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어떻게 유럽의 인기 실버타운이 되었나
“연중 300일 햇볕이 내리쬐니 더 바랄 것이 없다.”
“알리칸테의 프랑스인(혹은 독일인, 영국인)처럼 행복하다”라는 표현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스페인 코스타 블랑카, 그리스, 포르투갈에서 은퇴 후 삶을 보내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다. 유럽 은퇴자들은 남유럽의 따뜻한 태양을 즐기며 더 적은 돈으로 더 평온한 삶을 누린다. 하지만 외국인 유입으로 스페인 부동산 가격은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에 반해 스페인 현지 주민들은 살 곳을 찾아 헤매고 환경오염은 나날이 나빠지고 있다.
지중해 코스타 블랑카 해변 뒤로 솟아오른 베나칸틸산의 산타 바바라성에 장밋빛 석양이 드리운다. 3월치고는 너무 더운 바람이 스페인 17개 자치주 중 하나인 발렌시아주에 속한 인구 33만 명의 해안 도시 알리칸테의 거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나무가 우거진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패스트푸드점 2층에서 프랑스어가 들린다. 2022년부터 매주 목요일 이곳에서 열리는 프랑스어 사용자 친목 행사 ‘아페로 프랑코폰(apéro francophone)’에 참석한 20여 명의 부부 또는 독신 은퇴자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행사를 통해 친분을 쌓은 이들은 겨울 동안 혹은 연중 내내 코스타 블랑카에 거주하는 프랑스, 스위스, 캐나다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알리칸테에 연고가 없다. 프랑스 릴 출신 전직 산업 디자이너인 71세 피에르(1)는 “기후와 평온한 삶” 때문에 이곳을 선택했다. “연중 300일 햇볕이 내리쬐고 스페인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다. 더 바랄 것이 없다. 아직 은퇴 전인 프랑스 친구들은 이곳에 올 날만을 기다린다.”
발렌시아주에는 연중 2만 명의 프랑스인이 거주하며 이 중 60세 이상이 1/3 이상을 차지한다.(2) 총 16만 1,000명의 프랑스 기본연금 수령자가 스페인 전역에 거주한다. 정식으로 거주지를 이전하지 않고 겨울철에만 머물다 가는 이들도 수천 명에 달한다. 스페인과 프랑스 언론은 이들을 철새에 빗대어 “제비”로 부른다.
날이 갈수록 성황을 누리는 모임 ‘아페로 프랑코폰’을 시작한 피에르는 “새로운 얼굴이 자주 등장한다”라고 설명했다. 피에르가 2년 전 페이스북을 통해 이 모임을 시작한 이유는 “프랑스어 사용자들 간 인맥을 형성하고, 만남의 장을 제공하고, 유용한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서다.
피에르는 자신은 카스티야어를 배우고 있지만 “다른 프랑스인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라고 아쉬워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프랑스 노인들은 해변가의 저렴한 레스토랑, 산 중턱의 스파, 유명 관광지인 알리칸테의 자연공원에서 즐길 수 있는 하이킹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마르세유의 한 병원에서 IT 관리자로 일하다 은퇴한 릴리안은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고 흥미로운 문화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평온한 국제도시”에 혼자 정착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알리칸테 도심에 위치한 박물관들은 로마, 페니키아, 무어 문명을 거친 지중해 연안의 역사를 보여준다. 산타크루스 지구는 특유의 흰색 건물들의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라 람블라가(街)의 관광객들은 타파스(스페인 요리에서 간식의 일종—역주)를 즐긴다. 휴양지를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릴리안은 “오랫동안 해외 이주를 꿈꿨지만 일과 아이들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했다”라고 털어놨다. 알리칸테는 릴리안의 친지들도 쉽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파리에서 2시간 거리의 알리칸테 공항에는 항상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이 국제공항의 운항 편수는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릴리안은 “일자리 부족으로 프랑스의 빈곤, 치안, 생활 수준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는 것을 지켜봤다. 이러한 상황은 삶을 옥죈다”라고 덧붙였다. 피에르가 알리칸테를 선택한 이유 역시 치안이 큰 몫을 했다.
