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인들은 왜 남쪽으로 이민을 떠나나

2012-10-14     기욤 피트롱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요하네스버그로 향한다. 해마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새로운 엘도라도로 떠오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땅을 밟고자 온갖 위험을 감수한다.

벌써 정오다. 20살 정도로 보이는 콩고 통역관인 에티엔 보콜리는 조바심이 났다. 하늘 높이 뜬 겨울 해가 무시나의 건물 지붕을 뜨겁게 달궜지만 친구 바바사르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아침 7시부터 세네갈 출신 청년은 100여 명의 불법 이민자들과 함께 짐바브웨 국경에서 가까운 무시나에 있는 이민자수용센터에 갇혀 있었다. "그 친구는 가시덤불을 헤치며 국경을 넘어 오늘 아침 이민자센터에 도착했어요. 겁에 질려 망명 요청도 영어로 못했지요. 제가 통역을 해줬어요." 보콜리는 인터뷰 대가로 얼마를 기대하며 말을 이었다.

다카르에서 킨샤사로 다시 루붐바시로 비행기를 타고 잠비아에서 짐바브웨까지 한 달을 헤맸다. 바바사르처럼 "사하라 북부 국가에서 육로로 들어온 불법 이민자가 매년 수천 명"이라고 국제이주기구의 현지 사무소장인 음필로 은코모가 전했다. 몇백 랜드(1)를 받고 짐바브웨 국경 통과 브로커들은 삼중 철조망을 열어 림포포강을 건널 수 있도록 도왔다. 은코모는 "남자·여자·아이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밤이 되면 강을 헤엄쳐 건넌다"고 말했다. "덤불 속에서 브로커들한테 털리거나, 악어나 블랙맘바(아프리카 독사의 일종)를 만나지 않기만 해도 운이 좋은 것이다."

그들은 이제 국경수비대의 순찰을 피해 붉은 철망으로 둘러싸인 큰 건물에 모였다. 소말리아에서 모리타니, 차드에서 짐바브웨에 이르기까지 아프리카의 모든 민족이 보낸 '비밀특사'들이 오늘 아침 이곳에 모였다. 임시체류증을 손에 들고 하나둘 중앙아프리카를 떠난 이민 희망자들이다. 다양한 프로필의 무리 속에 바바사르도 있었다. 아니 그가 버스터미널에서 단체택시로 휩쓸려 들어가려고 할 때 겁에 질린 그를 구해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그의 다리는 후들거렸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데 성공했지만 국경에서 잡힐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30살짜리 이 남자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소형 트럭은 요하네스버그의 도로에서 아득한 한 점에 불과했다.

보콜리는 매주 평균 5명의 서아프리카인을 만난다고 했다. "특히 세네갈이나 가나 사람들이 많다. 정신 나간 짓이다. 그들이 도망친 삶만큼 힘든 여정을 통해 여기까지 온다." 요하네스버그에서 만난 이스마엘 포파나도 몇 마디 거들었다. 몇 년 전 아비장을 떠나 이곳에 도착한 그에게 "나도 벗어나고 싶다. 코트디부아르에서 매일 전화가 온다"고 했다. "내가 아무리 주의를 줘도 듣지 않는다. 2010년 월드컵 이후 그 친구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육로로 9천km 떨어진 서아프리카 지역의 중심 도시 아비장에는 베냉만(灣) 주위의 석호 위로 늠름하면서도 무미건조한 건물들이 들어섰다. 지난 4월 도시 전역이 더위로 지쳐 우기의 시작을 알리는 폭풍우를 기다렸다. 대중교통용 '와로와로 푸조 404'마저 묵직한 대기에 눌려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비장에서는 사는 게 아니다. 생존해야지." 니콘 수동 카메라를 목에 건 사진작가 라자크 바카레는 갈지자로 걸음을 걸으며 우푸에부아니(2) 대통령의 '벨 에포크'(좋은 시절)가 막을 내렸다고 애도했다. 경제위기, 다당제의 붕괴, 내란 등 20여 년 전부터 이어진 코트디부아르의 몰락은 프랑스어권 아프리카 전역에 그들의 쇠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2010년 대선 뒤 발생한 대립은 마침내 코트디부아르를 무릎 꿇게 만들었다.

