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소피아 코폴라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과연 정당한가?

2024-11-25     김채희(영화평론가)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 마태복음 13장 13절

 

1. 시겔, 이스트우드를 데리고 실험하다.

  돈 시겔(Don Siegel)과 클린트 이스트우드(Clint Eastwood)는 두 편의 서부극, <일망타진 Coogan’s Bluff)>(1968), <호건과 사라 Two Mules for Sister Sara>(1970)에서 합을 맞춘 사이였다. 1960년대 시겔은 두 편의 TV 시리즈, 몇 편의 경찰 드라마와 전쟁 영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서부극에 몰두했다. 그러던 그가 뜻밖에도 토머스 컬리넌(Thomas Cullinan)의 소설을 영화화하는 것으로 차기작을 결정하자 많은 이들이 놀랐다. 마카로니 웨스턴으로 스타덤에 올라선 이스트우드 역시 여러 감독의 구애를 뿌리치고 너무도 ‘이상한’ 영화 <매혹당한 사람들 The Beguiled>에 출연 결정을 내려 주변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1971년은 두 사람에게 가장 바쁜 시기였다. 그 해 초에 시겔은 <매혹당한 사람들>을, 후반기에는 <더티 해리 Dirty Harry>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을 선보였다. 그 사이에 이스트우드는 두 편 모두 주연으로 출연했으며,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 Play Misty for Me>를 통해 감독으로 데뷔했다. 여러 지면에서 밝혔듯이 이스트우드는 시겔과 작품을 같이 하면서 어깨너머로 연출법을 배웠다. <신체 강탈자의 침입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1956)과 같은 B급 영화에 특화되어 있었던 시겔은 한정된 예산과 시간을 적절히 활용해 언제나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연출 경력이 일천한 자신에게 빅 버젯 영화는 언감생심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이스트우드는 70만 달러가 조금 넘는 예산으로 데뷔작을 만들어 1000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매혹당한 사람들>을 통해 배운 저예산 운용 방식과 한정된 공간 속에서 드라마를 만드는 시겔 특유의 연출법은 이스트우드가 <어둠속에 벨이 울릴 때>를 제작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 IMDB에 따르면, <매혹당한 사람들>은 47만 5천 달러를 들여 11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 작품이 기대보다 못한 실적을 올린 이유는 관객들의 기대 심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냉철하고 거친 서부 사나이가 ‘거세’ 당한다는 사실을 누가 감히 예상이나 했을까?  시거를 물고 멋진 총 솜씨로 황야를 누비던 이스트우드는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포로 겸 왕자 노릇을 하다가 아마조네스들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그러니 홍보 담당자가 이 작품의 어떤 부분을 셀링 포인트로 잡아야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One man...seven women...in a strange house!”, “His love... or his life...”

 

  “이상한 집에 한 남자와 일곱 명의 여자”라는 태그 라인은 <매혹당한 사람들>을 직관적으로 설명하는 문구였지만 괴상한 결말로 인해 관객의 허탈감만 가중시켰다. 곁들어진 “그의 사랑과...인생...”이란 부연 설명은 차라리 붙이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뻔했다. 관객을 더욱 화나게 만든 것은 권총을 들고 서부사나이를 재현한 작품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포스터였다. 통쾌한 총격신을 기대했던 이스트우드 팬들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이구동성으로 영화를 비판했다. B급 영화를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유명한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마저 “시겔의 작품 중에 가장 예술 영화에 가깝지만 스타일에 대한 충동만 드러냈다.”라고 혹평했다. 로저 이버트(Roger Ebert)와 콤비를 이뤄 진행했던 TV 쇼, ‘At the movies’로 유명세를 떨친 진 시스켈(Gene Siskel)은 “섹스플로이테이션(sexploitation) 영화와 구별하기 힘든 싸구려 영화(shocker)”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물론 혹평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LA 타임지에서 활동하던 케빈 토머스(Kevin Thomas)는 “블랙 유머로 가득한 서스펜스 드라마이며 스타일의 승리”라고 치켜세웠다. 시겔을 가장 기분 좋게 만든 사람은 피에르 리시앙(Pierre Rissient)이었다. 고다르(Jean-Luc Godard)의 <네 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1960)의 조감독이자, 호금전(胡金銓)의 <협녀 俠女>(1971)를 칸에 소개한 그가 혹평이 자자했던 이 작품을 칸에 초청하겠다고 나선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제작자들의 반발로 이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리시앙의 제안은 시겔을 고무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스튜어트 카민스키(Stuart Kaminsky)와의 인터뷰에서 “여성들은 사기, 절도, 살인 등 그 어떤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너무 순진해 보이는 소녀의 가면 뒤에는 마피아 조직원에게 발견되는 것과 같은 악이 숨어 있다.”라고 주장했다. 과연 시겔은 단지 ‘순진무구함 속에 깃든 악’이라는 고전적 주제에 사로잡혀 논쟁적인 영화를 제작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2. 사연 많은 텍스트

