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낙인을 두려워하는 프랑스 ‘소외 계층’의 삶

2024-10-31     브누아 코카르 외

“편하게 내 집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는다. 특히 내 요구는 들어주지 않으면서 하라는 것만 많은 정부에는 의지하지 않는다.”

프랑스 농촌 지역의 이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극우세력 국민연합의 농촌 지역 기반이 확대되고 있다. 국민연합은 개인의 능력에 대한 보상만 이뤄진다면 농촌 지역이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확산시키고 있다.

 

프랑스 농촌 지역 서민층이 정부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극우 국민연합이 농촌 지역에서 득세하는 것도 대부분 이로써 설명되고, 도시 밖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좌파 역시 이러한 현실 인식에서부터 시작한다. 경제학자 쥘리아 카제와 토마 피케티는 농촌 서민 계층을 다시 장악하는 것이 “사회・생태 블록 형성을 위한 절대적 우선 과제”라고 지적했으며, 적절한 사회・경제 조치로 이들의 ‘소외감’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1)

언론과 정치권에서 앞다투어 ‘소외감’이란 말을 쓰고 있지만, 이 허울 좋은 표현의 이면에는 과연 어떤 현실이 숨어있을까? 사실 서민층의 생각을 정리해주는 이런 표현들은 조심해서 쓸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른 사회적 여파가 그 어느 때보다 크기 때문이다.

가령 ‘소외된 백인들’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로 ‘문화적 불안감’(2)이란 표현이 제시되었을 때도 정작 이를 써먹은 건 보수 성향의 일부 부르주아 계층이었다. 자신들이 느끼는 정신적 공황을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기 좋은 핑곗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들의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주던 표현이 남발되면서 ‘노란 조끼’ 시위 같은 이례적인 대규모 사회 운동의 내용이 뒤로 묻혔다.

국가 원수의 ‘경멸’과 ‘오만’을 비판하고 ‘존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의지를 표현하며 불공정한 조세 제도의 문제를 지적하는 등(3) 사회경제적 차원의 요구 사항이 쏟아졌음에도 제대로 부각되지 못한 것이다. 이 점에 있어 농촌 지역의 서민층은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의 표현대로 ‘대상화된 계층’(4)의 전형이다. 자신들보다 다른 계층에 의해 더 많이 정의되고 기술된다는 뜻이다. 정치적 행동의 동기를 단순히 ‘소외감’으로 치부하려는 것 역시 동일한 오류를 안고 있다. 설령 이 말이 실제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는 것이라 해도 그러한 현실은 농촌 지역 서민층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시골 지역이 정부의 공공 서비스에서 ‘소외’되었다는 점은 여러 자료에서 확인되지만,(5) 우리의 연구에 따르면 일부 서민 지구나 도시도 상황은 비슷하다. 해당 지역 주민들 또한 (낙후된 농촌 지역과 다름없이) 폐업한 산부인과 건물이나 최근 문 닫은 세무서, 용도가 변경된 복지기금 건물 앞을 지나는 게 일상이다. 산업이 무너진 이들 지역 역시 공장은 문을 닫았고, 작은 상점이나 음식점도 자취를 감췄다. 이곳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너 나 할 것 없이 “예전이 좋았지”라는 말을 내뱉는다. “우리에겐 있어야 할 게 아무 것도 없다”, “정부는 우리를 생각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의 시선이 불편한 복지 급여 수령

그렇다고 극우파에 대한 소외 계층의 지지를 단순히 정부의 부재에 대한 프랑스 서민들의 분노로 일축할 수는 없다. 우선 정부가 이들 지역에 정말로 ‘부재한가’하면 그건 또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와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 건 사실이다. 지난 수십 년간 행정 서비스 간소화와 개혁 작업을 통해 모든 공공 서비스가 대도시로 집중됐고, 관공서가 빠져나간 지역에서는 온라인 행정 서비스나 전자 의료 서비스 등의 방식으로 원격 서비스가 제공됐다. 

