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조작은 어떻게 자행되어 왔는가?

2차 세계대전에서 근동분쟁까지 조작된 집단기억

2024-10-31     브누아 브레빌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1945년 5월 7일 독일의 항복이 막 서명되던 당시, 프랑스 여론 조사 기관인 IFOP는 이미 프랑스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독일 패배에 가장 크게 기여한 국가는 어디입니까?”

1945년 5월 당시에는 동부 전선에서 수백만 명의 소련 군인들이 목숨을 잃어가며, 나치군 약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과 미군이 뒤늦게 참전했다는 소식이 모두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57%가 “소련”이라고 답했고, “미국”이라고 말한 사람은 단 20%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79년이 흐른 2024년에 IFOP가 같은 질문을 던진 답의 결과는 바뀌었다. 응답자의 60%가 미국을 택했고, 소련을 지목한 사람은 25%에 불과했다.

집단 기억은 시대, 세력 관계, 당시의 이해관계에 따라 변하는 일종의 구조물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할리우드는 미국을 지구의 구원자로 만들었고, <지상 최대의 작전>(1962), <라이언 일병 구하기>(1998), <패튼>(1970), <명예의 계곡>(1980) 등의 영화를 앞세워 미군의 영웅주의를 부추기고 미국을 우월적 지위의 영웅으로 그려왔다.

소련은 사라졌고, 소련의 희생을 기억하는 데 기여했던 프랑스 공산당(PCF)도 몰락했다. 지난 40년 동안 프랑스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화려하게 기념하면서 이를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환점으로 만들어 왔다.

하지만 이 사건이 처음부터 거창하게 대접받아온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1949년 6월 6일, 상륙작전 5주년 기념은 소박한 행사로 끝났다. 지역의 나팔수 단체, 화환을 해변에 놓는 두 명의 소녀, 꽃다발을 투하하고 폭죽을 터뜨리며 상공을 지나가는 몇 대의 폭격기 등이 전부였다. 

 

 

과거를 왜곡하는 거울로 이용된 기념행사

이후 축하 행사가 더 커지기는 했지만, 어느 미국 대통령도 노르망디를 방문한 적은 없었다. 1964년에는 드골 장군이 노르망디 방문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제가 그들의 상륙작전을 기념하기를 바라나요? 그 상륙작전은 미국이 우리 조국 프랑스를 점령한 두 번째 전조였을 뿐입니다. 안 돼요, 절대로 기대하지 마세요(1)!”

그러나 1984년, 미-소 간 긴장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6월 6일의 기념행사는 이제 미국의 아침 TV 방송 시간에 맞춰지고, 행사 또한 주요 국가 정상이 참석하는 등 정치적인 의미에서도 화려하게 변모했다.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초청으로 로널드 레이건, 엘리자베스 2세, 캐나다의 총리 피에르 엘리엇 트뤼도, 벨기에의 바두앙 1세 등 각국 대표들이 행사에 참석했다. ‘미국 등 서방 진영’은 상호 단결을 과시하며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신들을 내세웠다. 

“이 대륙의 중심에 왔던 소련군은 평화를 명분으로 임무가 끝난 뒤에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당시 레이건 미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공격적인 어조로 소련을 비난했다.

“초대받지 않은 그들은 아무도 원치 않은데도 전쟁이 끝난 지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머물러 있습니다.”

그 후, 매년 기념행사는 메시지를 발표하고 전달하는 기회의 장이 되었다. 초청자 명단, 연설 순서와 내용, 군사 퍼레이드의 진행 방식까지 행사의 모든 것에 의도하는 메시지를 담았다. 지난 6월 6일, 80주년 기념행사에는 무려 25명의 국가 원수와 정부 수반, 왕실 인사들이 노르망디 해변을 찾았다. 

서방의 대서양 동맹 진영이 완벽하게 참석한 셈이었다. 냉전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 대표는 단 한 명도 초대받지 못했는데, 심지어 러시아 대사관 고문도 초대되지 않았다.

엘리제궁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 전쟁을 감안할 때 러시아는 초대받을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라고 변명했다. 

반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 자리에 참석하였고, 엄선된 4,000명의 관중으로부터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미국 병사들의 희생을 내세우며 “자유는 가치가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가치가 있습니다, 미국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연설했다. 

한편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그가 즐겨 사용하는 역사적 비유 중 하나를 들어 “우크라이나 국민이 오늘날 수행하는 정당한 투쟁이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얼마나 부합되는지”를 설명했다.(2)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에서 히틀러의 군대를 무너뜨린 러시아는 이처럼 은연중에 나치 정권과 동일시되었다.

