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한 조약, 뻔한 결과

2012-10-14     라울 마르크 제나르

"전혀 걱정할 것 없다. 순전히 기술적인 법안일 뿐이다!" 지난 9월 19일 장마르크 에로 정부가 '공공재정 운영에 관한 국가조직법' 법안을 제출하면서 한 말이다. 그러나 유로존 안정, 협력 및 거버넌스 관련 협약(TSCG·신재정협약)의 지속적이고 강제적인 구현을 목적으로 하는 이 법안(1)이 가져올 정치적·사회적 파장은 매우 클 것이다. 이 법안이 발효되면 프랑스 국회는 행정·금융 기관들의 영향 아래 놓이고, 정부는 더 가난해지며, 합법적 경로로 사회복지가 축소될 것이다.

기술적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들에 점점 큰 정치적 권한을 위임함으로써 민주주의적 통제를 회피하는 이른바 '모네의 방법론'(2)이 부활하고 있다. 1957년 로마 조약, 1986년 유럽통합법, 1992년 마스트리흐트 조약, 2007년 리스본 조약을 거쳐 이제 민주주의 해체 프로세스의 결정판이 등장한 것이다.

TSCG는 조약에 서명한 국가들에 '균형적인 공공재정'을 강요한다. 그러나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 각국의 '구조적 적자'가 평가 기준이다. 조약에는 경기 상황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국가부채를 산정한다고 명시돼 있다. 따라서 경제위기와 관련된 부분, 즉 "예외적이고 적법한 정부 지출"은 제외한 뒤 연간 적자를 계산해야 한다. 그러나 '예외적', '적법한'이 정확하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명시돼 있지 않다. 프랑스 정부는 이 표현에 대한 철저한 검토 없이 고스란히 법안에 옮겨놓았다. 이 문구는 각국의 구조적 적자를 계산할 권한을 가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의 해석에 맡기는 셈이다.

요컨대, 프랑스 정부는 TSCG의 내용에 부합하는 국가조직 법안을 도입함으로써 정확히 뭔지 모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애쓰는 정도를 넘어 열성을 보인다. 문제가 발생할 경우 공공재정계획법에 근거해 TSCG의 수수께끼 같은 요구사항을 만족시키기 위해 "최소 3년 동안 구조적 노력 방안을 마련한다"고 명시돼 있다.

목표는 불분명한데 수단은 명확하게 언급돼 있다. 이 법안은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그 유명한 황금률(GDP 대비 적자 제한 규정)의 적용과 실현 수단,(3) 공공재정 고등위원회(HCFP) 설치, 예상 지출과 실제 지출의 간극을 조절하는 '자동 수정 메커니즘' 도입 등이다. 한마디로 '구조적 노력'의 일환으로 각 행정부처에 목표를 할당하고 결산 결과를 분석하겠다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모든 결과는 EU 집행위원회와 HCFP에 보고돼 평가받는다.

법안의 3번째 조항을 살펴보면 내용의 심각성을 실감할 수 있다. '노력'의 대상은 모든 지방자치단체뿐 아니라 "의무 가입 사회보험과 건강보험의 국가 차원에서의 지출 목표"로 명시돼 있다. 프랑스 정부는 TSCG가 요구하지 않은 사항까지 자세하게 명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뿐인가. 경제분석위원회가 이 분야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뒤져 있다고 지적한 시점에, 그리고 회계감사원이 프랑스의 퇴직연금 시스템의 비용 문제를 비판하는 시점에 이 법안은 사회보장제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주류 언론은 얼씨구나 국가재정 낭비를 지적하며 퇴직자들이 누리는 특권을 공격했다. 그렇게 조금씩 '개혁의 필요성'이 여론에 주입됐다.

지난 9월 7일 열린 회계감사원 심리에서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이 법안의 핵심 사항인 HCFP의 창설을 발표했다. HCFP는 사회보험 재정을 포함해 모든 예산법(국가재정 정의)을 고려한 뒤 거시경제적 예측을 내놓는 기관이다. 또한 설정 목표 달성 여부, 구조적 노력 과정 등을 평가하고 '수정 메커니즘'의 작동 필요성, 총리실의 요청이 있을 경우 '예외적 상황' 인정 등을 결정한다. 회계감사원과 나란히 운영되는 HCFP는 거시경제예측위원회와 예산위원회로 구성된다. 위원회 구성원은 대통령이 국회의 위원회 혹은 총회의 인준을 받아 임명한다. 임기는 6년이고 해임과 연임이 모두 불가능하다.

순전히 기술적이라고? 이만큼 민주주의 제도를 심각하게 파괴하는 법안은 본 적이 없다. HCFP는 실질적 권력을 누리며 정치적 결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경제·사회의 주요 현안이 국민의 대표자가 아닌 사람들의 손에 결정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지자체의 자유로운 행정은 헌법의 기본 원칙에 속한다"(제72조)고 명시한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 헌법은 제대로 보호받을 수 있을까?

구조적 적자 허용 한계 내에서 예산을 운용할 경우 공공투자는 위축되고 정치적 가능성도 협소해질 것이다. 교육, 의료, 문화, 주택, 교통, 수도, 에너지에 대한 평등한 접근권 보장은 어떻게 할 것인가? 법안 입안자들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돈은 단 한 푼도 쓸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사회의 생태적 변환, 기후변화 문제 해결 역시 요원한 일이 될 것인가? 예산 균형 목표가 강제될 경우 재정 마련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이다. 민간 영역의 이익을 위해 공공정책이 희생되고 있다.

글•라울 마르크 제나르 Raoul Marc Jennar 에세이스트.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주요 역서로 <프란츠의 레퀴엠> 등이 있다.

(1) 10월 2일부터 국회 토의에 부칠 이 법안은 이변이 없는 한 가결될 것이다.
(2) 경제계획위원이던 장 모네는 1950년 이른바 ‘점진주의 방식’으로 불리는 방법론을 제창해 정치적 비밀과 토론의 부재를 조장했다.
(3) 라울 마르크 제나르, ‘황금률과 안정 메커니즘, 쿠데타 위한 두 가지 협약’,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6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