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족(집시)은 유랑 민족이 아니다

2012-10-14     앙리에트 아세오

프랑스에서는 로마족(집시) 캠프촌을 강제 철거하고, 헝가리나 루마니아에서는 집시에 대한 차별이 흔하게 일어난다. 집시는 사사건건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 한 나라에 귀속되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이들은 유럽 기구들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음에도 ‘방랑객’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최소한의 권리조차 박탈당하며 살아간다. 집시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이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대해 우리는 많은 부분을 모르고 있다.

오랜 기간 다양한 민족이 공존해온 유럽 대륙에서는 각 민족 고유의 특수성을 논하기 힘들다. 하지만 내부의 위기가 고조돼 정치적으로 반이성주의가 대두될 때는 민족성을 두고 서로 욕먹는 진창 싸움이 벌어진다. 각 나라의 국민에 대한 낡은 고정관념이 판을 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독일인들은 '딱딱하다'는 평을 듣고, 프랑스인들은 '편협한 국수주의자'라는 말을 들으며, 그리스인들은 '태평한 지중해인'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인도 북서부를 기원으로 하는 유랑민족으로, 한때 이집트인이라는 오해로 말미암아 보통 '집시'라고 칭하게 된) 로마족(혹은 롬족, 로마니족)에게는 '유랑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로마족은 과연 '유랑민족'일까? 이들이 중부 유럽과 발칸반도에서 정주 생활을 해온 지 400년이 넘었다. 오래전부터 한곳에 붙박이로 정착해 살아온 것이다. 주거지가 고정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세대를 거듭하며 그렇게 자연적인 인구 증가가 이뤄질 수 없다. 그렇다면 '집시는 곧 유랑객'이라는 신화적 믿음이 매번 정치적 도구로 이용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불법 캠프촌'을 점거하고 있던 사람들이, (10년 전부터는 무려 행정 당국의 허가까지 받아가며) 어떻게 '이주노동자 로마족'이 될 수 있었으며, 어떻게 행정 분류상의 '유랑민'이 될 수 있었을까? 이들이 곧이어 가건물에 거처가 지정되는 신분이 된 배경에는 어떤 악의적 음모가 숨어 있었을까? 그토록 많은 수의 로마족에게 집단 분류표로 숨 막히는 족쇄를 채워 가둬두는 게 위험한 발상은 아닐까?

유럽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민족을 분류하는 게 조직 구성의 원칙이 되는 순간,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로마족을 전 유럽 차원에서 인위적으로 통합하려는 건 곧 이들을 전 유럽에서 배제하겠다는 의지의 또 다른 표현이다.

공산주의 체제 붕괴 이후, 옛 동구권 국가들에는 무한한 민주화의 가능성이 열렸다. 유럽연합(EU)의 지침에는 다민족주의를 민주주의가 한 단계 발전한 형태로 보았고, 선거인단 역시 소속 민족의 신고를 통해 구성될 정도였다. 각국에는 헌법에서 소수민족의 권리가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사회적·정치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었다. 이런 정신에 입각해 '다문화 시민권'(1)이 채택되면서 자연스레 소수민족의 권리가 신장되고, 민주주의가 순조롭게 꽃피울 수 있으리라 생각됐다. 전체주의가 되살아나려는 움직임이 없어진 뒤에는 인종 민주주의가 일관되고 이상적인 정치 메뉴로 등장했다. 2개의 연방 국가, 유고슬라비아와 체코슬로바키아만이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종민주주의를 예찬할 때 그리 오래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당시 헝가리가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소수계층 및 소수민족의 권리에 관한 1993년 법'은 극소수 논리의 막장까지 치닫는다. 이 법은 13개 토착 소수민족의 존재를 인정했고, 여기에는 로마족도 포함됐다. 또한 어느 민족이든 국내 모든 분야로의 진출을 허용했는데, 이는 곧 소집단을 더 힘있는 집단에 종속시키는 것과 같은 논리였다.

따라서 새로운 방식으로 로마족을 배척하려는 움직임에서 나타나는 정치적 성격이 과소평가됐다. 1995∼98년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있었던 물리적 폭력과 암살 사태에는 '스킨헤드'(Skinheads)라는 수식어가 붙으면서 당시 관행대로 상황이 상대적으로 미화돼 표현됐다.