관공서 건물이나 직원 등 정부의 물리적인 흔적이 사라진 탓에 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대도시로 나가야만 시청이나 복지 센터 같은 관공서와 공무원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정부와의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지면 사람들의 실생활에서 정부가 차지하는 비중은 외려 더 커진다. 관공서 업무 하나 해결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 시간을 잡아먹는가 하면 집안 곳곳에 포스트잇의 형태로 정부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작성해야 할 서류들도 곳곳에 산더미처럼 쌓인다. 

사실 정부 권력은 공공 기관의 담벼락 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부는 원거리에서도 국민을 ‘관리’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단 국민들의 생활 공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그 업무 또한 서민층의 일상적인 생활 패턴과도 동떨어져 있다. 온라인 행정 서비스도 그중 하나다. 

 

‘지역 격차’ 뒤에 숨어있는 ‘지배 메커니즘’

정부가 관공서 업무를 전자 행정으로 돌림으로써 디지털 격차는 심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상징적인 폭력까지 행사된다. 더욱이 공공 기관이 온통 도시로 집중된 탓에 사람들은 평소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 도시로 ‘상경’해야 했고, 예약 시스템이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는 이를 위한 별도의 시간 안배까지 필요해졌다. 취약 계층이나 임시직 노동자처럼 생활 여건상 앞일을 계획하기 힘든 사람들에겐 더욱 난감한 상황이다. 

따라서 정부에 무언가를 요청하려면 보다 전문적인 역량이 요구되고, 아니면 권리 행사를 하는 게 아예 불가능한 수준으로 서민층을 끌어내려야 한다. 문제는 정부가 농촌 지역을 외면한다는 게 아니라 ‘지역 격차’라는 연막 뒤로 ‘지배 메커니즘’이 숨어있다는 점이다.

도시라고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지역에서 관공서가 사라지는 건 지리적 차원의 문제라기보다 기본적으로 사회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약 특정 지역에서 제대로 된 공공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는다면, 이는 그 지역이 낙후된 시골이라서가 아니라 그곳 주민들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일부 대도시나 교외 지역에서 관공서가 사라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농촌 지역과 마찬가지로 “정부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 “우리에겐 있어야 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들려온다. 그러므로 ‘소외감’이라는 관점에서 오로지 농촌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상식적인 진단을 내리기가 힘들다. 더욱이 낙후된 농촌 지역의 현실은 도시 외곽의 서민 지구와 비슷하고, 살기 좋은 시골 부촌은 외려 대도심의 상황에 더 가깝다. 

낙후된 농촌 지역과 도심 교외 지역은 정치적 담론에서 서로 대비되어 나타날 때가 많은데, 두 지역 모두 탈산업화를 겪으며 앞길이 막막한 청년들이 늘어나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들 지역 청년들이 쉽게 정부에 손을 내밀지는 않는다. 

 

무시 받는 듯한 느낌이 극우세력의 외국인 혐오와 연대

이 또한 잠재적인 주홍 글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일자리가 없다는 건 그 지역의 고질적인 문제고, 실업자로 등록되면 취약 계층이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 즉, 복지 급여 수급자라는 꼬리표가 붙는 것이다. 따라서 청년들은 차라리 1인 사업자 지위를 더 선호한다. 취약한 상황은 마찬가지지만 적어도 ‘일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가까워지며 수급자라는 부정적인 지위와 거리를 둘 수 있기 때문이다.(6)

따라서 문제는 ‘소외’가 아니다. 그보다는 정부 자원이 근본적으로 불평등하게 편중됐다는 게 문제다. 공공 서비스라는 특별한 희소 자원을 유치 혹은 유지함에 있어 일부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더 경쟁에서 유리한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러한 현실에 분노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 맨 선봉에 선 게 서민층은 아니다. 