피에르는 “밤늦은 시간에도 아무 걱정 없이 혼자 걸어서 집에 갈 수 있다. 파리에 살 때는 지하철에서 강도를 당한 적도 있다. 나는 더 이상 파리로 돌아가지 않는다”라고 설명하며 “점점 더 악화되는” 프랑스의 상황을 한탄했다. “아이들이 마약을 놓고 난투극을 벌이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알리칸테도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다. 하지만 프랑스와는 분위기가 다르다.”
“스페인은 진정한 다인종 국가.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며 살아”
릴리안과 피에르를 비롯한 일부의 왜곡된 시각일까? 다른 은퇴자들 역시 “지금보다 살기 좋았던 예전” 프랑스에 대한 향수를 털어놓았다. “얼마 되지 않는” 연금을 수령하며 알리칸테의 서민 거주 지구에 살고 있는 81세의 에메 브룅은 “스페인은 진정한 다인종 국가다. 외국인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스페인 사회에 동화된다.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존중하며 함께 살아간다”라고 평가했다.
본토로 귀환한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 2세인 브룅은 알리칸테에서 피에 누아르(pieds-noirs, 프랑스 식민지 시절 알제리에 정착해 살았던 유럽계 백인—역주) 후손들과 재회했다. 1962년 본토로 귀환한 약 3만 5,000명의 알제리 출신 프랑스인이 알리칸테 지역에 정착했다. 알리칸테에서는 피에 누아르 단체들이 여전히 활동 중이다.
기업을 운영하다 은퇴한 브룅은 프랑스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10년 정도 지나면 의료상의 문제로 프랑스로 돌아가는 프랑스인의 수도 적지 않다. 하지만 브룅은 스페인의 의료 체계를 신뢰한다. “이곳의 의료 체계는 평판이 좋다. 병원에 며칠 입원한 적이 있는데 치료비를 문제없이 환급받았다.”(3)
주민 고령화에 비해 부족한 스페인 의사들
스페인의 의료 역량은 지역별로 차이가 크다. 하지만 2022년 스페인 보건부 발표에 따르면 2027년 전국적으로 9,000명의 의사가 부족해질 전망이다. 저임금에 시달리는 의료 인력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기 때문이다.(4) 발렌시아주 역시 주민 고령화로 “매우 큰 난관”에 직면했음을 인정한다.
세계보건기구(WHO)는 공립 양로원 수용 능력을 65세 이상 인구 100명당 5명으로 권고한다. 이에 비교하면 발렌시아주의 수용 능력은 2만 3,000명 부족한 상태로 스페인 전 지역 중 최하위권에 속한다. 발렌시아주 당국 역시 이 사실을 인정한다.
스페인 전체 65세 이상 인구는 950만 명으로 2050년에는 1,600만 명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이들이 수령하는 연금은 편차가 매우 크지만 프랑스와 비교해 평균적으로 낮은 수준이다. 스페인 중부에 거주하는 은퇴 교수 마르틴 루이스는 “어려움이 있지만 경제적인 이유로 가족을 떠나 해외 이주를 꿈꾸는 스페인 노인은 거의 없다”라고 설명했다.
스페인은 프랑스인들이 선호하는 나라 3위
반면 해외에서의 노후를 꿈꾸는 프랑스인의 수는 점점 늘고 있다. 현재 프랑스 기본연금 수령자 1,530만 명 중 1,100만 명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다. 이는 30년 전보다 5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고령 인구 증가 역시 이러한 추세의 요인 중 하나다.
2003년 대비 64세 이상 인구는 46% 이상 증가한 반면 프랑스 전체 인구(6,800만 명)는 훨씬 더 완만한 속도로 증가했다.(5) 해외로 이주하는 은퇴자 수는 계속 빠르게 증가하다 2013년 이후 다소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스페인 이주 은퇴자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스페인은 포르투갈, 알제리에 이어 은퇴한 프랑스인이 3번째로 선호하는 나라다.