기념행사가 과거를 왜곡하는 거울을 제공한다는 것에 놀라는 사람은 아마도 순진한 사람일 것이다. 기념행사는 주최자의 입맛에 맞는 이야기를 연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를 진영의 입맛에 맞게 다시 쓰는 작업은 단순히 행사에서만이 아닌, 훨씬 다양한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언론, 교과서, 박물관, 심지어 몇몇 국가의 공공정책 등이 이에 해당된다.

러시아는 오랫동안 자신의 역할과 공이 미국에 가려지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어느새 러시아는 독일과 마찬가지로 재앙에 대한 공동 책임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담론은 처음에는 중부 및 동부 유럽, 발트 국가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2000년대 후반에 부활한 민족주의 운동 탓이었다. 나치에 점령당했던 이들 국가는 전후에는 소련의 영향 아래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들 국가에는 ‘이중 점령’, 즉 처음에는 독일에, 그다음에는 소련에 점령된 ‘두 전체주의’라는 개념이 자리 잡았다. 그러한 개념을 역사적으로 정리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많은 흔적들, 특히 소련의 붉은 군대의 승리나 독일 점령군과의 협력을 보여주는 흔적들을 지워야 했다.

이러한 현상은 2007년 에스토니아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정부는 1947년에 탈린 중심부에 세워진, 2차 대전 당시 전쟁에서 전사한 소련 군인들을 기리는 동상을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이 동상은 ‘소련 점령’의 상징이 되어왔다. 

이에 러시아 소수 민족이 항의했고, 항의는 폭동으로 이어졌으며, 이에 에스토니아 정부는 동상을 철거하는 대신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와 같은 사례는 이후 흔한 일이 되었다. 

지난 15년 동안 불가리아, 헝가리, 라트비아, 폴란드, 루마니아, 우크라이나에서 수백 건의 유사한 사례가 발생한 것이다. 2017년 폴란드 정부는 지방 당국에 12개월의 기간을 주고 ‘공산주의나 기타 전체주의 체제를 상징하는 인물, 조직, 사건 또는 발생일을 기리는’ 모든 공공 기념물을 철거하도록 지시했다.

2018년에는 ‘인류에 대한 범죄를 폴란드 국가나 국민에게 거짓으로 밝히는 것’을 처벌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아우슈비츠 등 강제수용소를 ‘폴란드의’ 수용소라고 언급하면 국적과 관계없이 처벌되고, 나치 만행에 대해 폴란드나 폴란드인에게 공동 책임을 묻는 표현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이른바 ‘폴란드 수용소법’을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나치 만행에 대한 폴란드 협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국립 기억 연구소’가 이를 감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2018년 안토니 비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대한 책이 금지되었다. 

그 이유는 나치 군대에 참여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1941년에 90명의 유대인 아이들을 처형했다는 몇 구절 때문이었다. 역사적 불행이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공동 책임이라는 인식은 점차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까지 확산되었다.

특히 과거에는 주로 신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던 이러한 인식은 2019년 9월 19일, 동유럽 국가들의 주도로 유럽의회가 ‘유럽의 미래를 위한 역사적 기억의 보존 중요성’에 관한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일반적이고 공식적인 교리로 자리 잡았다.

 

 

역사의 진실을 모른 채,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이들

이 결의안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독소 불가침 조약의 직접적인 결과’라고 명시했다. 또한 그해 5월 25일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서방 세계에 알린 영웅 ‘비톨트 필레츠키’의 처형일—역주)을 ‘전체주의에 맞서 싸운 영웅들을 위한 세계 기념일’로 지정할 것을 권고했는데, 이는 소련을 유대인 학살과 암묵적으로 연관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선출된 입법자들이 감정적으로 역사를 기록하고 수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1990년에 저명한 역사학자들인 마들렌 르베리우와 피에르 비달-나케는 카르팡트라에서 유대인 묘지가 훼손된 사건 이후 두 달 만에 감정적으로 채택된 게소 법에 반대했다. 

이 법은 홀로코스트 부정을 금지했다. 르베리우는 당시 “범죄를 설명하고, 그 역사적 차원을 부여하며, 나치의 집단학살을 다른 인류에 대한 범죄와 비교하는 것이 자유로운 정신을 형성하는 방법이다. 억압으로는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했다. 

적어도 이 주제에 대해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합의가 있었다. 1915년 아르메니아 집단학살과 노예제에 관한 후속 기억 법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지한 역사학자들 중 누구도 첫 번째 사건이 집단학살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과 두 번째 사건이 인류에 대한 범죄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3)

그러나 이제 입법자들이 역사학자들 사이에 여전히 논쟁 중인 주제에 개입하고 있으며, 역사의 진실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오직 정치적 목적으로만 행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23년 3월 28일, 유럽 국가들의 의원들에 이어 프랑스 국회의원들은 1933년 우크라이나의 ‘대기근’을 집단 학살로 규정하는 것을 압도적으로 인정했다. 이는 전문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진행 중인 주제였다. 