  처음부터 <매혹당한 사람들>의 각본은 시겔의 전작 <호건과 사라>의 각본을 집필했던 알버트 몰츠(Albert Maltz)에게 맡겨졌다. 언제나 그랬듯 일당백 총잡이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면서도 곤경에 처한 수녀 이야기가 버무려진 이 특별한 서부극은 멋들어진 총싸움과 다이너마이트를 동원한 스펙터클이 셀링 포인트였다. <호건과 사라>는 “CLINT EASTWOOD...the deadliest man alive...takes on a whole army with two guns and a fistful of dynamite!(클린트 이스트우드...세상에서 가장 치명적인 남자...총 두 자루와 다이너마이트 한 줌으로 부대 전체를 상대한다!)”라는 태그 라인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카로니 웨스턴의 아이콘으로 인기를 누렸던 이스트우드의 명성에 기대 제작되었다. 줄스 다신(Jules Dassin)의 <네이키드 시티 The Naked City>(1948)와 헨리 코스터(Henry Koster)의 <성의 The Robe>(1953)의 각본을 썼던 몰츠는 시겔이 준비 중이던 <호건과 사라>를 계기로 오랜만에 할리우드로 돌아왔다. 그 유명한 할리우드 텐(Hollywood Ten)의 일원이었던 몰츠는 제임스 스튜어트(James Stewart)가 주연한 <부러진 화살 Broken Arrow>(1951)의 각본을 집필한 공로로 미국작가조합이 수여한 상을 받았지만 블랙리스트에 올라 호명되지 못했다. 결국 동료 작가였던 마이클 블랭크포트(Michael Blankfort)가 그 대신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블랙코미디를 연출한 끝에 <부러진 화살>의 각본상이 결정되는 소동을 겪기도 했다.

 

  시겔은 메카시 선풍이 할리우드에 불어 닥칠 때 불안정한 자신의 지위 때문에, 위대하지만 한편으로 가련한 사나이를 옹호하지 못했다. 또한 두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통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시겔은 오랫동안 고생한 몰츠에게 <호건과 사라>에 이어 <매혹당한 사람들>의 각본을 맡김으로써 마음의 빚을 갚으려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몰츠는 자신이 쓴 이야기 속에서 단 한 차례도 주인공을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몰츠는 그 동안 고수했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해, 원작자 컬리넌의 결말을 뒤집어 남녀 주인공이 행복하게 사는 해피엔딩으로 영화를 만들어버렸다. 컬리넌이 불같이 화를 낸 것은 당연했고 시겔 역시 도저히 이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TV 시리즈 <제스 제임스의 전설 The Legend of Jesse James>에서 시겔과 오랫동안 손발을 맞췄던 클로드 트라버스(Claude Traverse)에게 각본이 넘어간 끝에 현재와 같은 결말에 이르게 되었다. 시겔은 이 사연 많은 소설이 매우 다양한 서브-텍스트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을 진즉에 간파했다. 그는 “<매혹당한 사람들>은 섹스, 폭력, 복수라는 주제를 다루며 남성을 거세하려는 여성의 원초적인 욕망”을 그리고자 했다고 역설했다.

 

 

