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미의 문화톡톡] 사랑이 정치인 이유

2024-10-24     장윤미(문화평론가)

1. 모든 의혹의 시작

삶에 있어 가장 강렬한 의혹을 꼽으라면 그것은 사랑일 것이다. 내가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 맞는가부터 시작되는 질문은 그 대상 역시 나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의문, 사랑한다면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심, 이 사랑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혹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리고 이 모든 의심과 의혹이 사라질 때 우리는 사랑의 완성 즉, 결혼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결혼이란 행위는 모든 의혹과 의심이 사라졌음을 증명하는 행위인 셈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현실에서 결혼은 모든 의혹의 종료지점이 아니라 새로운 의혹의 시작점이자 출발점이다. 게다가 그 의혹들은 예고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건 물론이고 사랑에 딸려 오는 의혹보다 양과 질을 모두 압도한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말은 이제는 동화에서도 볼 수 없는 낡은 명제이자 현실에서는 거짓 명제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을까 싶다. 물론 결혼 생활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신성아의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은 그 부제처럼 찬란하고 구질한 질문과 투쟁에 관한 책이다. 여기서 질문은 결혼과 함께 시작된 갖가지 의혹을, 투쟁은 이 의혹에 대한 답을 찾아내기 위한 치열한 행위를 뜻한다.

평범한 개인인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고, 결혼으로 사랑을 완성했다. 그리고 그 결실로 소중한 아이를 얻었다. 아내고, 엄마로, 그리고 일하는 노동자로 모든 것이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많은 것이 좋은, 괜찮은 결혼 생활이자 일상을 지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아프게 되면서 그동안 사랑이란 이름으로 타협하거나, 참거나, 외면했던 의혹들이 수시로 튀어나왔다.

이 과정에서 작가가 자신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세상에 던진 질문은 두 가지였다.

 

2. ‘그 일’은 누가 해야 하는가

세상은 남자가 해야 할 일이 있고, 여자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자는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고 여자는 가족을 돌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사람에게 부여된 임무 중 하나라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가족의 붕괴는 시간문제라 말하고, 남녀에게 주어진 임무가 바뀌기라도 하면 비정상 가족 취급을 받는다.

 

신성아,

아이가 난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시점으로 작가의 일상은 응급조치, 임시변통, 임시방편으로 채워졌다. 예측 불가능한 아이의 간병이 오로지 그녀의 몫이 된 탓이다. 그러나 그녀와 달리 남편은 비교적 빠르게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일상을 회복했다. 아이가 아플수록 가장은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한다는 명제가 남편을 간병과 돌봄으로부터 멀어지게 해준 덕분이었다.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자식을 기르지만, 작가는 엄마라는 이유로 자기 일과 커리어로부터 재빨리 멀어졌다(손절당했다는 말이 적절할 수도 있겠다). 일보다 아이가 먼저라는 사회적 당위성이 작가를 주저앉혔다.

물론 아픈 아이를 돌봐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우선순위를 계산하는 부모는 없다. 문제는 아이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에 문제가 생기면 일을 두어야 하는 사람, 아이가 아프면 돌봐야 하는 사람은 늘 여자라는 점이다. 이때 작동하는 것이 바로 모성신화다.

모성은 본능이 아니라는 건 이미 많은 연구와 통계를 통해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부분의 돌봄 노동은 모성에 기대어 해결된다. 여자는 모성을 타고났기 때문에 돌봄 노동을 잘할 것이라는 믿음은 여성은 돌봄 노동을 맡아야 한다는 명제를 만들어낸다. 동시에 이 명제에 어긋나는 여성은 이른바 ‘자격 없는 존재’로 취급되며 사회로부터 비난받는다.

모성 신화와 함께 언급되는 것이 바로 희생이다. 희생은 자발적인 행위이자 대가를 바라지 않는 행위다. 따라서 모성이라는 타고난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봄 노동을 거부하는 여성은 남보다 못한 인간으로, 대가를 바라는 건 이기적인 인간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돌봄 노동을 두고 이 일은 누가 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정해지지 않았고, 정해서도 안 된다. 돌봄노동은 누구만 할 수 있는 것도, 누구에게만 부여되어야 하는 것도 아닌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3. 사랑은 왜 정치적이어야 하는가

흔히 정치는 생물이라고 말한다. 살아 있는 것처럼 변화하고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쓰인 비유다. 가장 이상적인 정치는 모두가 동의하는 공통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이견이나 차이를 극복하는(본문, 110쪽) 상태다. 그리고 이것과 반대되는 상황이 벌어질 때 우리는 정치가 실패했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상적인 정치란 실체가 있는 것도, 조건과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변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화와 타협이 필요하고 이 과정은 예측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언제든지 변화/변동/진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생물과 같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기에 공동체를 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공동체는 구성원이 지향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하고 타협한다. 다시 말하면 바람직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정치는 필요하다. 더 큰 갈등을 낳지 않기 위해, 극한으로 치닫지 않기 위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가족은 사랑으로 완성되긴 했지만, 엄연히 타인과 타인이 만나 만든 공동체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라 하더라도 정치는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집중한 나머지 가족과 정치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이해하곤 한다. 가족이라면 늘 같은 방향을 바라보아야 하고, 늘 한 공간에 모여 있어야 하며, 추구하는 욕망까지도 같아야 한다는 믿음은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강하다.

그러나 가족 역시 개별적 개인이 묶인 공동체라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가족 역시 결국은 독립적인 개인으로 존재하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각의 가족 구성원은 권력, 지위에 상관없이 타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존중하되 공동의 목표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가족 안에서 정치를 제대로 배웠다면 그는 누구를 만나든,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든 현명하게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정치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사랑을 지킨다는 건 공통의 가치를 지키는 과정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사랑에 정치가 무너지면 사랑이 무너진다는 건 예상하지 않아도 분명하다. 단, 정치가 생물이듯 사랑도 생물이다, 사랑은 어디로 튈지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문제를 발견하고, 쉬지 않고 대화하고 타협해야 한다. 이것이 멈추는 순간 사랑 역시 종료된다.

 

4. 모든 것이 다 정치다

작가는 아이의 질병을 통해 세상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생각한다. 아이의 병은 일상을 파괴했고, 작가의 커리어를 중단시켰으며, 가족이 해체되는 위기에 빠뜨렸다. 생사를 갈라놓는 아이의 병 앞에서 보통의 엄마라면 아이 간병의 최전선에 서서 자신을 갈아 넣고 희생을 당연시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질문했다. 돌봄 노동에 대해서, 여성에 대해서, 커리어에 대해서, 질병에 대해서, 가부장제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이 찾을 때까지 타협하고 투쟁했다.

그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의 타협과 투쟁은 곧 정치고, 정치는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정치가 성공했냐고 묻는다면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정치에 실패하지 않은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의 타협과 투쟁은 여전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므로.

 

 

글·장윤미
소설가 겸 문화 평론가. 저서로 독서 에세이 『우세한 책들』, 장편소설 『플랫폼; 또다른 세계로 가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