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동 속의 영국, 우경화로 돌아가나?
국가 조정기를 맞은 영국의 정국 개편
지난 7월 4일 치러진 영국 총선. 결과는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보수당의 14년 집권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보수당이 완전히 몰락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키어 스타머 신임 총리도 전임 총리와 마찬가지로 브렉시트 전쟁 이후 국가 조정이 필요한 때라고 공언했다. 그럼에도 지난 여름 영국에서 발생한 인종차별 폭동과 그에 대한 국민 반응은 영국 정치의 우경화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7월 4일 영국 총선은 중도주의의 기득권층이 극우 소수 세력의 위협을 물리치고 여전히 세력의 지속을 실현한 것처럼 보인다. 나이젤 패라지가 이끄는 극우정당 영국개혁당(Reform UK)은 13석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단 5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고, 스코틀랜드국민당(SNP)의 의석은 기존 48석에서 9석으로 줄었다. (반면에 노동당은 키어 스타머의 새로운 지도력 아래 재정 규율, 자유시장 수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대한 “흔들림 없는 헌신”을 공약으로 내세워 411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로써 노동당은 의회 내에서 굳건한 다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중도좌파인 키어 스타머가 당권을 잡게 되면서 당내 강성 좌파의 입지는 크게 쪼그라들었다.
복잡해진 영국 정치의 지형도
그러나 선거 데이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은 복잡해진다. 먼저, 이번 선거의 투표율은 60%로, 이는 19세기 이후 두 번째로 낮았고 2001년 이래 가장 낮은 투표율이다. 노동당은 970만 표를 얻어 34%의 득표율을 보였는데, 이는 제러미 코빈의 사회주의 지도부 시절인 2017년(1290만 표)과 2019년(1030만 표)에 비해 상당히 낮은 득표율이다.
기존의 보수당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영국의 새로운 보수당으로 탈바꿈한다는 노동당의 전략은 먹혀들지 않았다. 선거 결과, 기존의 보수당 지지자들 중 극히 일부만 이탈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에는 투표를 기권한 사람들이 더 많았고, 상당수는 400만 표를 얻은 영국개혁당에 투표했다. 과반수 투표 제도 덕분에 스타머는 부전승을 거둘 수 있었다.
한편 이번 선거에서 노동당은 초당적 노력을 통해 코빈주의의 유산을 지우려 노력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제러미 코빈은 노동당에서 축출되어 노동당 후보로 선거에 출마할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영국 좌파의 길잡이로 남아, 긴축 정책 및 공공부문의 사유화에 반대하는 투쟁과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코빈은 이번 선거에서 런던 북부 이즐링턴 노스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스타머가 지지하는 노동당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이겼다.
노동당 내에서 좌파로 분류된 의원 4명도 가자지구에서의 집단 학살에 반대하는 입장을 전면에 내세우며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기후 투자 확대와 공공 서비스의 재국유화를 요구하는 녹색당 역시 200만 표에 약간 못 미치는 득표로 웨스트민스터에 총 4석을 확보하며 노동당의 전국 득표율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참고로 총선에서 보수당은 하원 650석 중 121석만 확보하며 정당 역사상 최악의 성적표를 받고 부패 스캔들과 경제 혼란(2010~2024년)으로 얼룩진 오랜 집권을 끝내게 되었다.
노동당, 사민주의 입장 폐기
두 주요 정당의 지배를 보장하도록 설계된 선거 시스템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 같은 선거 결과는 향후 영국의 정치 지형의 재편을 예고한다. 가장 온건한 사회민주주의적 입장조차 폐기한 노동당은 이제 보수당으로부터 영국 자본의 주요 대변인이라는 타이틀을 빼앗아 입지를 다지려 하고 있다.
노동당은 공공 지출을 줄이면서 건강 및 주택 부문에서 기업 이익을 극대화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또한, 주요 기후 정책은 폐기하고, 부자나 기업에 대한 세금 인상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 평화적인 시위는 단속하고, 인종 차별로 악명 높은 영국 경찰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해 ‘공공질서’를 유지하려 한다. 국제무대에서는 미국과의 신성한 “특별 관계”를 유지하고 유럽연합(EU)과의 유대를 강화하려 하고 있다.
노동당이 안정적인 집권 세력으로 이미지를 구축하는 동안, 리시 수낙의 사임 이후 새로운 지도자를 찾고 있는 보수당은 ‘문화 전쟁’의 늪에 빠져들 것으로 보인다. 향후 몇 년간 ‘깨어있는 정치(woke politics)’, 젠더 이데올로기, 이민이라는 문명적 위협이 보수당의 의제를 지배할 가능성이 높다.