남유럽 국가에게 외국인 은퇴자 유치는 고수익을 보장하는 사업이다. 지난 10년간 남유럽 국가의 경제는 잦은 긴축 정책에 시달렸다. 따라서 이들 국가는 자국민보다 높은 구매력을 보유하고 따뜻한 태양을 꿈꾸는 외국인 은퇴자의 이주 열풍에 편승해 서로 이들을 유치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2022년, 그리스는 은퇴한 부부의 얼굴과 “다시 ‘20’으로 돌아가고 싶나요?”라는 슬로건을 내건 홍보 캠페인을 펼쳤다.
그리스의 겨울 평균 기온 20°C를 20대 청춘에 빗댄 전략이다. 포르투갈은 매력적인 세제를 내세웠다. 유럽연합(EU) 규정에 따르면 솅겐(Schengen)조약 가입국에 6개월 이상 거주 시 의무적으로 세금을 내야 한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외국인 거주자에게 10년간 세금 면제를 보장했다. 덕분에 포르투갈은 많은 고령자와 재택근무자를 유치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부유층 유입 증가로 포르투갈은 2014년 외국인에 대한 세제 혜택을 폐지했다.
스페인의 국세는 프랑스보다 높기 때문에 스페인 거주지에서 불법으로 6개월 이상 거주하는 프랑스 연금 수령자들도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를 오가며 거주하는 경우는 매우 흔하다. 프랑스어 사용자 대상 부동산 중개업체 ‘스페인 부동산 매입(J’achète en Espagne)’ 창립자 토마 루에는 “여력이 되는 사람들은 스페인과 프랑스에 모두 거주지를 두고 오가면서 세금은 프랑스에 낸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탈세자의 정확한 수는 알 수 없다. 신규 이민자 정착을 돕는 웹사이트 중 하나인 ‘국경 없는 은퇴자(Retraite sans frontières)’를 개설한 폴 델라우트르는 “이민의 주원인은 기후가 아니라 구매력이다. 프랑스 은퇴자들은 연금 수령액은 적은데 세금은 계속 인상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은 은퇴 후 적절한 수준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민을 선택한다”라고 분석했다. 은퇴 후 해외에서 보내는 노후는 오랫동안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이제 보다 적은 예산으로도 실현 가능한 노후대책이 됐다.
자녀가 없는 67세 독신 브리지트 루지에는 스페인에서 노년을 보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보르도 소재 럼주 공장에서 일했던 그녀는 은퇴 후 1,500유로의 연금을 받고 있다. 33년간 공장에서 일한 탓에 팔과 손이 불편한 루지에는 “오른쪽 팔은 완전히 망가졌다”라고 탄식했다.
“프랑스와는 이제 끝이다! 돌아가지 않을 계획”
프랑스 서부 샤량트 출신 루지에는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한 후 이동식 주택을 구매했다가 5년 전 “무작정” 코스타 블랑카로 왔다. “한 프랑스인 부부를 알고 있는 친구들이 이곳으로 오라고 조언했다. 당시 건강도 좋지 않았고 막 반려견을 떠나보낸 후라 떠나기가 조금 겁이 났다. 이곳에 아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하지만 루지에는 후회하지 않는다. “프랑스와는 이제 끝이다! 돌아가지 않을 계획이다. 이곳 생활에 만족한다. 보르도에 살 때는 항상 옷차림, 헤어스타일, 외모로 평가받아서 불편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친절하고 겉모습에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루지에는 “여유로운 생활”을 중시한다. “일주일에 한 번은 외식을 한다. 매일 아쿠아로빅 수업도 듣는다.” “겨울에도 난방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에너지 비용이 줄어들었다. 그녀는 전기 자전거를 타고 내륙 마을의 시장에서 장을 본다.
“멜론 3개가 1유로다. 2유로면 체리 1kg을 살 수 있다!”
이 채소나 과일들은 인근 마을이나 ‘유럽의 채소밭’으로 불리는 집약농업 지역 무르시아주에서 재배된 것이다. 무르시아의 황야는 타호강에서 농업용수를 끌어오는 온실 재배가 성행하는 농업지역으로 발전했다. 루지에는 “6유로면 일주일 치 채소를 살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고국에서의 식습관을 유지하길 원하는 외국인은 외국계 식품 체인점에서 다양한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알리칸테에는 독일계 체인 알디(Aldi), 리들(Lidl), 영국계 체인 오버시즈(Overseas), 프랑스계 체인 오샹(Auchan), 까르푸(Carrefour)등 다양한 외국계 식품 체인이 영업 중이다.