탐욕스런 브로커와 썩은 경찰의 독무대

"코트디부아르에 있으면 결국은 죽습니다. 어떻게 죽느냐만 선택할 수 있는 거지요. 가만히 있다가 굶어 죽든지, 아니면 성공하기 바라면서 길을 떠나는 거지요." 바카레가 설명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 나라를 뜨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예전 식민지 지배국이던 프랑스로 향했다. "그렇지 않으면 코트디부아르 사람이 아니지요." 그가 웃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이민은 경제적 색채를 띠게 되었다. 유럽으로 이민 가기가 점점 더 까다로워졌다. 레게가수 이스마엘 이삭은 "모두가 떠나면 아프리카는 누가 건설하느냐"며 걱정했다. 모로코, 케냐, 앙골라…. 한때 지중해로 향했던 나침반의 바늘이 아프리카의 신흥경제국가로 향했다. 그중에 단연, 미래와 성장의 중심지이자 '새로운 아프리카!'라고 불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주목받고 있다.

공장장 펠릭스 그남무아(24)는 "유럽보다 가깝다"는 이유를 들었다. "똑같이 일한다고 할 때 여기서보다 10배 더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티에메코 코네가 거들었다. 영어교사인 그는 클리넥스 몇 장과 환타 오렌지를 앞에 놓고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포르부에의 허름한 식당에 앉아 있었다. 그는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사회가 된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넬슨 만델라를 만날 꿈을 꿨다. 비자와 비행기 티켓 가격으로 200만 CFA프랑(3)이 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3년치 월급이다. "비자만 받으면 바로 떠날 거요. 인샬라!"

돈 있는 사람들은 나은 편이다. 그들 뒤에는 이등급 이민자 집단이 있다. 비행기를 탈 여력은 없지만 육로로 이동할 정도의 돈은 있는 사람들이다. 팔라 부아나마는 "몇 주간 이동할 수 있을 만큼 돈을 모았다"고 자신했다. 우아한 붉은색 카프탄(셔츠 모양의 기다란 상의)을 입은 젊은 청년에게 이번 여정은 만족스러웠다. 그는 "어쨌든 결국 집으로 돌아왔지 않느냐"고 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7년을 보내고 팔라는 가족과 친구들을 보러 코트디부아르로 돌아왔다. 이제는 새로운 탈출을 꿈꾼다. 더반의 포인트스트리트 해변에서 바라보던 석양과 자신이 노점상을 하던 요하네스버그의 트렌디한 구역을 떠올리는 그의 눈에서 빛이 났다. 누악쇼트에서 라고스까지 각지에 살며 부아나마처럼 "이곳보다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그들의 아버지가 꿈을 찾아 떠났던 반대 방향으로 미래를 찾아나서고 있다.

고통과 희망의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운송업자 10여 명이 여정을 수월하게 해주겠다고 했다. 사노고 바시키니와 에두아르 아무수도 그중에 있다. 그들은 가나와 대서양의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 사이에 있는 포르부에의 비밀 버스 정류장에서 은밀한 사업을 진행한다. 그들은 "언제나 합법적인 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 그것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무수는 "아비장의 모든 운송업자가 조금씩은 다 한다"고 털어놨다.

바시키니는 "코트디부아르 사람이면 여권과 예방접종확인서만 있으면 서아프리카경제공동체(ECOWAS) 소속 국가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다"고 했다. 거기에 7만5천 프랑과 5일의 시간만 투자하면 가나·토고·베냉·나이지리아를 지나 카메룬 국경지대의 해안도시 칼라바르에 도착할 수 있다. 비자 비용을 내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법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다행히도 이 두 사람의 인맥은 킨샤사까지 이어지고 그들은 불법 이민자들이 국경을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이력이 붙은 사람들이다. 바시키니는 아프리카 지도를 보여주며 말했다. "첫 번째 팀은 라고스에, 두 번째 팀은 두알라에 있다. 불법 이민자 전부가 카메룬에서 모일 것이다."

한 번에 요하네스버그로 가는 일은 드물다. 여기저기에 있는 중간 도시에서 며칠에서 몇 년까지 머무르며 자금을 모은다. 국적별로 모인 이민자 무리는 카메룬 두알라 콩고시장의 꿈을 파는 상인들 속에 몸을 숨긴다. 여기는 아비장에서 2만5천km 떨어진 곳으로 구운 닭고기와 조미료 마기 향이 퍼지고, 고철장수와 파파야 상인이 많으며, 골목길이 복잡한 시장이다. 탐욕스러운 국경 통과 브로커와 부패한 경찰관, 난폭한 도로 봉쇄인의 이야기로 얼룩진 국경탈출기가 기도 시간을 알리는 목소리와 함께 울려퍼지는 곳이다.

