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영의 문화톡톡]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영화적 실험, '홀리 모터스'로부터 만나는 타자들
프랑스 누벨 이마주의 등장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과 번영의 시기에 성장한 프랑스의 젊은 영화감독들이 보여준 프랑스의 누벨 바그(novelle vague)는 세계 영화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를 대표하는 장 뤽 고다르(Jean Luc Godard) 감독의 파격적인 작법은 이후 등장한 누벨 이마주(nouvelle image) 영화에도 이어졌다. 누벨 이바주는 화려한 영상미를 추구하며 독특한 탐미주의적 미학을 구현했는데, 최근까지 실험적인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 레오스 카락스((Leos Carax)도 대표적인 감독 중 한 명이다. 이전 영화들에서 보여준 그러한 특성은 2012년도에 제작한 <홀리 모터스(Holy motors>와 그 이후 8년 만에 내놓은 <아네트(Annette)>(2021)를 비롯하여 <잇츠 낫 미(C'est pas moi)>(2024)에 이르면서, 자기 반영적인 메시지와 시네마라는 매체성에 대한 탐구로 지속되고 있다.
특히 <홀리 모터스>는 영화 제목의 은유처럼 ‘홀리’한 자동차에 탑승하여 아홉 명의 역할을 수행하는 드니 라방(Denis Lavant)의 명연기를 보는 것만도 황홀하다. 그러나 한 명의 배우가 아홉 명의 역할을 연기하기 때문에, 최소한 아홉 개 이상의 분절된 시퀀스로 인해 다소 복잡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홀리 모터스>에서 <아네트>를 거쳐 <잇츠 낫 미>까지
관객은 <홀리 모터스>를 처음 접했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그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독창적인 서사 구성이나 재현 양식은 하나의 거대한 서사에 몰입하지 않게 만들며,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특성을 얼마나 미학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서사가 시작되면서 카락스 감독은 자신이 직접 스크린에 출현하여 스크린 속 또 다른 극장으로 관객을 초대한다. 이러한 작법은 뮤지컬 장르를 취하는 <아네트>에서 더욱 강화되어, 초대의 노래를 통해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동참시킨다. <잇츠 낫 미>는 기존의 이러한 실험적 시도를 엮어, 자기반영적 특성을 강하게 드러내는 41분짜리 중편 영화이다.
세계 속 아홉 명의 타자들이 전하는 철학적 메시지
<홀리 모터스>의 스토리는 이렇게 펼쳐진다. 대저택에서 걸어나오는 오스카는 비서 셀린이 안내하는 흰색 고급 리무진에 탑승한 후, 하루의 업무를 보고 받는다. 그런데 그 업무란 아홉 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은행가, 걸인, 모션 캡처 배우, 광인, 아버지, 암살자, 희생자, 죽어가는 부자 노인, 그리고 침팬지를 가족으로 둔 가정의 남자 역할이다. 오스카는 아홉 명을 완벽하게 재연하기 위하여 성스러운 자동차인 홀리 모터스 안에서 스스로 분장한다. 놀랍도록 각각의 인물로 완전하게 둔갑한 오스카의 형상은 낯설기만 하다. 각 인물의 대사나 행위에서도 그러한 낯섦은 강화되는데, 이는 오히려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반추하게 만든다. 각 인물의 대사를 통해서도 가난이 무엇인지, 미(美)가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가족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던진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매력 중 하나가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수많은 타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일 터, <홀리 모터스>처럼 다중의 인물과 그들의 시공간을 한 작품에서 동시에 만나기란 쉽지 않다. 기실 그가 연기하는 모든 인물이 평범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분명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오스카가 연기하는 아홉 인물의 삶 속에는 광기나 살인 등과 같은 인간의 추함도 존재한다. 하지만 카락스 감독은 그러한 추함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역설하여 인간과 동물, 인간과 사물을 포괄하는 변증법적인 공생으로 변주해 간다. 가족 구성원으로 등장하는 침팬지뿐 아니라, 오스카의 일과가 마감된 후 주차된 많은 홀리 모터스가 나누는 대화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낯섦은 이 세계의 모든 존재와의 관계를 재성찰하게 한다.
카락스 감독의 판타지적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카가 연기하는 아홉 명의 삶, 그리고 그 사람들의 삶을 연기하는 오스카. 영화 <홀리 모터스>는 그들에 대한 기괴하고 낯선 느낌보다는, 힘겹게 살아가는 세계 속 타자에 대한 연민을 일으킨다. “당신이 마주하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라. 그들도 힘겨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콜라주의 활용이나 화려한 시각 이미지로 구현되는 카락스 감독의 영화는 휴머니즘이 넘쳐나는 판타지적 리얼리즘 영화로도 느껴진다. 누추하지만 아름다웠던 파리 퐁네프 다리의 연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홀리 모터스>의 타자들이 전하는 생소함이 필모그래피 전반에 드러나는 연민으로 잔존하기 때문이다.
아홉 명의 인물이 살아가는 시공간 외에, 오스카가 탑승하여 자신이 직접 분장하는 자동차는 제목만큼 중요한 공간이다. 그렇기에 그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 역시 중요하다. 자신이 왜 그러한 일을 하는지, 오스카는 자동차 안에서 그 이유를 '연기의 아름다움'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스카에게 홀리 모터스는 세계 속 다양한 타자로 바뀌기 위하여 일하는 공간이다. 아홉 명의 타자로 살아가기 위해 타자화된 주체로 변신하는, 진정한 자아가 실현되는 공간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스카는 누구인가? 오스카의 연기는 세계라는 무대에서 여러 역할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가면을 쓰지 않을 뿐, 우리 모두 매일 연기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본래의 나 혹은 본래의 자아가 감춰진 채, 연기하는 자아만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 같다.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의 말대로, 우리는 뒷무대가 아닌 앞무대에서 연기하는 자아로 살아간다. 뒷무대에 있는 진정한 자아가 아닌, 앞무대의 연기하는 자아로만 살아가는 세상이다. 앞무대에서 뒷무대로 돌아올 때면 나의 내면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내적 자아를 마주하는 외적 자아. 이들은 하나이자 둘이다. 두 자아 모두 나를 구성하는 자아이므로, 인간은 복합적인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영화적 여정
영화의 엔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홀리 모터스’라는 간판의 주차장에는 오스카가 타고 다니는 하얀 색 리무진과 동일한 홀리 모터스가 즐비하다. 그 자동차에 탑승한 이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관객은 오스카가 변신하여 연기하는 아홉 명의 인물을 쫓아가며 혼돈에 빠진다. 영화의 막이 내릴 때까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모호하다. 마지막 침팬지 가족이 거주하는 곳으로 귀가하는 오스카 역시 그 정체가 뚜렷하지 않다. 누가 오스카이며 오스카가 연기한 인물은 누구인지, 어쩌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 역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답을 내릴 수 있는가? 삶이란 죽음의 순간까지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일 진데, 우리는 <홀리 모터스> 속 많은 타자들을 보며 그 답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지도 모른다.
글·김소영
문화평론가.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술연구교수 겸 서울사이버대 객원교수. 한국영화학회 국제학술상임이사. 현재 홍익대학교에서 <영화의 이해>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