찬란한 햇빛이 쏟아지는 이 해안마을을 선호하는 것은 프랑스 은퇴자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루지에는 매일 다른 “기리스(guiris, 타 유럽 주민을 뜻하는 스페인어 속어)”를 마주친다. 인구 520만 명의 발렌시아주에 거주하는 외국인 수는 25년 전보다 8배 이상 증가한 80여만 명에 달한다.(6) 특히 EU 출신 중 가장 수가 많은 영국인은 발렌시아주 뿐만 아니라 스페인 전역에 대규모로 거주하고 있다.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인은 수십 년 전 태양을 쫓아 스페인으로 온 최초의 유럽 은퇴자들이다.
해안 도로를 따라 치과, 개인병원 (영어) 광고판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고령자를 위한 주거지 ‘시니어 리빙(Senior Living)’ 주민도 여럿 눈에 띈다. 노르웨이인이 많이 거주하는 마을 알파스 델 피에는 창밖으로 바다와 시에라 엘라다(얼음 산맥)의 짙은 녹음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단지 ‘더 컴(The Comm)’이 있다.
주로 북유럽 출신인 300여 명의 주민들은 이 65세 이상 전용 아파트에서 수영장, 정성스럽게 손질된 정원, 체육관, 고급 레스토랑을 즐기며 살고 있다. 이곳의 최소 임대 기간은 20년이며 초기 매입 가격은 12만 5,000유로였다. 발코니 아래에서는 굴삭기가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땅을 파 엎고 있다. 분양이 완료된 ‘더 컴’은 지금도 계속 지어지고 있으며 입주민 수는 곧 492세대에 달할 예정이다.
‘더 컴’과 같은 호화 주거단지뿐만 아니라 저렴한 가격의 매력적인 부동산 시장 역시 프랑스 은퇴자의 스페인 이주를 부추기는 요소다. 루지에는 바닷가 소나무 공원 근처 “정원이 딸린”(그녀는 이 점을 특히 강조했다) 집에 3년째 살고 있다. ‘라 마리나(La Marina)’라는 이름의 주택 단지에 위치한 이 집의 임대료는 월 450유로다.
길을 따라 늘어선 흰색 주택들에는 대부분 수영장이 딸려있다. 이곳에서 프랑스 친구들을 사귄 루지에는 “프랑스인 입주민 수는 점점 늘고 있다. 우리는 함께 점심을 먹고 페탕크(쇠로 된 공을 교대로 굴리면서 표적을 맞히는 프랑스 남부지방의 놀이—역주) 게임을 하며 세월이 가는 줄 모르게 지내고 있다”라며 만족감을 표했다.
루지에와 친구들은 프랑스 정치 이야기는 피한다. “정치 이야기는 짜증난다. 그저 내 삶을 즐기고 싶다.” 카스티야어를 배우기 시작한 루지에는 “노력은 하고 있지만 정말 어렵다. 내 나이가 되면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다. 어느 정도 알아듣기는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이 속사포처럼 빨리 말하면 전혀 못 알아듣는다”라고 웃으며 말했다.
‘라 마리나’의 거리는 유명 예술가나 유럽 수도의 이름이 붙여져 있어 기억하기가 쉽다. 연중 7,000명이 이 단지에 거주하며 이중 상당수가 외국인이다. 구도심과 야자수가 심어진 광장에 주민 3,000명이 거주하는 산 풀겐시오에 속한 ‘라 마리나’는 이 마을보다 더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은퇴후 파리 교외 대신, 발렌시아로 이주를 선택
66세 도미니크 콩보와 그의 아내인 63세 크리스틴 파스키에는 모두 전직 공무원으로 은퇴 후 파리 교외 대신 ‘라 마리나’를 선택했다. 두 사람은 3년 전 7만 5,000유로에 집을 구매했다. 라 마리나 인근 한 부동산 중개인에 따르면 알리칸테의 부동산 가격은 프랑스 튈과 비슷한 수준으로 1㎡당 2,000유로가 조금 넘는다. 코스타 블랑카 일부 마을의 부동산 가격은 하락하고 있다.
