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의 시네마 크리티크] 무수한 말과 언어도단(言語道斷) 사이에서, <여행자의 필요> <수유천>

2024-11-11     김현승(영화평론가)

* 이전 기사와 이어지는 글입니다.

 

<우리의 하루>, <물안에서> 이후에도 ‘진실’을 포착하기 위한 홍상수의 시도는 계속된다. 언어에 의존하는 인간의 본원적 한계는 여전히 그에게 크나큰 골칫거리이다. 대화를 통해 결코 상대방에 온전히 다가갈 수 없다는 문제의식은 <여행자의 필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막다른 길에 봉착했을 때의 당혹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영화는 외국어를 통해서도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낙관주의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는 학생이 하루하루 느낀 심정을 불어로 옮겨 적는다. 외국어 교습을 위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니다. 교과서가 없어도 언어의 장벽을 넘을 수 있다는 믿음은 그녀가 간직한 자그마한 소망과 같다.

진심만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다는 그녀의 믿음은 인국(하성국)과의 연인관계로 이어진다. 토종 한국인인 인국은 한글시를 쓰는 젊은 시인이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여자친구는 언제나 연인의 글귀에 감명받았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관객은 인국의 시를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그녀의 말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이미 마을 어귀 비석에 새겨진 윤동주의 <서시>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꺼내 번역을 시도해 보지만, 시는 번역기가 닿을 수 없는 최후의 영역이다. 심지어 <서시>는 제국주의자의 땅에서 건너온, 조선의 역사가 낯선 이방인에게는 더욱 공감의 문을 열지 않는다. 윤동주 문학관을 방문한 이리스는 다시 한번 전지전능한 스마트폰의 힘을 빌어본다. “그냥 새와 꽃이로군요.” 효율성을 중시하는 기계의 정보처리 방식은 민들레와 까치의 고유성을 무자비하게 훼손한다.

 

‘불능’의 상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로 점차 확대된다. 인국의 어머니(조윤희)가 아들의 집을 갑작스럽게 방문한다. 거짓말이 하고 싶지 않은 인국에 한 발 앞서 이리스는 두 사람의 관계를 속인다. 이리스가 도피하듯이 집을 나선 뒤 전개되는 모자간의 대화는 분명 같은 언어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홍상수의 모든 대화가 그렇듯,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던 대화는 금세 어긋나고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아들을 나무라는 어머니의 말이 불편한 연인관계에서 생활비를 향할 때, 삶은 언어에서 숫자로 더욱 납작해져만 간다.

“넌 그 사람을 모르잖아. 네가 말한 건 네 상상 속의 여자잖아.” 어머니가 돌아간 뒤 인국은 오래도록 말없이 잠든 애인을 지켜본다. 잠시 그의 표정을 외면하던 카메라가 곧 남자의 전신을 포착하지만, 우리는 그의 착잡한 심정을 감히 헤아릴 수 없다. 이리스가 잠에서 깬 뒤 두 사람이 술잔을 나누며 건배를 외친다. “친구로서 좋아한다”는 남자의 말에 여자는 씁쓸함을 느낀다. 삶에 초연한 듯 보이던 당신도 충분히 외로웠군요. 두 사람이 나눌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는 “건배” 정도가 아닐지 생각을 해본다.

 

언어는 이번에도 교감을 위한 의미 있는 표상을 제공하지 못했다. <수유천>은 더 나아가 사람 사이 오고 가는 말이 너무 많아져 ‘진실’과 ‘진심’을 가리는 상황을 그린다. 여대의 강사로 일하는 전임(김민희), 그녀는 엉망이 된 촌극을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전임의 외삼촌 시언(권해효)이 조카의 부탁으로 연출을 맡게 된다. 대사가 적고 간결한 대본을 선호하는 그는 제스처, 목소리의 톤, 눈짓과 몸짓이 대사보다 더 많은 걸 담아낼 수 있다고 믿는다. ‘쓴소리’를 했다가 예술계에서 매장당한 그의 과거 때문일까. <수유천>에서 두드러지는 비/반언어적 표현은 반가움과 어색함, 팬심과 피로, 그리고 무관심이 공존하는 삶의 순간을 절묘하게 건져 올린다. 시언과 정 교수(조윤희)가 대화를 나눌 때, 전방에 배치되어 따분함을 온몸으로 표현하던 전임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정말 시언의 말대로 우리는 언어에서 멀어질수록 본원적 삶에 가까워지는 것일까? <수유천>이 그리는 세계는 여전히 상투적이고 공격적인 말들로 가득하다. 정 교수는 “정열적인 진짜 예술혼”이라느니, “정말 한 분뿐인 예술가”와 같은 낯간지러운 칭찬을 쉽게 하는 사람이다. 모두 감독 홍상수가 현실에서 지겹도록 들어온 말들일 것이다. 그러나 찬사와 위로의 말을 건네받은 남자의 표정은 굳어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만, 과거 시언에게 칼을 꽂은 것 또한 쉽게 내뱉어진 사람들의 말이다. 영화는 일상어를 해체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본원적 삶이 발견된다는 태도를 견지한다.

