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 유럽'을 위한 시민 불복종 촉구

2012-10-12     베르나르 카상

2005년 거부된 유럽 헌법의 복제판인 리스본 협약을 비준한 뒤 프랑스 의회는 신재정협약 (TSCG)을 비준하려 한다. 대통령과 뜻을 같이하는 대다수의 의원들에 맞선 소신파와 민중의 힘만으로는 공공재정을 신탁통치에 맡기는 이 결정을 막기에 역부족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유럽으로 가는 길은 존재한다. 그중 하나의 길을 여기 소개한다.

좌파 유럽, 즉 자유주의 정책과 결연히 단절하면서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사회주의적이며 견고하고 생태적인 유럽이 가능할까?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는 이를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들이 있다. 의원 시절이던 1992년 5월 6일, 올랑드는 국회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우리가 통화·금융·재정의 구속을 견뎌야 하는 것은 세계화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제 의미 있는 논쟁은 오로지 우리가 국제 자본주의의 규칙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화의 게임에 참여한다면 금융과 통화, 부차적으로 유럽연합(EU)의 구속이 강요될 것이다."(1) 달리 말해, EU의 건설은 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전체의 부분집합일 뿐이다.

신재정협약과 공동 시장, 불가능한 개혁

그로부터 20년이 지나 프랑스 대통령이 된 그는 EU 건설의 '재정립'을 약속한다. 그러나 그는 부수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알고 있다. 재정립을 이루려는 생각은 EU의 이념과 제도적 장치 전체와 부딪히기 때문이다. EU 정책의 구성 원칙으로서 '자유 공정 경쟁'을 제도화한 협약과 상충될 뿐 아니라, 수만 쪽에 달하는 공동 협약의 내용(지침·규칙·결정)을 구체적으로 해석할 때도 갈등을 빚게 된다. 자유주의자들은 어쨌든 숨기지는 않는다. 가장 말 많은 자유주의자들 중 하나인 엘리 코엔(파주 존 그룹, 프랑스 전력 신에너지 공사, 스테리아(Steria)의 임원)(2)이 시인한 것만 봐도 그렇다. "모든 시장정책 장치는 EU 회원국, 그중에서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라틴계 나라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구속이다. 자국에서 강한 노조와 정치 합의 덕분에 크게 변화시킬 수 없었던 보호 분야에서 정책 개혁을 하기 위해서였다."(3) 이보다 더 명료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현재 EU 구조의 틀 안에서 좌파정치 계획을 세우라는 주장은 합당할까? EU 체제 자체가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데도? 이 질문에 대해 아니라고 답한다면 논리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결국 EU 협약을 바꿔야 한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EU의 맹점을 보완한다. 그러나 어떻게 협약을, 아니 협약의 단 한 문단이라도 변경할 수 있을까? 그 답은, 협약에 쓰인 협약 수정 조항을 이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이런 조항에는 만장일치제가 규정돼 있다. 따라서 한 국가가 내놓은 수정 제안이 맘에 들지 않으면 그 절차를 막기 위해 27개 회원국 중 어느 한 정부라도 '반대'를 표하면 된다.

명백한 눈속임

이런 제도적 방해 장치에 대해, 각 의견 차이가 어떻든(4) 좌파라고 자처하는 정당과 운동세력, 지도자들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눈감고 있다. 이들은 27개 회원국에서 곧 30개 이상 회원국으로(5) 구성될 EU 안에서 마치 리스본 협약과는 다른 원칙에 기초한 새로운 협약이 채택될 수 있을 것처럼 논한다. 사민주의 지도자들에게 올랑드가 약속한 재정립이란 한 줌의 사회주의를 주입하기 위해 애초부터 적대적인 정부들과 협상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난 6월 28일 올랑드의 발의로 신재정협약의 흐름을 제어하려고 유럽 정상회담에서 27개국이 채택한 경제성장 및 고용 증진 합의는 구속력 없는 정치적 타협안일 뿐이다.

프랑스 내 좌파전선과 녹색당은 이 주제에 대해 일치된 의견은 아니지만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이들은 강력한 유럽 사회주의 운동을 일으키는 데 매진해 EU를 진보적 기반 위에 다시 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의 핵심 조치는 유럽 공동체 예산을 크게 확대해(현재는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1%만 성장 고용에 투입), 재정 분배를 통해 회원국의 경제와 사회적 기준을 수렴 기준에 맞추고 갖가지 내부 덤핑을 막는 것이다.

