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 작가들이 왜곡하는 ‘지식인’의 본질
오랫동안 이 단어는 형용사로만 사용됐었다. 그러다 드레퓌스 사건 이후, ‘지식인’은 행동을 위해 깊이 사유하는 사람, 금권 언론·군대·종교에 맞서 공화주의 이상을 지켜내는 수호자라는 의미를 지니게 됐다. 당시 우파는 지식인이 전통을 배신했다고 비판하면서 조롱했다. 하지만 정작 우파의 문필가들도 어느새 지식인 타이틀을 스스로 자처하며,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띠는 이 단어의 본래 의미를 왜곡하기에 이른다.
간첩 활동을 향한 공포는 사회적 질병에 속한다. 1870년 보불전쟁(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나 1871년 독일제국이 선포되었다.—역주) 이후 프랑스와 독일의 지도층이 서로 치열한 각축을 벌이는 상황에서, 19세기 말 내내 간첩을 향한 공포가 유럽의 사회 전역을 물들였다. 유럽의 언론매체에는 ‘간첩’ 재판과 관련한 기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이른바 ‘드레퓌스 사건’(1894년 프랑스 육군참모본부에 근무하던 유대계 드레퓌스 대위가 반역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에 처해져 프랑스령 기아나의 악마섬에 유배되었다. 이후 많은 지식인들의 오랜 항의로 프랑스 법원이 마침내 재심 청구를 받아들였고 결국 1906년 드레퓌스에 무죄를 선고했다. 드레퓌스는 이후 복권되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육군 소령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역주)이 관심을 모은 배경도 이런 사회적 상황과 맥을 같이 한다.
경찰 조사 결과 독일대사관 무관 슈바르츠코펜과 한 이탈리아 외교관이 프랑스인 장교를 ‘매수’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여러 신문들이 보도했다. 1894년 10월 중순 동일 언론사들이 배신자의 정체를 대중 앞에 넌지시 던져줬다. 2개월 뒤 전쟁위원회가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유죄임을 만장일치로 선고했다. 드레퓌스는 국가반역죄 혐의를 받고 대서양의 프랑스령 기아나로 영구 추방됐다.
반유대주의(antisémitisme)—혹은 반유대교주의(antijudaïsme)—라는 표현은 1880년대 중반 파리 부르주아 정치계를 가득 채웠다. 1886년 『유대인의 프랑스』를 저술해 큰 화제를 모으면서, 1889년 프랑스 반유대연맹(LNAF)을 공동 창립하기도 한 에두아르 드뤼몽은 1892년 4월 20일 <라 리브르 파롤> 신문의 창간호를 발간했다.
이 신문은 프랑스군에는 모두 유대인 장교 300명이 복무하고 있는데 그들은 저마다 “비양심적으로 국방 기밀을 팔아먹고 있다”라고 보도했다. 1907년 알자스 출신 기자 이자이 르바이양이 이러한 흑색선전의 효과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그는 “드레퓌스가 이렇게 사건 초반에 객관적인 근거와 분석도 없이 자신에게 둘러씌운 혐의를 씻어내지 못하고 기소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종교와 인종에 대한 편견이 그의 재판을 주동한 자들을 진정한 지적 실명 상태에 빠뜨렸기 때문이다”(1)라고 썼다.
1896년 11월 리옹 대회에서 기독 민주주의 기치 아래 모인 가톨릭 교도들이 채택한 결의안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여실히 보여줬다. 결의안의 내용은 흡사 독일 제3제국이나 프랑스 비시 정권에서 채택했을 법한 규제를 떠올리게 했다.(2)
“유대인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한 1791년 법령 폐지, 알제리 사회의 유대인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부여한 크레미외 법령 폐지, 공교육·법관·행정직 일자리·군 계급·군사위원회·정부 조달 입찰 등에 있어 유대인 배제, 유대인의 독점 및 매점에 대한 형법 적용, 유대인 상인 리스트 발표, 반유대상인지역연맹 조직.”