시간에 쫓기는 것을 질색하는 이곳에서 다른 여행자가 자신의 무용담을 들려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겠다는 건 달나라에 가겠다는 거예요." 배울 만큼 배워 눈빛이 남다른 브루노 피르맹은 불법 이민이라는 어두운 여로에 던져진 외로운 별 중의 하나다. "아프리카의 모든 가정에는 영웅이 있어요. 축구 선수이거나 가수일 수도 있죠. 아니면 탈출에 성공한 사람일 수도…." 가나 출신인 피르맹은 몇 년 전 형제들의 염원을 이루기 위해 길을 나섰다. "길을 떠나 성공해서 웨스트유니언을 통해 고향에 돈을 보내는 거예요." 그는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돼 이야기를 들려줬다. 방황하며 브라질까지 흘러갔고,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여자에 빠졌고, 생도맹그 면화밭에서 땀 흘리며 일하다가 2010년 아이티 대지진으로 그의 아메리칸드림은 종지부를 찍었다. 유엔이 그를 가나로 돌려보냈다. "나를 존중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나는 무너져버렸죠."

"자신감을 되찾으려면 다시 떠나야만 했어요. 이번에는 목적지를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정했지요." 아크라와 두알라를 왕복하는 화물선에 올라 과일 몇 개, 정어리 통조림 몇 통, 수건만 가지고 다시 구원의 길을 떠난 지 8일이 지났다. "밤에 부두에 대야 했어요. 경찰한테 1만 프랑을 내야 했지요. 경찰관 하나를 꾀어 가짜 카메룬 신분증을 얻었어요." 피르맹이 일용직으로 생계를 이어나간 지 이제 다섯 달째다. 언제쯤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어요. 1년이면 되지 않을까요?"

미국과 유럽으로 향한 발길은 뚝 끊어지고

매년 서아프리카인 2만5천 명(4)이 무지개를 찾아 길을 나서며 자신의 운을 시험한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에티오피아인과 소말리아인이 2만 명,(5) 짐바브웨와 모잠비크에서도 수십만 명(6)이 고국을 떠난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떠나려고 한다"고 정치학자인 장에마뉘엘 폰디가 사와 호텔의 수영장 앞 테이블에 앉아 말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가봉이나 앙골라, 그 옆의 적도기니에서 발목이 잡힌다. 이민자들이 석유자원으로 인해 부유한 이 국가들의 국경에 몰려 조상들이 저 편에 엄청난 유산을 남겨둔 것처럼 국경 바리케이드를 쳐다본다." 에마뉘엘 비앙브뉘가 비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민자와 국경 통과 브로커를 연결하는 중간 브로커다. 서아프리카의 삶이 점점 더 척박해진다는 전조로 봐야 하는 것일까?

고정관념과 달리 "아프리카인이 유럽을 뒤덮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통계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다"고 폰디는 분석했다. 굶주린 아프리카인들이 가득 탄 작은 돛배가 지중해에서 난파되는 끔찍한 장면이 이런 현실을 뒤집을 수는 없다. "아프리카 이민자 100명 중 5명만이 북아메리카에, 단 1명이 유럽에 도착한다.(7) 92명은 아프리카 대륙의 다른 나라로 간다. 아프리카가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이웃나라의 플랜테이션이나 광산, 유전으로 일하러 온 시골 청년들의 이주는 접경국가에서 빈번히 일어난다. 무모한 이들은 더 아래쪽으로 내려갈 꿈을 꾼다. 대륙을 통과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가는 일은 드물다. 어찌됐든 폰디의 표현처럼 "유럽이 임의로 설정해 영토상으로 전혀 의미가 없는" 국경이 점점 무너진다는 점은 아프리카의 부상을 위해 경제적 통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악명 높은 국경 통과 브로커가 그 견인차 역할을 해줄 것인가.