도시에 맞선 시골 사람들의 분노를 앞에서 이끌며 싸우는 사람들은 자신의 생활 터전이 매력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득이 되는 사람들, 그리고 아직 잃을 게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주로 지역 유지들이 이에 해당하는데, 정치적으로 우익 성향을 띄는 이들은 스스로의 크고 작은 특권이 사라지지 않을까 염려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낀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에 반해 서민층은 이들만큼 뚜렷하게 요구 사항을 내걸지는 않는 편이다. 대부분은 더 이상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솜강 유역의 한 공장에서 일했던 직원 한 명도 “여기가 이미 지옥”이라고 말했다. 경제적 이유로 해고된 그는 여러 임시직을 전전하며 지냈고, 일터까지는 항상 스쿠터를 타고 45분 정도 가야 했다. 직장까지 제시간에 도착하게 해주던 철도 노선이 사라진 탓이다.

그는 “기차를 포함해 더는 이곳에 남아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서 정부의 공공 서비스로부터 자신이 배제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부에 무언가를 기대하진 않았다. 정부에 손을 내밀었을 때마다 “일이 잘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 계층 서열이 낮아질수록 자신의 권리를 찾을 기회는 더 적어진다. 

완벽한 자격 여건이 되지 않는 사람들, 행정 언어나 절차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공공 임대주택에 들어가거나 정부 수당을 받는 일은 거의 전쟁에 가깝다. 게다가 이러한 권리 행사를 할 수 있게 되더라도 그 진정성을 의심받기 일쑤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이 허위 신청을 한 것으로 오해받고 과잉 감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7) 

학생 시절처럼 괜히 무시되는 듯한 이 언짢은 경험들은 극우파의 외국인 혐오 논리에 힘을 실어준다. “차라리 이민자였다면 상황이 더 나았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곤란한 상황을 겪을 때마다 사람들은 정부와 그 제도를 탓하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이민자에게 화살을 돌린다. 따라서 자신이 챙겨야 할 권리는 제대로 챙기지 않은 채 정부 지원 수급자를 희생양으로 삼으며, 아울러 자신은 이들과 다르다는 듯 선을 긋는다. 

 

사회적 낙인에서 벗어나려고 극우 논리에 동조

모두가 알고 지내는 마을에서 복지 급여를 받는다면 그에 따른 사회적 낙인이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민자나 수급자 같은 사회 취약층 사이를 갈라놓는 극우의 분열 화법은 취약한 서민층과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서민층 사이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자유주의식 노동 시장 개혁을 기반으로 제 기능을 톡톡히 수행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극우파는–경제적 실패에도 불구하고–‘최소한의 불행’ 논리를 무기로 내세운다. 내 뒤에 더 낮은 사회 계층이 있으며, 정부 시스템상에서 이들이 나보다 더 타깃이 되고 불리한 존재이길 바라게끔 만드는 것이다. 농촌 서민층 사이에서 “우리가 먼저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프랑스인이 먼저다”라는 극우의 오랜 논리와 닮아있는 이러한 운동 방향은 생활 수준이 취약할수록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근근이 살아간다’는 ‘더러운 오명’을 쓰기보다 차라리 극우 논리에 동조하며 불명예스러운 사회적 낙인을 떨쳐내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서민층이 정부와 맺고 있는 관계는 꽤 모호하며, 이를 ‘소외감’이란 표현만으로는 설명하긴 힘들다. 불법 노동과 관련한 대화 중 농촌 지역의 두 청년 노동자가 우스갯소리로 “여기는 바다 없는 섬”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편하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정부 명령은 따르지 않다 보니 정부와 동떨어져 자기 힘으로 알아서 살아가며 개인의 능력을 기반으로 성공한 사람이라는 자기 확신을 갖게 된다는 말이었다. 

