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어산지의 불가침권과 ‘범인 인도’

2012-10-14     모리스 르무안

미국 정부와 펜타곤의 기밀문서 수십만 개를 웹사이트 위키리크스에 공개한 줄리언 어산지를 미국 정부가 곱게 봐줄 리는 없다.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의 어산지는 성폭행 혐의로- 그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스웨덴 검찰에 기소된 상태가 아니라면 미국 정부에 훨씬 더 불손한 태도를 보였을지 모른다.

어산지는 영국 런던에서 체포돼 가택연금 상태에서 영국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지난 6월 14일 기각 결정이 나자 스웨덴으로 송환될 처지에 놓였다. 그는 6월 19일 자신이 '정치적 탄압'과 음모의 피해자임을 주장하며 에콰도르 대사관에 망명 신청을 했고, 라파엘 코레아 대통령은 그의 망명을 허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에콰도르 정부는 어산지가 스웨덴으로 송환되도록 내버려둘 경우 머지않아 미국 정부로 신병이 인도될 위험이 있다고 판단한다. 리카르도 파티뇨 에콰도르 외무장관은 "현재 상황대로 간다면 어산지는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할 것"이라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어산지는 특별재판 혹은 군사재판을 받게 될 것이고, 가혹행위나 고문을 당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아마 무기징역이나 사형을 선고받을 것이다."(1)

지난 8월 15일 영국 정부는 외국 대사관의 불가침권을 보장한 외교관계에 관한 빈 협약(1961년 4월 18일 체결)을 무시하고 무력을 행사해 어산지를 체포하겠다고 협박했다. 영국 정부는 1987년 제정된 영사기관의 공관에 관한 법률(Consular Premises Act)(2)을 근거로 내세워 "대사관 건물에 숨은 어산지를 체포할 권한이 있다"(3)고 주장했다. 에콰도르 정부가 "우리는 영국의 식민지가 아니다"라며 발끈하고 나섰지만 영국 정부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현재 어산지는 대사관에서 한 발짝만 나서면 곧바로 체포될 위험에 처해 있다.

영국은 예전에는 지금보다 좀더 융통성이 있었다. 1998년 10월 17일 런던에서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체포됐다. 스페인 판사 발타자르 가르손은 피노체트 독재 정권하에서 91명의 스페인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의 신병을 스페인으로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영국 상원은 피노체트에게 외교 면책 특권 적용을 거부했다. 칠레의 에두아르도 프레이 대통령과 중도좌파 정부는 피노체트를 칠레로 송환할 것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호세 미구엘 인술자 칠레 외무장관은 "정치적 맥락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상황 속에서 피노체트는 스페인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칠레에서 재판을 받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4)

마거릿 대처 전 총리는 피노체트의 구금을 '잔인하다', '부당하다'고 비판하면서 가르손 판사가 "마르크스주의 단체의 사주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5) 대처와 피노체트는 유사한 이데올로기를 신봉했을 뿐 아니라 사이도 각별했다. 피노체트는 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벌인 포클랜드 전쟁에서 은밀한 방식으로 영국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미국 정부 역시 '옛 친구'의 칠레 송환을 지지했다.

1999년 10월 영국 대법원은 신병 인도를 승인한다. 미국·영국·칠레·스페인 정부는 급히 비밀리에 회동해 해결책을 찾아낸다. 영국 정부에서 지명한 의사 3명은 피노체트를 진찰한 뒤 '심각한 건강 상태'로 인해 재판받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2000년 3월 3일, 전세계는 황당한 장면을 목격한다. '다 죽어간다'던 피노체트는 산티아고 공항에 착륙하자마자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마중 온 지지자들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후안 구스만 판사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피노체트는 자신의 죄과를 지불하지 않은 채 2006년 12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1996년 처음으로 피노체트의 처벌을 위해 발 벗고 나섰던 스페인 대법원 검사 카를로스 카스트레사나는 누가 그를 비호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토니 블레어,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 에두아르도 프레이가 피노체트를 구해줬다. 그들은 피노체트가 칠레로 송환되면 처벌받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6)

남미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쿠데타로 실각한 뒤 추방당했던 온두라스 대통령 마누엘 셀라야는 2009년 9월 21일 비밀리에 귀국해 브라질 대사관에 몸을 숨겼다. 독재자 로베르토 미첼레티는 브라질 대사관을 포위한 뒤 "외교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했다. 2002년 4월 12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있었던 일도 빼놓을 수 없다. 쿠데타로 차베스가 권좌에서 쫓겨난 다음 날, 극우파 시위대가 쿠바 대사관으로 몰려가 차량을 파괴하고 수도와 전기, 전화를 끊어버렸다. 엔리크 카프리레스 라돈스키(10월 7일 치른 대통령 선거의 야당 후보)는 그곳에 피신해 있을지 모르는 베네수엘라 정부 요원들을 찾아내기 위한 조치라고 둘러댔다. 제르만 산체스 오테로 쿠바 대사는 분노했다. "쿠바는 4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에 맞서 싸워왔다. 그런데 여기서 이런 식으로 주권을 침해받아야 하는가!"(7) 노르웨이가 중재에 나서고 차베스가 정권을 되찾은 뒤에야 사태가 진정됐다.

