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스랄라 암살 이후의 헤즈볼라
더 거세진 저항 불씨 속에, 더 급진적 지도부 등장 기대
헤즈볼라 지도자 나스랄라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의 휴전을 가속화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군사적 압박을 가하려 했지만, 그 대가로 목숨을 잃었다. 지역 내 세력 균형을 잘 평가하는 능력으로 존경과 두려움을 동시에 받았던 그는 2006년 전쟁에 대한 이스라엘의 복수 의지를 과소평가했다. 그의 정당이 크게 약화된 것은 사실이나, 헤즈볼라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2024년 9월 27일, 레바논 헤즈볼라의 사무총장이자 종교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가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 다음날, 9월 28일 헤즈볼라는 그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다. 이날은 범아랍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가 1970년 심장마비로 사망한 날이기도 하다. (그의 죽음은 이스라엘이 서안지구, 동예루살렘, 가자지구, 골란고원, 시나이를 점령하게 된 1967년 6일 전쟁, 즉 아랍어로 ‘후퇴’를 뜻하는 ‘낙사’ 이후에 있었음.)
나스랄라는 베이루트 남부 외곽 하렛 흐레이크에 위치한 헤즈볼라 본부에 대한 이스라엘 공군의 집중적인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사망 몇 시간 전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유엔 총회에서 헤즈볼라를 “반유대주의의 고통스러운 중심”이라 칭하며 레바논에서의 공격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나스랄라를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궁극의 테러리스트”라고 불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나스랄라의 죽음을 놓고 “1983년 베이루트에서의 미국 대사관과 해병대 막사 폭탄 테러 이후 모든 헤즈볼라 피해자들에 대한 정의의 일부를 실현한 것”이라고 말했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나스랄라를 “미국인의 피를 묻힌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했다.
이는 네타냐후와 그의 동료들이 가자에서 수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인구의 90% 이상을 강제로 내쫓은 것에 대한 책임은 아예 의식조차 못하는 발언이었다. 또한 서안지구에서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자행한 공격과 파괴, 그리고 남부 레바논과 베카 계곡, 베이루트 폭격 등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없이 한 발언이었다. 서구의 도덕적 계산에서는 아랍인의 피가 미국인이나 이스라엘인의 피와 동일한 가치를 지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레바논 지지자들과 反서구의 많은 이들에게 나스랄라는 단순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미국과 이스라엘의 중동 야망에 맞서는 정치 지도자이자 저항의 상징으로 기억될 것이다. 헤즈볼라는 여전히 서구 이익에 맞서는 군사조직과 공격으로 유명하나, ‘신의 정당’과 그 지도자는 레바논 내전(1975~1990) 이후 복잡한 진화를 겪어왔다.
나스랄라,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테러 방식 모방해 보복
이와 비슷하게, 네타냐후의 정당 리쿠드의 전 지도자였던 메나헴 베긴과 이츠하크 샤미르도 정치 경력을 테러리스트로 시작했다. 베긴은 1946년 예루살렘의 킹 데이비드 호텔을 폭파해 무려 91명의 민간인을 죽음으로 몰았고 샤미르는 1948년 유엔의 팔레스타인 특사였던 폴케 베르나도트를 납치하여 암살했다. 진보 시온주의자들에게 평화의 주역으로 숭배받는 이츠하크 라빈조차도 1948년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을 리다와 람레, 그 주변 마을에서 강제로 추방하는 일을 감독했다.
폭력을 정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나스랄라는 이스라엘의 급진 시온주의자들이 자행해온 테러의 여정을 면밀하게 연구하며 그대로 모방했다. 나스랄라는 1992년 이스라엘에 의해 전임 지도자 셰이크 아바스 무사위가 암살된 후 31세의 나이에 헤즈볼라의 수장이 되었다.
당시 그는 헤즈볼라의 주요 조직인 슈라 평의회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지만, 아직 운동권 외부에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무사위보다 더 주목받는 위치에서 중요한 인물로 평가 받아온 나스랄라는 지난 30년간 중동을 움직여온 역사적 지도자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이란의 충실한 동맹이면서 이슬람 성직자가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이란의 최고지도자 이론, 즉 ‘벨라야테 파키’를 신봉했으나, 미국-이스라엘 이중 국적의 언론인 제프리 골드버그가 2002년 시사주간지 <뉴요커>에서 언급한 ‘이념적 광신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종교적 열정에 휘둘리기보다는 이성적인 계산을 하는 인물이었다. 나스랄라는 레바논인, 특히 시아파조차 광신적인 종교집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레바논에서의 이슬람 국가 건설은 당분간 실현 불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했다. 그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조차 이슬람 종교규범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의 기반인 베이루트 남부 외곽에서 여성들은 자유롭게 옷을 입을 수 있었고, 종교 경찰의 간섭도 없었다.