3. <매혹당한 사람들>, 이토록 다채로운 테피스트리

  남북 전쟁 시기, 북군 병사 맥버니(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부상당해 헤매다가 판스워스 신학교(Farnsworth Seminary for Young Ladies) 근처 숲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이 학교 여학생인 12살 에이미는 정신을 잃은 맥버니를 학교 안으로 부축해서 데려온다. 여학생 5명, 선생(에드위나)과 교장(마사) 그리고 흑인 노예(할리)로 이뤄진 작은 공동체는 그 동안 여성들만의 힘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이곳에서 맥버니는 이질적인 존재로 취급된다. 십대 소녀들은 교장과 선생 몰래 그에게 다가와 키스하고 도망가는 것으로 맥버니에게 갖고 있던 두려움과 호감을 표현한다. 선생과 교장도 소녀들처럼 맥버니에게 이끌린다. 맥버니는 이 작은 왕국의 구성원들과 각각의 비밀을 만들면서 심신을 위로받는다. 그러던 중, 유별나게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소녀 캐롤에게 이끌려 정사를 나누다가 모두에게 들키고 만다. 맥버니가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었던 선생 에드위나는 극도로 흥분한 상태에서 그를 계단 아래로 밀치고 만다. 총상으로 인해 완전하지 못한 다리는 완전히 부러지고 결국 교장 마사는 맥버니의 목숨을 살린다는 명목으로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감행한다. 정신을 차린 맥버니는 마사의 물품을 뒤져 은밀한 비밀을 알아내고 그녀가 자신의 다리를 자른 이유를 성적 질투심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이때부터 ‘왕자’의 가정 폭력과 공포 정치가 시작된다. 그는 와인 셀에서 술을 가져와 마음껏 마시며 술주정을 부리고 에이미가 아끼던 애완 거북이마저 죽이고 만다. 에드위나는 마사와 의견대립 끝에 그녀의 뺨을 갈긴 후에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맥버니와 정사를 나누러 나가버린다. 마사는 순종적이던 에드위나가 자신을 때린 원인이 모두 악마 같은 맥버니에게 있다고 아이들을 선동한다. 아끼던 애완 거북이가 죽은 사건을 계기로 맥버니에게 가진 호감이 증오로 변한 에이미는 마사가 시킨 대로 독버섯을 채취해 가져온다. 마사는 맥버니에게 화해를 청하면서 특별한 만찬을 준비했다면서 버섯 요리를 대접한다. 호의에 감탄한 맥버니는 북군에게 요청해 이곳을 지켜달라고 할 것이며 자신과 에드위나는 새벽에 떠나 결혼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한다. 이윽고 음식을 맛있게 먹던 맥버니는 호흡곤란을 일으켜 죽고 만다. 마사는 아이들이 동요하지 못하게 다독거리고 독버섯을 가져왔던 에이미는 버섯 때문이 아니라 몸이 약해져서 그렇게 된 거라고 중얼거린다. 맥버니의 주검 위로 그가 부른 노래가 보이스 오버로 들린다.

 

“예쁜 여성들이여 이리 모이세요. 햇빛 속을 걸어요. 그에게 총을 쥐게 하지 마세요. 모든 젊은이들이여 이리 모이세요. 내 경고를 듣고 병사가 되지 말아요. 입대하지 말아요. 비둘기는 떠나고 까마귀가 올 거예요. 죽음이 북소리 장단에 맞춰서 행진해 올 거예요.”

 

  원래 고딕 소설은 18-9세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해서 수도원이나 수녀원과 같은 외딴 종교 건물, 지하 납골당에서 벌어지는 복수심에 가득찬 감금과 살인을 다루며, 종교적 맹신과 근친 관계를 통해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유럽의 고딕 소설의 영향을 받은 미국에서는 광기, 쇠퇴,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남북 전쟁 당시 소유권을 잃은 남부 귀족의 과거 영광을 향한 집착과 타자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는 장르로 발전했다. 고딕 소설 전문가 마샬 브리짓(Marshall, Bridget)은 저서 『Critical Insights: Southern Gothic Literature』에서 이 장르는 “노예제, 외부 세계에 대한 두려움, 폭력, 괴상함에 대한 집착, 현실적 요소와 초자연적 요소 간의 긴장을 통해 미국 남부 역사에 초점을 맞춘다.”라고 설명한다. 컬리넌의 저작은 고딕 소설의 유행이 지난 1960년대에 발간되었지만 이 소설의 장르적 특색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작품이다. 그러므로 외부 세력에 의한 침입과 폭력에 천착했던 시겔이 『매혹당한 사람들』에게 매혹당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백설공주

  게다가 이 소설은 동화 『백설 공주』와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설정을 뒤집으면서 그 안에 내재된 성적 메타포를 극대화했다. 각본가 몰츠는 광기어린 왕비의 저주에도 불구하고 일곱 난쟁이들의 보살핌으로 결국 왕자를 만나 행복에 이르는 『백설공주』의 결말을 떠올리면서 컬리넌의 이야기를 비틀었다. 원작자 컬리넌은 일곱 난장이를 신학교 기숙사에 거주하는 7명의 여성들로 바꾸고 교장 마사를 악독한 왕비이자 난쟁이들의 일원으로 교묘하게 탈바꿈시킨다. 그리고 죽음처럼 고요하게 ‘잠든 숲(신학교)’ 혹은 ‘잠든 미녀(7명의 여성들)’라는 중의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잠자는 숲속의 미녀(La Belle au bois dormant)’ 이야기를 도입해 성적으로 고립된 ‘신학교라는 숲’과 ‘여성 공동체’가 성적으로 각성할 수 있도록 왕자의 키스에 해당하는 맥버니의 남성성을 부각한다. 또한 영화 후반부에 에드위나가 다리가 잘려 불구가 된 맥버니에게 진정한 사랑을 느껴 그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대목은 흡사 제인이 한쪽 팔을 잃고 실명까지 한 로체스터와 재회하면서 “독자여러분 저는 그와 결혼했습니다.(Reader, I married him)”라고 말했던 『제인 에어』의 결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포스터 허쉬 (Foster Hirsch)가 시겔의 영화를 두고 “외딴 탑에서 잠든 공주를 깨우는 왕자의 로맨스, 쇠락해가는 남부의 이야기, 남성과 여성 사이의 근본적인 적대감, 주인과 하인 간의 역할 교환 등 여러 문학적 태피스트리”라고 주장한 것은 타당하다.