1971년 '로마족연합' 창립

1991년부터는 안이한 기술주의에 물든 유럽 관료제가 로마족에 열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들의 이미지를 유럽 전 지역에서의 자유로운 이동에 대한 수사법으로 활용했다. 인종민주주의의 장점을 공유하는 분위기가 형성됨에 따라 로마족의 처지를 이해하게 된 유럽 기구의 책임자들은 몇 가지 구체적인 정책을 마련한다. 소로스재단 같은 비정부기구는 '로마족연합' 같은 곳을 중심으로 집결된 로마족 지식인 계층의 대표적 인물들을 받아들였다. 로마족연합은 국내 조직을 국제적 차원으로 연합하기 위한 목적으로 1971년 영국 런던에서 창립된 로마족의 정치 조직이다.

2000년대 초, 유럽 집행위원회와 유럽이사회는 로마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유일한 모델로 '유럽의 초국적 소수민족'이라는 개념을 채택했다. 목적은 국제법과 유럽연합법에 대해 (필요한 경우) 차별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2005∼2015년에 이루어질 로마족 통합 10개년 계획의 재정 지원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초국적 소수민족'은 추상적인 정치 조직체가 되었고, 역사적·사회적 현실과의 합일성에 대한 확인 여부는 누구의 관심사도 되지 않았다. 이렇듯 편협한 관료적 시각은 로마족 사회를 오랜 역사의 지리적 기반으로 단절시켜버렸다. 그리고 동구권 지도자들의 경우, 여기에서 두 가지 실리를 챙겨간다. 하나는 단비 같은 재정 수입원이 생긴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초국적성의 개념을 '조상 대대로 내려온 유랑 생활'로 해석함으로써 로마족에 대한 분리 수용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2) 과거 로마족 마을을 대거 이주시킨 러시아의 경우가 이와 비슷한 사례다.

2007년 중부 유럽과 동유럽 국가들을 받아들이면서 EU가 확대되자, 이같은 정책 노선은 일관성을 상실한다. 이 국가들 내에서 로마족이 차지하는 비율은 6~11%였고,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로마족은 서유럽에서 '집시'로 불리며 유랑민으로 살아오던 방랑객과는 다른 삶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공산주의 시절 아무렇게나 방치된 산업공단의 노동자였다. 로마족의 자유로움에 고무됐던 유럽인들은 곧 도심의 판자촌에서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며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불편함을 느낀다.

EU 가입을 위한 일명 '코펜하겐 기준'에 부합하려면 가입 대상국들은 로마족 거주민을 대하는 올바른 행동 표준을 채택해야 한다. 그 대신 브뤼셀은 엄청난 유로를 허공에 뿌려댈 것이고, 그렇게 공중에 뿌려진 돈을 낚아챈 동구권 지도자들은 로마족 통합을 위한 재정 지원책인 'EU 구조기금'을 민첩하게 확보한다. 엄청난 금액이 이 국가들에 배분됐고, 서유럽의 예산 적자에 대해서는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재정위원회가 EU 구조기금의 분배와 관련해서는 그다지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 로마족에게 돌아간 돈은 거의 없었다. 2012년 세계은행 보고서(3)에 따르면, 로마족 가운데 40%가량은 최소한의 생계를 위한 식비조차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인간의 손에 의한 엄청난 자금 낭비가 이뤄졌으리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초국적 소수민족'으로서 로마족을 통합하려는 시도의 핵심에는 저들의 역사성을 거부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유럽 민족으로서의 정당성은 '유랑민'이라는 영원불멸의 민족성으로 대체됐다. 이런 정치적 수사법은 로마족의 탈국적화에 이바지했고, 이들을 사회적으로 소외시키는 데 기여하고, 이로써 동구권에서든 서구권에서든 로마족 배척 논리가 더욱 힘을 얻게 됐다.

