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는 정말 살만한 곳이 되었을까?
한국 저널리스트가 다녀온 종족 학살 30년 이후의 현장
플라스틱 쓰레기는 어느 나라에서나 골칫거리다. 특히 저개발국을 돌아다니다 보면 온갖 쓰레기, 비닐과 캔 따위가 골목을 채우고 있다. 실개천에도, 바닷가에도, 수풀 사이에도. 글로벌화가 낳은 상품의 범람과, 행정 인프라가 부족한 저개발국의 현실이 결합된 것이 길가의 쓰레기들이다.
길에 쓰레기가 없는 나라가 있다면? 비닐봉지가 없는 나라가 있다면? 그게 르완다다. 물론 비닐로 포장된 상품이야 있지만 어떤 가게에서든 물건을 담는 용도로 비닐봉지를 쓸 수는 없다.
아직도 외부 세계엔 30년 전의 ‘제노사이드’ ‘학살’ ‘내전’으로 각인돼 있는 르완다를 설명하면서 비닐봉지 얘기부터 꺼낸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나라를 가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깨끗하다”는 것이다.
올여름 동아프리카의 르완다를 방문했다. 수도 키갈리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머릿속에 박힌 것은 압도적인 깨끗함이었다. 자세히 보면 허름하지만 얼핏 보기엔 고급 빌라촌처럼 보이는 깔끔한 집들이 키갈리의 언덕들을 채우고 있다. 대륙 전체에서 11개국,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만 9개국을 다녀봤지만 이 나라의 깔끔함은 경이로웠다.
아시아나 유럽의 어디를 떠올려봐도 르완다는 예외적이었다. 기묘할 정도의 깨끗함 속에서 느껴지는 압박감. 연중 내내 무더위도 추위도 없는 내륙의 고지대, 건기의 쾌적함 속에서도 어쩐지 행동을 조심하게 만드는 미묘한 압박감이 공기 중을 떠도는 듯했다.
르완다는 2008년 비닐봉지의 제조, 사용, 수입, 판매를 금지했다. 잘 사는 나라들은 환경을 생각하겠지만 갈 길 바쁜 나라들은 경제발전부터 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르완다의 비닐봉지 금지령은 그런 인식에 타격을 가한다. 산업혁명 이래로 ‘발전한’ 나라들은 지구를 더럽히며 부자가 됐다.
이제부터 좀 더 잘 살고 싶은 나라들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할까? 그러지 않고서 발전할 방법은 없을까. 인구 1,400만 명에 면적 2만 6,000㎢, 동아프리카의 이 작은 나라가 그 길을 걷고자 한다.
르완다와 콩고민주공화국, 우간다가 만나는 국경지대는 화산과 호수와 열대우림이 겹쳐있는 종 다양성의 보고(寶庫)다. 특히 유명한 동물은 마운틴고릴라다. 전 세계에 1,000마리 남짓밖에 남지 않은 마운틴고릴라가 이 3개국이 만나는 숲 지대에서 살아간다. 마운틴고릴라가 가장 많은 곳은 500마리 넘게 서식하는 우간다의 브윈디 국립공원이지만 남쪽에 바로 붙어 있는 르완다의 비룽가(Virunga)가 더 유명하다. 미국의 영장류 학자 다이앤 포시가 이곳에서 20년 동안 고릴라를 연구하다가 1985년 의문의 살해를 당했고, 이 사건이 영화로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고릴라들의 숲에서, 인간은 주인이 아닌 방문객일 뿐
야생의 개체 수가 워낙 적기 때문에 마운틴고릴라를 보기는 매우 까다롭다. 르완다나 우간다, 케냐처럼 생태관광으로 돈을 버는 나라들은 야생을 보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 가난한 나라니까 시스템이 엉성하겠지 생각하면 오산이다. 마운틴고릴라를 보기 위한 허가증 비용이 무려 1인당 1,500달러인데 그나마도 두어 달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릴라 1,000여 마리의 출생과 사망, 가족구성과 가계도를 관리인들과 숲속 마을 주민들이 모두 파악하고 있고, 그들의 안전과 안녕을 면밀히 살피고 지킨다. 고릴라를 만나는 투어에는 전문 안내원인 레인저들과 마을 주민들로 이뤄진 트래커, 추적꾼들이 동행해 한정된 숫자의 관광객을 관리한다.
숲속에서 큰 소리로 웃거나 떠드는 것은 어림도 없다. 코로나19 이후로는 고릴라들에게 병을 옮기지 않도록 마스크도 써야 한다. 고릴라를 보는 시간도 1시간을 넘길 수 없다. 고릴라들의 숲에서 인간은 주인이 아닌 방문객일 뿐이다. 밀렵이나 불법 벌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다이앤 포시의 시대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숲을 지키는 것은 그 대륙의 국가들이다. 종 다양성을 지켜나갈 책임을 떠안은 그들은 부자 나라들에 구걸하는 게 아니라 그 임무에 대한 대가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야생을 지키는 것은 쉽지도 않고 단순하지도 않은 과제다.
