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 얻은 방글라데시 부활과 자유
2024년 6월 말,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학생들이 공무원 채용 제도에 반대하는 시위를 시작했다. 몇 주 만에 이 운동은 대규모로 확산되어, 15년간 권좌를 지키고 있던 셰이크 하시나 총리가 결국 인도로 도피했다. 초기 시위에서 대중 봉기로 급변한 이 사건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으며, 방글라데시 국민들은 이제 어떤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2024년 8월 5일 아침,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는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대도시의 주요 교차로에는 군용 차량과 경찰차가 배치되어 있었고, 트럭들이 주요 진입로를 차단했다. 이는 3주간 나라를 흔든 대중 운동인 ‘다카로의 대행진’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의 유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정부가 명령한 인터넷 차단이 1주일 전에 해제된 이후, 셰이크 하시나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대중들의 목소리가 커진 가운데 육군 참모총장인 와케르 우즈 자만 장군이 국민들에게 연설을 하겠다고 발표한 이후, 소셜 미디어는 다음 사건에 대한 추측으로 가득 찼다.
자만 참모총장이 마침내 이날 오후 4시에 연설을 시작했을 때, 하시나 총리가 이미 나라를 떠났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 검은 안경을 쓴 장군의 표정은 카메라 앞에서 긴장한 모습을 보였고, 그의 연설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숨을 죽였다. 장군은 총리의 도피를 확인했다. 2시간 전, 하시나 총리는 헬리콥터를 타고 인도로 떠난 것이다.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환호했고, 군중들은 하시나 총리의 공식 거주지인 가나바반에 들이닥쳤다. 일부는 그녀의 사리를 가져가고, 다른 이들은 궁전의 호수에서 백조를 잡아갔으며, 마지막으로는 그녀의 호화로운 침대에서 사진을 찍었다.
텔레비전에서 장군은 평정과 자제를 요청하며 연설을 이어갔다. 그는 다음날 야당 지도자들과 회의를 약속했으며, 회의의 유일한 주제는 누구도 15년 동안 감히 묻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이제 누가 나라를 이끌 것인가?
이렇게 방글라데시의 올해 7월은 ‘피의 7월’로 불리며 막을 내렸다. 이달은 국가의 보안 기관에 의해 자행된 강압적 억압과 수많은 강제 실종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대중 운동은 굴복하지 않았다. 이 운동은 하시나 정권과 집권당인 아와미 연맹의 몰락을 이끌어냈다. 셰이크 하시나의 아버지인 셰이크 무지브가 이끌었던 이 정치조직은 1971년 방글라데시의 해방을 이끌었지만, 2009년 다시 집권한 후에는 국민을 억압하는 도구로 변했다.
투사 손자들에게도 공무원 채용 특혜, 실업 청년들의 분노 사
이전까지는 하시나 총리의 퇴진을 예견할 만한 조짐이 전혀 없었다. 2024년 7월, 시위가 시작된 것은 쿼터 개혁 운동이 다시 부활하면서였다. 이 운동은 처음 2013년에 등장하여 공무원 채용에서 특혜를 주는 할당제를 비판한 것이었다.
1972년에 도입된 이 제도는 독립 전쟁에 참여한 민간인들의 재통합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할당을 공무원 직위에 적용했다. 30%는 ‘자유의 투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10%는 파키스탄 군대와 벵골족 협력자들에 의해 성폭행을 당한 여성들인 비랑고나(Birangonas)에게, 40%는 공공 부문에서 상대적으로 대표성이 부족한 지역 주민들에게, 그리고 나머지 20%는 순전히 ‘성과에 기반한 자격’(공채시험)으로 할당되었다.
이 시스템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는데, 1976년에는 ‘성과’에 기반한 공채 비율이 20%에서 40%로 증가했다. 그러나 2010년, 정부가 자유의 투사들의 손자까지 30% 할당 대상에 포함시키면서, 젊은 층의 실업률 증가와 맞물려 2013년에 첫 시위가 발생했다.
경찰과 아와미 연맹의 준군사조직 ‘방글라데시 차트라 연맹(BCL)’에 의한 억압에도 불구하고, 이 운동은 몇 년 동안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2018년에는 하시나 총리가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반발하는 운동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로 전체 할당제를 폐지하기로 했다.