3일 천하를 누린 페드로 카르모나는 가택연금 상태에서 풀려나자 카라카스의 콜롬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사태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차베스 정부는 그의 출국을 허용했다. 콜롬비아 공군기로 보고타에 도착한 카르모나는 '정치 망명자' 자격으로 지금까지 그곳에 살고 있으며, 베네수엘라 정부는 신병 인도를 요구하고 있다.

남아메리카국가연합(UNASUR) 회원국들은 정치적 성향을 떠나 한목소리로, 주권국은 정치적 망명을 받아들일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며 에콰도르 정부의 결정을 지지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이 강한 미주기구(OAS)는 애매한 입장을 표명했다. 칠레 외무장관 출신의 인술자 미주기구 사무총장은 돌연 논쟁의 초점은 '정치적 망명자를 보호할 권리'가 아니라 '외교공관의 불가침권'이라는 논리를 폈다. 8월 24일 미주기구는 "에콰도르에 대한 연대와 지지 표명을 위한 회원국들 간의 '적절한 합의'에 도달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미국의 요구로 에콰도르 대사관에 대한 영국 정부의 '위협'이라는 표현은 삭제됐다.(8)

정치적 망명, 범죄인 인도 등의 문제에 대해 미국 역시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현재 미국 마이애미에 살고 있는 루이스 포사다 카릴레스는 1976년 쿠바나 데 아비아시온 항공 여객기 폭파범(73명 사망)으로 체포됐다. 그는 베네수엘라 감옥에서 탈출한 뒤 1997년 쿠바에서 연쇄 테러를 모의했다. 베네수엘라와 쿠바 정부는 그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고 있다. 미국에는 그와 비슷한 처지의 망명자가 몇 명 더 있다. 볼리비아 정부가 2003년 유혈진압(67명 사망)의 책임을 묻기 위해 신병 인도를 요구하고 있는 전 대통령 곤살로 산체스 데로사다, 2003년 카라카스 스페인 영사관과 콜롬비아 영사관 건물 폭탄테러의 주범 호세 안토니오 콜리나- 언론에서는 이를 차베스 지지자들이 모의한 일이라고 선전했다- 도 있다. 마피리판 마을 학살(1997년 7월 12일) 책임자 에르난 오로스코 대령은 콜롬비아에서 40년형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긴 명단의 일부에 불과하다.

스웨덴 정부는 어산지를 실정법 위반 혐의로 불러 조사하겠다며 신병 인도를 요청했다. 코레아 대통령은 어산지를 경찰 수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의 망명 신청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다. 언론인 어산지가 제3국, 구체적으로 말해 미국으로 다시 인도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미국으로 송환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는 한 상황은 쉽게 정리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어산지는 헝가리 공산정권에 항거하다가 부다페스트 주재 미국 대사관에서 15년 동안(1956~71) 살아야 했던 요제프 민첸티 주교와 같은 처지가 될지 모른다. 혹은 1989년 노리에가 장군이 겪었던 일을 반복하지 말란 법도 없다. 파나마를 침공한 미군을 피해 교황 대사관에 피신한 노리에가는 미군 쪽이 밤낮으로 귀청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시끄러운 록음악을 틀어대자 11일 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에콰도르 대사관이 있는 런던의 부유한 지역 나이츠브리지의 주민들은 과연 이런 소음을 참고 견딜 수 있을까?

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정기헌 guyheony@gmail.com

(1) <BBC Mundo>, 런던, 2012년 8월 17일.
(2) 1987년 영국 경찰관이 리비아 대사관저에서 발사된 총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한 뒤 도입된 법이다.
(3) <The Guardian>, 런던, 2012년 8월 16일.
(4) <Le Monde>, 1998년 12월 3일.
(5) <El Pais>, 마드리드, 1999년 10월 7일.
(6) <El Pais>, 2006년 12월 13일.
(7) Maurice Lemoine, <대통령 차베스!>, Flammarion, 2005.
(8) 영 연방(Commonwealth) 소속인 캐나다만 서명을 거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