콩보는 “스마트폰 번역 앱을 사용하면 레스토랑에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라고 만족스러워했다. 기술 덕분에 그는 프랑스와도 계속 연락을 유지하고 있다. 무료 메신저 애플리케이션과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가족 및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프랑스 TV도 시청”할 수 있다.
스페인에서는 코스타 블랑카의 육지와 해안선을 잠식하는 ‘라 마리나’와 같은 주택 밀집 단지를 신흥 주택지(urbanización)로 부른다. 빠른 속도로 늘고 있는 신흥 주택지는 거의 동일한 형태로 지어진 별장으로 구성된 소규모 교외 주거단지로 학교, 도서관 등의 공공시설이 거의 없는 곳도 있다. 여름철 ‘라 마리나’는 다양한 곳에서 온 모든 남녀노소 관광객으로 붐빈다.
겨울이 되면 주로 노인들만 남는다. 산 풀겐시오의 관광 담당 시의원 파울리노 에레로는 “앞으로 더 많은 은퇴 외국인을 유치할 수 있길 희망한다”라고 밝혔다. 산 풀겐시오는 거동이 불편한 고령 인구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휠체어가 다닐 수 있도록 인도 폭을 넓혔으며 차량 운행 속도를 시속 30km로 제한했다. 평온한 생활환경도 조성했다.
이 주택단지들은 프랑코 독재 시절(1936~1975)인 1960년대부터 변화하는 농업지역에 휴가객을 유치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스페인이 부동산 열풍에 휩싸였던 1990년대 말 급속도로 증가했다. 2000년에는 지금의 5배에 달하는 55만 건의 건축 허가가 발급되기도 했다.(7) 이 주택단지들은 또한 스페인 ‘베이비붐’ 세대의 주택 마련을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지역 의회는 부동산 개발업자들과 담합해 과도한 건설공사를 묵인했다. 2003~2011년 발렌시아 주지사 프란시스코 캄스에 따르면 “(주도)발렌시아를 세계에 알리려는” 현지 우파 정치 엘리트들도 이를 장려했다. 공사비 일부를 공공 자금으로 조달한 대형 건설공사의 사업비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완공에 3년이 걸린 카스테욘 데 라 플라나 공항 건설비는 1억 5,000만 유로에 달했다.
주택 매입하는 외국인들 늘어난 반면, 스페인 주민들은 살 곳 찾기 힘들어져
3억 유로가 투입된 알리칸테의 영화 촬영 단지 시우다드 데 라 루스(Ciudad de la Luz), 시우다드 델 시네(Ciudad del Cine)는 불법 지원금 수령으로 2012년 EU로부터 폐쇄 명령을 받았으며 이후 부분적으로 재개장했다. 이처럼 상식을 벗어난 지역 경영은 2008년 부동산 거품이 꺼지면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빚더미에 앉은 이 지역은 2012년 긴축 정책을 시행했고 그 피해는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발렌시아주 도로 모퉁이에 폐허로 남아있는 주택 단지들은 이 위기 사태의 잔재로 부동산 붐이 끝난 후 부동산 개발업자들의 몰락을 상기시켜준다. 2018년, 한동안 발길을 끊었던 외국인 매수자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부동산 시장은 활기를 되찾았다. 2023년 스페인에서 체결된 주택 매매 계약의 19.3%는 헐값에 주택을 구입한 외국인 매수자가 차지했다. 이는 거의 역대 최고 비중으로 2007년 7.1% 대비 큰 폭으로 증가한 수치다.(8)
부동산 시장은 활기를 되찾았지만 대가가 뒤따랐다. 부동산 중개인 토마 루에는 “부동산 가격이 상승하고 있다. 젊은 학생과 스페인 주민이 살 곳을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졌다. 특히 알리칸테의 부동산 평균 매입 가격은 2022~2023년 7% 상승했다. 2000년대 열풍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계속 주택을 짓고 있다. 구매자의 평균 연령은 50~55세이며 평균 거주 기간은 7년으로 길지 않다. 개인적인 이유로 이사를 하거나 거주 중 사망하는 경우도 있다”라고 설명했다.