대규모 반발을 초래한 하시나 총리의 ‘라자카르’ 망언
이 결정은 반대로 대중의 환영을 받았지만 3년 후, 일부 ‘자유의 투사’의 자녀들은 할당제 폐지가 헌법에 위배된다고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그들은 승소했다. 결과적으로 2024년 7월, 대법원은 할당제를 다시 부활시켰다. 몇몇 공립대학에서 시위가 발생했지만, 시위대의 수는 적었다.
그러나 두 가지 사건이 대규모 반발을 촉발시켰다. 첫째는 공무원 시험에서 권력층의 지인들에게 시험 답안이 유출되었다는 언론 조사가 발표된 것이다. 둘째는, 하시나 총리가 시위대들을 ‘라자카르(Rajakars)’라고 부르며 논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용어는 1971년 방글라데시 독립 당시 파키스탄의 학살에 협력했던 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그 무게감은 상당했다.
1971년, 방글라데시가 아직 파키스탄의 일부였을 때, 이슬라마바드는 수십만 명이 희생된 학살을 자행했다. 이 학살은 9개월간 지속되었고, 벵골족 협력자들, 즉 라자카르들이 파키스탄군에게 주요 지원 역할을 했다.
라자카르들은 파키스탄군이 해방군인 ‘무크티 바히니(Mukti Bahini)’를 식별할 수 있도록 도왔고, 어떤 집을 불태우고, 어떤 가족을 처벌하며, 어떤 여성을 성폭행할지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하시나 총리가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대중을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이 용어 선택과 시험 부정 사건이 겹치면서, 대법원은 7월 21일 할당제를 다시 수정했다. 새로운 시스템에서는 93%가 공채 지원자들에게 할당되고, 5%는 자유의 투사들에게, 1%는 아디바시(Adibashis) 소수민족과 장애인, 그리고 제3의 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할당되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이미 너무 늦은 조치였다. 불만이 쌓인 방글라데시 사회는 이미 오래전부터 불안정한 상태였고, 작은 불꽃만으로도 대규모 봉기로 번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시나 총리의 오랜 집권 기간 동안 방글라데시는 연고주의적 자본주의가 만연했다. 은행 부문은 소수의 산업계 거물들이 장악했고, 이들은 권력과의 밀접한 관계 덕분에 대출금을 상환할 필요가 없었다. 정부는 규제를 완화해 이들의 부정행위를 눈감아 주었고, 방글라데시는 저임금 노동자들이 섬유를 대량 생산해내는 공장으로 전락했다.
하시나 정부는 2010년 특수 경제 구역을 설립하여 노동 규제를 대폭 완화했으나 2021년에는 50만 명이 넘는 의류 노동자가 이 구역에서 노동조합에 가입할 권리조차 갖지 못했다. 2013년 라나 플라자(Rana Plaza) 참사 이후에도(1), 정부는 시위에 폭력으로 대응했고, 2022년에는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이 방글라데시를 노동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10개국 중 하나로 선정했다.(2)
생산된 부의 30%가 상위 5%의 부유한 가정에 집중되고 있는 상황에서(3), 최저임금을 받는 차(茶) 노동자들은 2022년 8월 3주간의 자발적 파업을 통해 적정 임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는 그들에게 미미한 임금 인상, 즉 하루 1.20달러에서 1.70달러로의 인상을 강요했으며 이는 여전히 빈곤선인 2.15달러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노동계급의 열악한 처지를 외면하고 침묵
하시나 총리의 노동계급에 대한 무시는 국가 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확장되었다. 노동자들의 고통은 방글라데시 내부뿐만 아니라 해외로도 확장되었다. 여성 이주 노동자들은 “송금 전사”로 찬양받았지만, 이들이 해외에서 겪는 학대에 대해 정부는 침묵했다.