헤즈볼라가 2000년 레바논 남부를 해방한 후, 나스랄라는 이스라엘에 협력한 기독교인들에게 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범죄자들은 국경으로 인도되어 이스라엘 당국에 인계되었지만, 시아파 협력자들은 보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2012년 시리아 내전 당시 반정부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한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면서 많은 지지자들로부터 반감을 샀다.
그러나 그 이전에는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34일간 전쟁을 이끌며 2006년 휴전까지 오는 동안 그는 마지막 아랍 민족주의자로 여겨졌다.
그는 전장에서 헤즈볼라가 거둔 성과를 자랑스럽게 여겼지만, 이스라엘이 자행한 폭격의 잔혹함에 충격을 받았고, 적지에서 벌인 인질 납치 작전으로 이스라엘에 레바논 전체를 파괴할 구실을 제공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시리아 알사드 정권 편든 이후 명성에 먹구름
이스라엘만이 그의 적은 아니었다. 그는 레바논에서도 논란의 인물이었다. 1980년대 레바논 공산주의자 암살에 가담했으며 서구 이익을 겨냥한 인질 사건에도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헤즈볼라가 ‘국가 안의 국가’로 성장하면서 그의 적들은 레바논 내에서도 늘어났다. 그는 1985년 자신이 비판했던 정치-종교 시스템을 이용해 반대 세력을 위협하거나 때로는 암살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2021년 2월 4일에 암살당한 시아파 비평가이자 언론인 록만 슬림이 그 대상이었다. 헤즈볼라는 또한 2005년 전 총리 라피크 하리리 암살에서부터 2020년 베이루트 항구 폭발에 이르기까지 레바논을 강타한 주요 사건들과도 연관이 있었다. 나스랄라는 자신의 운동을 지역 정치 시스템에 통합하려고 노력했지만, 부패 문제로 큰 논란을 일으켰던 여러 사건의 조사를 방해하는 데에도 가담했다.
심지어 2019년 금융 붕괴 이후 몰락한 레바논 중앙은행 총재 리아드 살라메를 옹호하기까지 했다. 헤즈볼라의 통합이 지역 정치 시스템에 기여했다고 그는 믿었을지 모르나, 비판자들은 이 시스템이 신의 정당을 부패시키고 지도자의 명성을 깎아내릴 것이라고 예견했다. 나스랄라의 결정 중 헤즈볼라의 명성에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2013년 시리아 내전에 바사르 알-아사드 독재 정권의 무자비한 폭력을 지원한 일이다. 따라서 아사드 정권의 희생자들이 헤즈볼라의 최근 패배를 반기는 것은 당연했다. 나스랄라이 아사드를 지원한 동기는 아마도 실용적이었을 것이다. 비록 독재자이나 ‘저항의 축’ 일원이었던 아사드가 만약에 내전에서 패배한다면 시리아 국경을 통해 이란에서 레바논으로 무기를 운반해야하는 시아파 민병대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되었던 것이다. 또한 시리아 반군 내에서 수니파 지하디스트들의 영향력이 커진 것도 헤즈볼라에게는 위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스랄라의 헤즈볼라가 시리아 아사드 정권의 잔혹한 진압을 편든 것은 많은 이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나스랄라의 결정은 아사드 정권을 지키는 데 기여했고, 헤즈볼라와 러시아 간의 관계 강화에도 기여했다. 그러나 이는 1960년대 당시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베트남’이라 부른 북예멘 내전에 이집트가 개입했을 때처럼 치명적이었다. 헤즈볼라는 수천 명의 전투원을 잃었고, 다른 아랍인들에 맞서는 반란 진압 세력으로 변모했다.
헤즈볼라는 시리아와 러시아 정보기관과 협력한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에 더 취약해졌다. 2006년 전쟁에서는 시아파 전사들이 이스라엘군과 직접 맞섰지만, 시리아에서의 전술은 민간인 피해를 방지하려는 고려가 부족해 보였다.