마요 데후앙비가레이 알리칸테 대학교 마케팅학 교수는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고 북아메리카 출신이 새롭게 유입되면서 다른 문제점도 생겨날 것으로 예측했다. “신흥 주택지 대부분은 애초에 중상류층 외국인을 위해 지어졌다. 서구인을 위한 요새로 설계된 이 주택 단지의 주민들은 선거 및 지역 활동 참여도가 낮다. 상시 거주자 부족은 지역 공동체 및 네트워크 발전을 방해할 수도 있다.”
베니돔은 외국인을 위해 설계된 도시의 첫 번째 사례다. 38㎢ 면적의 이 도시는 런던, 밀라노 다음으로 고층건물 밀집도가 높다. 베니돔의 화려한 건축물의 정점은 외관이 황금빛 창문으로 둘러싸인 에디시오 인템포 빌딩이다. 높이 192m의 이 아치형 고층빌딩은 미래 지향적 스타일과 저속한 휴양지 스타일이라는 평가가 동시에 존재한다. 작은 어촌 마을이었던 베니돔은 1950~1967년 시장을 지낸 페드로 사라고사 오르츠가 추진한 외국인 유치 사업으로 25년 만에 대량 관광 도시로 탈바꿈했다.
오르츠 시장은 유럽 전역을 돌며 외국인 노동자 계층을 상대로 항공편, 호텔, 식사가 포함된 ‘올 인클루시브(all inclusive)’ 관광 상품을 홍보했다. 2023년 알리칸테 지방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인민당(PP) 소속 안토니오 페레스 베니드롬 시장은 프랑코 정권이 한창일 당시 가장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들의 해변을 비키니 관광객으로 채운 오르츠 시장에 감탄했다.
여전히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리는 베니돔은 계속 건물을 짓고 있다. ‘수직 생태계’를 주장하는 시 당국은 “고층건물은 단독 주택보다 오염을 적게 유발한다. 예를 들어 400명의 입주민이 하나의 수영장을 공유한다”라고 설명하며 고층건물을 옹호했다. 8월이 되면 비치 타월이 모래사장을 뒤덮고 40만 명이 도시를 공유한다. 현지 주민들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취한 관광객을 곳곳에서 마주친다. 대부분은 외국인 관광객으로 현지인들은 이들의 행태를 “음주 관광(turismo de borrachera)”으로 비난한다.
겨울이 되면 주민 수는 7만 2,000명으로 줄어든다. 이 중 수만 명은 단기 체류 노인들이다. 마이클 잭슨 음악이 흘러나오는 술집 앞 부두의 보행자들은 은퇴자들이 모는 사륜 전동 스쿠터를 피해 다닌다. 도시 곳곳에 스쿠터 대여소가 있다. 페레스 시장은 “시의 모든 공공건물에 자동문을 설치하고, 도로에는 음향 및 전동 신호등을 설치하고, 3개 국어로 된 오디오 가이드를 제작해 배포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태양을 쫓아온 은퇴자들, 무더위를 피해야 하는 아이러니
“이동성 향상 투자”로 베니드롬에 많이 거주하는 영국 은퇴자의 삶은 더욱 편리해질 것이다. 영국에서는 베니드롬의 이름을 딴 시트콤이 나올 정도로 이곳 해안 리조트의 인기가 높다. 곧 은퇴를 앞둔 영국 여행사 직원 제프 가틀랜드는 “많은 영국인이 은퇴 전에는 휴가를, 은퇴 후에 노년을 이곳에서 보낸다”라고 설명했다.