그러나 한 입법 제안자는 이렇게 말했다.(4) “홀로도모르의 집단 학살적 성격에 대해 논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정치적 행동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 의원들은 단순히 논쟁에서 한쪽을 지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방해 요소를 제거하여 역사를 재작성하고 있다. 모스크바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프랑스와 영국의 책임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1939년 8월 23일 소련이 독일 나치와 ‘독소불가침 협정’을 맺었을 때, 영국과 폴란드는 소련을 포함한 집단 안보 협정의 모든 가능성을 차단했다. 당시 영국의 엘리트들은 나치와의 ‘유화’ 정책을 지지했고, 나치를 공산주의자보다 훨씬 존중할 만한 존재로 보았다. 

영국의 정치적인 타협은 전쟁으로 가는 길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공공 담론, 교과서, TV 프로그램에서는 무시된다.

서방의 이데올로기적 공세에 맞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반(反)러시아적인 ‘역사수정주의’를 비난하였다. 그는 2020년 6월의 한 연설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과 그 결과에 대한 서구의 역사수정주의는 1945년 얄타와 샌프란시스코 회담에서 정립된 평화적 발전의 원칙을 심하게 왜곡하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서구의 사실 조작을 밝히려고 푸틴 대통령은 ‘역사 교수’로 변신했다. 푸틴은 전쟁의 발발에 대한 서구의 책임을 지적했고 ‘뮌헨의 배신’을 비난했다. 폴란드의 나치 협력을 지적하면서 소련 군인들의 영웅주의를 칭송했다. 

그리고 그가 비난하는 적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과거를 왜곡하고, 소련과 독일 간의 관계를 언급하는 것을 금지했다. 교육 프로그램과 교과서를 다시 작성했으며, 우크라이나 ‘탈나치화’와 그 역사적 정당성을 부정하는 것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러시아 대통령의 집착 중 하나였다. 푸틴은 오랫동안 자신의 이웃 국가의 과거를 부인하기 위해 애써왔다. 2023년 5월, 그는 17세기 지도를 조사하며 “소비에트 정부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만들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전에는 인류 역사에 우크라이나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유혈 갈등을 초래한 왜곡된 기억의 전쟁들

이보다 앞서 2021년 7월, 푸틴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역사적 통일성”을 입증하기 위해 15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키예프에 설립된 9세기 러시아 왕국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쿠리코보 평원에서 모스크바의 대공 드미트리와 볼린의 보이보드 보브록, 리투아니아 대공 올기어드의 아들인 폴로츠크의 안드레이와 브랸스크의 드미트리가 함께 싸웠다. 동시에 리투아니아의 대공 야겔론, 티베르 공주의 아들인 야겔론은 마마이를 도우러 병력을 이끌었다. 이는 우리가 모두 하나의 운명 공동체라는 역사적 사실을 일깨운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021년 8월 23일 긴 연설을 통해 “우리의 화폐 흐리브냐는 천 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가 있으며, 이는 볼로디미르 대공 시대에 이미 존재했다. 우리 국장의 삼지창은 우크라이나 헌법에 의해 25년 전에 채택되었지만, 이미 1025년 전에 ‘십일조 교회’의 벽돌에 새겨져 있었다”라고 반박했다.

이러한 역사적 논쟁은 단순히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러한 기억의 전쟁은 이미 피비린내 나는 갈등으로 변질되었으며, 다른 국가들도 과거를 왜곡하고 살인적 결과를 초래하는 유사한 역사를 답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은 지도자들이 주저 없이 철기 시대에 설립된 유다 왕국이나 유대인들이 이 지역에 지속적으로 거주해 왔다는 고고학적 발견을 언급하고 있다. 수천 년 된 동전, 무덤, 비석은 오늘날 이 지역의 식민화와 억압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역사적 사건들은 이해관계에 맞춰 왜곡되고 있으며, 전쟁을 정당화하고 적을 무력화하며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이는 마치 역사의 조각을 필요에 따라 선택하고 재구성하는 것과 같다. 

미디어가 제공하는 ‘프레임’을 통해 공론장이 만들어지며,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역사적 사실을 철저히 ‘프레임 밖’으로 밀어낸다.

 

 

과거를 조작하는 자들에 맞서 

역사의 조작이 갈등을 초래하고 또 한편으로 갈등을 부추기기 위해 역사를 왜곡하고 있지만, 사실 역사는 갈등을 이해하고 그 뿌리와 쟁점을 파악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중들의 입맛을 돋우는 역사적 서사는 그 실체보다도 가벼운 해설가들이 전하는 왜곡되거나 개조된 이야기들이다. 

