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평화는 오는가?

2012-10-14     그레고리 윌퍼트

   
<다양한 얼굴들>, 2000-이즈마일 일드림

50년간의 극렬한 내전과 숱한 협상 결렬 끝에, 콜롬비아 정부와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 다시 한번 평화 안착을 위해 손잡기로 전격 합의했다. 지난 8월 27일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은 반군과의 대화를 재개하고, 협상 중재를 베네수엘라·칠레·노르웨이·쿠바 정부에 맡기겠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콜롬비아 정부는 알바로 우리베에서 산토스 정권(산토스는 우리베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다)에 이르는 지난 10년 동안 줄곧 고수해온 무력 강경 정책에서 벗어나 일대 노선 전환에 돌입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노선 변경이 그리 놀랄 만한 사건은 아니다.

적어도 2가지 요인이 정국 변화에 기여했다. 먼저, 교전 중인 정부와 반군 모두 이 전쟁에서 어느 한쪽이 승리에 이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우리베가 집권한 지난 10여 년간(2002~2010) 반군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2008년 이후 다시 과거 전력을 상당 수준 회복했다. 또한 수많은 반군 지도자가 매복 공격에 희생됐음에도 FARC는 전혀 반격의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심지어 4년 전부터는 대인지뢰·저격수·폭탄테러까지 동원해가며 더 격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최근 콜롬비아 의회가 작성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반군은 전국 3분의 1 도시에서 "상당한 규모의 세력을 형성"하는 것으로 조사됐다.(1) 이런 상황에서 콜롬비아군은 특공대의 기습 공격과 잠입 시도를 확대하고 있다. 군이 전술적 변화에 나서면서 겉보기에 내전은 10년 전만큼 그리 치열하지 않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내전에 희생된 국민 수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양쪽 진영 모두 요란하게 입 밖에 내뱉지 않아서 그렇지, 결국 일방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는 공감하고 있다.

전통적 엘리트 세력과의 결별

콜롬비아 정부가 유화적 제스처를 취하게 된 데는 산토스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과는 다른 엘리트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한다는 개인적 이력도 한몫했다. 이를테면 전임 대통령인 우리베는 지역 과두세력의 대변자로 통했다. 우리베는 1983년 목축업자인 부친이 FARC에 납치돼 피살되는 사건을 겪은 뒤, 문중 땅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 정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땅은 팔았을지언정 결코 농촌 부농 계급과의 연까지 끊지는 않았다. 대지주의 충실한 대변자 노릇을 한 그는 일부 '마약왕'과도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다. 1991년 미국 국방정보부(DIA)는 훗날 콜롬비아의 실권을 장악하게 될 그를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절친한 친구"(2)라고 설명하며 메델린 카르텔의 협조자 명단에 포함시켰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1980년대 초 우리베가 민간항공청 청장이던 시절, 항공기 운항 허가와 활주로 신설이 대폭 늘어났다. 2007년 에스코바르의 옛 정부 버지니아 발레조는 이 사실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파블로는 '그 억세게 운 좋은 풋내기 녀석(우리베)이 없었더라면 아마 우리는 양키들에게 약을 팔아먹기 위해 마이애미까지 헤엄쳐서 다녀야 했을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3)

더욱이 우리베 대통령은 본인은 사실무근이라 일축하지만 민병조직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우리베의 선거참모이자 정보국장을 지낸 호르헤 노게라가 2011년 유력 극우민병대 콜롬비아자위대(AUC)의 정보국 잠입을 도운 혐의로 25년의 징역형에 처해진 사건은 그저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을까?

우리베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숨기는 법이 결코 없었다. 그는 콜롬비아의 심각한 사회적 양극화가 내전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정작 빈부 격차를 해소하려면 그전에 먼저 내전을 종식하는 것이 순서라고 주장했다. 2004년 우리베 대통령은 "평화가 없으면 투자도 없고, 투자가 없으면 조세수입도 없다. 조세수입이 있어야 정부가 국민 복지에 투자할 수 있다"(4)고 말했다. 우리베가 재분배 정책(콜롬비아의 경우 재분배 정책은 필연적으로 농지개혁을 수반한다)에 얼마나 무관심하고, 신자유주의를 얼마나 열렬히 신봉하는지 이처럼 완벽하게 웅변해주는 말은 없었다.

하지만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무력강경책을 표방한 덕분에 우리베는 집권에 성공할 수 있었다. 메델린 농민 출신인 우리베는 FARC와의 평화협상을 지지하는 기득권 세력 호라시오 세르파의 공천에 불만을 품고 자유당을 탈당했다. 그리고 2002년 콜롬비아 대선에 출마해 '무소속'이란 타이틀로 당당히 승리를 거머쥐었다. 2006년 우리베는 연임을 위해 국가사회연합당(U당)이라 불리는 새 정당을 창당했다. 거대 정당의 탄생은 한 세기 가까이 이어져온 콜롬비아 양당 체제에 마침표를 찍었다. 우리베가 재임에 성공하자 민간부문에서 활동하는 신진 인사들을 주축으로 새로운 내각이 구성됐다.