그러나 난점은 '사회주의 연방'을 향한 거대한 도약이 실현 가능성 면에서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EU의 제도적 장치 때문만은 아니다. 안타깝지만 현재 그들은 유럽 대중에게 고립된 섬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특히 유럽 사회주의 운동 개념은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하고 있지 않다. 최근까지 유럽노조연맹(CES)은 유럽 자유주의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신재정협약에 반대했다. 하지만 CES 내부의 이질성을 볼 때 현재의 EU 건설 형태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민중운동의 첨병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10월 17일 총회에서 CES의 결단은 시험대에 오를 것이다. 회원 단체 중 일부는(특히 스페인 노조) CES가 12월 유럽 의회에서 모든 유럽의 수도에서 긴축재정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는 결정을 내리기 바란다.

공동체 예산을 크게 확대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 가능성이 배제되고 있는 상황이다. 각국 정부들이 예산 절감에 고심하고, 또 유럽 시민들이 분명 브뤼셀에서 결정된 모든 것에 점점 적대적이 되어가는 탓이다. 현재의 제도적 틀을 뒤엎지 않은 채 새로운 좌파 협약이 가능한 것처럼 행하는 것은 결국 환상이다.

역사의 흐름을 바꾸자

이제 가능한 방법이 하나 남아 있다. 바로 투표다. 한 국가에서 국민투표로 정부에 권한을 위임하면, 그 정부가 EU의 정책들과 단호히 단절하면서 동시에 국가 운영 및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를 규정한 새로운 원칙을 도입하는 것이다. 꼭 탈퇴하지는 않더라도 EU에 불복종하고 동시에 점진적으로 국경을 초월해 확대되는 새로운 연합 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EU 불복종 개념(6)은 리스본 협약에서 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꼭 EU를 탈퇴할 필요가 없는 불복종이다. 불복종 정부는 약에서 강으로 점진하는 전략을 취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즉, 상대 국가들을 성가시게 할 각오로 굴러가는 EU의 톱니바퀴에 최대한 많은 모래를 뿌리는 것이다. 따라서 오랫동안 연합 내에 머물러 자유주의 정책이 확대되는 데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공격하기 전에 우선 입지를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전략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을까? 우선 자유화 및 기존 사회주의 기반 '해체'를 골자로 한 EU 지침을 국내법으로 수용하길 거부한다. 또한 이미 수용한 지침은 적용하지 않고 준비 중인 지침의 적용을 막기 위해 룩셈부르크 합의(7)에 청원한다. 은행을 지키고 유럽 시민들에게 영속적으로 긴축을 강요하기 위해 서명한, 또는 일부 국가에서는 이미 비준을 끝낸 협약(당장은 유럽안정성메커니즘(MES)과 신재정협약)에 대해서도 같은 식으로 대응할 수 있다. 일부는 이런 대응 노선이 유럽 공동체의 적법성을 어떻게 벗어나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는 명분으로 반대할지 모른다. 그들에게 우리는 적법성보다 우위의 가치가 존재한다고 반박할 것이다. 바로 각국 민중이 가진 주권에 대한 존중이다. 이 가치는 EU 메커니즘에 의해 늘 무시된다. 특히 유럽사법재판소의 법령과 그 의무적 계승자인 각국의 판사들에 의해 무시된다.

이런 항의가 유럽 대륙 전체에 큰 메아리가 되어 유럽 집행위원회의 일상적 업무인 자유화 조치의 입안과 실행을 모두 중단시키고, 유례없는 EU 정치의 위기로 치달을 수 있다. 이 EU의 위기는 전대미문의 역학관계로 발전될 수 있다. 한쪽은 자국 여론과 타국의 사회주의운동의 지지를 받는 불복종하는 한 정부나 여러 정부들이고, 다른 한쪽은 민주주의적 정당성이 전혀 없고, 자국의 시민들로 하여금 대규모로 거리로 나와 자신들을 지지하게 할 능력도 없는 기타 정부들이 지지하는 기관들(EU집행위원회·사법재판소·중앙은행)이다. 은행가들의 보너스를 지키기 위해서, 아니면 자신의 월급과 연금을 깎기 위해 거리로 나가 싸우는 시민은 본 적 없지 않은가.

대치 국면은 결정적인 역사적 순간을 잉태하게 될 것이다. 상대적으로 약해진 지정학적 무게에도 불구하고 유럽이 몇몇 정부의 추진 노력에 의해 다시 역사의 향방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른다. 만일 유럽의 강대국들을 하나하나 섭렵하고 지역 전체를 확보하게 된다면, 그래서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세 가지 조건- △유럽인들에게 잠재된 비판적 사고력 △작금의 위기로 인해 움직이고 있는 사회주의 동력 △인구와 경제 면에서의 비중- 을 규합해 전세계에 사회 속 삶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남미에서는 유럽보다 훨씬 작은 규모임에도 자유주의와 단절한 정치 논리를 구현한 국가 간의 연대 건설이 이미 계획 단계를 지나 실현 단계에 이르렀다. '미주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이다. 남미와 유럽은 지역 배경이 다르지만, 남미의 경험은 유용한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다.(8)