  시겔은 <졸업 The Graduate>(1967),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1967), <미드나잇 카우보이 Midnight Cowboy>(1969)와 같은 1960년대 후반부터 유행한 뉴할리우드 스타일(American New Wave)을 도입해 섹스와 폭력을 작품의 동력으로 주입하고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잔혹 동화로 패러디해 인간의 근원적 욕망을 고딕풍 영화로 재현했다. <매혹당한 사람들>은 억압받지 않고는 억압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살인을 위한 조건을 만들지 않고는 살인이 불가능하다는 패러독스를 ‘매혹당한 사람들’의 중의적 의미와 공명시킨다. 우리는 이제 “매혹당한 사람들은 누구인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다. 왕자, 맥버니는 잠든 숲과 그 안에 사는 미녀들에게 잠식당하고 그를 매혹시켰던 존재들은 두렵지만 흥미로운 외부 침입자에게 잠식당한다. 파국은 서로에게 매혹된 자들 사이에 벌이는 주도권 싸움의 결과로 나타난다. 시겔은 서부극의 아이콘을 거세시키면서 남부 고딕 이야기를 마무리했지만 이는 관객이 원한 결말은 아니었다. 아직 남성의 가부장적 역할에 경도되어 있던 1970년대 관객들에게 시겔의 시도는 너무 급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4. 대부의 딸, 소피아 코폴라

  소피아 코폴라(Sofia Coppola)는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영화계의 대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Francis Ford Coppola)의 세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영화계에 입문했지만 보트 사고로 단명한 큰 오빠 지안카를로(Gian-Carlo), 아버지가 세운 영화사 아메리칸 조에트로프(American Zoetrope) 영화사를 이끌고 있는 둘째, 로만(Roman)과 더불어 소피아는 어린 시절부터 영화계에 투신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녀는 비록 아버지의 후광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어쨌거나 20대에 <처녀 자살 소동 The Virgin Suicides>(1999)로 감독으로 데뷔한 촉망받는 인재였다. 아무리 대부의 딸이지만, 소녀들의 성장담을 다룬 이 영화에 누가 선 듯 600만 달러가 넘는 자금을 투자했을까? “패밀리 비즈니스는 가족 간 거래로 시작한다.”라는 코폴라 가문의 원칙 아닌 원칙을 상기해보라. 조에트로프를 이끌고 있는 오빠가 제작비의 절반을 댔다.

 

코폴라

  코폴라는 자식들 외에, 여동생(<록키>의 히로인 탈리아 샤이어(Talia Shire)), 조카 니콜라스 케이지(Nicolas Cage/형 오거스트(August Coppola)의 아들), 제이슨 슈워츠먼(Jason Schwartzman/탈리아의 아들)을 영화계에 이끌었으며 요절한 큰아들이 남긴 손녀딸, 지아 코폴라(Gia Coppola)마저 2013년 <팔로 알토 Palo Alto>란 영화로 데뷔시켰다. 지아는 25살에 패션 필름으로 업계에 입문했을 때, 진행했던 한 인터뷰에서 “이 일을 시작하기 전에는 어떤 영화 교육을 받았나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제 가족과 함께 지내는 건(영화 작업) 항상 평범한 일이었던 것 같아요.”라고 간단하게 답했다. 코폴라 가문을 예술계로 이끈 사람은 대부 프란시스의 아버지인 카마인(Carmine Coppola)이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영화계에 진출하기 전부터 이미 유명한 작곡가였던 카마인은 아들을 위해 니노 로타와 함게 <대부> 시리즈 음악을 작곡했으며, <지옥이 묵시록>에서 선보인 대부분의 곡을 단독으로 만들었다. 영화 산업을 패밀리 비즈니스로 만든 내력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소피아는 영화와 함께 숨을 쉬고 살았다는 표현이 과하지 않는 인생을 살았다. 그녀는 1살 무렵부터 대부 시리즈의 제 1부를 시작으로 아버지가 연출한 여덟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소피아가 대학 초년생 시절 아버지는 딸을 패밀리 비즈니스에 끌어들이기 위해 묘안을 냈다. 당시 프란시스는 뉴욕파인 우디 앨런(Woody Allen), 마틴 스코세이지(Martin Scorsese)와 더불어 <뉴욕 스토리 New York Stories>(1989)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맡은 세그먼트, <조 없는 삶 Life Without Zoe>의 시나리오를 함께 써보자고 소피아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소피아는 위노나 라이더에게 배당되었지만 그녀가 신경쇠약 때문에 포기한 <대부 3>의 마이클 콜리오네의 딸을 연기했다. <대부 3>의 흥행이 위태로워졌다는 평가까지 나올 정도로 어설픈 연기로는 꿈을 이루기 어렵다고 판단했던지 그 이후 소피아는 배우보다는 아버지의 길에 더 역점을 둔다.