일부 범죄생물학 전문가들은 공산정권 시절과 마찬가지로 로마족의 표현형 정립에 매진한다. '동양의 유목민적 특성'이라는 민족적 기질에 '소외 집단'이라는 사회적 기질을 더해 가공할 만한 정의를 만들어낸 것이다. 로마족의 가족관계와 관련한 통계 자료는 솅겐 국가(상호 출입국 절차를 최대로 간소화한 솅겐 조약을 체결한 유럽 국가) 전역으로 점차 퍼져나갔고, 자녀를 포함한 일가족의 모든 기록을 서류화해 로마족 추방을 용이하게 하는 통계 관리 수단으로 사용된 프랑스 오스카 파일(Fichier Oscar)도 그중 하나였다. 헝가리에선 음모의 논리가 '극소수론'을 대체한다. 친정부 성향의 언론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집시 범죄'와 관련한 내용을 풍성하게 실었고, 그러면서도 국제 무대에서 벌어지는 '유대인 금권정치'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해서는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브뤼셀 역시 이를 반기는 분위기였다. 이런 맥락에서 2011년 3월에는 헝가리의 극우정당 요비크(Jobbik)당 수뇌부 중 한 사람이 보수 성향의 신문 <마자르 넴제트>(Magyar Nemzet)에서 "헝가리의 KKK단(Ku Klux Klan·백인우월주의를 앞세우는 인종차별주의 집단)이 움직일 때가 왔다"고 주장했다. 이와 더불어 무장한 의용대 역시 로마족 주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타인의 의도에 따라 그 정체성이 결정될 수는 없다. 심지어 그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정체성을 구축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게 인간이다. 사실 '로마족'이라는 어휘에서 우리는 두 가지 현실을 혼동하고 있다. 하나는 로마족이 인류학적 기원으로 봤을 때, 그 옛날 앙시앵레짐(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하에서 각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구축된 동부 로마니 사회에서 유래한 존재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집시와 관련한 정책이 20세기의 차별적 법제에 따라 마련됐다는 점이다. 그리고 서로 대비되는 두 가지 사실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유럽 민족의 다양성이 짓밟힌다. 그래서 로마족은 한 지역에서 오래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토착민 대우를 받지 못하는 유일한 유럽인 집단이 되었다.

위의 사진은 1966∼67년 마지막으로 캠프촌 타보르(Tabor)(4)를 떠나기 전 한자리에 모인 폴란드 로마족 '샬라디카 로마'(Chaladytka Roma)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이 사진을 보면 영원히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돌아다니는 집시의 이미지가 쉽게 연상되나, 당시 긴박한 정세가 미친 영향을 헤아리기란 쉽지 않다. 사실 전후에 체결된 이주협정은 옛 소련의 폴란드인들을 자발적으로 본국에 송환시키면서 소련-폴란드 간의 국경 갈등 해소를 꾀했다.(5) 그래서 당시 아스팔트가 깔리지 않은 진창길 위로 수많은 차량 행렬이 이어졌다. 로마족은 소비에트연방을 떠나 다시 폴란드로 돌아갔고, 이들은 유랑민이 아니라 정식 '폴란드 난민'이 되었다. 이들은 실로 기구한 운명을 겪어왔다. 나치의 손에 대량학살을 당하다가 전쟁이 끝나자 러시아의 콜호스(집단농장)로 끌려간 폴란드 로마족은 국경을 넘을 수도,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도 없었으며, 소비에트 공산당의 손에서도 무사하지 못했다. 이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폴란드 성씨도 그대로 간직했는데 '알렉산드로비치'(Alexandrowicz)라는 성은 1732년 폴란드 귀족 폴 상구스카(Paul Sanguska)가 하사했다. '마르친케비치'(Marcinkewicz)나 '스테파노비치'(Stefanowicz) 같은 성도 1778년 리투아니아의 라진윌(Radziwill)가 왕자들에게 하사받은 성씨였다. 모두 로마 가톨릭을 믿은 이들은 폴란드 로마족의 한 원류인 '폴스카 로마'(Polska Roma)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폴란드 지방 당국은 난민들 가운데 집시만 따로 골라냈고, 이런 선별 작업은 국경을 통과할 때만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폴란드 국경을 넘어가는 순간, 이들은 러시아 집시인 '루스카 로마'(Ruska Roma)로 간주됐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과 한 집단이 되는 것이다. 이제는 이들 스스로 그런 호칭에도 익숙해진 상태다.

이들이 오랜 기간 폴란드에 보인 충성심에 대한 보상 역시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1980년 앞서 사진에 찍힌 폴란드 로마족 가운데 그 어떤 가정도 자국 영토 내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지 못했다. 로마족 어린이 80% 이상이 학교에 다녔지만, 아이들은 학교에서 로마족 언어를 사용하지 못했다. 로마족 언어의 사용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러시아 북부에서 만주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역에서 사용되던 이들의 아름다운 언어는 19세기 초부터 문자로 발전했고, 수없이 죽어간 러시아·폴란드 로마족의 지식인층이 사용하던 언어였다.