축구화, 선수복, 칫솔 그리고 신용카드 한 장

"매주 목요일 오후 3시만 되면 응움이 아콰 군의 스낵바로 옵니다. 몇 분 지나면 온 동네에 그 소식이 퍼지지요." 비앙브뉘가 전했다. 유니테 거리의 오후는 클랙슨 소리와 자동차 엔진 소리와 함께 지나간다. 응움은 식당 1층에 앉아 게슴츠레한 눈으로 기니의 바타로 향하는 자동차에 사람들이 타는 모습을 지켜본다. 2층에서는 한껏 멋부린 젊은 여성이 1인당 2만 프랑을 받고 있다. "통상적인 요금의 3배지만 이 돈으로 응움은 세관원을 매수해 아무도 검사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비앙브뉘가 설명했다. 심지어 상인들도 응움의 도움을 받는다. 전직 경찰관이 공공연한 국경 통과 브로커가 됐다. 불법 이민자들에게 완벽한 피신처다. 그는 "추가로 2만 프랑을 더 내면 사람들 무리 속으로 완전히 섞여 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이웃한 가봉을 통과한다. 응움이 미리 친구에게 손을 써둔다. 그 친구는 권력기관 최상위층까지 줄이 닿아 암밤 국경경비대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책임진다. 외국인을 혐오하기로 유명한 가봉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불법 이민자 신고에 나선다. 불법 이민자들에겐, 특히 비에에겐 악몽 같은 일이다. 리브르빌에서 잡힌 코트디부아르 출신 비에는 서아프리카로 떠나는 첫 번째 화물선에 실려 쫓겨났다. 자신을 꿈에서 멀어지게 한 그 배는 상반신에 문신이 가득한 덩치 큰 남자가 선장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사람이었다.

전문가는 "두알라를 출발할 때는 야운데까지 버스를 타고 카메룬 동쪽에 있는 베르투아로 가는 것이 낫다"고 했다. "콩고 브라자의 국경검문소에 도착하면 6만 프랑에 비자를 받을 수 있소. 우에소 마을이 바로 옆이야." 돈 걱정 때문에 에메카(8)는 뇌물과 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축구를 이용했다. 프로축구 선수인 그가 "국경검문소가 나올 때면 축구 선수 복장을 하고 킨샤사 AS 비탈 클럽에서 경기를 하러 왔다고 경찰관들에게 말했다"고 했다. "그러면 경계심을 풀고 저를 호의적으로 대하거든요."

2006년 꿈을 이루고 싶어진 그는 먼저 아프리카 전역을 누비고 다니다가 마침내 축구화, 선수복, 칫솔과 신용카드를 들고 길을 나섰다. 우에소에 도착해 버스를 타고 원시림을 헤쳐 마침내 브라자빌에 도착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여정이었어요. 꾸불꾸불한 길이 끊임없이 이어졌어요. 망고와 오렌지만 먹으며 버텼지요. 도착했을 땐 정말 녹초가 됐어요." 두알라를 출발해 이민자들의 다음 기착지인 응고빌라 비치까지 가려면 또 한 달이라는 시간과 3천 프랑이 필요할 것이다.

6월의 어느 날 오전 11시. 흙탕물 콩고강 위로 세워진 킨샤사로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국경에는 군인, 상인, 대충 수리한 이륜가마 등이 북적였다. 전쟁에서 다친 남자, 전통 의상을 입은 여자, 포대, 의자, 과일과 채소 바구니 등 아프리카의 무질서한 모든 에너지가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향하는 작은 보트에 실려 이민자센터 직원인 루이스 앞으로 몰렸다. 작지만 다부지고 건들건들 걷는 이 콩고인은 킨샤사에서 가장 활기찬 동네인 블록의 테라스에서 현지산 맥주 터보를 마시고 나서야 말을 꺼냈다. "서아프리카인들이 떼거지로 응고빌라 비치로 온다. 비자가 없으면 바로 쫓겨난다."

현실은 다소 달랐다. "응고빌라 비치에 있는 공무원 20명의 월급은 200달러(9)입니다. 쥐꼬리만 하지요." 다비드 레루 국제이주기구 킨샤사 지부 자문의 말이다. "하루에 관리인 1명당 500달러를 받고 길을 터줍니다. 일주일에 한 3일은 그렇지요." 레루는 킨샤사에서 이뤄지는 하나의 비밀을 알려줬다. "대규모 상납 시스템이 갖춰져 있어요. 이민자센터 직원이 자기가 받은 뇌물에서 몇%를 떼어 상위 직급에 다시 상납하고, 가장 상부에는 대통령이 있지요."

이 시스템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만들기 위해 약 20명의 국경 통과 브로커가 거의 공식적으로 응고빌라 비치에 드나들고 있다. "2년 전에는 100여 명 됐는데 그사이 숙청이 있었다"고 제레미(10)가 알려줬다. 한때 내무부 공무원이었으나 2004년 국경 통과 사업에 본격적으로 나선 그는 킨샤사 저지대에 있는 한 카페에 앉아 장시간 얼굴을 찌푸린 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브라자에 있는 국경 통과 브로커가 곧 10명이 비치에 도착할 거라고 알려줬다. 서아프리카인을 알아보기는 쉽다. 18살에서 30살 사이이고 단출한 복장에 전쟁에서 도망친 것처럼 겁에 질려 있다."