우리베는 반군과 협상하려면 그전에 무조건 무장해제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간 콜롬비아 정부군이나 우익 민병대가 저지른 만행을 감안할 때, 이는 양대 반군조직인 FARC와 민족해방군(ELN)의 입장에서는 수용 불가능한 조건임이 분명하다.(5) 알바로 우리베 대통령 집권 전 20년 동안 콜롬비아 정부는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모두 세 차례(1982~85, 1990~92, 1999~2002)에 걸쳐 반군과 평화협상을 시도했지만 매번 실패로 돌아갔다. 가장 최근의 회담을 무위로 돌아가게 한 책임은 먼저 미국에 있었다. 마약과의 전쟁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골자로 한 이른바 '콜롬비아 플랜'은 반군소탕전의 수단으로 악용됐다. 콜롬비아의 엘리트 계급도 반군과의 협상에 지지부진하게 대응하며 회담이 실패로 돌아가는 데 악영향을 미쳤다.

이런 엘리트 계급의 대표주자라 할 만한 사람이 바로 산토스 대통령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형제인 에두아르도는 1938~42년 콜롬비아 대통령이었고, 사촌 프란시스코는 우리베 정권에서 부통령으로 일했다. 한마디로 산토스 가문은 지난 한 세기 동안 이룩한 기득 권력의 수혜를 톡톡히 누려온 집안이었다. 1913~2007년 콜롬비아 내 유일 전국 일간지 <엘 티엠포>는 산토스 가문의 소유였다. 심지어 현 산토스 대통령의 아버지는 무려 25년이나 이 언론사를 이끈 사람이다.

미국 하버드대학과 영국 런던정경대학(LSE)에서 수학하며 신자유주의 이론의 세례를 받고 자란 산토스는 불과 21살에 국제커피협회 콜롬비아 대표가 되어 공직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 재벌 가문의 자제는 1991년 무역부 장관으로 승진한 데 이어 여러 장관직을 거치며 우리베 정권에서 국방부 장관까지 올랐다.

2010년 6월 산토스의 대선 승리는 현 정치체제가 낳은 자연적 산물이자 정치 노선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담보물로 인식됐다. 하지만 의외로 산토스의 집권은 콜롬비아 정치사에 일대 변화를 몰고 오게 된다. 산토스 신임 대통령은 범세계적이고 초국적인 성향의 도시 엘리트층과 연대했다. 도시 엘리트층의 관심사가 항상 대지주의 관심사와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산토스는 정치계 유력 인사나 민병대의 요구에 전보다 둔감해졌다. 그는 새로운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면서 자연스럽게 콜롬비아의 남미 통합 참여를 추진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대지주와 달리, 수출산업계는 재분배 정책을 반감 없이 받아들였다. 덕분에 산토스 대통령은 2011년 6월 '역사적인' 법 제정에 나설 수 있었다. 정부는 지난 25년간 내전으로 인해 고향을 등진 200만 명의 콜롬비아인에게 토지를 되돌려주기로 결정했다.(6)

우리베는 콜롬비아를 미국과 공동 운명체로 묶기 위해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전력을 기울였다. 반면 그의 후임은 다른 정책을 선결 과제로 내세웠다. 남미 통합을 추진하고, 제2의 남미 경제국인 콜롬비아의 국제적 위상을 더욱 드높이는 것이었다. 특히 후자를 위해서는 시베츠(CIVETS·콜롬비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이집트, 터키, 남아프리카) 결성을 통해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그리고 최근 남아프리카까지) 국가들처럼 일극화된 세계 체제에 대한 편견을 깨고 전세계 투자자의 관심을 불러모으기를 기대했다.

산토스 신임 대통령은 콜롬비아 사회의 고질적 현상인 국내 정치 분쟁을 무마하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는 불난 집에 기름 붓기를 즐기던 우리베와는 달리, 야당 인사를 내각에 영입하는 등 야권의 환심을 사는 데도 수완을 발휘했다. 덕분에 거의 모든 주요 정당들(좌파정당인 대안민주중심(PDA)은 제외)이 권력의 상층부에 오를 권리를 획득했다.

