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위선, ‘규칙에 기반한 질서(RBO)’

겉으로는 ‘다자주의’, 속으로는 국제 질서 장악

2024-11-29     안세실 로베르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국제이사

국제법과 유엔 헌장의 자리에, 서구 국가들은 국가 간 관계를 평화롭게 한다고 여겨지는 새로운 체제를 내세운다. 불명확하고 견고한 이론적 토대가 없는 이 ‘다자 질서’는 주로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세계의 흐름을 장악하려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

 

 

외교관들의 입에서 새로운 표현이 등장하고 있다. 평화를 위협하는 상황에 직면하여 “국제적 규칙에 기반한 질서”(Rules Based Order, RBO)를 수호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이다.(1)

마치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처럼, 서방 국가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2021년 10월, 워싱턴과 파리는 공동 성명을 통해 “국제적 규칙에 기반한 다자주의적 질서를 강화”할 뜻을 밝혔다.

유럽연합은 2022년 3월 전략적 나침반(Strategic Compass, EU의 안보와 방위 정책을 강화하고 향후 5~10년간의 방향을 제시하는 종합적인 전략문서)채택을 통해 유럽연합은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 및 국가들과 관계를 강화하겠다.”고 선언했다.(2)

그 뒤 2023년 2월,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의 중국 확장 억제와 지역안정을 목표로 하는, 미국 주도의 ‘자유롭고 열린 인도-태평양(Free and Open Indo-Pacific, FOIP)’ 전략의 일환인 쿼드(Quad-미국, 호주, 인도, 일본 참여) 정상들도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강압으로부터 자유로운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를 유지하겠다”라는 결의를 표명했다.(3)

 

내용이 모호한 RBO, 국제 사회의 또 다른 균열 드러내

겉보기에는 이 표현이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규칙에 기반한 질서에 반대한다는 것은 곧 법이 보장하는 평화와 안정 대신 무질서와 혼란을 선호한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RBO는 국제 합의를 거쳐 수십 년간 역할해온 국제법이라는 표현을 밀어내며 국제 사회의 균열을 드러내는 또 다른 지표로 부상하고 있다.

RBO 개념을 내세운 미국과 서방의 특정 국가 그룹은 법과 질서라는 긍정적 가치를 내세우는 주장과 함께 선한 고지를 점령함으로써 RBO로 인한 국제 사회의 균열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유도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국제법과 달리 그 내용은 모호하다. 정치학자 보아스 리버헤르는 “미국, 호주, 독일, 인도의 RBO 개념은 현저히 다르다. 모두가 RBO에 의한 국제질서의 의미에는 RBO 관련 국가들이 합의하고 지지해온 특정 조항에 따라 활동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으나 그 조항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다르다”라고 지적했다.(4)

일부 국가들(혹은 유럽연합, 독일, 프랑스와 같은 국가들의 연합)은 여기에 유엔(UN) 헌장을 포함시킨다. 반면 호주는 완전 다르다.

RBO를 지지하는 자들은 국제 규범성을 구성하는 다양한 규칙, 특히 비공식적 규칙들을 RBO에 포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디지털 경제, 인공지능, 환경, 대유행병과 같은 아직 국제법의 조약이나 규범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새로운 도전과제들을 다루는 것이 포함된다. 이러한 문제는 불과 10년 전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긴급하게 다뤄져야 한다.

그 이유는 문제와 관련하여 다수의 이해관계자들과 그들의 역할이 새롭게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다. 어떤 다국적 기업들은 일부 국가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이는 제약 회사에서부터 소셜 미디어 거대 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국제 법원의 판례를 주변부로 떠밀어 낸 RBO

또한, 민간 보안 업체, 초국가적 협회 단체 등도 포함된다. 국가들은 개별적으로나 공동 조직 내에서 이러한 영역에 대한 규제가 부재할 때 발생하는 위험에 직면하고 있으며, 이는 그들 자신과 시민들에게도 위험이 된다.

이처럼 유동적인 상황에서 RBO는 일종의 규제의 틀을 마련하려 한다. 그러나 그 윤곽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지금까지 어떤 회의나 국제 회의에서도 이를 종합적으로 다룬 적이 없으며 당연히 주요 방향이나 원칙에 대해 요약된 내용도 없다. 그 기원, 발전, 변형, 다양한 부문 등에 대한 매뉴얼이나 학술 연구도 없다.