2019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19구의 시신이 송환되었을 때,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A.K. 압둘 모멘(임기 2019~2024년)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 여성들의 수에 비해 이 사망자 수는 미미하다고 강조했다. 2022년에는 3,838명의 방글라데시 여성이 해외에서 사망한 채 돌아왔다.(4)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이 떠오르며 농촌 지역의 노동자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에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자헤딘과 함께 싸웠던 방글라데시인들의 귀국, 그리고 전통적인 이슬람 정당들의 ‘자극’에 따라 여러 극단주의 단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단체들은 특히 농촌 지역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매력을 발휘하며 이들을 끌어들였다. 극단주의 단체들은 국가가 제공하지 못한 교육 및 복지의 공백을 메우며, 이러한 불만을 안고 있는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모집했다. 이들 단체는 중동과 걸프 지역,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유입된 자금으로 교육과 일자리 측면에서 국가가 제공하지 못한 공백을 메우며, 많은 인재를 대규모로 모집할 수 있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국제적 흐름 속에서 온건 이슬람을 지지하는 입장을 보였으나, 실제로는 이러한 극단주의 단체들을 적대시함으로써 내부적으로는 강력한 통제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2013년, 아와미 연맹 정부는 ‘자마트-에-이슬라미 방글라데시(JIB)’라는 온건한 이슬람 정당의 정치 활동을 금지했다.
이 조치는 더욱 급진적인 이슬람 단체들의 성장을 부추겼으며, 이는 정부가 마음대로 탄압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 2013년에는 ‘헤파자트-에-이슬람’이라는 단체가 다카의 금융지구에서 신성모독 관련 법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하시나 총리는 경찰과 준군사 조직을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했고, 당시 방글라데시 좌파와 진보 세력은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정부의 ‘용기’를 찬양했다. 하지만 이들이 몇 년 후 정부의 비슷한 억압에 직면했을 때, 자신들이 환호했던 그 억압의 결과를 직접 겪게 되었다.
억압 통치를 도리어 ‘국가 해방’으로 선전
마지막 몇 년 동안 방글라데시에서는 강제 실종과 초법적 처형이 급격히 증가했다. 2022년에는 <네트라 뉴스(Netra News)>에서 오랫동안 소문으로만 존재하던 아이나고르(Aynaghor, ‘거울의 방’)라는 비밀 구금소의 존재를 폭로했다.(5) 이 구금소는 군사 정보 기관이 관리하고 있었다.
2018년에는 학생들이 교통 안전과 교통 규제 강화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을 때, 정부는 보안군과 아와미 연맹의 차트라 연맹을 투입했다. 사진기자인 샤히둘 알람이 이 사건을 보도하자, 그는 국가안보법 위반혐의로 107일간 수감되었으며, 정부는 그가 ‘반국가적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했다.(6)
하시나 총리는 자신의 억압적 통치를 ‘국가 해방’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그녀는 아버지 셰이크 무지브가 싸운 그 해방을 자신이 계승했다고 자처했으며, 따라서 아와미 연맹에 반대하는 것은 곧 국가의 독립과 해방에 반대하는 행위로 간주했다. 이는 방글라데시가 인도의 요구에 굴복하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방글라데시는 인도에 의해 거의 완전히 둘러싸여 있으며, 오직 인도양을 향한 해안선만이 인도와 접하지 않는다. 따라서 뉴델리는 다카에게 필수적인 대화 상대국이 될 수밖에 없다. 인도는 방글라데시와의 무역과 외교에서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방글라데시는 지리적 특성상 인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인도는 방글라데시의 독립 이후 줄곧 무역에서 이웃국으로서의 이점을 누려왔지만, 지난 15년 동안 이 이점들은 종속 관계를 나타내는 특권으로 변질되었다. 인도는 방글라데시와의 경제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혜택을 보아왔으며, 방글라데시는 점차 인도의 요구에 맞춰 행동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이러한 변화는 양국 간의 경제적 불평등과 방글라데시의 자주권 약화로 이어졌다. 한 가지 예로, 2016년에 람팔 석탄 화력발전소가 세계에서 가장 큰 맹그로브 숲 중 하나인 순다르반스 근처에 인도 자본으로 건설되었다. 이 발전소는 인도에서 수입된 석탄으로 운영되며, 그로 인해 발생하는 환경적 피해는 기후 변화에 가장 취약한 나라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가 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또한, 2017년에 하시나 정부는 인도의 재벌 고탐 아다니가 소유한 아다니 파워와 계약을 체결했다. 이 계약에 따르면 방글라데시는 사용하지도 않을 전기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불리한 조건을 떠안게 되었다. 아다니는 인도 총리 나렌드라 모디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이 계약은 방글라데시의 종속성을 더욱 강화한 사례로 여겨진다. (7)
나렌드라 모디의 바라티야 자나타당(BJP)과 아와미 연맹이 긴밀히 협력하는 동안, 인도와 방글라데시 두 국민 간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졌다. 인도인들은 방글라데시인들을 불법 이민자로 간주하라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받았고, 방글라데시인들이 지속적으로 인도의 관대함에 기대어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로 묘사되었다. 이는 인도가 방글라데시의 해방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자부심과 함께 이루어졌다.