나스랄라의 오판, 네타냐후에게 반격의 빌미 줘
2006년 이후 헤즈볼라는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때 이스라엘에 점령된, 주로 골란고원 내 체바 농장 지역에서 이스라엘군과 간헐적인 충돌을 벌였으나, 그 외에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국경 상태가 이어졌다. 이러한 상황은 2023년 10월 8일, 나스랄라가 하마스와 가자 주민을 지원하기 위해 “북부 전선”을 열겠다고 결정하면서 급변했다.
이스라엘의 모든 논평가들은 헤즈볼라가 의도적으로 이 갈등을 부추겼다고 주장했다. 나스랄라는 이스라엘-아랍 갈등을 국가별로 나눌 수 없는 하나의 현실로 보았고, ‘저항의 축’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은 가자 지구에 대한 압박을 줄이는 것이라고 여겼다. 서방에서는 이스라엘 북부에 대한 헤즈볼라의 공격을 테러리즘으로 비난했지만,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를 아랍 지도자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가자 지구에 대한 지원으로 환영했다.
나스랄라는 군사 인프라만을 겨냥한 공격으로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함으로써 가자 지구에 대한 실질적인 지지를 보이면서도 이스라엘이 하마스와 휴전 협정에 서명하도록 압박하려 했다. 그는 대부분의 레바논인들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알았고, 특히 많은 시아파와 이란의 동맹국들이 헤즈볼라의 무기를 이란 방어에 쓰일 수 있도록 보존하기를 원했다. 나스랄라는 이 전략이 가자 지구에서의 이스라엘 공격을 종식하기 위한 최선이라 강조했으며,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휴전이 이루어지면 헤즈볼라도 로켓 공격을 중단할 것임을 밝혔다.
과거에 나스랄라는 아랍 세계와 이스라엘 지도자들로부터 그들의 실제 의도를 읽어내는 능력으로 존경을 받았지만, 이번에는 적을 잘못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 힘의 균형에 대해 어이없는 판단의 순진함을 드러냈다. 헤즈볼라가 이웃 남쪽의 이스라엘과 상호 억제 상태를 만들어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마지못해 수용했을 뿐이었다. 2023년 10월 8일, 팔레스타인과의 연대라는 명목으로 로켓을 발사하여 이스라엘 북부와 가자 지구를 연결하려 한 나스랄라는 사실상 네타냐후에게 2006년 이후 국경에서 ‘게임의 규칙’을 재정립할 구실을 제공하고 말았다.
지난해 10월 7일 공격 직후, 이스라엘 국방부 장관 요아브 갈란트는 하마스가 아닌 헤즈볼라를 먼저 공격하길 원했지만, 네타냐후는 그의 조언을 거부했다. 그러나 2006년부터 이스라엘이 준비해온 시아파 민병대와의 전쟁은 여전히 네타냐후 총리의 주요 관심사로 남아 있었다. 11개월 동안 이스라엘은 남부 레바논을 맹렬히 폭격하여 수백 명의 사망자를 냈고, 약 10만 명이 집을 떠나도록 강요했지만, 이는 국경 반대편 이스라엘인들의 소규모 이주보다 서방의 관심을 덜 받았다.
국경 지역에서 일어난 공격의 약 80%는 이스라엘군에 의한 것이었다. 이 불균형 또한 미국 언론에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아랍인들이 이스라엘의 폭력으로 피난을 가야 할 때, 이는 서방 언론에 의해 자연재해처럼 축소되었다.
올해 9월 17~18일 발생한 비퍼와 무전기 공격은 나스랄라와 헤즈볼라가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표적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공격은 시아파 민병대의 통신 시스템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침투 규모를 드러내고 조직을 마비시켰다. 이후 베이루트에 대한 치명적인 폭격은 전쟁 이후 어떤 날보다도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결국 나스랄라와 헤즈볼라 고위 지도부 대부분이 사망에 이르렀다.