드레퓌스의 유죄판결 사건이 세간의 무관심을 벗어나기까지는 무려 3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변화를 이끈 주인공은 오귀스트 쉐레르-케스트네르 상원 의원이었다. 그는 1897년 10월 31일 <르피가로>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드레퓌스 대위가 결백하다는 걸 잘 알기에, 내가 가진 모든 힘, 모든 에너지를 다해, 그를 공개 복권시키고, 그가 누려야 할 온당한 정의를 되돌려줄 것이다.”
곧이어 에밀 졸라가 쉐레르-케스트네르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는 1897년 11월 25일 <르피가로>에서 만일 ‘사법적 오류’를 범했다면 오류를 ‘바로잡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가장 중대한 잘못은 “명백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것이라고 했다.
졸라는 1897년 12월 5일 같은 신문에 ‘조서’라는 제목의 기사를 기고했다. 여기서 그는 ‘발정난 저열한 언론’이 명성을 떨쳤던 저 ‘철저한 암흑 속 진창’, ‘수렁’ 속에서도, 여전히 진실이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쁘기만 하다고 썼다. 그리고 “저들이 수년 전부터 매일 아침마다 민중에게 쏟아내던 유대인을 향한 광적인 증오”야말로 해로운 독약이라고 일갈했다.
1898년 1월 13일 졸라는 다시 <로로르(L'Aurore)>(조르주 클레망소의 신문. 조르주 클레망소는 훗날 프랑스 국무회의 의장이 되어 1차 세계대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역주)에 펠릭스 포르 프랑스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투고했다. 여기서도 졸라는 다시 한번 드레퓌스가 얼마나 반유대주의로 가득 찬 이 사회의 희생자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졸라가 8번이나 “나는 고발한다”라는 표현을 쓴 이유
“추악한 반유대주의의 등 뒤에 숨어, 하층민과 서민에게 독약을 주입하고, 반동과 불관용의 격정을 자극하는 것은 범죄다. 이를 치료하지 못한다면, 인권 자유의 위대한 프랑스는 사멸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비판의 최고 백미는 결코 프랑스 제3공화국에 팽배한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공격이 아니었다. 졸라는 특히 프랑스군 수뇌부의 일부 인사들과 그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수하들을 겨냥해 모두 8번의 “나는 고발한다”로 글을 끝마쳤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보기에 명백한 ‘사법적 오류’가 분명해 보이는 문제를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다음 날인 1898년 1월 14일, 일간지 <라 크루아>는 프랑스의 모든 사회 계층이 한마음 한뜻으로 승인한 재판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반대자들을 비판했다.
이 카톨릭 신문은 졸라를 ‘무례한 반박문’의 저자로 간주했다. 졸라는 국가 반역자들을 지휘하는 사령탑으로 인식됐다.
“드레퓌스 사건에서 유대인과 사회주의자가 왜 그리 서로 죽이 잘 맞는지 아는가? 왜냐하면 두 부류 모두 세계주의자이기 때문이다. 한쪽은 조국이 없는 자이고, 나머지 한쪽은 조국을 원하지 않는 자다.”
역시 1월 14일 자 <로로르>에서 클레망소는 졸라를 위해 지원 사격에 나섰다. 클레망소는 사회 원칙의 준수를 논거로 내세웠다.
드레퓌스 재심 요구자 명단이 나온 이후, ‘지식인’이란 단어 유행
“한 개인을 상대로 정의가 보장되지 못한다면, 사회 집단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한편 이 신문의 별지에도 드레퓌스의 ‘재심’을 요구하는 ‘항의자들’의 첫 시리즈가 실렸다. 맨 상단에는 졸라의 이름이 올랐고, 유명 작가 아나톨 프랑스와 그리고 파스퇴르 연구소 소장이자 생물학자인 에밀 뒤클로의 이름이 뒤를 이었다. 그 밖에도 수많은 대학교수와 작가의 이름이 열거됐는데, 그 가운데는 저명한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 언론매체에 ‘지식인’(intellectuels)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까지 이 단어는 형용사적 용법으로만 사용됐었다.(3) 저명한 문필가 앙리 푸키에는 1896년 이후 자신의 기사에서 주기적으로 이 단어를 명사로 사용하며 지식인이라는 표현을 대중화한 기자 중 한 명에 속했다.
