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타냐후의 피비린내 나는 승리
지난 1년 동안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지도자들인 야히야 시누아르, 이스마일 하니야, 하산 나스랄라를 잇달아 제거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유리한 휴전을 고려하기보다는 전쟁을 계속할 뜻을 고수했다. 이제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그는 이란을 겨냥한 대규모 작전에 미국을 끌어들일 것인가?
최근 몇 달간 네타냐후 총리의 국내 위상이 눈에 띄게 회복된 것에서 그의 놀라운 정치적 회복력이 보인다. 이는 그가 오랜 기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네타냐후는 지난 봄부터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하마스와의 휴전과 포로 교환 협정을 거부하며 이스라엘의 극우층 사이에서 인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5월에는 워싱턴의 촉구에도 불구하고 가자지구 최남단 도시 라파와 이집트와의 국경지대를 공격했다. 이는 하마스 지도부가 휴전 협정을 받아들일 주요 동기를 제거한 것이다.
또한 네타냐후는 라파 철수 권고를 거부하며 팔레스타인과의 합의를 완전히 무산시켰고, 이 때문에 가자지구와 이집트 사이의 통로에 대한 통제권을 잃은 이집트의 분노를 샀다. 그는 바이든 미 대통령이 바랐던 휴전과 인질 석방을 통해 미국에 이득을 주려는 의사가 전혀 없었다. 이는 바이든의 미국 대통령 선거 라이벌인 도널드 트럼프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네타냐후의 최우선 과제는 여전히 이란 핵 프로그램 파괴
네타냐후와 오바마의 관계가 긴장 속에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2009년 네타냐후가 취임한 직후, 오바마와 대립을 지속하며 공화당의 지원을 얻었다. 그는 바이든 미 대통령과 펜타곤이 자주 만난 갈란트 국방장관을 선호하는 모습을 보이자 다시 비슷한 전략을 펼쳤다.
올해 7월 24일, 공화당은 네타냐후를 네 번째로 의회 연설에 초대했으며, 이는 윈스턴 처칠의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헌법에 따라 상원 의장을 맡고 있는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부통령으로서 해리스가 후보로 나서며 여론이 뒤집힌 것은 이후 네타냐후의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가 트럼프의 승리를 기대하며 시간을 벌 수 있었으나, 해리스의 승리가 그의 행동 범위를 좁힐 수도 있었다. 네타냐후에게 있어서 팔레스타인 문제 이상의 우선 과제는 이란으로(1), 이는 1970년대 후반 이집트의 입장 변화 이후 이스라엘의 가장 큰 존재적 위협으로 여겨지고 있다.
1979년 2월 호메이니 혁명을 계기로 이란은 서방과 단절했다. 1980년대에 이란은 이라크와의 치열한 전쟁에 휘말리고 다양한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정밀 무기 공급이 차단된 상태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을 포함한 그들의 지역 동맹국에 대항할 수 있는 이념적·군사적 네트워크를 점진적으로 구축했다.
이슬람 공화국은 미국을 ‘대악마’로 규정하고, 파트너인 이스라엘의 붕괴를 다짐하며 강력히 적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이 적대적 입장은 아랍 및 이슬람 세계 내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주요 이념적 논리로 활용되었다.
이란은 1990년부터 무슬림 형제단과 관계를 맺어왔다. 무슬림 형제단은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리야드와 결별했다. 테헤란은 특히 팔레스타인의 무슬림 형제단인 하마스에 집중하면서, 같은 이념적 기반에서 활동하는 이슬람 지하드와도 관계를 강화했다.
한편, 이스라엘 당국은 이란에 대한 집착을 키우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 이란이 비밀리에 핵 프로그램을 재개한 사실이 밝혀지자, 텔아비브는 이란이 핵무기를 보유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이는 1960년대부터 이스라엘이 보유한 지역 독점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란의 핵 시설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결심하게 되었다.