 

처녀

  전술한대로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연출에 집중한 결과 소피아는 비슷한 연령대에서는 특별한 경쟁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나갔다. 데뷔작 <처녀 자살 소동>은 칸 감독주간에 초청되었고 그녀의 대표작인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처녀 자살 소동>에 이어 커스틴 던스트를 다시 기용해 화제가 되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칸 경쟁 부분에 진출했고 4년후 엘 패닝을 캐스팅해 만든 <썸웨어>로 베니스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후 할리우드 스타들의 빈 집을 터는 십대들에 관한 실화를 영화화한 <블링 링>(2013)은 악평에도 불구하고 칸의 ‘주목할 만한 시선’에서 상영되었고 2017년 <매혹당한 사람들>로 드디어 칸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연출한 모든 영화가 언론의 큰 주목을 끌면서 국제영화제 씬이나 아카데미에서 이 정도 성과를 내는 동시대 미국 여성 감독은 캘리 라이카트나 클로이 자오 정도라고 할 수 있다.

 

 

5. <매혹당한 사람들>의 리메이크 혹은 재해석

  조카, 지아 코폴라의 <팔로 알토>도 그렇지만 <처녀 자살 소동 The Virgin Suicides>(1999), <썸웨어 Somewhere>(2010), <블링 링 The Bling Ring>(2013) 그리고 데뷔작 직전에 만든 단편 영화, <별을 핥아라 Lick the Star>(1998)에 이르기까지 소피아도 10대 이야기에 천착했다. 하지만 금수저 출신이라는 편견 때문인지 캐릭터와 주제에 대한 이해력과 깊이가 부족하다는 평을 듣는다. 소피아의 전체 필모그래피는 어린 시절이나 유명인 이야기에 치중되어 있고 작가론적 관점에서 보자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적 일관성도 부족하다. 이러한 그녀의 지난 행보와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매혹당한 사람들>은 가장 예외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영화는 본인이 스스로 결정해서 작품화한 것이 아닌, 프로덕션 디자이너이자 오랜 친구인 앤 로스(Anne Ross)가 권하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시겔의 작품을 감상한 이후 원작을 읽은 소피아는 이 영화를 다른 관점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직후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포부를 밝혔다.

"시겔의 영화를 보고 나니 너무 신기해서 계속 머릿속에 남았어요. 이야기의 전제(premise) 자체가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적군이 남부 여성들의 환경에 침입한다는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웠고 같은 이야기지만 여성들의 관점에서 그들이 어땠을지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 영화는 리메이크가 아니라 재해석(reinterpretation)입니다. 우리 가족에게 ‘리메이크’는 나쁜 단어와도 같죠. 절대 그렇게 안할 거라고 다짐했습니다.”