아일랜드 수호성인을 기념하는 성 패트릭의 날을 앞두고 녹색 깃발로 장식된 ‘타파스 앨리(Tapas Alley)’에서 만난 그는 왁자지껄한 거리에서 소리치듯 말했다. 이 거리의 스페인 이름은 ‘칼레 데 로스 바스코스’이다. 가틀랜드는 “대로와 거리 이름을 영어로 바꿔 훨씬 찾기 쉽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모두가 영어를 한다”라고 설명하며 2020년 영국 브렉시트 이후 “영국 계절 노동자들”의 방문에 제약이 생긴 것을 아쉬워했다. 예전만큼 꾸준하진 않지만 그래도 은퇴한 영국인들은 계속 베니드롬을 찾고 있다. 가틀랜드는 “스페인 법이 바뀌어 3개월 이상 연속 체류가 가능했으면 좋겠다. 관광객이 지역 경제에 기여하는 바는 크다”라고 덧붙였다.
발렌시아주 당국은 지역 경제의 원동력인 연중 관광 활성화를 반기고 있다. 발렌시아주 정부 산업관광 장관인 인민당 소속 누리아 몬테스는 “관광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건설 및 서비스 분야 일자리를 창출해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한다. 외국인 주민이 창출하는 문화적 다양성은 우리 지역 사회를 풍요롭게 한다”라고 자부했다.
심각한 환경오염을 일으키는 관광 산업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다. 스페인은 심각한 물 부족을 겪고 있다. 카탈루냐를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는 지난 3년간 비가 거의 또는 전혀 내리지 않았다. 스페인 그린피스의 훌리오 바레아는 “발렌시아주의 물 부족은 심각한 단계는 아니지만 관광객 유입으로 물 소비가 계속 증가하는 반면 수자원은 점점 고갈되고 있다”라고 경고하며 “지역 주민 대부분이 관광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에 물 부족에 항의하는 주민은 거의 없다”라고 유감을 표했다.
외국인을 상대로 환경문제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것은 어려운 과제다. 바레아는 “요즘 주민들은 환경문제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다. 국적에 따라 환경문제에 대한 인식 수준이 다르다”라고 설명하며 지역 당국의 역할이 크지만 이들의 결정은 모범을 보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덧붙였다.
“계속 건물을 짓고 있다. 이미 위험 수준을 넘어섰다. 고급 아파트를 짓느라 땅과 산은 황폐해졌다. 절벽이나 자연보호지역에 지어진 아파트도 있다.” 부동산 중개인 루에 역시 이에 동의했다.
“부동산을 구매하는 외국인은 환경 문제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대규모 주택 건설은 온난화도 악화시킨다. 2018년 그린피스는 30년 사이 스페인 해안지역 도시화가 두 배 이상 진척됐다고 지적했다. 올여름에도 스페인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운 폭염에 시달리고 있다. 삶의 활기를 되찾기 위해 태양을 쫓아온 은퇴자들은 그토록 꿈꿨던 태양을 피해 숨어야 할 신세가 됐다.
글·엘리사 페리게르 Élisa Perrigueu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기자
번역·김은희
번역위원
(1) 익명을 원한 인터뷰 대상자는 성을 제외한 이름만 표기.
(2) 발렌시아주 자치정부에서 제공한 2024년 5월 수치.
(3) 유럽연합 회원국에 거주하는 프랑스인은 프랑스 사회보장제도 대신 현지 사회보장제도의 적용을 받는다.
(4) Elisa Silió, 「 La fuga de miles de médicos agrava el déficit de especialistas en España」, <El País>, Madrid, 2022년 10월 17일.
(5) 프랑스 노령보험공단(Cnav), 「Recueil statistique du régime général – Édition 2023 일반연금 통계 모음집-2023년판 」 , 2023년 12월, www.statistiquesrecherche.lassuranceretraite.fr
(6) Rafel Montaner, 「Los residentes extranjeros se han multiplicado por ocho en un cuarto de siglo」, <Levante El Mercatil Valenciano>, 2024년 3월 3일.
(7) Ángel Gavilan, 「El mercado de la vivienda en España : evolución reciente, riesgos y problemas de accesibilidad」, 스페인은행, 2024년 4월 23일, www.bde.es
(8) Ibid.(같은 책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