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르트헤이트 시대로 돌아간 대학살
경찰 특별 진압대가 강철 띠로 통제선을 두르고 지켜보는 가운데, 카메라 여러 대가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전통 의상 차림으로 집결한 사람들의 수는 어림잡아 수천 명은 돼 보였고, 이들은 주홍빛 화산암 광산을 점거하고 있었다. 광산의 경사진 언덕 아래로는 메마른 대초원이 펼쳐졌고, 지형적으로 형성된 이 대피처 부근에서 이미 남자 8명과 여자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영국의 대형 광산 기업 론민과 광산 노동자들 사이의 격렬한 대치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언쟁 끝에 경찰관 2명이 죽은 사건 이후 상황은 급박하게 전개됐다.
지난 8월 16일, 경찰 진압대와 10여 대의 장갑차는 '경이로움의 언덕' 원더콥(Wonderkop)을 에워쌌다. 조금 더 아래로 내려가면 광산마을 마리카나로 이어지는 울퉁불퉁한 도로 위에서 200명이 넘는 경찰관과 민간 보안 직원들이 플라스틱 식기에 식사를 하고 있다. 일부는 다 비운 식기를 바닥에 내던진 뒤, 대초원의 메마른 풀숲 위로 태연히 소변을 본다. 진압보다 더 중요한 이 일상적 행동을 할 때 방탄조끼와 무기는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일 뿐이다.
언덕 위에서는 광산 노동자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플래카드를 들고 이동한다. 평소 같으면 시추·정지·폭파 작업에 매진했을 인부들이다. 이들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바위에서 고작 몇g밖에 나오지 않는 백금을 채굴하던 땅속에서 나와 이같은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마리카나 광산의 직원들은 최저급여 노동자들을 지지하기 위해 8월 10일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의 요구는 월급여를 최고 1만2500랜드(약 164만 원)로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시추 작업을 하는 인부들은 매월 4350랜드(약 59만 원)에서 5100랜드(약 69만 원)의 급여를 받는다. 상여금을 포함한 세전 소득이다. 이들의 임금 인상 요구에 대해 기업 지도부 쪽에서 반발하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남아공 최대의 노조 연합 '남아프리카공화국노동조합회의'에서 가장 비중이 높은 노조 '전국광산노동자연합'과의 임금협정이 내년에나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파업을 호소한 건 시추 작업을 담당하는 노동자들이었다. 갱도 내벽에 대고 직접 작업하는 이들은 하루 8시간씩 천공기 위에서 작업하는데, 무게 25kg의 천공기에서 작업하다 보면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극심한 진동이 느껴진다. 낙반 사고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손가락을 잃거나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광산에서 이뤄지는 작업 중 가장 위험한 일임에도, 이들은 한 달에 고작 4천 랜드(약 54만 원) 정도밖에 받지 못한다.
광산 노동자들은 기업 지도부와 노조 대표로부터 자신들이 모욕과 멸시를 받고 있다고 느꼈다. 기업 지도부가 자신들을 무시하며, 노조는 자신들의 권익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시추 작업을 담당하는 한 노동자는 "노조에 가입돼 있으나 노조가 우리를 대표한다는 느낌은 받지 못한다. 걱정을 토로해도 이에 대한 조처가 이뤄지지 않는다. 나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존재이고, 저들이 내리는 결정에서 아무런 득을 보지 못한 채 언제나 유린당하는 느낌이다. 우리는 학대를 당하며 일을 해야 한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 힘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보다 돈을 더 많이 받는 다른 파트의 직원들이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을까? 우리는 노조와 고용주가 우리 말을 들어주도록 할 것이다. 저들이 우리 요구를 들어줄 때까지 정당한 폭력을 행사할 것이다." 그래서 파업이 시작됐고, 시위대의 행군이 시작됐으며,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30명이 경찰의 총에 죽은 광산파업
8월 16일, 폭력까지 불사하기로 결심한 파업 노동자들은 마치 제단 앞에라도 서듯 광산 앞에 모여 인간으로서의 권리 회복을 기대했다. 이들은 언덕 아래 어느 구덩이 안에 들어가 옛 전통 의식을 거행했다. 외부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그곳에서 과거의 주술 의식에 참여한 것이다. 적들에게 감행할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면죄부를 얻고, 저들이 퍼부을 총탄이 물로 바뀌길 바라는 의식이었다.
오후가 되자 경찰은 시위대를 둘러싼 통제선을 죄어왔고, 시위대는 장갑차와 통제선 사이에 어느 정도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두 그룹이 이 유일한 출구 가까이로 다가가던 그때, 경찰은 최루가스와 고무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시위대 중 1명이 자신의 권총으로 반격하자 10여 명의 경찰관이 자동소총을 꺼내들며 공격을 개시했다.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최소 12명이 쓰러졌다. 범죄의 현장에서 수집한 증언과 증거 자료에 따르면, 사상자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기자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것이다. 이같은 참사로 광부 14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대부분 진압대에 항복하려는 사람들이었다. 현장에 있던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시위대 중 1명이 손을 들어 올리며 우리에게 '항복합시다!'라고 말했다. 경찰들이 쏜 총에 그의 두 손가락이 맞았다. 남자가 쓰러졌다. 이어 남자는 다시 몸을 일으키며 '여러분, 항복합시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두 번째 총알이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남자는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세 번째 총알이 날아와 그의 옆구리에 맞았다. 남자는 바닥에 쓰러졌지만 계속 움직여보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이 사람의 바로 뒤에 있던 남자 역시 항복하려고 했지만, 정수리 한가운데에 총알이 와서 박혔다. 남자는 아까 그 사람 옆으로 쓰러졌다."
정당방위 주장은 얼마나 진실인가
경찰들은 '경찰 살인범'에 대한 정당한 조처였다고 말했다. 어떻게 이같은 즉결 처형이 그렇게 대규모로 이뤄질 수 있었을까? 경찰과 정치권 윗선 어딘가에서 시위대가 승리하도록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경찰들 대부분은 단순한 소요 사태 발생시 사용하는 장비를 갖춘 게 아니라 저격 소총으로 단단히 무장한 상태였다. 이들에게 어떤 명령이 내려진 것인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마리카나 광산에서 사망한 광부 수는 모두 34명이며, 78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기소된 경찰은 1명도 없었으나, 동료 살인죄로 기소된 광산 노동자 수는 200명이 넘었다. 인종분리 정책이 실시되던 당시 기반을 둔 말도 안 되는 법 적용 때문이다. 이들은 곧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경찰의 진압 작전은 계속됐고, 노동자들은 가택수사까지 받아야 했다. 마리카나의 폭력 사태는 일단락된 것으로 보이지만, 론민은 노동자 1200명의 해고를 발표했다. 노사정(勞使政) 세 주체 사이에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면서 남아공도 어느 정도 체면을 살리고 자국 경제의 핵심인 광산업계 활동도 다시 재기할 수 있을 듯 보이지만, 광산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이번 사태의 최대 희생자가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글•그레그 마리노비치 Greg Marinovich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언론인 겸 사진가.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