  리메이크나 재해석은 같은 행위지만 후자는 전자에 비해 텍스트를 자신의 관점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탈바꿈하겠다는 의지가 더 강력하게 작동한다. 그렇다면 소피아는 리메이크가 아닌 재해석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컬리넌의 원작은 시겔과 소피아의 영화들과 달리 맥버니를 제외한 7명의 눈으로 사태를 바라보는 일종의 다중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영화에서 생략된 모든 등장인물의 전사(前史)가 기술되어 있다. 다양한 이력을 가진 일곱 개의 시선은 맥버니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기 때문에 독자들은 이 시선들을 경유하여 사태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하지만 컬리넌의 수사법을 그대로 영화에 적용시키게 되면, 러닝 타임이 길어질 뿐만 아니라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고심 끝에 시겔은 다중 시점을 해체하고 이를 대신할 수 있도록 인물들에게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발화하게 만든다. 한편 원작의 인물들을 합치거나 특정한 역할의 비중을 가감함으로써 분산적인 드라마투르기를 단순화시켰다. 그 결과 마사의 여동생이자 선생으로 등장하는 해리엇은 삭제되고 그녀의 역할 일부를 많은 비밀을 간직한 17살 소녀 에드위나 캐릭터에 통합된다. 시간예술(time-based)인 영화의 매체적 속성을 고려한 시겔의 선택은 105분이라는 제한된 조건 속에 원작이 품고 있었던 성적 에너지가 충만한 기괴한 고딕 드라마로 큰 무리 없이 이어졌다. 소피아 역시 시겔의 방식을 그대로 도입해 해리엇과 에드위나를 합치고 몇몇 캐릭터의 비중을 줄이면서 잔가지를 제거했다. 그녀는 리메이크가 아닌 재해석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시겔의 에드위나(엘리자베스 하트먼)가 사랑에 집착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는 인간적인 감정에 초연한 인물로 탈바꿈시킨다. 그 결과 커스틴 던스트는 맥버니의 죽음을 목격하고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와 더불어 에드위나가 맥버니와 함께 공동체를 떠나 결혼하겠다고 선언하는 대목도 자연스럽게 삭제된다.

 

매혹당한

  캐릭터를 손본 후에 소피아는 성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을 지워 문제의 소지가 될 수 있는 싹을 자른다. 삭제의 이유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이 영화는 강한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971년 영화에서 살짝 미쳤거나 과장된 캐리커처에 불과했던 캐릭터들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고 싶었습니다.” 이는 시겔의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의 ‘살짝 미친’ 상태를 정상으로 복원하고 ‘캐리커처’에 머문 피상적인 인물의 성격 구축을 좀 더 현실화시키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여겨진다. 소피아가 여성 캐릭터들이 “살짝 미쳤다”라고 한 이유는 섹스와 사랑에 대한 집착이 시겔의 영화에서 과도하게 표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시겔의 작품에서 중요한 모티프로 작용했던 근친상간과 동성애를 암시하는 교장 마사의 꿈 장면이 삭제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시겔은 마사가 맥버니의 다리를 자른 이유를 성적인 질투심에서 찾았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침실로 향하지 않고 캐롤과 정사를 나눈 맥버니를 상징적 ‘거세’라는 수단으로 응징한 것이다. 그러나 마사가 맥버니에게 성적 충동만 느낀 것은 아니었다. 마사는 근친상간의 추억을 떠올리며 잠드는데, 연이은 꿈 장면에서 맥버니와 정사를 나눌 뿐만 아니라 에드위나에게도 다정한 키스를 한다. 이윽고 문제적인 장면이 등장한다.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Rogier van der Weyden)의 피에타(Pietà)를 패러디한 이 쇼트는 마사의 꿈 장면이 남녀 사이에서 흔히 벌어지는 단순한 열망의 표출로만 해석되는 것을 가로 막는다. 모성, 근친상간, 동성애가 뒤섞인 이 장면은 마사가 맥버니라는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21세기에는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운 1971년 영화의 한 장면은 소피아의 재해석에 대한 욕구를 더욱 강화했다. 시겔의 오프닝에서 맥버니는 거의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아멜리아에게 발견된다. 이 때 남군이 숲속을 지나가자 두 사람은 몸을 숨긴다.

 

맥버니 : 이름이 뭐니, 얘야?

소녀 : 아멜리아요. 사람들은 에이미라고 불러요.

맥버니 : 난 존 맥버니 상병이야. 사람들은 맥비라고 부르지. 몇 살이니 에이미?

소녀 : 12살이요. (약간 들떠 큰 소리로) 9월이면 13살이 돼요.

맥버니 : (쉿 조용) 키스할 수 있는 나이구나. (소녀에게 키스한다)

 