하시나의 오판, 시위대의 요구를 무시하고 강경 진압 고집
반면에 방글라데시인들은 인도 내에서 벌어지는 무슬림에 대한 폭력과 두 나라 간의 불평등한 무역 협정을 비판했다. 다카에서는 인도의 비밀 요원들이 방글라데시의 군대와 경찰에 침투해 있다는 소문이나, 인도인들이 정부의 고위직에 임명되었다는 이야기가 자주 들렸다. 이러한 소문들은 증거로 뒷받침되지는 않지만, 이러한 이야기가 사실로 밝혀져도 많은 방글라데시인은 놀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24년 6월, 하시나 정부는 인도가 방글라데시 철도 시스템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는 서벵골에서 아삼까지 기차를 운행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방글라데시에서는 인도 불매운동이 시작되었다.(8)
그러나 하시나 총리는 이 모든 반발에도 불구하고 시위대를 잠재울 수 있다고 확신했다. 7월 중순, 5일간의 시위가 이어진 후, 그녀는 인터넷을 차단하고 통행금지를 선언했다. 아와미 연맹 간부, 경찰, 준군사 조직으로 구성된 죽음의 부대가 거리를 순찰했고, 시위자, 행인, 그리고 때로는 집 안에 있던 어린이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했다. 최소 1,000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점에서 하시나 총리는 시위대가 요구한 9가지 사항을 외면한 채 오히려 억압을 강화했다. (9)
하시나 총리는 계속해서 강경 노선을 택했다.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하면서 아와미 연맹 지도부는 언론을 통해 시위가 ‘반(反)해방’ 세력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시위대의 요구는 점차 하나로 수렴되었다. 그것은 바로 셰이크 하시나의 퇴진이었다. 이 구호는 갈수록 많은 대중을 끌어들이며, 통행금지와 억압을 무릅쓰고 시위에 나서도록 했다. 하시나 총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군대에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라고 명령했으나, 참모총장 와케르 우즈 자만 장군은 이를 거부했다.(10)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유누스가 임시 정부 수반 취임
하시나 총리가 도피한 후, 방글라데시에서는 군중들이 권력을 잡는 순간이 찾아왔다. 처음에는 기쁨과 안도감으로 가득했지만, 곧 분노와 격노로 변했다. 폭력 사태와 약탈이 발생했다는 여러 보고서가 있었지만(11), 동시에 시민들은 스스로 조직하여 재산, 사원, 교회 등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인도 우익 힌두주의 단체(RSS)와 아와미 연맹이 협력하여 힌두교 신자들을 겨냥한 폭력 사태를 과장하는 허위 정보를 퍼뜨렸지만, WhatsApp 메시지와 전화 통화 기록이 유출되어 오히려 아와미 연맹의 일부 인사들이 혼란을 일으키기 위해 힌두 사원에 대한 공격을 계획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12)
2024년 8월 8일, 무함마드 유누스 박사가 임시 정부 수반으로 취임했다.(13) 유누스 박사는 2006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서구 언론에서는 ‘빈자의 은행가’로 찬양받고 있으며, 방글라데시 국민 사이에서도 일정 부분 신뢰를 받고 있다. 특히 하시나 총리가 그를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중의 호감이 더 커졌다.
하시나 총리는 1996년 치타공 힐 트랙트에서의 평화 협정 체결로 자신이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누스 박사가 소속되지 않은 아와미 연맹이나 주요 야당인 국민당(BNP)에 대한 반감이 유누스의 임시 정부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높였다.
유누스 정부의 구성은 신자유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띠었다. 옛 장성, 전직 장관, 대사들이 정부에 참여했으며, 그들은 국유 자원과 산업의 민영화를 적극 지지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인권 운동가 아딜루르 라흐만과 환경 정의를 옹호하는 변호사 리즈와나 하산 같은 인물들도 포함되었다.