 

이 정부는 나와 맞지 않는 사회 모델 

소외 지역의 노란 조끼 시위대는 운동 초반부터 ‘진짜 오염의 주범’인 “부자들에게 세금을 물리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자신들은 “그냥 가만히 내버려 달라”고 요구했다. 톨게이트에서는 부득이하게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주민들의 원성이 쏟아지는데, 예전만 해도 회사나 관공서가 모두 근처에 있어서 어디든 자전거로 다닐 수 있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다 멀기만 하다는 것이다. 

작은 건설 회사나 공장, 혹은 노인들 집에서 재택으로 일하던 농촌 지역 노동자들이 바라던 것은 사실 역내(域內)에 TGV 노선 같은 걸 설치해달라는 게 아니었다. 이런 건 지방의 돈 많은 사람들이나 하던 요구다. 이 지역의 노란 조끼 시위대가 원한 것은 줄어들지 않는 집과 직장 사이의 먼 거리를, 그리고 자신들과 정부 당국 사이의 먼 거리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복잡한 행정 절차 같은 것을 거치지 않고 도로에서도 속도위반으로 벌금을 물지 않는 것, 연료비의 급등으로 살림살이가 어려워지고 가뜩이나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게 힘들어진 상황에서 탄소세 같은 환경세를 물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이들이 바라는 바다. 

아울러 우리가 만나본 농촌 지역 노동자들은 정부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있지는 않았다. 간혹 생활이 안정되는 경우, 정부의 복지 혜택 같은 것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지 상황이나 시대적 분위기로 인해 사람들은 주변의 가족이나 친구들, 특히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의 생각에 쉬이 동조하게 된다. 

농촌 지역에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문직 종사자의 입김도 무시할 수 없는데, 이들이 “남들 낼 돈을 다 우리가 내고 있다”라거나 정부가 수입을 “훔쳐간다”고 거듭 반복하면 다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버린다. 남부끄럽지 않게 일하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려면, 아니 최소한 수급자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이렇듯 주변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 말에 얹혀가는 게 하나의 방법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부가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 극우 편에 서서 목소리를 내면 정부 지원 없이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여력까지 과시할 수 있다. 따라서 도시화를 부추긴 정부는 무조건 나와 맞지 않는 사회 모델로 깎아내려질 수밖에 없다. 

 

 

글·브누아 코카르 Benoît Coquard & 클라라 드빌 Clara Deville
프랑스 국립 농업식량환경연구소 소속 사회학자. 디종 농촌 및 농업 지역 응용 사회경제학 센터 구성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 『Une histoire du conflit politique. Elections et inégalités sociales en France, 1789-2022 정치분쟁사 : 1789~2022년 프랑스의 선거와 사회적 불평등』, Seuil, Paris, 2023.
(2) 로랑 부베가 공론화 자리에서 주로 내세운 개념. Cf. 『L’Insécurité culturelle 문화적 불안감』, Fayard, Paris, 2015.
(3) 고충민원서에 대한 연구원 및 시민 모임, 「Les cahiers de la colère ‘노란 조끼’가 남긴 흔적, 분노한 민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2년 6월호, 한국어판, 2022년 7월호.
(4) Pierre Bourdieu, 「Une classe objet 대상화된 계층」, <Actes de la recherche en sciences sociales>, no 17-18, Paris, 1977년 11월.
(5) Cf. Thibault Courcelle, Ygal Fijalkow & Thomas Taulelle, 『Egalité, accessibilité, solidarité : les renoncements de l’Etat. Services publics et territoires ruraux 평등, 접근성, 연대–국가의 포기. 정부가 버린 농촌 지역과 공공 서비스』, Le Bord de l’eau, Lormont, 2024.
(6) Sarah Abdelnour, 『Moi, petite entreprise. Les auto-entrepreneurs, de l’utopie à la réalité 1인 기업의 환상과 현실』,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Paris, 2017.
(7) Vincent Dubois, 『Contrôler les assistés. Genèses et usages d’un mot d’ordre 복지급여 수급자에 대한 통제–그 유래와 관행』, Raisons d’agir, Paris,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