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만 되면 ‘범죄’ 띄우는 보수언론

Corée

2012-10-14     이택광

미국의 역사학자 코리 로빈은 <공포>라는 책에서 정치의 기본 이념으로 '공포'를 지목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새로운 공포의 시대가 열렸다는 중론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한 것이었다. 정치의 역사가 겉으로 보면 공포를 적으로 돌리고 이성과 자유를 옹호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공포를 중요한 통치 수단으로 삼아왔다는 요지다. 역설적으로 공포가 정치에 복귀하는 것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자유주의의 의무와 가치를 훼손한다.

물론 이런 공포가 공공연하게 정치의 주제로 들어설 수도 있겠지만, 최근 들어 둘의 관계가 일방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한다. 공포의 확산이 위에서 아래로 진행되기보다, 아래에서 옆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지대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신종 음모론마저 나올 정도로, 공포를 정치 문제와 엮는 중개자로서 선정적인 언론 보도가 한몫하고 있다.

공포가 이렇게 정치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안전'에 대한 대중의 불안에 있다. 여기에서 대중은 도시에 거주하는 중간계급, 다시 말해 '표준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표준시민은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도심에 거주하기 점점 어려워지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혼자 산다면 모를까 가족을 이루는 데 필요한 절대적인 조건을 도심에서 마련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과거 부산 덕포동 여중생 살해사건이나 최근 전남 나주 초등생 납치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서울이라는 중심을 벗어난 곳에서 발생하는 범죄는 '취약계층'이라고 불리는 붕괴한 가족을 대상으로 삼는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까닭은 국가권력이 담당해야 할 치안을 가족이라는 사적 영역에 유기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건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보다 '최소국가론'을 떠받치는 한국형 자유지상주의 덕분일 것이다. 한국에서 치안이라는 근대 정치의 핵심은 노동력을 관리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극심한 노동현장 통제는 노동력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산업화를 통해 도시로 집중한 인구의 통치를 의미하기도 했다. 국가 주도의 중공업 정책을 통해 조성된 대단위 사업장은 훈육의 장소이자 규율을 내면화하는 장치이기도 했다. 그러나 1997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구조조정이라는 명목으로 급속하게 이런 메커니즘을 해체한다.

구조조정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실제 대단위 사업장 중심으로 이뤄지는 근대 국가권력의 작동 방식을 '생명권력'으로 대체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신체에 직접적으로 작용했던 국가권력이 이제 민간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지식에 근거한 '생명권력'이 전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효과적인 자기 통치를 최대 미덕으로 설파하는 자기계발의 이데올로기가 이 과정에서 노동력 재생산의 물질 토대로 자리잡았다. 대기업 중심으로 도입된 자기계발 논리는 구조조정에 따른 새로운 노동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명분을 제공했다.

자본주의에서 자기 통치의 완성은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한때 유행했던 숱한 '성공 스토리'는 자기계발서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었다. 1990년대에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던 조안 리 같은 '커리어우먼'의 사연이나, '초라한 더블보다 화려한 싱글이 좋다'는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즘은 결국 경제력이라는 '능력'을 내세워서 미처 성장하지 못한 여성 노동력을 새롭게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조안 리는 출근하다가 가을 하늘이 아름다워서 즉흥적으로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로 날아간 자신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이런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넉넉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목도하는 자기계발론의 맹아였다고 할 수 있다.

