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에게 무대를 내준 독일 부르주아

2024-10-31     요한 샤푸토 | 역사학자

일반적인 통념과 달리, 나치 아돌프 히틀러는 결코 선거를 바탕으로 집권에 성공한 게 아니다. 각종 의회 위기 사태가 반복되고, 극우 거물 인사들의 사주를 받은 독일 언론이 정신적 혼란을 조장하는 상황에서, 기업가와 은행가가 협잡을 벌인 결과였다. 그들은 모두 선거에서 독일 좌파의 선전을 막고, 국가를 무너뜨리기를 원했던 것이다.

 

1933년 1월 30일 나치 집권은 모든 민주주의 정신에 깊은 상흔을 남긴 최악의 트라우마였다. 그때까지 서구에서 독일은 문화·과학·연구·기술 대국이자, 음악·문예·철학의 영예로운 위상을 거머쥔, 수많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로 여겨졌다.

이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고 체계적이며 강력한 좌파를 보유한 나라라는 위용도 뽐냈다. 그 바탕에는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 노조, 그리고 여러 정당이 존재했는데, 가령 사회민주당(SPD)은 사회정치활동을 통해, 공산당(KPD)은 존재 자체만으로 1918~1919년 진보적인 사회 민주주의 확립에 기여했다.

1919년 7월 31일 헌법을 채택한 바이마르 연립정부(사민당, 독일민주당(DDP), 가톨릭 중앙당)는 1920년 선거에서 후퇴했다. 이 연립정부는 기존에 이룩한 민주적, 사회적 성취를 되돌리려는 온건파, 더 나아가 우파에게 정권을 내주어야 했다.

사민당 출신의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임기 중 서거함에 따라, 구체제의 살아 있는 화석, 파울 폰 힌덴부르크 원수가 대통령 자리에 취임했다. 하지만 법은 법이었다. 힌덴부르크는 바이마르 헌법에 충성을 맹세하고 법을 준수했다.

베르사유 조약, 다수 국가의 배척, 막대한 전쟁 배상금. 이처럼 불리하기만 한 국제 정세 속에서, 독일공화국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의회주의를 표방하며 상당히 존속 가능한 민주주의 문화(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차원에서 주기적으로 선거 개최, 정당 간 대화)를 조성했다.

하지만 구스타프 슈트레제 총리(인민당(DVD), 우파 정당)가 이끄는 연정 체제(우파-좌파 연합)는 1923년 가을 루르 점령(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배상 지불 불이행에 대하여 프랑스와 벨기에가 단행한 보복조치—역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기존 화폐 폐지, 각종 반란(라인 지방의 분리주의 운동, 동부의 볼셰비키 혁명 시도, 바이에른의 나치 폭동) 등의 사태에 직면했다.

 

독일 우파, 대통령실을 통해 통치하고 의회를 무시

이에 헤르만 뮐러 총리가 이끄는 대연정 체제가 1928년 6월 28일 이후 독일을 통치하게 됐다. 그런데 다음 해인 1929년 가을 미국발 경제위기가 독일을 강타했다. 경제위기의 충격파는 독일 정권을 분열시켰다. 우파는 긴축 재정을, 좌파는 실업보험 강화를 각기 주장했다.

어떤 다수당도 의회를 온전히 장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소수의 대통령 보좌진 그룹이 헌법 관행을 뒤엎으려고 시도했다. 말하자면 권위, 위엄, 간단히 말해 힌덴부르크라는 인물을 상대로 벌인 일종의 항구적 쿠데타에 해당했다.