보수당, 개혁당과의 동맹 고려
주요 보수당 지도자들도 이런 문제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개혁당과의 동맹을 고려하고 있다. 올해 선거에서 이들의 합산 득표율은 노동당의 득표율보다 4%포인트 높은 38%로, 이는 이들이 2029년 선거를 앞두고 강력한 반(反)이민 전선을 형성하고 더욱 우파적인 국가로의 전환을 도모하는 데 충분한 기반이 될 것이다.
영국 정부는 국가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저비용 외국인 노동력을 포기하는 것을 꺼리면서도, 보수당의 방침을 따라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정부가 국경 통제 부서를 신설하고 불법 이민자 체포 및 추방을 강화하는 동시에, 범죄 및 반(反)사회적 행동이 이민자 급증과 연관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1)
사회 곳곳에서 그 효과가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지난 7월 29일 영국 머지사이드주의 작은 해변 마을 사우스포트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칼부림 사건이 발생하자, 온라인에서는 범인이 무슬림 이주민이라는 확인되지 않은 허위 정보가 빠르게 확산되었고, 앤드류 테이트, 토미 로빈슨 같은 인플루언서들도 이 같은 허위 주장을 SNS에 올렸다.(2)
이는 곧 영국 곳곳에서 발생한 일련의 폭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먼저, 로더럼에서 난민을 수용하는 데 사용된 호텔이 방화 공격의 표적이 되었고, 이제 코스프레 파시스트들이 이슬람 사원과 난민 보호소에 몰려들고 있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4분의 1이 폭동의 원인을 무슬림에게 돌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타머 내각은 이 같은 사태에 권위주의적 수단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경찰의 안면 인식 기술 사용을 확대하는 동시에 새로운 폭력 퇴치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험악해진 사회 분위기… 보수 이미지로 변신하는 노동당
덕분에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지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수백 명의 반(反)인종주의 시위대가 다시 거리로 나서고 있다. 게다가 최근 총선에서 녹색당과 무소속 후보들의 선전은 (지금까지는 제한적이고 지역적인 사례에 불과하지만) 좌파가 현재 나타나고 있는 반동적 경향을 역전시킬 가능성을 보여준다.
좌파는 비록 극우보다 득표수는 적었지만, 웨스트민스터에 더 많은 의석을 확보했고, 수십 개의 다른 선거구도 노리고 있다. 노동당이 보수 이미지로 변신하고 있고 보수당은 개혁을 꿈꾸는 가운데, 이런 흐름에 반대하는 운동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노동당은 새로운 정치적 지형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현재의 상황은 대체로 2015년에 발생한 두 가지 사건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첫 번째 사건은 제러미 코빈이 노동당 지도부에 합류해 국가 의제에 좌파 포퓰리즘이라는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두 번째 사건은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EU 탈퇴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를 결정한 것으로, 투표 결과 영국의 EU 탈퇴가 최종 결정된 것이다. 두 사건 모두 영국에서 정치적 가능성의 영역을 확대했다고 볼 수 있다.
브렉시트, 모호한 정치 반란에 그쳐
코빈주의는 대처 내각 이후 모든 정권이 핑계로 삼은 사회적 부패의 불가피성과 맹목적 애국주의를 비판하면서, 워싱턴으로부터 진정한 자율성을 확보하고 “그린 뉴딜”을 통해 경제 변혁을 이룰 것을 주장했다.
브렉시트는 정치적으로 모호한 반란이었다. 영국의 주권을 되찾겠다는 약속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든, 정책 입안자, 기업 임원 및 전문가들의 재앙 경고에 귀 기울이지 않는 대다수 노동자에게 호소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노동자들은 EU 탈퇴는 순진한 환상이라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암울한 현실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코빈주의는 브렉시트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공격을 받아왔다. 코빈 전 노동당 대표는 이런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기득권층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해야만 했다. 브렉시트로 인해 이미 벌어진 계층 간 분열은 EU 잔류 지지자들이 국민투표 결과를 뒤집으려 하면서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코빈은 브렉시트 관련 혼돈 상황을 계기로 노동당의 강력한 정치적 가능성을 확대하고자 했다. 즉, 영국 국민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브렉시트 찬성투표를 EU의 질서자유주의 조약, 비인도적 이주 정책, 비민주적 구조와 결별할 기회로 규정하고, 자신의 변혁 프로젝트를 대자본, 보수당, 노동당 우파, 보수 언론매체, 국가 등 수많은 현상 유지 옹호자들에 맞설 대안으로 제시할 수도 있었다. 이른바 코빈주의에 담긴 핵심 의도는 브렉시트를 통해 변혁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브렉시트와 변혁이라는 두 프로젝트를 하나로 융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당 지도부는 용기가 부족했다. 노동당 내 EU잔류파가 집단 탈당을 주도할 것을 우려한 지도부는 2016년 브렉시트 관련 투표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2차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하면서 그들을 달래려 했다. 지도부의 이런 행보에 심히 불편함을 느낀 코빈은 인터뷰에서 긴장하고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에게서는 더 이상 호전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보리스 존슨, 포퓰리즘에 스캔들로 얼룩져
2019년 여름, 총리로 당선된 보리스 존슨은 코빈이 잃어버린 포퓰리즘의 에너지를 넘겨받아 자신의 전유물로 독점하려 했다. 보수당을 “국민의 정당”으로 재편한 이튼 출신의 그는 공식 야당, 자유주의 성향의 EU 엘리트들, 편파적인 법원, 심지어 자신이 속한 진영의 특정 의원들까지도 모두 대중의 의지를 방해하는 세력이라며 비난했다.