도시중간층의 공포 자극, 보수화 유도

1990년대 이후 한국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한 이데올로기는 자유지상주의에 가까웠다. 그러나 자유지상주의에서 설정하는 절대 자유에 대한 유토피아주의는 시장의 절대시로 실현됐고, 시장을 확대하고 정부의 기능을 축소하는 최소국가에 대한 옹호가 대세를 이루었다. '작은 정부, 큰 시장'이라는 말이 군사독재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것이다. 6월 항쟁이라는 데모스의 분출을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안보 논리가 노태우 정부 시절에 필요했다. 끊임없는 재개발을 통해 거주민들을 추방시켰다. 데이비드 하비가 지적하는 추방에 의한 축적이 가속화한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부동산 붐'이라고 명명되는 이 축적의 과정에서 밀려난 이들은 서울 변두리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운 좋은 이들은 부의 사다리를 타고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다수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신의 삶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고용과 해고가 자유롭고, 급속하게 변화하는 산업구조 덕분에 기본 기술을 끊임없이 바꾸는 것이 '능력 있는 삶'이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바람직한 삶'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사회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사회라고 불리는 비시장적 영역은 점점 축소되고, 시장이 사회를 대체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과거 같으면 선배를 만나 술 한잔 기울이며 전수받을 수 있는 노하우나 팁을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학원에서 교육받아야 하는 변화가 일어났다. 개인으로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통치의 능력을 배가하는 것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인식되기 시작했다.

사회가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각성은 구성원 전체를 잠정적 범죄자로 상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폐쇄회로텔레비전(CCTV)이 대표적인 장치다. CCTV는 미셸 푸코에게 판옵티콘(원형감옥)에 불과했던 근대의 규율권력이 전일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이 사회는 사회의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판옵티콘처럼 서로를 지켜보는 감시탑에 가깝다. 이 상황이야말로 정확하게 데모스의 정치를 합의 민주주의라는 부르주아 체제에 묶어두는 알리바이이기도 하다. 이른바 '취약계층'에서 발생한 사건을 침소봉대해서 보도하는 언론의 효과는 표준시민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도시 중간계급에게 공포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도시 중간계급에게 아동성범죄를 비롯한 취약계층을 상대로 하는 강력범죄는 언젠가 자신들에게도 닥쳐올 수 있는 현실의 가능성이다. 책 <우파의 불만>에서 논의했던 것처럼, 영화 <도가니>는 이런 도시 중간계급의 공포를 상상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 잔혹극이었다. <도가니>를 '사회극'으로 만들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붕괴한 사회로 인해 발생한 도시 중간계급의 위기의식이었다. 도시 중간계급에게 선정적인 언론의 범죄 보도가 먹혀드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이 보도에서 전달하는 내용이 범죄의 폭력성과 잔인성을 보여주기에 공포를 느끼기보다, 그 범죄의 온상으로 자신들의 처지가 전락할지 모른다는 구체적인 위기감이 이들을 자극하는 것이다.

범죄를 보도하는 언론의 선정성은 이런 맥락에서 도시 중간계급의 공포를 자극해서 정치적 보수화를 유도하는 장치인 셈이다. 민주주의라는 상태는 너도나도 자신의 욕망을 주장하는 상황에서 탄생한다. 이 무질서의 상태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공포라는 최루탄을 투하하는 것이다. 평소에 이 상황은 언론시장이라는 이윤 기계의 논리를 따른다. 숱한 매체들이 인터넷 시대에 탄생했고, 종이신문의 장악력을 압도하는 온갖 군소 언론이 만들어졌다. 자신의 처지를 유지하기 위해 언론들은 콘텐츠를 필요로 한다.

광고를 유치하기 위해서 판매 부수를 올리고 조회 수를 늘리는 방법은 매일 특종을 하든지, 아니면 계속 선정적인 내용을 보도하는 수밖에 없다. 인터넷 시대로 접어들면서 언론은 자연스럽게 정론직필하기보다 미끼를 던져서 독자를 유인하는 '낚시질'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아르바이트 학생을 써서 포털 사이트에 올라가는 메인 제목을 선정적으로 처리하게 만든다는 소문은 이제 진실로 굳어졌다.