우파는 대통령실을 통해 나라를 통치했고, 의회(Reichstag)를 홀대했다. 1919년 헌법 제48조 2항에 따라, 국가수반이 법령을 통해 사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허용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제도는 정작 민주주의의 본질을 호도했다. 정치적 위기 상황에 대비해 마련된 조항이 정작 사회급여 삭감에서 최저임금 인하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반사회적인 긴축 재정 조치를 취하는데 제멋대로 마구 악용됐다(에베르트는 1919~2023년 분리독립운동세력, 볼셰비키 세력, 나치 세력 등을 상대로 이 제도를 자주 애용했다).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1930년 3월~1932년 5월)는 2년간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진했다. 디플레이션 정책은 당연히 위기를 더욱 부채질했다. 이에 1931년 가을 이후 재계와 금융계의 반발이 높아졌다. 이들은 조금 더 비정통적인 경제 정책, 공급을 통한 경기 부양(세금 감면, 물론 국민이 아닌 산업을 대상으로 한 보조금 등)을 주장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 측근은 브뤼닝 총리가 긴축 기조를 유지하는 것이, 특히 농지개혁에 입각해 사회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다고 봤다. 브뤼닝 총리는 독일 동부 지대에서 대토지소유주들이 보유하고 있던 잉여농지의 분배를 주장했다.

그런데 힌덴부르크 대통령도 그와 동일한 대토지소유주 계급에 속했다. 이른바 융커(대토지를 소유한 동프로이센의 귀족) 계급은 군과 더불어 힌덴부르크 인맥의 핵심을 차지했다.

한편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을 대하는 전술적 차이 역시 문제였다. 처음에는 나치와 대화를 추진하던 브뤼닝이 끝내 나치의 민병대를 없애기로 작정하고, 1932년 4월 법령을 통해 돌격대(SA)와 친위대(SS)의 활동을 전격 금지했다.

이는 힌덴부르크 측근인 유력 고위인사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이 추구하던 노선과는 전혀 맞지 않았다. 슐라이허는 길거리에서 공산주의자들에 맞서 싸우고, 독일군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나치 군사나 민병대의 기동력이 불가피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는 이 갈색 머리칼을 한 난폭한 덩치들이 바로 군 수뇌부가 그토록 간절히 재건하고자 하는(독일이 전쟁 배상금 지불을 중단함에 따라, 1932년 국가방위군(Reichswehr) 군인 수를 10만 명으로 제한한 베르사유 조약이 완화될 가능성이 열렸다) 독일군의 전력을 채워줄 고급 ‘인적자원’이라고 생각했다.

각종 막후 공작(비밀접촉, 브뤼닝 총리의 등 뒤에서 벌어진 대화, 나치 민병대 금지를 강력히 주장한 국방, 내무장관 빌헬름 그뢰너 장군의 세력 약화를 위한 공작, 임무를 맡을 준비가 된 장관들 리스트 작성) 끝에 결국 브뤼닝이 실각하고, 프란츠 폰 파펜 신임 총리가 임명됐다. 기록적인 단기간 내에 1932년 6월 새 정부가 조직됐다.

 

파펜 정부, 나치와의 야합을 위한 최적의 허수아비

파펜은 정계에서 거의 무명에 가까웠다. 중앙당(Zentrum) 소속 인사이자 프로이센 주의회(Landtag)(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주(Land) 의회) 의원이었던 그는 항상 신중한 태도를 견지했다. 귀족 출신에 전직 군인이자 사업가였던 파펜은 경영자, 고위 공직자, 군인 등으로 구성된 아무나 쉽게 가입할 수 없는 우파 성향의 유력자모임, 신사클럽(Herrenklub)의 일원으로, 중대한 인맥과 영향력을 갖추고 있었다.

슐라이허의 눈에 파펜은 나치와의 야합을 위해 내세울 만한 가장 최적의 허수아비 인사로 보였다(“내가 원하는 건 머리지, 모자가 아니야.”). 파펜은 계획대로 움직여줬고, 나치 돌격대(SA)와 친위대(SS)에 대한 활동 금지령을 해제했다.