  맥버니가 소녀의 입을 키스로 막는 순간 마차를 탄 남군 기병대가 그들이 은신해 있는 곳을 그냥 지나친다. 키스 이후 소녀는 좀 더 친근하게 맥버니를 맥비라고 부르면서 포기하지 말라고 용기를 북돋아준다. 시겔이 이 장면을 집어넣은 이유는 ‘잠자는 숲속의 공주들’의 나이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매혹적인 존재라는 맥버니의 캐릭터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소피아로서는 소아성애를 떠올리게 하는 이 장면을 반드시 제거해야 했다. 성적인 코드가 제거되면서 마사 캐릭터에도 많은 변화가 뒤따른다. 온갖 성적 욕망에 사로잡힌 번뇌의 마사(제럴딘 페이지)는 소피아의 재해석으로 인해 독실한 신자이자 공동체를 보호하는 수호자로 변신한다. 맥버니(콜린 파렐)가 그녀의 욕망을 떠보기 위해 전쟁 전에 사귀던 사람 있었냐고 묻자 마사는 “아픔 없는 사람 있나요?”라고 설의법으로 답한다. 그렇지만 이야기는 진행되어야 하기에, 소피아는 은근한 방식으로 마사가 맥버니를 붙잡게 만든다. 맥버니가 “장미를 좀 다듬어야겠어요. 넝쿨이 너무 무성해요. 손봐드릴게요.”라며 은유법으로 접근하자 마사는 “정원일 그리 잘하시면 몸이 나은 뒤에 손질해주세요.”라고 답한다. 이에 호응하기 위해 맥버니 캐릭터에도 어쩔 수 없이 수정을 가해야 했다. 시겔의 맥버니가 불가항력의 매력을 가진 마초였다면 소피아가 그린 침입자는 한결 부드럽게 묘사된다. 소피아의 의도대로 새롭게 재해석된 <매혹당한 사람들>의 여성들은 전작보다 자립심과 자존감이 강한 인물로 바뀐다. 하지만 극을 지배하던 성적 에너지가 옅어지면서 긴장감도 함께 사라졌다. 그녀의 재해석은 변화된 시대적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패미니즘적 가치를 작품에 녹여내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삭제’가 파장을 불러오기 전까지는.

 

 

6. 흑인 노예 캐릭터가 삭제된 이유

 

  칸에서 소피아의 감독상 수상은 그녀가 베니스에서 <썸웨어>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것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왔다. 그녀의 수상 소식이 전해지자 어떤 평론가는 “아마도 심사위원들은 이 영화의 서사가 기본적으로 남부 고딕(Southern Gothic)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라는 말로 의구심을 드러냈으며 또 다른 평론가는 “컬리넌의 이야기에서 너무 많은 것을 지웠다.”라며 불만을 표했다. 그들의 비판은 남부 고딕이 가지고 있는 장르적 유산이 사라진 것에 대해 아쉬움을 드러낸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몇몇 사람들이 소피아의 재해석보다 시겔의 것을 더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컬리넌의 원작이 가진 남부 고딕적 요소가 시겔의 작품에는 고스란히 살아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몇 편의 동화와 서브-텍스트를 비틀어 씨줄과 날줄로 엮으면서 발화되는 잔혹 동화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아쉽지만 이를 담보로 새로운 가치관을 창출할 수 있다면 이는 환영할만한 일이다. 어쨌거나 원작을 재해석하거나 리메이크를 하는 경우 비난은 피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소피아의 의도가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는 존재였던 여성들의 자립을 도모하고 자존감을 고취시키는 것이었다면, 흑인 하녀 핼리(컬리넌의 원작에서는 매티) 캐릭터를 삭제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당연히 핼리가 사라진 이유를 묻는 질문이 쇄도하자 소피아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그렇게 중요한 주제를 가볍게 다루고 싶지 않았어요. 어린 소녀들이 영화를 볼 텐데, 이것은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캐릭터의 묘사가 아니었습니다.”

 