푸키에가 생각하는 지식인이란 행동을 위해 깊이 사유하는 사람, 자신의 사상을 이론으로 정립할 줄 아는 사람을 뜻했다. 푸키에는 1848년 혁명을 계승한 급진사회주의 계열 일간지 <르 라펠>(1896년 2월 6일)에서 지식인을 국가가 공포한 권리, 하지만 한낱 ‘국가라는 미명을 내세워 남용’된 것에 불과한 권리, ‘항상 더 확대되기만 하는 금권’에 대한 고발자로 묘사했다.
1897년 9월 4일 이번에도 역시 <르 라펠>에서 푸키에는 지식인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내리기 위해 다시 한번 이들 지식인에 대해 거론했다. 그에 따르면, 지식인의 특징은 무사무욕에 있었다. 그는 지식인이 ‘돈을 좋아하는 사람’인 경우는 “극히 드물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지식인의 경우, 시민 활동의 유일한 동기는 도덕적 가치와 청렴성뿐이라고 지적했다.
푸키에가 말한 기준은 <로로르>지가 이들 ‘지식인’의 특성을 규정하는 잣대이기도 했다. 1898년 1월 23일 클레망소는 이 신문에서 ‘원내정당’ 인사들이 “우발성보다 더 높은 차원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버젓이 ‘법이 유린’되는 상황을 지켜보고도 그저 내버려 두며, “‘밀실 정치’, ‘협잡 정치’를 위해 고귀함을 저버렸다”라고 개탄했다.
“지식인은 공화주의 이상을 지켜내는 ‘진정한 수호자’”
이런 이유에서 클레망소는 이탤릭체 대문자로 유난히 강조 표현하면서까지, 이른바 지식인들(Intellectuels)을 예찬했다. 같은 날짜의 <로로르>지에서 클레망소의 비서 앙리 레이레도 역시 대문자로 강조된 이 지식인들(Intellectuels)이 모든 제도화된 저열성을 벗어던지고 ‘이성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식인들은 칼과 성수채(성수를 살포할 때 사용하는 기구—역주)의 결탁에 맞서, “광신적이거나 혹은 매수된 언론에 대항해서, 기만당하거나 혹은 실성한 민중을 상대로”, 공화주의 이상을 지켜내는 ‘진정한 수호자’라고 소개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지식인이란 표현은 경멸적인 표현으로 뒤바뀌어 프랑스 우파의 독설 속 단골멘트로 등장했다. 가령 <라 리브르 파롤>(1898년 1월 30일)은 이렇게 혐오의 고함을 내질렀다.
“우리는 지식인(Intellectuels)이 되기를 열망하지 않는다. 그저 지적인 사람(intelligents)이 되는 데 만족할 뿐이다.”
같은 날 <프티 주르날>의 발행인 에르네스트 쥐데도 ‘흉악한 순진무구함’으로 인해 길을 잃은 ‘고장 난 뇌들’을 통렬히 비판했다. 하지만 역시 최고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1898년 2월 1일 <르 주르날>에 실렸던 소설가 모리스 바레스의 조소였다. 그는 ‘드레퓌스 옹호’ 탄원서를 ‘다수의 얼간이들’이 승인한 ‘엘리트 목록’이라며 신랄하게 조롱했다.
적들은 지식인을 반민족주의자, 유대인, 혹은 친유대 세력으로 규정했다. 1899년 6월 17일 민족주의 단체 ‘라 파트리 프랑세즈’의 파리 연례 컨퍼런스에서 르네 두미크는 지식인의 주요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그에 따르면, 지식인은 ‘전통적인 사상’, 권위의 원칙에 반대하는 자들이며, ‘위계도, 규율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국제주의자들’이자, ‘집산주의자들’이었다. 프랑스의 가치를 위협하는 강경한 적들이었다.