네타냐후가 바이든에 보낸 찬사, “자랑스러운 시온주의자 아일랜드계 미국인”
2009년 당시, 오바마 미 대통령의 취임 며칠 전, <뉴욕 타임스>는 이스라엘 정부가 전년도부터 미군이 주둔 중인 이라크 영공을 통과해, 이란의 나탄즈 핵 시설을 타격하기 위한 긴급 GBU-28 대(對)벙커 폭탄 제공과 영공 통과 허가를 요청했다고 보도했다.(2)
부시 행정부는 당시 이스라엘의 공격이 미군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다는 우려로 이를 거부했으나, 이미 2007년에 이스라엘을 위해 GBU-28 폭탄 55개를 주문해 2009년 인도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후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 첫 해에 이 폭탄의 인도를 승인했다.(3)
그러나 이러한 지원이 이뤄졌음에도 오바마와 네타냐후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서안지구에서의 이스라엘 정착촌 확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두 사람 간의 주요 의견 충돌은 이란 문제에 있었다. 한편으로는 오바마가 이스라엘에 대벙커 폭탄 제공을 승인함으로써 이란에 대한 압박이 강화되었고, 이를 통해 이란이 핵 프로그램 제한에 대한 외교적 합의에 응하도록 유도했다.
이 합의는 2015년에 체결되었는데, 이는 이란의 오랜 적인 네타냐후와 사우디아라비아를 크게 실망시켰다. 이들은 이란에 대한 경제적 압박이 완화되면 이란이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계속하고, 2011년 이라크에서의 미국 철수와 서방의 실패로 유리해진 지역 확장을 지속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2011년 시리아의 민중 봉기로 시작된 내전과 2014년에 분열된 예멘 내전은 이란이 중동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제공했다.
2016년 11월, 트럼프의 미 대통령 당선은 네타냐후와 사우디 지도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트럼프는 2017년 5월 첫 해외 순방지로 리야드를 방문했다. 이듬해 2018년 5월 8일, 트럼프는 2017년 10월부터 준비했던 대로 이란 핵 합의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하며, 독일, 프랑스, 영국 및 유럽연합 지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약을 실현했다.
트럼프는 임기 마지막 해인 2020년 1월, 이란 혁명수비대의 해외 작전 부대인 알쿠드스군의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바그다드에서 암살하며 강경한 대이란 정책을 선포했다.(4) 2020년 대선 캠페인에서 바이든은 자신을 트럼프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로 내세웠다.
이는 트럼프가 오바마에 반대하며 그의 업적을 하나씩 해체하려 했던 방식과 유사했다. 중동 정책에서 바이든은 이란 핵 합의를 복원하고, 트럼프가 폐쇄했던 예루살렘 동부의 미국 영사관과 워싱턴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OLP) 사무소를 다시 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오바마의 중동 정책을 다시 채택하기보다는 트럼프의 정책을 계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네타냐후 정부가 가자지구에 대한 재점령 및 파괴 전쟁을 벌이면서 바이든은 미국과 이스라엘이 공동으로 수행한 첫 번째 전쟁을 주도하게 되었고, 역대 대통령들을 뛰어넘을 기회를 얻었다.(5)
양국 간에 가끔 발생하는 마찰은 워싱턴이 텔아비브에 제공하는 막대한 군사 지원 규모에 비하면 하찮게 느껴진다.(6)
“어느 행정부도 내가 했던 만큼 이스라엘을 도운 적이 없다, 아무도, 아무도, 아무도.”
바이든 미 대통령은 10월 4일 이렇게 말하며 이스라엘 총리를 배은망덕하다는 식으로 비난했다. 그는 네타냐후 총리가 가자지구에서의 휴전 합의를 방해한 것이 공화당 후보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7)
이후 미 의회 연설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한 네타냐후는 바이든에게 열렬한 찬사를 보냈다. 그는 “자랑스러운 시온주의자 이스라엘인으로서 자랑스러운 시온주의자 아일랜드계 미국인에게, 50년간의 공직 생활과 이스라엘에 대한 50년간의 지지에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했다.(8)
“다히야 독트린”, 전쟁을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
바이든이 자신의 후보직을 해리스에게 넘긴 것에 대한 네타냐후의 찬사는 진심이었을 것이다. 7월 말, 바이든이 해리스에게 지휘봉을 넘기고, 네타냐후가 플로리다 마라라고에서 트럼프를 방문하면서 전쟁의 새로운 국면이 열렸다. 네타냐후는 바이든의 임기 종료를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가장 좋은 경우,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이끌며 이스라엘의 공격을 더욱 강화할 기회를 줄 것이고, 최악의 경우 해리스가 미국의 개입을 떠안아야 할 것이다.
하마스의 공격은 이스라엘의 억지력 상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스라엘은 2000년 조건 없이 레바논에서 철수하며 미국의 베트남 패배에 비견되는 첫 군사적 패배를 경험했다. 2006년 헤즈볼라와의 충돌에서 또다시 실패했고, 이후 이란의 군사 네트워크가 지역 내에서 확장되는 것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했다.
