은 특유의 날카로운 필치로 현실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온 좌파 논객이다. 본지에 기고한 ‘종말로 치닫는 이노센스’(한국어판 제189호, 2024년 6월호)는 그의 명석한 사고와 광범위한 관심사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스피노자의 사유를 중핵으로 삼는 과정에서 그는 앞서 언급한 연구목록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포디즘의 확산으로 성립한 축적체계가 대량소비를 낳았고 그로 인해 유례없는 욕망과 정서라는 조절양식을 가능하게 했다거나, 사회관계의 인식과 공동체 힘의 표현으로서 제도화된 화폐(주권성)를 언급하는 대목은 프랑스 조절학파에 대한 로르동의 태도를 보여준다.

왜 스피노자일까라는 자문에 그는 서슴없이 “스피노자 이상으로 ‘욕망’의 ‘타율성’을 절대 보편적인 것으로 수립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39~40쪽). 이렇듯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를 정서와 구조(자본-임노동 관계)가 상호 되먹임하며 진행하는 정념의 구조로 재정의하고자 하는 시도다.

이를 ‘미시-거시(스피노자-마르크스)’의 보완관계로 볼 수도 있지만, 철학사적 측면에서는 고대 그리스(플라톤)의 초월성 철학을 거부하는 유물론의 계보(에피쿠로스-스피노자-마르크스), 즉 이질적 사유의 조우가 아닌 하나의 연속체에 서 있다고 보면, 스피노자와 마르크스의 결합이 어색하지만은 않다. 또한 ‘전형적 구조주의’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구조주의의 틀을 유지하는 후기구조주의(탈구조주의)의 흐름이나 마르크스의 실질적 포섭이 관철되는 현대적 양상에 대한 기술(네오푸코리안)을 수용하는 경향도 눈에 띈다.

여기서 로르동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19세기의 공장과 21세기의 기업 내에서 동일한 일이 행하여지지 않는 것은 분명”한 만큼 개인의 욕망이 약동하는 신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을 마르크스와 전혀 다른 사유로 접근하려 한다(15쪽).

오늘날 우리를 속박하고 있는 ‘정념적 예속’이 적나라하게 관철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동학을 이처럼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는 저작이 있을까. 『자본주의와 자발적 예속』은 마르크스와 스피노자라는 두 거인의 화학적 작용이 연출하는 긴장 관계가 살아 숨 쉬는 역작이다.

 

 

글·배인철
경제학자. 전 도로교통연구원 연구위원, 나라살림연구소 정책위원을 역임한 후 현재 인공지능의 급부상을 학설사적으로 조망하는 저서를 집필 중이다. 


(1) 패트릭 해밀턴이 1938년에 발표한 동명의 희곡이 원조다, 수차례 영화화되었으나, 우리나라에는 1944년에 처음 개봉한 조지 큐커 감독의 버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2) 라 보에시의 경우 정확한 집필 시기는 알 수 없고, 1576년에 첫 출간되었다. 한국어 번역은 『자발적 복종』이라는 제목의 몇 가지 판본이 있는데, 『자발적 노예론』이 최근판이다. 로르동은 라 보에시 저작을 높이 평가한다.
(3)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모든 신체는 필연적으로 복합체이며, 무한하게 쪼개진 신체들의 결합이다. 그 누구도 정신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신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는 언명은 스피노자 유물론의 초석이다.
(4) 루이 알튀세르, 『철학과 맑스주의 - 우발성의 유물론을 위하여』, 중원문화, 2017, 15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