개발과 보존의 딜레마보다 어쩌면 더 복잡한 또 다른 딜레마는 민주주의다. 르완다의 너무 깨끗한 골목들에서 느껴지는 권위주의의 압박감을 곱씹기 전에 30년 전의 르완다 학살을 되짚어 보자.
르완다가 벨기에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해 1962년 공화국을 세우면서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후투족이 권력을 잡았다. 이미 그전 몇 년 동안 벨기에 통치 시절의 기득권이었던 소수민족 투치를 겨냥한 폭력 사태가 벌어졌다. 후투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화 투쟁에 투치가 많이 참여했고, 탄압을 피해 상당수가 우간다를 비롯한 이웃 나라들로 피신해갔다. 키가 크고 코가 높고 얼굴이 갸름한 투치, 코가 낮고 넓은 후투. 일각에서는 후투와 투치의 이런 구분 자체를 벨기에가 의도적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분할 통치를 위한 벨기에의 이간책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공정하게 말하면 이전부터 있던 구분을 벨기에가 제도화, 고착화했다고 봐야 한다. 르완다의 민속박물관 등에 가면 근대 이전 시기에 르완다를 지배한 ‘투치 왕국’들의 자취를 볼 수 있다. 후투족 대통령이 의문의 항공기 사고로 숨진 뒤 투치 대학살이 시작됐다. 80만~100만 명이 숨졌다.
피해 규모가 엄청나기도 했지만, 르완다를 자꾸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힘겨운 진상 규명과 처벌, 그리고 재발을 막기 위한 피눈물 나는 노력 때문이다. 1996~1997년부터 학살자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됐다. 이전까지 후투, 투치 가리지 않고 한 마을에 섞여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내 남편이 내 오빠를 죽이고, 이웃집 남성이 내 여동생을 강간하고, 엊그제까지 함께 놀던 이웃이 학살자들에게 내 아이들을 넘겼다. 피해자가 많은 만큼 가해자도 많다.
제노사이드 이후의 헌법, 부족갈등 선동을 중대 범죄로 규정
이 비극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과정은 힘들 수밖에 없다. ‘블러디 다이아몬드’로 유명한 서아프리카 내전의 당사국 시에라리온이나 크메르 루주의 대학살을 겪은 캄보디아, 르완다와 비슷한 시기에 탈냉전의 혼돈을 참혹하게 겪었던 옛 유고연방 등은 이 과정을 국제법정에 맡기거나 유엔 등의 도움으로 아직까지 재판을 진행 중이다. 하지만 국제사회가 개입하게 되면 그 나라 사람들이 스스로 과거와 대면하고 화해를 모색하기가 오히려 힘들어진다. 심지어 가해자들은 자기네들이 정치적으로 부당한 핍박을 받고 있다며 재판의 정당성을 부인하곤 한다.
르완다는 이 어려운 과정을 해냈다. 다른 나라가 개입된 일에 대해서는 탄자니아에 설치된 유엔 국제형사재판소(ICTR)가 재판을 했고, 내부에서 벌어진 일은 스스로 조사하고 처벌했다. 우간다에 피신해 힘을 키웠던 르완다애국전선(RPF)이 들어와 내전을 끝내고 집권했으나 사법체계가 거의 무너진 상태였다. 애국전선 정부는 그래서 가카카(Gacaca)라고 불리는 ‘동네 법원’을 만들었다. 행정구역마다 가카카 법정을 꾸리고 가해자를 경중에 따라 처벌했다.
제노사이드 뒤에 만들어진 헌법은 폭력 사태가 재발하는 것을 막는 데 초점을 맞췄다. 신분증에서 부족 표기가 사라졌다. 부족 갈등을 부추기고 선동하는 것은 중대한 범죄다. 또 하나의 축은 젠더 평등이다. 내전 때 후투 선동가들은 ‘후투 십계명’이라는 걸 만들어서 투치를 죽이라고 부추겼다. 그중 첫째, 둘째, 셋째 계명이 투치 여성들, 투치와 관계된 후투 여성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래서 르완다는 여성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을 중시한다. 여성들 스스로도 노력한다.
세상 일에 의문을 가지라는 의미에서 브랜드 이름을 정한 ‘퀘스천’이라는 커피 회사가 있다. 협동조합 농장에서 직접 커피를 키워 가공하고 키갈리 시내 카페에서 커피와 원두를 판다. 서울 어느 카페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세련된 카페다. 농장부터 카페까지 여성들이 운영한다. 내전 때 다치거나 가족을 잃은 여성들이 만든 전통공예품 조합도 많다. 여성을 상대로 한 폭력은 매우 엄하게 처벌한다. 결혼을 하면 모든 재산을 부부가 50 대 50으로 등록한다.