1932년 여름, SA와 SS가 대대적인 학살극을 벌였다. 백여 명 이상의 좌파 당원과 지지자들, 심지어 지나가던 행인들이 이들의 총격과 구타에 사망했다. 결국 파펜은 1932년 8월 9일 정치폭력에 대한 특별법령(정치폭력에 대해 항소 기회 없이 바로 사형 집행)을 선포했다.

파펜은 경제 및 사회 부문과 관련해 자신만의 신념이 투철했다. 사회국가를 지속적으로 해체하고, 비로소 기업을 상대로 대대적인 보조금과 세금 공제 혜택을 제공하며 공급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1932년 9월 5일 특별명령을 통해 실제로 현실화됐다.

한편 파펜과 그 측근들(‘보수혁명’의 이론을 정립한 인물 중 한 명인 에드가 융과 카를 슈미트 교수)은 의회민주주의와도 결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회 해산에 이어 열린 1932년 7월 31일 선거에서 나치당은 100여명에서 230명으로 의석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후 9월 12일 폰 파펜 정부는 압도적인 다수의 불신임안이 통과됨에 따라 실각했고, 또다시 의회가 해산됐다.

그해 11월 6일 그다음 선거에서도 또다시 자유주의 우파의 몰락이 재현됐다. 하지만 동시에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도 36석을 독일국가인민당(DNVP)에 내어주며 상당히 후퇴한 모습을 보였다. 사실상 신흥 극우 정당인 DNVP를 이끈 지도자는 아돌프 히틀러에 견줘 카리스마나 매력도가 훨씬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히틀러에 비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연장자로 보이는 알프레트 후겐베르크는 사실상 속물근성이 다분한 대부르주아였지만, 생각에 있어서만큼은 철저히 극우적인 성향(인종차별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이자, 맹렬한 범게르만 민족주의자)을 보였다. 독일 유수기업 크루프의 전 경영진 출신이기도 했던 후겐베르크는 1914년 전까지 독일의 동부 영토 팽창과 폴란드 식민지화를 옹호한 인물이었다.

 

독일 언론, 날조된 공포로 독일인의 우경화를 부채질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각종 주간지와 월간지, 영화사(Deulig와 이어 UFA)들을 줄줄이 인수하고, 영화 시작 전 극장에서 미리 준비된 ‘뉴스릴’을 배포하며 미디어계의 거물로 우뚝 섰다. 후겐베르크는 비용과 이념적 일관성을 이유로 표준화된 콘텐츠를 생산하며, 날조된 공포를 활용해 독일인의 우경화와 히스테리를 부채질했다.

그는 독일의 극심한 우경화를 부추기고, 나치당을 합법적 정당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1929년 후겐베르크는 우파 연대를 주장하며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과 연합해 배상금 축소 협상 영플랜(Young Plan) 반대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이어 1931년 10월 한시적 정치 연합체 하르츠부르크 전선(바이마르 공화국의 단명한 우익 정치 연정체—역주)을 결성해, 나치가 위엄 있고 근엄한 은행, 산업, 군, 더 나아가 정통 우파의 대표자들과 나란히 연단에 함께 자리해도 좋을 만큼 결코 위험하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입증해줬다.

우파는 기존의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독일을 군사 강국으로 재건할 최고의 해법을 놓고 고민이 깊어졌다. 또한 그들이 생각하는 최악의 위험, 다시 말해 공산당 유권자 확대에 맞설 최상의 전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고심했다. 사실상 1932년 가을 나치 지지도가 하락한 것과 달리 공산당 지지자는 선거를 거듭할수록 더욱 확대됐던 것이다.

1932년 8월 파펜 정부는 참담한 총선 패배 이후 두 가지 대책을 구상했다. 첫째, 나치를 국가 행정에 참여시키는 방안이었다. 이미 1932년 초 브뤼닝이 제안했던 것을 파펜이 히틀러에게 다시 제안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이 7월 31일 개최된 의회(Reichstag) 선거에서(11월 6일 선거도 동일) 선두자리를 차지하면서, 당수인 히틀러가 총리 자리를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힌덴부르크는 원칙상의 이유를 들어(힌덴부르크는 우파 연정을 원했지만 NSDAP는 오로지 나치당 출신의 장관으로만 구성된 내각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요구를 거절했다.

