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혜의 문화톡톡] 책과 영화: 스마트폰을 내려두고 집어 든 원작 소설과 영상들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는 '책과 영화' 추천(01)
스마트폰의 계절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가을이면 어쩐지 의무적으로라도 책 한 권쯤 읽어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든다. 내일 출근길에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대신 꼭 책을 읽어야지. 마음을 잔뜩 먹는다. 그러나 또 쇼츠나 릴스를 보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거나, 타인의 SNS에서 사진을 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올해는 유난히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습관적으로 스마트폰의 액정을 밀어내던 중 발견한 것은 재생 중인 초단편 동영상 아래 달려 있는 제목 문장이었다. '한국이 싫어서',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냉정과 열정 사이', '렛 미 인', '백설 공주에게 죽음을' 같은 글자를 멀게는 십 년쯤 전, 가까이는 몇 개월 전 소설책의 제목으로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이 소설 대부분을 읽었다. 그제야 내가 무의식적으로 보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인터넷 알고리즘이 스마트폰의 액정을 통해 내 앞에 펼쳐놓은 것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나 영화였으며, 그 시절 내가 너무나도 아껴 읽은 글자들이었다. 말하자면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내 손에 들려 있었고, 지금은 잊고 있던 것들이었다.
무엇을 보고 있는가
기억 연구가 알라이다 아스만의 저서에서 고대 이집트인들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글자를 가장 확실한 기억 매체로 여겼다. 건축물이나 기념비는 폐허가 되어도, 텍스트는 사람들이 계속 읽고 필사하며 배움으로써 소비되므로 내면의 시간에 켜켜이 새겨져 전승된다고 믿었다. 연약한 파피루스(종이 발명 이전의 종이와 비슷한 매체)의 검은 잉크 흔적이 무덤의 기념비보다 유의미하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파피루스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다.
물론 그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마법은 여전히
그 책을 읽는 모든 이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Papyrus Chester Beatty Ⅳ, 3장, 9~10행.)
이 시기 이집트의 지식인이나 문자를 아는 사회인들은 '글자'가 자신들의 불멸성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시간의 파괴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유일한 불멸의 매체라고 확신한 것이다. 이집트인들의 발견이 맞다. 그 자체로서의 '글자'는 시간의 파괴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만 동시대에 글자 대부분이 기록한 결과물이 무엇인지, 지금 우리가 무엇을 읽고(보고) 있는지가 문제다.
이 가을, 나는 쇼츠를 봤다. 초 단위의 동영상을 손가락으로 수도 없이 넘겼다. 책 내용을 요약해놓은 쇼츠를 보고, 드라마나 영화의 내용 일부를 잘라놓은 쇼츠를 봤다. 가끔 그걸 보고 있는 것만으로 책을 읽고, 영화나 드라마도 다 본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그건 말 그대로 '기분'일 뿐 사실은 아니었다. 수많은 것을 보았지만,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이 현실이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생각하는 사이에도 책 대신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자리에
'스마트폰'이라고 불릴만한 휴대폰이 사람들에게 보급되기 시작된 건 2011년경부터였다. 이 작은 네모 덩어리 하나가 순식간에 다양한 사물의 기능을 대체했다. TV, 카메라, 책, 지갑.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손에 들린 물건이 하나같이 단출해졌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는 세상이 됐다. 안되는 일이 없다는 건 참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텍스트를 조금 읽다 지루해지면 동영상을 보면 됐고, 보던 동영상이 재미 없어지면 바로 원하는 음악을 재생했다.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 오래 기억에 담고 싶은 풍경을 보면 오래 쳐다보는 대신 사진을 찍었다.
말하자면 스마트폰이 나 대신 참았고, 나 대신 기억(저장) 해줬다. 그러는 사이에 스스로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졌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기억할 필요조차 없어진 지 오래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아니라 알고리즘이 알고 있었다. 그것을 깨닫는 동시에, 시간과 노력을 들여 무언가를 열렬히 좋아했던 시절이 떠올랐다. 손에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은 자리에는 책과 영화티켓이, 긴 호흡의 드라마가 있었다. 도전과 실패를 거듭해 호와 불호를 가려 스스로 만들어 낸 취향이 있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창작된 것들이 문화 평론을 쓰는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올 하반기 지면을 통해 기억 속의 소재들을, 과거에 나를 열광시켰던 것들을 한 편씩 끄집어 내보려고 한다. 그리고 긴 시간이 흐른 지금, 이것들이 문화 속에서 어떻게 다시 재현되고 있는지 바라보고자 한다. 나아가 새로운 취향과, 앞으로 나를 구성해 나아갈 기억을 만들어보고자 한다. 인디언의 말처럼 마음을 동요시키는 문장들을 찾아볼 것이다.
중국 당나라 때 살던 한유는 아들의 독서를 권장하기 위해 등화가친(燈火可親)이라는 사자성어를 만들었다. 이 말은 서늘한 가을밤 등불을 가까이하고 책을 읽자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가을은 본래 공들여 책을 읽는, 탐독의 계절이었다. 스마트폰의 계절이 아니다. 지금 나는 빈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빈손이면 좋겠다. 그래서 빈손을 채우는, 우리가 가을에 잊고 있던 것들을 되찾아가는 여정에 당신을 초대한다.
*이 글은 [이지혜의 문화톡톡] 책과 영화 : 싫음의 가능성과 부정의 희망: <한국이 싫어서>(2024, 장건재)와 시리즈로 이어집니다.
글·이지혜(이해이)
문화평론가. 2022년 문화전문지 《쿨투라》 제16회 영화평론 신인상으로 등단.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글쓰기를 강의하며 문화현상을 연구한다. 월간 《쿨투라》 와 영화전문매체 <코아르>에 영화평론을, 르몽드 문화톡톡에 문화평론을, 서울책보고 웹진 <e-책보고>에 에세이를 기고 중이다.
· 인스타: @leehey_cine · 이메일: leehe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