더 복잡한 문제는 RBO가 그간 국제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져 지정학적 여러 국제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 공적기준, 즉 조약, 국제 기구의 결의안, 또는 국제 판례 등을 주변부로 밀어낸다는 점이다.

이 공적 기준의 개념은 법적 효력이 다양한 여러 종류의 문서를 포함하고 있다. 이에 관련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존 듀가드 교수는 “RBO와 국제법의 관계는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단지 조약의 강제적 규범과 그 기반이 되는 가치들 사이의 연결만을 다루고 있다. 더 나아가 RBO와 국제법이 호환 가능한지, 그리고 어느 것이 우위에 있는지에 대한 관심조차 없다”라고 지적했다.(5) 이러한 괴리와 잠재적 모순은 유럽 외교 및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유럽 외교관들에게 RBO에 대한 견해를 물어보면, 일부는 질문의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하며, 유럽의 지도층에서는 유럽연합이나 회원국들, 혹은 유엔 헌장의 공식 성명이나 문서를 언급하기도 한다.

 

국제적 규칙의 합의를 깨뜨리고 더 큰 위험을 불러올 수도

그러나 미국이나 호주는 다르다. 버락 오바마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RBO에 대해 긴 연설을 하면서도 이 국제 질서의 기초가 되는 문서나 국제법 자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2022년 6월 2일 <뉴욕타임스>에 실린 중요한 기사에서 미 대통령은 러시아의 공격을 RBO에 대한 침해로 묘사했는데, 사실 이는 간단히 유엔 헌장을 위반한 것으로 규탄할 수 있었던 일이다. 같은 해 마드리드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 종료 기자 회견에서도 바이든 대통령은 RBO 개념을 장황히 언급했으나 국제법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듀가드 교수에 따르면 이는 미국이 지정학적 선택을 한 것으로, 이를 통해 파트너뿐 아니라 적대국이나 경쟁국과의 관계를 조율하려는 것이다. 세계의 변화 속도가 빨라지고 이를 통제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에서 범위가 다소 특정되는 이러한 지정학적 전략은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략은 국제 규칙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큰 혼란과 직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1945년에 수립되었으나 이미 취약해진 국제 규칙의 합의마저 깨뜨리면 더 큰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RBO는 또한 매우 유연하고 조정 가능한 개념이다. 그 이유는 RBO가 일부만 문서화된 규칙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리버헤르는 “위계상 RBO는 국제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구속력이 없는 규범, 표준, 다양한 포럼과 협상 내 절차 같은 다른 요소들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일부 국가들이 반드시 동의하지 않은 규칙과 규범을 이 질서에 포함시킬 수 있다”라고 지적한다.

 

국가 간 규제 합의 원칙에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

RBO는 본질적으로 갈등을 유발하는 성격을 안고 있다. 미국은 이 개념을 냉전시기 서구 ‘자유 세계’의 가치, 즉 시장 경제, 민주주의, 인권 등과 논리적으로 연결하고 있는데,(6) 이는 그러한 가치를 공유하지 않는 이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제법이 가치 체계와 상관없이 공통의 절차와 기준을 통해 갈등 해소를 위한 공동의 국제 공간을 창출하려는 데 반해, RBO의 개념적 구조는 본질적으로 분열을 야기하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RBO는 국가별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여러 갈등을 합의적으로 규제해야 하는 원칙 사이에 필연적으로 혼란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 연구자 타라 바르마는 국제적 대화가 전자보다 후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제안하며, 그럴 때 유엔 헌장이 상정한 더 명확하고 건강한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미국이 RBO를 체계적으로 그리고 거의 집요하게 언급하는 것은 대화의 틀과 규칙을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설정하기 위한 것이며, 그렇게 설정된 규칙은 상황에 따라, 또한 그것을 언급하는 이들의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탄력적으로 조정된다. 이로 인해 미국이 얻을 이점은 여러 가지다.