한 민족의 파괴 두고만 볼 것인가?

1948년 이후, 특히 1955년에 바르샤바 조약이 체결된 이후 모든 공산권 국가는 이른바 '치간스카 폴리티카'(Ciganska politika)라는 집시 정책을 실시한다. 이들의 원래 로마족 기원과 상관없이 '집시계 인구'로 묶어 호적 등재를 시행하는 것이다. 이 온화적 동화 정책은 이후 강압적 동화 정책으로 변질되고, '집시들의 원시적 생활방식에 따른 무정부주의'를 제거하는 데 동원된다. 그런데 로마족에 대해 이같은 '집단 신분증'이 발부되면서 이들은 직업의 자유를 박탈당한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슬로바키아 로마족이 모두 보헤미아 지방의 산업공단에 인력으로 투입됐고, 집시들의 소작인 신분을 모조리 없애려던 헝가리에서는 로마족끼리만 모여 살던 농촌마을을 모조리 파괴한 뒤, 이들을 국가 5개년 개발계획의 노동력으로 활용했다. 게다가 이들은 국영 합동기업이나 국유농장 등 주로 국영화된 경제 부문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10여 년간 이루어진 민영화의 과도기 과정에서도 로마족 대부분이 배제됐다. 따라서 이들은 아무렇게나 방치된 공단 지역의 빈민촌에 몰려 살아가는 신세로 전락한다.

집단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린 듯한 유럽 국가들의 눈에는 아무리 한 지역에서 수백 년을 살아오며 수세대에 걸쳐 국가 발전을 위해 희생했다 한들, 그게 온전한 시민권을 보장해주는 요건으로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이에 로마족 사람들은 그들의 국가를 세울 마음까지 먹게 된다. 자기 조상들의 나라, 자신들의 고통을 알아주는 나라를 가짐으로써 정식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 어떤 지지도 받지 못할 것이다. 실제로 독일의 '신티 운트 로마(Sinti und Roma·독일 집시) 중앙조직' 같은 경우 '신티 운트 로마'를 독일 내 소수민족 집단으로 인정해달라는 운동을 전개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엄연히 독일 문화 속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며 600년 넘게 그곳에서 살아온 소수민족 집단이었다. 더욱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강제수용소에서 빠져나온 독일 집시들은 독일 국적을 되찾지 못했고, 헤센주 같은 경우는 나치 시대의 형사·경찰 조직인 '제국형사경찰청'(Reichskriminalpolizeiamt)이 집계한 유랑민 자료를 그대로 차용했다. 세상이 바뀌었지만 로마족에 대한 기준과 잣대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무조건 다민족주의를 중부 유럽 민주화의 만병통치약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러자 사람들은 과거에 이미 '떠돌이 민족'에 대해 논한 바 있던 르네상스 학자들을 도용했다. 하지만 미래에 대한 근거 없는 상상을 우려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과거의 논리를 들먹일 수 있을까? 오랜 기간 축적된 박식한 소양에서 나온 '떠돌이 민족'의 개념은 쥘 미슐레과 발터 베냐민의 책에서나 통용될 법한 생각이다. 상상력이 동원되면 점술의 영역과 논리적 이해력은 얼마든지 멀어질 수 있다. 상상력이 개입될 경우 객관적 인식과 논리적 사고는 더 이상 결부되지 않고, 상상력은 곧 허상을 만들어내며 오류를 범하는 위험한 능력이 된다. 궁정문화에서 집시가 많이 등장한 시기 역시, 예언이 주를 이루다가 이내 곧 빠르게 환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과거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속자였던 프랑수아 페르디낭 대공은 한 집시 여인에게서 자신이 곧 엄청난 전쟁의 원인이 될 거라는 예언을 듣는다. 대공은 이 얘기를 비웃었다. 그런 재앙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알다시피, 그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것을 계기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이후 나치의 손에 끌려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두 아들은 여기에서 과거 합스부르크 제국에 살던 집시들을 찾아다니는데, 반면 라벤스부르크 수용소에 수감됐던 레지스탕스 출신 민족학자 제르맨 티옹은 릴 지방의 떠돌이 집시로서 그곳에 들어온 한 프랑스 강제수용자로부터 로마족 어휘를 수집한다. 로마족에 대한 환상적 차원에서의 접근과 이성적 차원에서의 접근이 서로 얼마나 다른 결과를 낳는지 잘 보여주는 경우다. 19세기에 많이 등장했던 민족 지도는 중부유럽제국 '미텔유로파'(Mitteleuropa) 소속의 국가들로 대체됐다. 마치 오리엔트 익스프레스가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대륙 횡단 열차로 변질된 것과 비슷하다.