‘역사적 서사’는 이미 결정되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2022년 2월 24일에 시작되었고, 가자 전쟁은 2023년 10월 7일에 시작되었다. 한쪽에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따라서 피해자들이 스스로를 방어할 권리가 있으며, 서방은 그들을 지원할 의무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러한 서술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거리를 두고 보면 전혀 다른 풍경이 드러난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소련의 붕괴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며, 러시아가 무너지고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을 때 미국이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를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을 상기하지 않고서는 이해할 수 없다. 

이후 미국은 과거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들과 소련의 옛 공화국들을 점차 나토에 통합하고자 했고, 조지아와 우크라이나까지 포함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이는 러시아 국경 근처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반(反)러시아 동맹의 군사적· 전략적 확장이었다. 

노암 촘스키(5)는 이렇게 비꼬았다. 

“만약 멕시코가 중국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중국이 미국 국경 바로 너머에 군대와 무기를 배치하고, 베이징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멕시코 영토를 침공할 경우, 누가 유럽연합이 국제법을 준수하기 위해 공격받은 국가(멕시코)에 수십억 달러를 지원할 것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역사 조작의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방법

하마스가 저지른 학살 역시 역사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는 지난 18년 동안 가자 지구에 대한 여섯 차례의 이스라엘 보복 작전, 지상 및 해상에서 이뤄진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봉쇄, 1967년 이후 유엔에 의해 수차례 비난받은 팔레스타인 영토의 불법 점령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보다 언론은 즉각적인 사건의 흐름에 집중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가해진 이스라엘의 일상적인 학대, 끊임없는 검문, 군사 점령, 분리 장벽, 가옥 파괴, 토지 식민화를 무시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2023년 10월 7일의 공격은 인종적 또는 종교적 이유 이외의 다른 이유가 없는 사건이 되어버린다.(6) 

이는 유대인 학살, 즉 ‘포그롬(pogrom)’으로 불리며, 심지어 “홀로코스트 이후 가장 큰 포그롬”이라고 언론인들과 정치인들은 신속하게 해석했다. 이로써 이 사건은 유대인 박해의 긴 역사 속에 자리 잡게 되며, 하마스의 공격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반(反)유대주의로 낙인찍힌다.(7)

역사 조작을 방어하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역사는 수없이 조작된다. 역사는 전쟁을 정당화하고, 적을 무력화하며,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사용된다. 누구나 역사 왜곡이 필요할 때마다 비유나 참고할 만한 사건을 찾아내고 이를 이용해 자신의 주장을 강화할 수 있다. 

주요 미디어를 소유한 사람들은 이러한 서사 만들기의 다툼에서 공론장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서사를 만들어줄 강력한 무기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으로 토론의 범위와 경계를 정하려 하고 있고, 미디어는 민주주의 국가의 이미지를 손상시킬 수 있는 텍스트들을 “프레임 밖”에 두려고 노력한다. 

서방 세계에서 어느 누가 미국이 나치에 맞서 싸우는 것을 주저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1943년 인도 벵골 기근에서 윈스턴 처칠의 책임(3백만 명의 사망자)에 대해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파리와 워싱턴의 지지로 인도네시아에서 수십만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학살당한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아니면 자유주의자들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칠레 독재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것을 기억하는가?

언론과 출판의 압도적인 영향력에 맞서서, 역사의 뮤즈 클리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의 은혜로운 이야기는 결코 충분하지 않다. 고정관념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언제나 이중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은 올해 9월에 『지적 자기 방어 매뉴얼(Manuel d’autodéfense intellectuelle)』을 출판하며, 누구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각자의 길을 찾아낼 수 있는 방법과 도구를 제공하고자 했다(한국어판은 내년 발행될 예정이다). 역사를 관장하는 클리오조차도 올림포스의 가판대를 채우기 위해 몇십 권을 주문하지 않을까 싶다.

 

 

글·브누아 브레빌 Benoît Brévill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발행인

번역·성지훈
번역위원


(1) Cité dans 『les Mémoires d’Alain Peyrefitte. C’était de Gaulle 알랭 페이레피트의 드골 회고록』, 파리, 1997년에서 인용.
(2) 「L’histoire comme arme de guerre 전쟁의 도구로써의 역사」, <Le Monde diplomatique> 프랑스어판 2024년 4월.
(3) Madeleine Rebérioux, 『Le génocide, le juge et l’historien 집단 학살, 판사 그리고 역사학자』, L’Histoire, 파리, 1990년 11월.
(4) M. Aurélien Taché, 전 유럽 생태-녹색당 의원, <Mediapart>, 2023년 3월 31일 인용.
(5) 노암 촘스키와 제레미 스카힐의 인터뷰, <The Intercept>, 2022년 4월 14일.
(6) Enzo Traverso,  『Gaza devant l’histoire 역사 앞에서의 가자』, Lux, 몬트리올, 2024년.
(7) Michael Parenti, 『History as Mystery 미스터리로서의 역사』 , City Lights Books, 샌프란시스코,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