  매티는 원작에서 가장 냉정한 시각을 유지하는 인물이다. 핼리는 맥버니 상병이 자신을 해방시켜 줄 북군에 소속되어 있지만 그의 사기꾼 기질을 재빨리 눈치 챈다. 시겔 영화에서도 핼리는 잠자는 7공주가 유혹과 사기의 게임에 빠지는 동안 침입자의 속임수를 꿰뚫어보고 당시 유행하던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 장르에서 자주 등장하는 흑인 여성 캐릭터의 사나움을 드러내면서 자신을 지킨다. 영화 후반부에서 맥버니가 그녀를 강간하겠다고 위협하자 핼리는 마사의 오빠가 강간하던 장면을 떠올리며 “빌어먹을 백인 놈아 시체가 된 흑인 여자랑 같이 있게 될 거다. 그것만이 내게서 네놈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니까.”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영화의 배경인 남북전쟁이 왜 일어났으며 흑인 노예 제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드는 이렇게 중요한 매티의 존재를 소피아는 “흑인 노예들이 다 떠났다.”라는 한 줄로 요약해버린다. 소피아의 지지자들은 “남북 전쟁 시기이기 때문에 이를 지적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흑인 노예 문제를 다룬다면 영화의 주요 관점인 여성 문제에서 초점이 벗어난다.”라며 옹호한다. “가볍게 다루고 싶지 않아서 아예 삭제했다. 컬리넌과 시겔이 그린 캐릭터는 내가 구현하고 싶은 흑인 여성 캐릭터가 아니었다.”는 소피아의 설명은 “컬리넌과 시겔은 흑인 여성을 가볍게 다루었는가?”, “가볍게 다루고 싶지 않았다면 삭제하는 것보다 진지하게 다룰 수도 있지 않았는가?”와 같은 꼬리를 무는 질문을 하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이 모든 질문에 앞서 우리는 소피아가 마음에 들었다는 전제(“적군이 남부 여성들의 환경에 침입한다는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웠고 같은 이야기지만 여성들의 관점에서 그들이 어땠을지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가 인종차별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여성들의 이야기는 백인에게만 한정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핼리가 사라짐으로써 사소하지만 중요한 의문들에 사로잡히게 된다. 프랑스어와 교양 교육을 받고 기도에 전념하는 백인 여성 중에 누가 요리를 했을까? 마치 샤넬 캣 워크에서나 볼 수 있는 저 아름다운 드레스를 관리하고 풀을 매기는 일은 누가 담당했을까? 이 은둔의 여성 공동체가 작동할 수 있는 상부구조는 마사와 에드위나겠지만 그들이 업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실제적으로 떠받치는 하부구조는 누구에 의해서 유지되는가?

 

마리앙투아네트

  소피아의 역사 지우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를 논하면서 프랑스 혁명을 빼놓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소피아는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한 여성을 통해 혁명을 재조명하고자 했다고 하지만, “소피아 코폴라의 성인버전 바비인형 놀이에 불과하다”는 한 평론가의 말처럼 패션의 아이콘으로서 마리 앙투아네트만 부각될 뿐이다. 심지어 그녀는 원작자 안토니아 프레이저(Antonia Fraser/2001년 영화의 모태가 된 『Marie Antoinette』 출간)에게 정치적인 문제를 제외해도 되겠냐고 묻고 이에 대해 허락까지 받는다. 소피아의 역사 지우기는 로케이션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매혹당한 사람들> 촬영지를 물색하다가 비욘세(Beyoncé)가 레모네이드 앨범에 수록한 ‘formation’을 위한 뮤직비디오를 루이지애나에 소재한 매드우드 플랜테이션 하우스(Madewood Plantation House)에서 촬영했다는 소식을 듣고 곧 바로 영화의 촬영지로 결정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라고 누군가는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비욘세의 ‘formation’이 흑인 여성의 자존감을 주장하는 곡이란 사실을 감안했더라면 그녀는 핼리를 삭제한 재해석 버전을 이곳에서 촬영하는 것에 대해 그 의미를 숙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소피아는 재빨리 이 기쁜 소식을 영화에 출연했던 백인 동료들에게 전파했다. 엘 패닝(Elle Fanning)과 커스틴 던스트(Kirsten Dunst)는 영화 촬영 중에 비욘세의 뮤직비디오 한 장면을 재현한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무사유로 인한 차별은 이런 식으로 바이러스처럼 전파되는 법이다.

 

흑인 혈통에 크리올까지 섞여 만들어진 Texas산 흑인 촌뜨기

내 혈통을 이어받은 우리 아기의 아프리칸 머리가 좋은 걸

Jackson5의 넓은 콧구멍 같은 내 흑인 코가 나는 좋은 걸

이렇게나 돈을 많이 벌었지만, 남부 촌동네 스타일은 못 버리지

- Formation의 가사 중에서

 

  소피아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패션에 관심이 많았을 뿐이고 인종 문제에 대해 신중히 접근하고 싶었을 뿐이고 정치보다는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졌을 뿐이다. 2017년 칸 심사위원들은 소피아의 작품에서 페미니즘의 약동하는 기운을 느꼈을까? 그래서 상을 주었을까? 아니면 두 번씩이나 칸의 정상에 섰던 ‘대부’의 향기를 그녀에게서 느꼈을까? 이듬해 아카데미에서 소피아의 <매혹당한 사람들>은 수상은커녕 어떤 부문에서도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소피아는 베니티 페어(Vanity Fair)가 <매혹당한 사람들>의 제작 동기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저는 항상 남부의 여성들과 남부를 좋아했습니다. 정말 이국적이고 다르거든요.” 그녀의 인터뷰는 우리가 잠시 간과한 것을 상기시킨다. 미학과 비정치적인 것이 언제나 동의어가 되는 것은 아니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생각의 진공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바로 그 사실!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