그래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면, 집시 극단과 이들의 축제가 인기를 끌던 시절의 프랑스를 떠올려보자. 파트리크 윌리암스가 <장고 라인하르트의 네 가지 사후 생애>(6)에서 쓰고 있는 바와 같이, 파리는 오고 가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센 강변에선 태평하게 낚시를 즐기던 그 시절 "우리는 사기 그릇에 집커피 첫 잔을 함께 내려 마셨다. 그릇은 집시촌을 나타내는 듯한 그림으로 장식돼 있었는데, 그릇이 너무 작아 손바닥 안에 쏙 들어왔다". 이토록 사랑받던 프랑스의 모습이 두 눈에 선하건만, 불안정한 정세의 영향으로 프랑스는 결국 1940년 나치의 요구에 따라 '부랑자'로 분류된 프랑스인들을 40개 가족수용소에 가두고 말았다. 이들은 1946년에야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지만 곧이어 다시 행정상 '부랑자'로 처리되고, 1969년에는 '유랑민'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게 된다.

수세기의 역사를 지닌 한 사회계층이 어이없이 파괴되는 이 상황을 그냥 두고만 볼 것인가? 로마족의 언어와 문화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평화로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돌을 던지는 작금의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텐가? '그늘에서는 누구나 마땅히 자기 자리를 가질 수 있다.' 이 로마족 속담처럼, 저들을 그렇게 어둠 속으로만 내몰 것인지 생각해볼 때다.

글•앙리에트 아세오 Henriette Asséo 역사가. 프랑스 국립사회과학고등연구원 교수. 저서로 <치간(집시): 유럽 내에서의 험난한 생애>(Les Tsiganes: une destinée européenne·Gallimard·Paris·2010) 등이 있다. 이디 블로흐와 쥘리에트 주르당과 함께 제작한 다큐멘터리 <치간(집시) 회고록: 또 하나의 학살>(Kuiv productions-Mémoire Magnétique·2011)이 있다.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

(1) Will Kymlicka, <Multicultural Citizenship, A liberal theory of minority rights>, Clarendon Press, Oxford, 1995. 프랑스어 번역판 <다문화 시민권: 소수민족 권리에 관한 자유주의 이론>(La citoyenneté multiculturelle : une théorie libérale du droit des minorités), Patrick Savidan 옮김, La Découverte, Paris, 2001.
(2) Michael Stewart, <The Gypsy ‘Menace’: Populism and the New Anti-Gypsy Politics>, Hurst, London, 2012.
(3) ‘The situation of Roma in 11 EU Member States’, 세계은행·유럽연합기본권기구(FRA)·유엔개발계획(UNDP) 합동 보고서, Bruxelles, 2012년 5월.
(4) 타보르(Tabor)는 ‘캠프’, ‘숙영지’ 등을 가리키는 폴란드 용어로 여기에는 군사주둔지도 포함된다. 또한 로마족 전체를 일컫는 로마족 용어이기도 하다. 언제나 캠프촌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이 반영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5) 옛 소비에트연방과 공산주의 체제하의 폴란드 정부가 맺은 협정에 따라, 폴란드 국적의 유대계 및 비유대계 사람들이 1955∼60년 단계적으로 고국에 송환되는 길이 마련된다. 사진 속의 사람들은 모두 폴란드 시민으로, 총 25만 명을 대상으로 한 2차 송환 때의 모습이다.
(6) Patrick Williams, <장고 라인하르트의 네 가지 사후 생애: 3개의 픽션과 1개의 연대기>(Les Quatre vies posthumes de Django Reinhardt: trois fictions et une chronique), Parenthéses, Marseille,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