이런 유화적인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우리베는 과거 자신이 그토록 총애하던 정치 후계자 산토스에게서 등을 돌려버렸다. 산토스가 야권 인사를 노동부에 기용한 뒤 보인 우리베의 날카로운 반응이 이런 사실을 잘 대변해준다. 오늘날 자기 후계자의 극렬한 반대세력으로 돌아선 전직 대통령 우리베는 산토스의 결정에 대해 "우리베주의에 대한 반감을 보여주는 위선적 결정"이라며 맹공을 퍼부었다.(7)

두 인물의 불화는 기존 여권 세력의 분열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과거 농촌 대지주 계급과 도시 재계 인사들 사이의 끈끈한 연대가 깨졌다. 산토스는 몇몇 개혁 추진에도 불구하고 일부 정책은 그대로 답습하는 모습을 보였다. 대표적인 예가 신자유주의 경제 기조였다.

협상타결 가능성 어느 때보다 높아

얼핏 대통령과 대지주 세력 사이의 불화는 평화회담에 불길한 징조처럼 보이기도 한다. 성공적인 평화회담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모든 참여자를 협상 과정에 참여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농지개혁이라는 난해한 문제를 풀려면 이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친(親)우리베 성향의 유력 인사들을 회담장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기존 연합 전선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도 주지해야 한다. 이를테면 산토스 대통령은 오랫동안 FARC에 대해 무력강경책을 고수해오던 퇴역장군 2명을 협상팀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오늘날 다른 경제주체들이 내전 종식을 애타게 고대하는 상황에서 농촌 과두세력은 예전만큼 극복하기 힘든 장애물도 아니다(로이크 라미레즈 인터넷판 기사(www.monde-diplomatique.fr/48236) 참조). FIP재단이 32회에 걸친 콜롬비아 기업 총수와의 인터뷰를 토대로 실시한 한 연구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경제정책가들은 콜롬비아의 무력분쟁을 해결할 가장 안전하면서도 바람직한 방법은 협상이라고 판단한다".(8)

그동안 반군과의 협상은 1980년대 냉전, 1990년대 마약과의 전쟁, 2000년대 테러와의 전쟁 등 북미 군사작전의 어두운 그늘 속에서 진행돼왔다. 그런 점에서 차후 협상은 예전보다 훨씬 더 낙관적으로 진행되리라 기대된다. 오늘날 콜롬비아에서는 과거 북미 군사작전의 그늘이 걷히고, 그와 더불어 미 정부의 영향력도 상당히 약화됐다. 그만큼 평화협정이 체결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이다.

칠레·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중재도 협정 타결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와 우고 차베스가 남미 정치 지형에서 각기 양극단의 성향을 대표하는 만큼, 그들의 개입은 더욱 설득력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한편 볼리비아 대통령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다. 볼리비아 대통령은 FARC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지만, 동시에 FARC의 무장투쟁 전략에는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FARC의 무력 활동이 수백만 명의 콜롬비아 피란민 유입, 접경지역의 치안 불안 등 베네수엘라와의 사이에 수많은 갈등의 소지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번에는 무장해제가 협상의 선결 조건이 아니기 때문에 설령 우발적인 휴전 위반 행위가 일어날지라도 전체 협상 과정이 위태로워지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반면 과거 협상에서는 양 진영 중 어느 쪽에서든 총성이 한 발만 울려도 금세 회담장을 박차고 나가 전쟁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빌미가 되곤 했다.

대통령 교체는 소수에 불과한 엘리트 집단 내 역학관계를 조금 변화시킨 데 불과하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의 가장 참혹한 내전 중 하나를 종식시킬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다. 때로는 작은 변화가 엄청난 결과를 몰고 오기도 한다.

글•그레고리 윌퍼트 Gregory Wilpert 저서로 <권력 쟁취를 통한 베네수엘라의 변화: 차베스 정권의 역사와 정책>(버소 출판사·런던·2007)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Alertan que más de 330 municipios tienen fuerte presencia de las Farc’, <엘에스펙타도르>, 보고타, 2011년 4월 28일.
(2) ‘U.S. Intelligence Listed Colombian President Uribe Among “Important Colombian Narco-Traffickers” In 1991’, 내셔널 시큐리티 아카이브, 2004년 8월 2일.
(3) Luis Hernandez Navarro, ‘Alvaro Uribe, senor de las sombras y Los Pinos’,<라호르나다>, 멕시코, 2008년 3월 18일.
(4) ‘Uribe defends security policies’, <BBC뉴스>, 런던, 2004년 11월 18일.
(5) Ivan Cepeda Castro, Claudia Giron Ortiz, ‘콜롬비아에서는 수천 명의 정당 조직원이 어떻게 제거됐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5년 5월호.
(6) ‘Santos signs “historic” Victims law’, <콜롬비아리포트>, www.colombianreports.com, 2011년 6월 11일.
(7) ‘Tensions between Uribe and Santos rise’, <콜롬비아리포트>, 2011년 11월 1일.
(8) ‘Léderes empresariales hablan de la paz con las FARC’, Fundaci?n Ideas para la Paz(FIP), www.ideaspaz.org, 2012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