방글라데시 역사상 처음으로 차별 철폐 운동에서 활동한 학생 출신들이 장관직을 맡았으며, 이 중 마흐푸즈 압둘라는 반차별 운동의 이론가로서 임시 정부의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힌두교와 아디바시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비단 란잔 로이와 수프라딥 차크마도 정부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값비싼 대가를 치른 ‘자유’, 피로 얻은 ‘부활’
현재 유누스 정부는 정치적으로 큰 조치를 발표하지 않았으며, 단지 셰이크 하시나의 인도 송환 요청만이 주요 안건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정치적 지형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국민당은 하시나 정권이 몰락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움직이고 있으며, 아와미 연맹이 장악하고 있던 밀수 활동을 금지하려 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 정당 JIB의 금지령이 해제되었고, 그들의 학생 조직인 차트라 시비르(Chhatra Shibir)가 대학 캠퍼스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캠퍼스에서 정당의 영향력을 배제하자는 논쟁도 일어나고 있으며, 정당 없는 정치 행동을 추구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방글라데시의 전통적인 좌파 정당들은 이번 봉기에서 눈에 띄게 부재했다. 방글라데시 공산당(PCB), 국민 사회주의당(JSD), 노동자당 등은 아와미 연맹과 함께 연립 정부에 참여했기 때문에 부패와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에 소극적이었다. 이들 정당은 노동조합 기반이 약해졌고, 학생 조직들도 BCL의 영향력 아래 눌려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을 잃어버렸다.
석유, 가스, 광물 자원, 에너지 및 항만 보호를 위한 국가위원회와 같은 조직들이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활용하여 노동자들과 연대하고, 정치 세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지만, 사회주의라는 용어는 무지브와 하시나의 그림자 속에서 여전히 부담스러운 단어로 남아 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현재 다양한 이익 집단들이 각자의 이유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인권을 침해당한 릭샤 운전자들, 시위로 인해 직장을 잃은 의사들, 그리고 아와미 연맹에 충성했던 준군사조직 안사르와 경찰들까지도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들은 반혁명이나 반동적 세력의 개입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방글라데시에서 새로운 표현의 자유가 탄생했음을 상징하기도 한다. 방글라데시는 1990년 독재자 후세인 무하마드 에르샤드의 몰락 이후로 이렇게 자유롭게 표현된 적이 없었다.
이 자유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방글라데시의 피로 얻은 부활은 오랜 기간 막혀 있던 지평을 열어 주었다. 이제 방글라데시인들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차례다.
글·나피스 하산 Nafis Hasan
방글라데시 작가이자 연구자, 저널 Jamhoor의 편집자
번역·아르망
번역위원
(1) 「방글라데시, 의류산업의 살인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3년 6월.
(2) 「ITUC 글로벌 권리 지수 2022」,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 2022년 6월 30일, https://www.ituc-csi.org/
(3) 「가구 소득 및 지출 조사(HIES) 2022」, 방글라데시 통계청, 다카, 2023년 4월 12일.
(4) 「방글라데시 이주 노동자: 너무 많은 이들이 해외에서 사망」, <다카 트리뷴>, 2019년 12월 30일.
(5) 「다카의 비밀 수감자들」, <Netra News>, 2022년 8월 14일.
(6) 「샤히둘 알람 사건: 수사 보고서 제출 다시 요구」, <다카 트리뷴>, 2023년 2월 9일.
(7) 「논란의 아다니 계약이 전기 비용을 어떻게 증가시키는가」, <The Business Standard>, 다카, 2024년 8월 20일.
(8) 「방글라데시-인도 철도 계약 하에 상품과 승객 수송 허용」, <다카 트리뷴>, 2024년 6월 28일.
(9) 「7월 이후 방글라데시 폭력 사태로 1,000명 이상 사망, 보건부 장관 발표」, <로이터 통신>, 뉴욕, 2024년 8월 29일.
(10) 「배타적 – 방글라데시 군대, 시위 진압 거부로 하시나 운명 확정」, <로이터 통신>, 2024년 8월 7일.
(11) 「하시나 퇴진 후 방글라데시에서 힌두교 가정과 사원 공격, 소수 민족 단체 발표」, <로이터 통신>, 2024년 8월 6일; 「방글라데시 소수 민족 공격의 진실을 왜곡하는 극우 영상들」, BBC, 2024년 8월 18일.
(12) 「방글라데시의 새로운 민주주의, 정보의 홍수로 위협받다」, <디플로맷>, 2024년 8월 14일, The Diplomat.
(13) 「마이크로크레딧, 빈곤의 상업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2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