존슨 총리는 그들의 방해를 물리치기 위해서는 대중이 투표소에 가야 한다며, 투표소에서 대중이 직면하게 될 간단한 선택은 자신에게 투표해 “브렉시트를 완수”할 것인가, 아니면 코빈을 선택해 브렉시트를 되돌리는 위험을 감수할 것인가라며 자신에게 투표할 것을 종용했다. 2019년 12월 총선에서 노동당은 2005년 총선이나 2010년 총선에서보다는 많은 표를 얻었지만, 다른 모든 정당을 합친 것보다 80석 앞선 보수당의 지지율에 맞서지는 못했다.
다우닝가에 입성한 존슨은 브렉시트 캠페인 동안 자신이 무임승차할 수 있었던 항의의 물결을 유지하려 애썼다. 정부는 손발이 묶여 있고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고 주장했던 캐머런 시대의 긴축주의는 분명 끝났다. 이제 국가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이행하거나 적어도 그렇게 하는 척이라도 해야 했다.
그 다음 과제는 분명했다. 국민들의 브렉시트 찬성 원인이 영국 내 지역 격차, 즉 임대수익으로 부를 축적한 남부와 산업 쇠퇴로 황폐해진 북부라는 격차에 있다고 본 존슨 총리는 이를 재분배가 아닌 “레벨링업(levelling up)” 정책, 즉 부유한 지역을 끌어내리지 않고 빈곤한 지역을 지원하는 정책으로 바로잡겠다고 맹세했다. 그런 다음 주요 인프라 프로젝트, 경기 부양 지출, 지역 사회 재생을 논하겠다는 것이 존슨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태산이 울릴 듯 요란했으나 정작 생쥐 한 마리만 나왔다”라는 속담처럼 그 성과는 아주 미미했다. 수년간의 긴축 끝에 레벨링업 펀드의 일환으로 지방 당국에 지급된 8억900만 파운드는 변화를 가져오기에는 충분치 않았다. 존슨의 지역 재균형 계획이 무너지자 보수 언론은 존슨 행정부가 포퓰리즘 사명에 등을 돌리고 점점 방향성을 잃고 있다고 비난했다.
존슨의 이력은 항상 스캔들로 얼룩졌지만, 그가 우익 언론의 지원을 받는 일관된 정치 프로젝트의 최전선에 있어온 덕분에 그의 스캔들 이력은 문제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 같은 정치 프로젝트가 사라지면서 그의 면책특권도 사라졌다. 코로나19로 인한 봉쇄가 절정에 달했을 때 파티를 연 것, 비밀 정치헌금으로 다우닝가 총리 관저를 개조한 것, 핀처 원내 부대표로 임명 시 그의 성추문 사실을 몰랐다고 거짓말한 것 등 일련의 폭로가 터지면서 존슨의 지지율은 급락했다.
위기에 직면한 보수당
2022년 9월 존슨의 치욕적 사임 후 보수당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그들은 지난 선거에서 승리의 견인차가 되어준 포퓰리즘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고, 전통적 유권자를 안심시킬 수 있는 보다 엄격한 관리주의로 전환할 수도 있었다. 리즈 트러스는 전자를 공약으로 내세워 총리로 선출되었다. 트러스는 존슨의 ‘레벨링업’ 정책을 이어가는 대신, 영국이 대공황 이후 이루기 어려웠던 ‘성장’을 정책 기조로 내세웠다.