의회에서 여성 의원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가 르완다다. 하원 80석 중에 여성이 49석(61%)을 차지한다. 성평등지수(Gender Gap Index)에서 이 나라는 항상 상위권을 차지한다. 2024년 지수에서는 이전보다 많이 떨어진 세계 랭킹 39위였지만 그 전해에는 12위였다. 한국은 94위다. 선출직이나 정부기관뿐 아니라 사기업이든 재단이든 모든 조직에서는 이사회 멤버의 30%를 여성에 할당한다.
‘군기가 잡힌’ 사회 분위기, 통제와 순응의 이면
마찬가지로 학살을 겪은 서아프리카의 라이베리아에서도 국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여성들이 내전 세력들의 무장 해제와 마을 살리기에 큰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르완다 남성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공격적인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생활화된 모습에 깜짝 놀라게 된다. ‘쩍벌남’에 익숙한 사회에서 살아온 여성으로서, 남성들이 혼잡한 곳에서 팔다리를 마구 휘두르며 다닐 수 있게 만드는 그 무의식 속의 권력을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론 폴 카가메 대통령부터 시작해서 여전히 르완다 정치지도자들은 남성이다. 더 큰 문제는 모든 측면의 군사화다. 애국전선 정권이 재구축한 르완다군은 강하고 규율 잡힌 군대다. 군대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군기가 잡혀 있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의 한 측면이 지나치게 깨끗하고 너무나도 안전한 사회다. 늦은 밤 키갈리 거리를 여성 혼자 돌아다녀도 위험할 일은 없다.
반대쪽 측면은 통제와 순응이다. 불가능할 정도의 깨끗함을 가능하게 한 것은 촘촘히 조직화된 위계적인 행정이다. 학살을 딛고 일어선 모습을 세계에 보여줘야 한다는 집념과 함께, 카가메 정부가 “빌딩을 지으라”고 지시하면 기업이 건물을 올려야 하는 것이 이 나라라고 앙투안은 말했다.
카가메는 지난 30년 동안 대체 어떠한 나라를 만든 것인가. 경외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이 된 것은 2000년이지만 애국전선 사령관으로서 내전을 진압한 이후 국방 장관과 부통령을 지내던 동안에도 실질적인 권력자였다. 때마침 7월 15일은 대통령 선거일이었고 곳곳에서 애국전선의 표시들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선거 분위기’ 같은 것은 없었다. 카가메는 98.2%의 투표율, 99.2%의 득표율로 4선에 성공했다. 북쪽 우간다 접경지대의 녕웨(Nyungwe)에서 만난 한 중령은 “카가메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선거가 일주일 남았지만 이미 그 한 주 전부터 ‘만일의 혼란에 대비해’ 국경 지대에 군인들이 배치돼 있었다. 그는 “지금 우리 군대는 강하고, 규율이 잡혀 있고, 우리나라는 안정돼 있다”고 강조했다.
그 규율 잡힌 르완다 군대가 이웃한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툭하면 넘어가 천연자원을 약탈해온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지만. 카가메를 예찬하는 그가 군인 신분임을 굳이 고려할 필요는 없다. 정부에 비판적인 앙투안도 “부정선거를 저지를 필요조차 없다”고 담담히 말했다. 67세 카가메는 아마도 다음 대선에서도, 혹은 그다음 대선에서도 승리할 것이다.
장기집권하는 카가메, ‘한국형 개발독재 모델’ 가능할까?
르완다의 안정은 국제사회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고, 그간 서방도 이 나라에 대해서는 칭찬 일색이었다. 그러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 카가메의 장기집권과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비판이 늘고 있다. 그러나 독재자라 폄하할 수는 없다. 세상 어디서든 불안보다는 안전이, 무질서보다는 질서가 낫다. 정권의 억압을 비판하는 앙투안에게 “다른 나라에 가서 살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는 케냐에 다녀온 경험을 이야기했다. “나이로비에서는 횡단보도나 신호등이 없어서 길을 건너지 못하겠더라. 르완다 사람들은 그런 곳에선 못 산다.”
매달 한 번씩 동네를 돌며 강제로 청소를 해야 하지만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동네에서 사는 것보다는 낫다. 범죄와 유혈사태를 걱정하며 사는 것보다는 강한 군대와 결합된 권위적인 통치자가 안전을 지켜주는 곳에서 사는 게 낫다. 게다가 카가메는 쿠데타로 집권한 찬탈자가 아니라 내전을 끝낸 영웅이다. 이 나라의 ‘해방일’은 벨기에로부터 독립된 날이 아니라 애국전선이 키갈리의 학살을 끝낸 날이다.