첫째, 1990년대에 무력 사용 규범을 어긴 미국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다. 예컨대, 코소보와 이라크에서 미국의 개입은 유엔 헌장에 위배되고, 특히 대량살상화학무기와 같은 허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이라크에 대한 무력 침공도 RBO를 내세우면 쉽게 면죄부를 얻고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RBO는 미국이 국제 사회에서 모범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게 하는 장점도 있다. 예를 들어, 미국은 18개의 인권 보호 국제 조약 중 5개만 서명했으며, 이는 유럽연합 대부분의 국가가 최소 13개를 비준한 것과는 대조적이다.(7)

이러한 주제에서의 도덕적 훈계는 다소 위선적으로 보인다. 워싱턴은 1982년의 유엔 해양법 협약에 가입하지 않았으면서도, 남중국해에서의 해상 안전 문제와 관련해 중국과 정면으로 대립하고 그 규칙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의 RBO 추진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중국과 러시아

미국은 인권을 언급하지만 국제형사재판소(ICC)에 가입하지 않았으며—이는 물론 중국과 러시아도 마찬가지다—전쟁법에 관한 1977년 제네바 협약의 추가 의정서도 비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듀가드 교수는 “국제법의 엄격한 규칙에 따라 스스로를 정당화하기보다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국제법 해석을 지지하는 것이 더 실용적으로 보이는 것같다”라고 분석한다.(8) 듀가드 교수가 언급한 또 다른 이점은 가자지구의 사건에 대한 것이다. RBO를 내세우면 미국의 특정 동맹국, 즉 이스라엘의 공통 규칙에 반하는 행동에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RBO의 추진에 즉각 반응하며 UN 내에서 공개적으로 이를 반대했다.

이에 관한 2022년 2월의 중러 공동 선언은 “유엔이 주도하는 국제 구조와 세계 질서”를 언급한다. 베이징은 RBO를 서방과 그 동맹국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촉진하기 위해 만든 발명품으로 보고 이에 반대한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국제법에 근거한 국제 질서”를 고수하며, 소수 국가가 지지하는 이른바 규칙 기반 질서라는 주장을 거부한다. 중국은 일정한 교활함을 띠며 유엔 헌장에서 비롯된 시스템에 애착을 드러내고, 국가 주권과 불간섭 원칙이라는 기본 규범에 중점을 둔 보수적인 헌장 해석을 옹호한다.이는 서방의 권력 남용에 염증을 느끼는 국가들에 매력적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유엔, 파열 위기에 몰려 RBO는 또한 서방의 영향력 상실에 대한 반작용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서방 국가들은 새로운 개념을 내세워 사건들을 다시 통제하려 한다. 사물을 명명하는 것은 그것을 통제하는 한 방식이다. 따라서 언어적 표현은 종종 열띤 논쟁과 영향력 싸움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러시아는 크림반도에 대해 ‘병합’이라는 표현 대신 ‘편입’이라는 훨씬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이는 본국과 반도의 자발적인 재결합이라는 인상을 준다. RBO와 함께 미국은 수십 년 동안 차지해 온 국제 항공기의 조종석에 계속 앉으려 하고 있다. 이 표현을 많은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비례해 미국의 권력 집착은 더 드러날 것이다. 주로 서방 국가들이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정치학자 장-뱅상 올랭드르는 “세계의 분열은 단순히 강대국들의 충돌을 넘어선다”며, 이는 “서사적 충돌”이라고 진단한다. 현재의 논쟁은 다자주의의 기본 규칙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유엔을 파열 직전으로 몰고 갈 위험이 있다.

 

 

글·안세실 로베르 Anne-Cécile Robert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국제이사

번역·박명수
번역위원


(1) 이 글은 필자의 저서 『Le Défi de la paix. Remodeler les organisations inter-
nationales 평화의 도전: 국제기구 개편하기』(아르망 콜랭, 파리, 2024)에서 발췌됨.
(2) 「향후 10년 동안 EU의 안보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적 나침반」, 유럽연합 이사회, 2022년 3월 21일, www.consilium.europa.eu
(3) 보아스 리버허,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 <정치와 안보: CCS 분석>, 제317호, 취리히, 2023년 2월.
(4) 같은 글.
(5) 존 두가드, 「우리 앞에 놓인 선택: 국제법인가 ‘규칙에 기반한 국제 질서’인가?」, <라이덴 국제법 저널>, 제36권, 제2호, 케임브리지, 2023년 2월 21일.
(6) 길포드 존 아이켄베리,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종말?」, <인터내셔널 어페어스>, 제94권, 제1호, 런던, 2018년 1월.
(7) 유엔 인권 고등판무관실 웹사이트에서 비준된 조약의 대화형 지도를 참조, https://indicators.ohchr.org
(8) 존 두가드, 앞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