1명을 통과시켜주는 데 얼마나 받을까? "돈이 얼마나 있느냐에 따라 500∼1천 달러를 받는다. 그중에서 계급에 따라 200∼1천 달러를 경찰에게 수수료 명목으로 준다. 응고빌라 비치를 통해서만 매년 150명 정도 들어온다." 주변에 있는 작은 항구 10여 곳은 고려하지 않은 수다. 밤이면 어부로 변장한 불법 이민자들이 이곳에 배를 댄다.

제레미는 "서아프리카인이 도착하자마자 지원가정으로 보낸다. 민족·부족적 유대 관계가 무척 강하다"고 했다. 서아프리카 출신의 이주민 공동체는 대시장의 구불구불하고 복잡한 한구석에 자리잡았다. 헌옷 가게가 늘어선 시장 거리를 보면 천이 담긴 저 상자에 소중한 비밀을 감춰둔 것처럼 보인다. 킨샤사의 말리인 수장인 쿨리바리 부야는 "정부가 주도하는 일제 단속에도 단련돼 공동체가 단결해 불법 이민자를 감싼다"고 말했다. 이민자들은 공동체에 동화돼 링갈라어를 구사하고, 구이장수나 구두수선공 등 일용직으로 돈을 모으며 새로운 탈출을 꿈꾼다.

"남아공, 민족 무지개로 이룬 성숙한 나라"

"이 탈출은 고통이자 지옥"이라고 부야가 한탄했다. 앙골라 룬다노르트의 다이아몬드 광산에 도착한 남자들 대부분은 인신매매조직의 표적이 되고, 특히 콩고 출신 여자들은 루안다의 사창가로 팔려가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내게 된다. 제레미는 "강간·고문·대량축출 등의 소문을 접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려는 이민자가 늘었다"고 했다. 에메카처럼 말이다. 2010년 나이지리아 출신 에메카는 다시 축구화를 신고 요하네스버그로 출발했다. 육로로 가기에는 아득해 잠비아 국경에 가까운 루붐바시까지 비행기를 탔다. 기나긴 악몽의 시작이었다. 바로 체포돼 7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킨샤사의 불법체류자수용센터로 보내졌다. 레루는 "비공식적인 감옥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도 방문할 수 없는 곳"이라고 했다. 방문객이 없는 탓에 에메카는 빛도 보지 못한 채 두 달을 더 갇혀 지냈다. '영어를 쓰는 모르는 사람'이 찾아와 250달러를 내고 그를 풀어줬다고 한다. "그 뒤 다시는 그 사람을 못 봤어요."

오토바이 부품을 사고팔며 먹고사는 29살의 에메카는 축구 선수의 꿈에서 점점 멀어졌다.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6년간 헤매고 다닌 시간을 차분히 돌아보니 잘못된 결정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이지리아가 나아요. 콩고보다 훨씬 나아요." 그러고는 애매모호한 말을 했다. "저는 먼 길을 왔습니다." 돌아가기에는 부끄럽고 다시 떠나기에는 걱정이 앞서며 지나친 고통으로 인해 공허해진 눈빛을 한 이 청년은, 자신의 꿈으로 짓밟힌 이름 모를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했다. "탈출은 포커 게임이랑 비슷합니다. 영웅이 되거나 인간성을 상실하게 되지요." 국제이주기구 킨샤사 지원단장인 미셜 찬즈의 설명이다. 그는 "이미 길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그냥 사라지고 싶어 한다"고 덧붙였다.

중앙아프리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카탕가주(州)의 주도이자 남부 지방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루붐바시로 이동한다. "모두 카숨발레사 국경검문소를 통과해야 합니다." 전화를 받은 콩고 국경 통과 브로커의 말이다. "250달러를 내면 이틀 안에 버스로 루사카, 하라레, 마지막으로 요하네스버그까지 데려다줄 거예요." 사바나를 직선으로 가로지르는 고속도로가 남아프리카 수도가 가까워질수록 구부러졌다. 저 멀리 푸른 하늘로 높이 뻗어오른 중심 비즈니스 지구의 고층 빌딩이 보였다. 자동차는 1번 국도를 벗어나 반듯하게 그어진 여러 도로 사이를 빙빙 돌다가 터미널에 멈췄다. 종점이다.