‘지식인’이란 단어, 어느새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철저히 변질돼
바레스나 두미크처럼 진정한 프랑스 에너지의 수호자를 자처한 무리는 지식인을 문화의 해체에 골몰하는 선동가로 취급했다. 본래 드레퓌스 옹호자에서 훗날 샤를르 모라스가 표방한 통합 민족주의(nationalisme intégral)의 확고한 추앙자로 변신한 앙리 보주아는 <락시옹 프랑세즈>(1909년 3월 29일)에서 이른바 ‘드레퓌스파들의 공화국’을 맹렬히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그곳은 ‘취향의 부패’가 지배하는 세계였다.
이런 지식인들의 이미지는 보수주의나 반동주의 집단의 상상계 속에 편견과 관념으로 강력히 자리 잡았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독일에 맞선 ‘신성동맹’이 예찬되는 분위기 속에서, 다시금 이러한 지식인의 이미지가 더욱 강화됐다.
그럼에도 한동안 ‘반드레퓌스파들’은 자신들이 지식인으로 여겨지지 않는 데 대해 어느 정도 굴욕감을 느끼던 때가 있었다! 가령 1919년 7월 민족주의자 앙리 마시스는 <르피가로>에 ‘지성 정당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선언문을 기고했다. 선언문에서 그는 ‘엘리트 지식인’은 ‘국가, 가정, 개인’을 파괴하는 ‘볼셰비즘’에 맞선 자신의 ‘의무’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고 명시했다.
당시는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좌파 내에 프랑스 정치 구조를 변혁하는 데 앞장서야 할 지식인의 소명이 요구되던 시절이었다. 가령 1921년 소논문 <입에 칼을 물고서>에서 앙리 바르뷔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지식인(여기서 내가 말하는 지식인이란 결코 익살꾼, 선무당, 마음을 이용하는 자들이 아니다. 바로 생각하는 자들이다)은 삶의 혼돈 속에서 사상을 전달하는 번역자다.”(4)
그렇다면 지식인의 임무는 무엇일까? 바로 공산주의를 둘러싼 온갖 궤변을 불식시키는 것이었다. 사실상 공산주의는 “연약한 정신을 가진 자들 중에서 특히 쉽게 속아 넘어가는 가련한 우민을 상대로 조악하게 변질되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맞서 프랑스 우파도 철저히 지성을 무기로 삼고자 했다. 프랑스 우파의 대표자들은 지성의 사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득세 중인 파시즘을 용인했다. 어느새 수많은 인사가 민족주의, 식민지주의, 인종주의 지식인의 위상을 뽐내기에 이르렀다.
지식인을 과시하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애석한 말이지만, 지식인이란 단어는 어느새 본래의 궤도를 벗어나 길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급기야 의미가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신뢰와 명예의 징표로 여겨지던 본래 용법과는 철저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말이다.
글·리오넬 리샤르 Lionel Richard
역사학자. 피카르디 쥘 베른 대학교 명예교수.
번역·허보미
번역위원
(1) Isaïe Levaillant, 「La Genèse de l’antisémitisme sous la troisième République. Conférence faite à la société des études juives le 14 avril 1907 제3공화국 반유대주의의 기원. 1907년 4월 14일 유대인 연구회 컨퍼런스」, <Revue des études juives>, 제53권, 제106호, Paris, 1907년 4/5월.
(2) <Le Temps>, Paris, 1896년 11월 28일.
(3) Geneviève Idt, 「L’intellectuel avant l’affaire Dreyfus 드레퓌스 사건 전의 지식인」, <Cahiers de lexicologie>, Paris, 제15권, 제2호, Paris, 1969년.
(4) Henri Barbusse, 『Le Couteau entre les dents. Aux Intellectuels 칼을 입에 물고서. 지식인들에게』, Editions Clarté, Paris, 192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