시민 의식이 성숙돼 있지 않거나 건강한 야당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곳에 갑자기 민주주의를 이식했을 때 생겨나는 문제들을 우리는 안다.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이집트에서 이슬람주의 정치조직이 득세했다가 다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것, 시리아가 내전에 휩싸인 것, 리비아가 동과 서로 갈려 아직도 싸우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시민 의식과 건전한 야당 세력은 민주주의를 통해 배워 가고 만들어 가는 것이다. 카가메 이후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카가메 정부의 목표는 당연히 개발과 성장이다. 한국 같은 나라가 이들의 모델이다. ‘개발독재’를 활용한 성장이 르완다에서도 가능할까? 한국형 성장모델을 다른 나라에 옮겨심거나, 다른 저개발국이 따라 하기는 힘들다. 한국의 고속성장은 특정 시기, 특정한 세계 경제의 구조 속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세계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기에 글로벌 분업구조 속에서 저임금 노동집약형 산업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중공업으로 갈아탈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의 저개발국들에게는 그렇게 올라탈 흐름이 없다.
제조업 기반이 없는 르완다가 기대를 거는 것은 정보기술(IT)이다. 인프라가 열악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유선통신을 건너뛰고 모바일로 이동하는 ‘퀀텀점프’를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은행 ATM보다 모바일 금융이 자리를 잡았다. 외진 구석까지 핀테크가 속속들이 들어가 있고, 누구나 모바일로 돈 거래를 한다. 키갈리는 도시 전체에 무료 퍼블릭 와이파이가 깔려 있다. 배달앱이 인기를 끌고, 식당 앞에 배달 오토바이가 줄을 선다.
“지금 갈등이 터져 나온다면, 그건 빈부격차 때문일 것”
그럼에도 아직은 저개발국인 것은 분명하다. 1인당 실질 GDP 3000달러, 세계에서도 최빈국 가운데 하나다. 학살 당시를 담은 <호텔 르완다>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는데 거기 나오는 키갈리의 호텔 이름이 밀 콜린스다. 프랑스어로 ‘천 개의 언덕을 가진 나라(pays des mille collines)’에서 따온 표현이다. 르완다는 평지가 없다. 수도 키갈리조차도 온통 구릉들로 이뤄져 있다. 더군다나 바다와 접하지 않는 내륙국가다. 영국의 개발경제학자 폴 콜리어는 아프리카 내륙의 이런 지리적 한계를 ’내륙국가의 덫‘이라고 표현했다. 르완다는 그 덫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제노사이드는 재발하지 않을까. 그토록 고군분투해왔는데, 지금은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앙투안은 “만일 지금 갈등이 터져나온다면 부족 문제가 아니라 빈부격차 때문일 것”이라며 “10대인 내 아들만 해도 투치니 후투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갈등은 너무 쉽게 남 탓의 외피를 쓴다. 남의 부족 탓, 이민자 탓, 한국의 경우는 ‘여자들 탓’. 르완다 상황에 대해 긍정적, 부정적인 측면을 같이 전해준 중령도 변호사도 실은 모두 투치족이었다. 그들이 사회의 위층을 구성하고 있다. 르완다 정부는 제노사이드 이후 인구 85%를 차지하는 후투와 14%인 투치, 1%인 트와를 모두 ‘바냐르완다’ 즉 ‘르완다 민족’으로 재규정했다.
그런데 부족을 구분하지 말라던 카가메 정권이 요즘 들어 제노사이드를 ‘투치에 대한 학살’로 재규정하고 있다. 투치족이 많이 희생된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살에 반대한 후투족들도 목숨을 잃었고 투치족의 후투 보복 학살도 있었다. 한때 비하적인 표현으로 ‘피그미’라 불렸던 트와(Twa)족은 3만 명 중 1만 명이 희생됐다. ‘투치 대학살’로 규정되는 순간 그들의 존재는 사라진다. 무엇보다,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옛 유고연방의 민족 분규는 70년간 눌러놓았음에도 끝내 터져나왔다.
르완다는 깨끗하고 안전하고 아름다웠다. 커피는 맛있고, 사람들은 상냥했다. 내전 이후 이 나라는 힘겨운 길을 그럭저럭 잘 걸어왔다. 이 나라가 이뤄낸 성취는 보기에 따라선 눈부시다. 그러나 앞으로 어디로 갈지, 아직은 모른다. 국경마을 기사쿠라에서 만난 마숨부코는 정규교육을 거의 못 받은 60대 남성인데 독학으로 여러나라 말을 익혔다. 흙집에서 전통 바나나술을 담그는 법을 보여주면서, 왓츠앱으로 연락하며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마숨부코의 아들과 손주들에게 더 나은 삶의 기회가 펼쳐질 수 있기를.
글·구정은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 신문사에서 오래 일하면서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취재했다. 현재는 독립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 『사라진 버려진 남겨진』, 『10년 후 세계사』 등의 책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