평소 이렇게 시장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언론이 선거 기간만 되면 본색을 드러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궁극적으로 언론의 선정 보도와 데모스의 동요를 고정시키는 치안의 논리가 서로 관련성을 갖기 때문이다. 보수언론은 데모스의 요구를 발산하는 정치적 차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치를 윤리적 위계질서로 분할하는 역할을 한다. 보수언론의 보도가 선거 기간에 더욱 선정적으로 바뀌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선정성이 노리는 것은 도시 중간계급의 공포심 자극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의 붕괴와 가족의 위기에 도시 중간계급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이유는 1990년대 이래로 '공동선'으로 통념화한 자유지상주의의 '최소국가론'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서 도시 중간계급의 정서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국가론'이 개인의 차원에서 실천 강령으로 만들어질 때 자기계발론이 탄생한다. 자기계발론은 일단 성공할 경우 신화로 인식될 수 있지만, 실패할 경우 빠져나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이 된다. '더 많은 자유'라는 자유지상주의의 정언명령을 '더 많은 돈'이라는 세속적 가치로 치환하는 과정이 자기계발론에 숨어 있다. 이렇게 고상한 정치적 이상은 하찮은 육체를 만나 현실화한다. 끔찍한 범죄에 대한 보도가 도시 중간계급에게 남기는 상상은 구체적인 현실성을 얻는다. 자기계발에 성공한다면, 자신은 그 범죄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지옥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돈이 필요하다.

더 큰 자유를 누리기 위해 안전은 필수다. 그렇지만 안전을 갈구하는 도시 중간계급의 태도는 국가 불신에 기반을 둔다. 국가는 이해관계를 나눠가진 부분집합을 재현하는 합의의 상태다. 그러나 이 합의의 상태는 어긋나는 이해관계 때문에 언제나 삐걱거린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은 이런 국가의 기능에 회의를 품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쁜' 정치인들로 인해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쁜 정치인들을 걸러내고 '착한' 정치인들로 정치를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고 항상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생각이 진짜 정치개혁이라고 할 수 있는 데모스의 출현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다. 데모스는 시민이나 국민으로 포섭할 수 없는 과잉의 정치다. 데모스는 '아무나'이면서 동시에 개인으로 수렴할 수 없는 정치적 요구를 분출시키는 존재다.

도덕주의 프레임, 보수우익의 선거전략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외박>에 나오는 이랜드 여성노동자들이야말로 데모스의 분출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이들은 노동조합운동으로도 정당정치로도 재현하기 어려운 자신들만의 즐거움을 나눠가진 존재다. 문제는 평생 처음으로 '외박'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했던 여성노동자들을 호명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사실이다. 파업농성이 끝나고 이들이 돌아간 곳은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일상성의 윤리였다. 따라서 위험에 처한 가족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는 것은 이런 일상성의 윤리에 대한 옹호로 이어진다. 엄연히 강력범죄의 대상은 취약계층이라고 불리는 '몫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노동의 기회마저 공평하게 부여받지 못한다. 가족은 붕괴했고, 아이들은 방치됐다. 범죄에 파괴된 문제 가정은 언제나 연민을 자극한다. 계급이라는 사회구조적 문제가 온정주의라는 손쉬운 해결책을 만나는 까닭이다.

선거 기간에 부쩍 보수언론들이 강력범죄에 대해 선정적 보도를 일삼는 까닭은 반복되는 정치의 계절에서 분출하는 데모스의 정치의식을 치안 문제에 묶어두려는 의도를 내장하고 있는 것이다. 보수주의자들에게 정치는 새로운 것의 출현을 통한 변화라기보다, 기존 것을 지속시키는 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착하고 유능한 지도자가 나와서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는 정치를 해야 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매일 언론을 장식하는 '나쁜 놈들'을 척결해주는 것이 바로 착하고 유능한 지도자라는 증표다. 대선 후보 모두 열심히 착하고 유능한 능력을 앞다퉈 과시하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글•이택광 경희대 영미문화전공 교수. 영국 셰필드대학 영문학 박사. 저서로 <한국문화의 음란한 판타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