대대적 부자 감세, 도시 계획 규제의 과감한 완화, 복지 축소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이를 그 악명 높은 “미니 예산”에 반영했다. 그러나 트러스 총리의 아마추어 경제 정책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채권 가격 폭락과 파운드화 가치 폭락으로 나타났다. 결국 트러스 총리는 그 책임을 지고 취임 후 불과 45일 만인 10월 20일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트러스의 후임으로 총리로 취임한 수낙에게는 이 쓰라린 기억을 지우고 보수당을 다시 안정적인 기반 위에 올려놓을 책임이 주어졌다. 새 총리는 불평등을 완화하고 국가 르네상스를 이루겠다는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는 전임자들이 했던 것처럼 야심 찬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보다는, 재정 건전성과 올바른 거버넌스에 초점을 맞춰 행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하지만 수낙 총리는 정치적 분열을 심화시키고 당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려 한 보리스 존슨의 공격적인 정책 기조를 이어받았다. 예를 들어 그가 파업권을 제한하고 망명 신청자들을 르완다로 추방하는 결정을 내린 것 등에서 이 같은 경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전략의 핵심은 자신을 혼란을 수습할 현명한 관리자로 ‘이미지 메이킹’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수낙 전 총리는 스타머 총리의 거울상이었다. 두 사람 다 전임자들과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며 그들을 무모한 이념가로 묘사했다. 또한, 기존 질서를 다시 정당화하면서 2015년부터 시작된 격동의 시기를 마무리하려 했고, 국정 지도자의 윤리 회복을 주장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차이점은 수낙 총리가 그 같은 이미지를 입증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수낙 총리의 임기 내내 비리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내각 장관들의 직원 괴롭힘과 함께 세금 회피 사실이 드러난 데 이어 부유한 보수당 지역에 공공투자가 집중되었으며, 총리는 금융 소득을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 조사까지 받았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2024년 선거를 앞두고 보수당 후보 및 주요 당직자가 내부 정보를 이용해 선거 관련 돈 내기에 참여했다는 의혹인 이른바 ‘베팅 스캔들’이 터졌을 때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3)
노동당 스타머 정부의 당면 과제
반면, 스타머 총리는 아직까지는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의 헤드라인에 등장하지는 않았다. 무미건조한 관료라는 점은 노동당 대표로서 그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덕분에 그는 보수당 정부가 붕괴하는 동안 크게 주목받지 않고 다우닝가에 입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긴급한 개혁이 필요한 현재의 경제 상황을 감안할 때 국민의 호감을 얻으려면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보수당 스캔들이라는 헤드라인 이면에는 분명 보수당이 신뢰를 잃은 근본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2008년 이후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연평균 성장률은 0.25%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같은 기간 실질 소득 감소로 약화된 구매력은 최근 몇 년간 인플레이션과 금리 상승으로 더욱 떨어졌다.
여기에다 유례를 찾기 힘든 생산성 둔화가 나타나고 있고,(4) 공공 서비스는 수십 년간 진행된 시장화와 자금 부족으로 더 이상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이제 국민들은 필수 의료 서비스도 받기 어렵다. 민영화된 교도소는 과밀화 문제를 겪고 있고, 이익만 챙기는 수도회사는 엄청난 양의 폐수를 템스강에 무단 방류했다. 수십 년 전부터 전문가들은 영국의 쇠퇴를 우려했다. 저명한 역사학자 페리 앤더슨은 이런 상황은 “몰락”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5)
좌파가 현 정권의 가짜 안정 정치에 저항 정신으로 맞설 수 있을지는 지켜볼 일이다. 그들은 아마도 적록협약(Red–Green pact)의 일환으로, 기존의 사회운동 조직을 규합하고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새로운 원형 정당 조직을 출범시키려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좌파는 영국 의회의 구식 선거 제도를 민주화할 수 있을 만큼 의회에서 충분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현 단계에서는 아직 요원한 일일 수도 있지만, 좌파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만 봐도 사회를 재구성하려는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스타머주의라는 정치적 바이러스를 거부하는 놀라운 움직임이 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노동당의 선거 승리가 공허하다 할지라도 좌파의 새로운 시도는 아직 정치영역에 희망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글·올리버 이글턴 Oliver Eagleton
<뉴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 편집인, 『스타머 프로젝트(The Starmer Project)』(Verso, 런던, 2022)의 저자
번역·김루치아
번역위원
(1) Yvette Cooper, 「We Can‘t Pretend Everything Is OK: Knife Crime, Anti-Social Behaviour and People Smugglers Are Plaguing Our Streets」, <더 선>, 2024년 7월 20일.
(2) Arthur Parashar & Katherine Lawton, 「Far-Right’s “Hit List” Ahead of More Riots: Thugs Set to Target Immigration Centres, Refugee Shelters and Lawyers’ Homes in 38 Areas of the Country―As Offices Plan to Close and Let Staff WFH amid Threats」, <데일리메일>, 2024년 8월 6일.
(3) Eleni Courea and Matthew Weaver, 「Pressure on Sunak as Betting Scandal Grows」, <가디언>, 2024년 6월 23일.
(4) Nicholas Crafts & Terence C. Mills, 「 Is the UK’s Productivity Slowdown Unprecedented? 」 , <National Institute Economic Review>, 2020년 2월 6일. www.niesr.ac.uk.
(5) Perry Anderson, 「Ukania Perpetua」, <뉴레프트 리뷰>, 2020년 9월-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