게다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에 대해 개인적인 반감도 강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히틀러에게 힌데부르크는 프로이센인이었다. 군 원수였던 힌데부르크에 비해 히틀러는 보잘것없던 하사 출신이었다.

한편 두 번째 대책은 다시 의회를 해산(6개월 동안 벌써 3번째였다!)하고, 무기한 다음 선거를 연기하는 방법이었다(하지만 이는 차기 선거일을 최대 60일 이내로 제한한 헌법 제25조에 위배됐다). 그리고 정부가 요지부동 자리를 지키며 각종 시행령을 통해 원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만일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다면(파업, 시위, 저항운동) 비상시국을 선포해 군대가 공공질서를 회복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군 수뇌부는 1932년 12월 초 공산주의와 나치 세력을 동시에 막아내기란 어렵다는 뜻을 전달했다. 더욱이 외세 침입의 위험이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랬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가능성이 떠올랐다. 1932년 12월 3일 총리로 임명된 쿠르트 폰 슐라이허 장군은 그레고어 슈트라서(장관직을 맡지 못해 실망하고, 선거에서 당의 지지도가 하락할 것을 우려하던 NSDAP의 2인자)와 조합주의자들을 영입하는 사회국가주의 정책을 제안함으로써, 나치당을 분열시키는 방안을 제안했다.

 

기업가와 은행가, 대통령에게 히틀러 총리 임명을 거세게 요구

그런데 슐라이허는 실업 문제 해소 방안으로 농지개혁 실시를 주장한 브뤼닝의 생각을 계승하며, 힌덴부르크와 그 측근들을 자극했다. 결국 파펜은 대토지소유주와 더불어 기업가, 은행가의 지지를 등에 업고 슐라이허를 상대로 음모를 꾸미기로 작정했다.

기업가와 은행가는 1932년 11월 19일 이후로 히틀러를 총리 자리에 앉히자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공개 요구했다. 1933년 1월 4일 은행가 쿠르트 폰 슈뢰더의 자택에서 우파 연합 정부의 원칙을 정하기 위한 비밀 회동이 조직됐다. 이 자리에서 히틀러는 총리, 파펜은 부총리에 앉히는 방안이 거론됐다. 또한 우파 연합 정부는 (‘반민족’ 분자에 대항해) ‘민족’ 정책, 사적 이익에 유리한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히틀러는 이미 1년 반째 경영자 단체들과 수많은 회동을 가져왔다. 나치당은 사회 정당, 게다가 사회주의 정당은 더더욱 아니며, 경제성장을 담보해줄 대대적인 재무장을 표방하는 정당으로, 동부 신흥시장을 힘으로 정복하려고 계획 중인 정당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결국 세 번째 대안이 채택됐다. 1933년 1월 30일 정오, 신임 정부가 마침내 힌덴부르크 대통령 앞에서 선서를 했다. 힌덴부르크는 파펜의 약속에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파펜이 히틀러의 목에 고삐를 단단히 매어두겠다고 맹세하는 한편, 힌덴부르크에게 NSDAP-우파는 이미 1930년 이후 3개 주에서도 연정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1933년 1월 31일, 공식적으로 의회 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힌덴부르크는 ‘민족 집결’의 다수당을 희망하며, 3월 5일 예정된 선거가 최후의 선거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이로써 헌법 제48조 2항의 민주주의는 마침내 독재정권으로 향하는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우파(권위주의 자유주의, 민족보수주의 세력)와 나치가 서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희망한 정권이었다.

 

 

글·요한 샤푸토Johann Chapoutot 
역사학자

번역·허보미
번역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