남미에서 ALBA가 남미공동시장(MERCOSUR)에 영향을 주면서도 공존하고 있듯이, 유럽에서 두 가지 입장이 공존함을 상상해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한편에서는 극소수 국가에서, 아니 어쩌면 오직 한 국가에서 출발한 사회주의가 점차 확대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지금과 같은 자유주의가 공존하는 것이다. 불가피하게 이 공존에는 분명 많은 불안이 따를 것이고, 가능하다면 합의에 따라 단일 시장, 심지어 상업 보호 조처를 조정할 수도 있다. 좌파 정부의 경험이 성공적이면 마침내 연쇄효과를 낳아 유럽 다수로 확대될 수도 있다.

그동안 유로존이 어떤 상태든지, 설사 해체되지 않는다 해도 이렇게 구분되는 2개의 유럽이 존재하면 단일 통화의 문제가 불거질 것이다. 그로 인해 상대적으로 유사하지만 상호 분절된 두 가지 통화권을 만들게 될 것이다. 아니면 협의하에 자국 통화에 연동되도록 제도화해 외환으로만 환전이 가능한 유럽 공동 통화(단일 통화가 아닌)가 될 수도 있다. 후자의 해결 방안은 다시 유럽통화제도(SME)를 되살리게 될 것이다. 이때 유로와 중요한 차이를 갖는다. 유로와 달리 유럽통화제도 내에서 유럽통화단위(ECU·European Currency Unit)는 가상 통화였고, 자국 통화만을 환전할 수 있었다. 이 문제와 관련해 전 장관이자 벨포르 지역 상원의원이었던 장 피에르 슈벤망은 "유일한 합리적 방향은 유럽 전체 차원에서 조직적이면서도 협의된 방식으로 유럽 단일 통화 체제에서 빠져나가는 것"(9)이라고 했다. 덧붙여 "그렇지만 그 합리적 방향이 무엇인지는 이념적 이유와 그보다 더한 실질적 이유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지금은 말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런 현실이 영원히 지속될까? 위기가 악화되면 입 밖으로 내뱉게 될 것이다.

이 영역은 폭발성이 있고, 미지의 단계로 도약해야 함을 의미한다. 반대로 이미 알고 있는 것과 같이 폭발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현재의 정책 추구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다. 그 정책이란 수십 년간 사회주의 기반을 무너뜨리면서 무기한 지속될 긴축과, EU 대부분의 국가들을 EU집행위·유럽중앙은행·국제통화기금의 '트로이카' 신탁통치하에 연명하는 레짐(체제)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에 비춰 유럽의 민주주의와 함께 어쩌면 유럽의 정신, 그 자체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할 것이다.

글•베르나르 카상 Bernard Cassen 파리 8대학 유럽학연구소 명예교수

번역•박지현 sophile@gmil.com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편집위원. 남극보호연합(ASOC) 한국 어드바이저.

(1) Christophe Deloire 와 Christophe Duboisdml 인용문 참조(82쪽), Circus Politicus, Albin Michel, Paris, 2012.
(2) Elie Cohen은 프랑스 CNRS의 연구소장이자 Sciences-Po의 교수이기도 하다. Renaud Lambert, ‘경제학자라는 청부업자’(Les économistes à gages sur la sellett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3월호 참조.
(3) La Tentation hexagonale, Fayard, Paris, 1996.
(4) Antoine Schiwartz, ‘또 다른 유럽 향해, 각자 다른 좌파의 꿈’(La gauche française bute sur l’Europ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6월호 참조.
(5) 2013년 크로아티아가 EU에 가입한다.
(6) Aurélien Bernier, Dés obéissons ? l’Union européenne !(EU에 불복종부터!), Milleetunenuits, Paris, 2011.
(7)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대다수 회원국이 승인으로 규제하던 유럽 공동농업정책(PAC)의 재정 마련을 위해 감행한 1965년 6월부터 1966년 1월까지의 ‘빈 의자 정책’(la politique de ’la chaise vide)을 말한다. 1966년 1월 30일 룩셈부르크 합의를 통해 드골 대통령은 실제 정책 결정에서 만장일치제를 다시 도입했고 결국 거부권(비토)을 확보했다. ‘만장일치제 바깥의 프랑스’(La France hors du consensus europe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1월호 참조.
(8) L’ALBA s’élargit et monte en puissance, www.medelu.org/L-ALBA-s-elargit-et-monte-en.
(9) La Newsletter de Jean-Pierre Chevènement, 2012년 9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