헤즈볼라가 입은 타격, 이란에게는 굴욕
현재 레바논에는 약 120만 명의 피난민이 있으며, 사망자는 2,000명이 넘는다. 네타냐후는 올해 10월 8일 자신의 X계정(구 트위터)을 통해 레바논 정부에 헤즈볼라를 제거하지 않으면, 레바논이 “가자에서 우리가 본 것과 유사한 파괴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강력한 지지자들은 해외에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왜곡은 베르나르-앙리 레비의 트윗 내용을 따른 표현이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남부 침공도 “갈릴리의 평화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발표되었지만, 이 작전은 당시 팔레스타인 저항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더 강력한 무장 조직인 헤즈볼라를 탄생하게 했다. 마찬가지로, 2006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남부 레바논과 베이루트를 폭격하는 동안,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콘돌리자 라이스는 이를 “새로운 중동이 탄생하는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이스라엘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에서의 휴전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할 수 있었고, 또한 나스랄라가 승인한 프랑스-미국 제안인 레바논 내 21일간의 전투 중단 제안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이는 헤즈볼라가 리타니 강 이남으로 철수할 수 있게 하는 제안이었다. 9월 26일, 미국 정부의 국가 안보 문제 대변인인 존 커비는 이 제안에 대해 “이스라엘을 포함해서 서명 당사자들이 면밀한 협의를 거쳐 만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네타냐후는 가자 지구에서의 협상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휴전 제안을 하면서도 사실은 이를 지킬 의도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해당 협상을 진행하던 지도자들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이는 7월 31일 테헤란에서 살해된 하마스의 전 정치국장 이스마일 하니야와 그 뒤에 암살된 하산 나스랄라에게도 해당된다.
헤즈볼라 내부에서 개인 우상과 같은 체제가 설계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스랄라의 지도자로서의 역량은 명확히 증명되었고, 그의 죽음은 헤즈볼라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또한 이는 이란에도 굴욕적인 타격이었다. 10월 1일, 나스랄라와 하니야의 암살에 대한 명백한 대응으로 이란은 예고 없이 이스라엘에 약 200발의 탄도 미사일을 발사했으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일부 군사 기지를 겨냥하였으나 오히려 요르단강 서안에서 한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사망했다. 2024년 4월의 이란 공격이 대부분 미국의 지원으로 요격되었을 때,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이를 승리로 간주하고 더 이상의 대응을 자제할 것을 권고했다.
나스랄라 후계 세대, 헤즈볼라 재건의 과제
그러나 미국은 이번에 네타냐후에게 이란의 유전이나 핵시설을 공격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데 그쳤다. 이스라엘이 이를 지킬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이스라엘이 종종 미국의 지시를 무시해온 점을 고려하면 안심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갈란트 장관은 10월 9일에 게시한 비디오에서 “우리의 공격은 치명적이고 정밀하며, 무엇보다도 놀라울 것이다.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단지 결과만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이스라엘이 특정 전략적 목표를 공격하더라도 이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중단시키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 핵 역사가인 아브너 코헨은 하아레츠에서 이란의 핵 프로그램이 여러 장소에 분산되어 있으며, 일부 시설은 지하에 깊숙이 위치해 있어 “분산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쉽게 이동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10월 3일, 네타냐후 정부는 나스랄라의 후계자로 거론되었던 사촌 하셈 사피에딘과 그 후임자까지 암살했다. 수많은 레바논 민간인, 특히 시리아 난민들이 시리아 국경을 넘고 있다. 틱톡(TikTok)에서는 이스라엘 병사들이 레바논 남부, 베카 계곡, 베이루트 남부와 중심부에서 마을과 건물을 파괴하는 장면을 기념하는 영상이 확산될 것이다. 10월 7일 기념일에는 이스라엘에서 전국적 애도의 물결과 복수의 기쁨, 그리고 그들의 억제력의 회복에 대한 자부심이 섞인 반응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환희는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레바논과 가자 지구에서의 갈등은 점점 더 소모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고, 하마스의 전사들은 여전히 이스라엘 군대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동안 프랑스와 미국이 튀니지와 캄보디아를 각각 폭격했던 것처럼, 레바논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은 일시적인 위안만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헤즈볼라는 천천히 재건될 것이며, 암살된 지도자들은 새로운 세대의 급진화된 지도자들로 대체될 것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으로 인한 시신, 부상자, 대규모 이주 등 21세기 가장 강력한 폭격 중 하나에서 발생한 참상을 기억할 것이다.
하산 나스랄라의 죽음은 그의 운동에 1967년 나세르의 패배만큼이나 굴욕적인 후퇴를 안겼으나, 굴욕은 저항을 키우는 불씨가 된다.
글·아담 샤츠 Adam Shatz
격월간지 <The London Review of Books> 미국 담당 편집장. 『프란츠 파농: 혁명의 삶』(La Découverte, 파리, 2024년) 저자.
번역·김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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