 

“지금은 만나는 사람이 없어 평화롭고 깨끗하다. 사람이 모여서 사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사회화된 언어는 언제나 거짓을 낳는다. 뻔뻔한 바람둥이에게 청혼을 받은 여학생의 말처럼 우리의 모든 말이 사라지고 나면 그 남자의 진심을 살필 수 있을까? 계속해서 미끄러지는 대화를 거슬러 올라간 곳에서 한 편의 연극이 펼쳐진다.

관객은 무대에서 말없이 컵라면을 먹는 네 명의 여학생을 발견한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짐작하게 만드는 것은 이번에도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이다. 연극은 영화에 비해 많은 생략을 허용하지만, 그 빈자리를 메꾸는 것은 늘 언어이다. 결국 정치적인 대사와 연출가의 평판에 대한 비극이 반복된다. 전임이 분개한 총장의 호출을 받는다. <물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저음질의 음악이 큼지막한 낙엽을 휘이휘이 휘젓는 그녀를 위로한다. 같은 시각, 시언과 여학생들의 술자리에서 처참한 연극이 남긴 침울함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로 이어진다. 시, 여백이 많은 예술은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줄 지도 모른다. 한 여학생의 담담한 고백에 옆자리 학생의 표정이 급속도로 얼어붙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레짐작만 할 수 있을 뿐, 시의 추상성은 구체적인 내용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윽고 눈물을 쏟아내는 다섯 사람. 진정한 교감은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무대 저편에서 듬성한 언어를 통해 이루어진다.

 

다음 날, 늘 수유천에 앉아 그림을 그리던 전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지친 그녀는 서점의 옥상에 죽은 듯이 누워있다. 몸을 뒤척이고 일어난 그녀는 마치 <우리의 하루> 속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말없이 먼 곳을 바라본다. 그러나 방문객이 모두 물러난 그와 달리 운전을 부탁하는 상사의 연락은 그녀를 속세에 붙잡는다. 반강제로 끌려간 음식점에서 전임은 언어가 망친 관계와 더불어 자신의 속단이 불러온 오해를 알아차린다. 그렇게 들이켠 맥주 한 잔, 담배 한 모금. 그리 높지 않은 곳에서 세계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은 점점 노년의 시인을 닮아간다.

세상사에 초연함을 느낀 전임은 물의 상류를 향한다. “왜 저걸 못 참지?” 지저분한 뒷말이 오가지만, 그녀는 이미 수유천 멀리 사라진 상태다. 홍상수의 작품에 반복되는 패턴을 감히 예상해 보자면, 이대로 그녀가 점이 되어 소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세 남자를 우스꽝스럽게 만든 <우리 선희>의 선희(정유미), 홀연히 모습을 감추고 싶었던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의 민정(이유영), 수평선 너머를 향한 <물안에서>의 젊은 감독처럼. 하지만 전임은 곧 밝은 미소를 띤 채 세계로 돌아온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는 간명한 깨달음이 그녀의 미소를 더욱 환하게 밝힌다.

 

볼 수 없는 것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우리의 하루>와 <물안에서>의 두 남자는 회의를 느끼고 자살을 감행한다. 끝내 상대방의 진심에 닿지 못한 <여행자의 필요>의 낙관주의자는 물밀듯 밀려오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수유천>의 전임은 다르다. 프레임 너머를 다녀온 그녀의 표정은 놀랍도록 밝다. 바로 이곳에서 홍상수의 예술관이 도식화의 늪에 빠지지 않았다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가보지 못한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부정하는 시인의 ‘無’는 포도를 보고 비아냥대는 여우를 닮아있다. 하지만 세계의 끝을 직접 목격한 전임의 ‘無’, 언어도단은 다르다.

더 나아가, 닿을 수 없는 세계를 가보았다는, 그리고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그녀의 말을 신뢰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단지 거듭해서 비참한 실패의 순간만을 그려오던 홍상수 감독이 자신의 연인을 프레임 너머로 보냈다는 사실만이 가엽게 반짝인다. 구태여 그녀를 붙잡지 않고 홀로 영화의 세계에 남겠다던 <소설가의 영화>의 결연한 의지가 다시 한번 느껴진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글·김현승
영화평론가. 2022 영평상 신인평론상으로 등단하였다.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이론과 예술전문사에 재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