파크타운노스는 여기서 멀지 않다. 서민동네의 넓은 아파트에서 마크 그바푸는 전화기에 매달려 남동생이 경찰 조사를 받지 않도록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정치적 망명자에게 유리한 법제를 이용해 콩고·소말리아·짐바브웨 사람들은 쉽게 남아프리카에 들어올 수 있다. 서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은 다르다. "신분증 확인도 안 하고 바로 국경으로 데리고 간다"면서 코트디부아르 이주민 공동체 대표는 가슴 아파했다. 1997년 이주해 채소를 팔다가 농업기술자가 된 이 중년 남성은 자신의 성공은 예외적인 경우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주민들이 이곳에서 꿈을 이루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하지만 궁지에서 벗어나긴 하죠.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사랑은 했지만 조건을 보고 한 결혼 같은 것입니다."

우울한 기운이 감도는 대형 건물 그늘로 야간경비, 수공업자, 석공, 이발사들이 남아프리카의 햇살을 찾아 모이는 반면, 수만 명의 불법 이민자는 노던케이프나 쿠아줄루나탈의 광산이나 채취임업장으로 밀려간다. 자발적으로 시스템의 외부에 머무르는 그들은 유동적이고 저렴한 노동력이다. 비트바테르스란트대학의 남아프리카이주프로그램 연구원인 오렐리아 세가티는 "그들이 사회적 기준을 잠식시킨다"고 분석하며 "외국인들은 민중적 좌절의 희생양"이라고 했다. 2008년 세계가치조사원(11)에서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전세계적으로 가장 외국인 혐오가 심한 국가다.

지도자들은 뒤늦게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세가티는 "위조 문서에 대한 조사를 한층 강화하고, 생체인증시스템을 도입했으며, 국외 추방도 대폭 증가해 15년 동안 250만 명이 추방됐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이민의 경제적 측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신흥경제대국으로 부상했지만 그 여파를 감당할 능력이 부족한 점이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실이다. 또한 나이지리아 자선활동부터 모잠비크 세금고지서까지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기 위해 설립된 아프리카민족회의(ANC)를 지지했던 아프리카 '형제들'은 입맛이 쓰다. 그들은 다시 유럽이나 미국에서 자신의 운을 시험해보고 싶을 것이다. 마크 그바푸는 이렇게 말했다. "꿈을 이루겠다며 고집을 부리다가는 길 위에서 인생을 다 보낼 수 있어요. 내 역할은 그들에게 다른 곳에만 더 좋은 세상이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에밀리오 시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성숙한 나라'라고 평했다. 코트디부아르 출신인 그는 지난 10년간 정비공장을 운영하며 키워왔다. "저미스턴에 120만 랜드짜리 집이 있고, 자녀 3명은 사립학교에 다녀요. 전화 한 통이면 대출을 받을 수 있고요. 모험은 끝났습니다. 그는 이렇게 단호하게 말했지만 그래도 가끔 "인도·앙골라·말레이시아로 출장을 간다. 매달 여행을 하긴 한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의 밑에서 직원 10명이 단체택시에 붙어 일했다. 아마 그것이 시에의 운명일지 모른다. 길과 함께하는 인생 말이다.

글•기욤 피트롱 Guillaume Pitro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1유로는 10랜드.
(2) 1960∼93년 국가수장을 지냈다.
(3) 1유로는 655CFA프랑.
(4) 연간 수치는 남아프리카통계국이 발간한 월간 수치를 합산한 결과임(관광과 이민 통계자료집). www.statssa.gov.za/publications/statspastfuture.asp?PPN=P0351&SCH=5313.
(5) 국제이주기구, <서던 드림을 좇아서, 불가피한 일의 피해자들>, 제네바, www.publications.iom.int, 2009년 4월.
(6) 신빙성 있는 자료가 없는 상황. 타라 폴저 응과토, <남아프리카 내부에서 그리고 남아프리카를 향해 떠나는 사람들>, 이주와 사회를 위한 아프리카 센터, 요하네스버그, www.migration.org.za, 2010.
(7) 장에마뉘엘 폰디가 이끈 연구보고서에 실린 수치임. <이민과 디아스포라,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시선>, 메종뇌브 에 라로즈 에디시옹, 파리, 2009.
(8) 본인의 요청에 따라 가명 사용.
(9) 1유로는 1.25US달러.
(10) 본인의 요청에 따라 가명 사용.
(11) www.worldvaluessurvey.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