가자지구에서도 2007년 이래 이스라엘의 반복적이고 치명적인 공격은 하마스나 이슬람 지하드의 로켓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이루어졌지만, 팔레스타인 단체들이 활동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적의 환경에 불균형적인 피해를 입히려는 “다히야 독트린”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겠다는 공개적인 의도로 인해 전쟁 범죄를 부추기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9)
이스라엘은 2008~2009년과 2014년 가자지구에서 두 차례 다히야 독트린을 적용했으며, 이 정책은 2006년 레바논의 베이루트 남부 헤즈볼라 거점 지역인 “다히야”에서 처음 실행되었다. 이 경우에는 억제 효과가 있었다. 2006년 이후로 헤즈볼라는 7월 12일의 국경 간 공격처럼 전면적인 교전을 유발하는 행동을 재개하지 않았다.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는 2006년 8월 27일에 이스라엘의 대응이 이토록 치명적이고 파괴적일 줄 알았다면 자신이 그 작전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인정했다.(10) 그러나 같은 기간 동안 이란은 헤즈볼라에 다양한 미사일로 구성된 막대한 규모의 무기고를 지원했다.
헤즈볼라는 이를 통해 이스라엘과 “상호 억제” 상태를 달성했다고 여겼다. 이는 상대방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능력에 기반한 비교적 평화로운 공존 상태였다. 이로써 헤즈볼라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에서 중요한 균형 요소가 되었으며, 이란 또한 강력한 재래식 전력과 지역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었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대담하고도 치명적인 공격은 이스라엘의 분노를 극에 달하게 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네타냐후는 이스라엘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는 팔레스타인 내부의 분열을 유지하고 ‘평화 프로세스’ 재개 압력을 피하기 위해 하마스가 가자에서 권력을 강화하고 카타르의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11)
하마스가 그해 10월 7일 오전 “레바논, 이란, 예멘, 이라크, 시리아의 이슬람 저항 형제들”에게 전투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을 때, 이란이 최소한 간접적으로라도 이에 반응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억지력이 상당히 약화되었음을 보여준다.(12)
이란은 그해 10월 7일 하마스의 요청에 간접적으로나마 반응하여, 레바논의 헤즈볼라, 이라크의 시아파 민병대, 예멘의 후티 반군 등 파트너들을 저강도 소모전에 나서도록 독려하며 지역 네트워크를 가동했다.
이란의 세 협력 세력 중 이스라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레바논의 헤즈볼라였다. 제한된 “그린 라인”(이스라엘과 레바논 사이 국경선) 지역에서의 교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군은 북부 국경에 병력을 집중해야 했고, 이 때문에 수만 명의 민간인이 대피했다.
반면 가자지구에 집중하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북쪽에서 자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가자지구는 단순한 보복을 넘어 파괴적 재점령과 대규모 학살이 이어졌다. 이스라엘군의 강력한 억제 조치로 인해, 대부분의 서안지구 팔레스타인인은 하마스의 투쟁 동참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트럼프 당선 후, 네타냐후는 미국을 이란 공격에 끌어들이려 해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에 대한 공격을 수개월에 걸쳐 조절하면서 “정밀 타격”을 통해 민병대원 수백 명을 사살했다. 9월 공격을 전후해 이스라엘군은 가자지구와 달리 헤즈볼라에 대해 세심한 군사 전략을 펼쳤다. 9월 17~18일의 공격과 9월 27일 나스랄라 사망 이후, 이스라엘은 레바논 국경지대로 지상군 침투를 포함한 작전을 빠르게 확대했다.
또한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이스라엘에 87억 달러의 추가 군사 지원을 승인하고, 하산 나스랄라 사망에 대해 축하의 뜻을 전하며, 레바논 작전에 대한 지원 의지를 드러냈다.(13) 이때 네타냐후는 승리를 거두었고, 이란은 체면을 잃었다.
심지어 레바논 헤즈볼라 내부에서도 이란이 동맹국들을 전투에 끌어들이면서도 직접적인 개입이나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테헤란은 10월 1일 이스라엘에 두 번째 미사일 발사를 감행하며 이를 만회하려 했지만, 이는 제한적이고 영향이 미미한 수준에 그쳤다. 이란은 대규모 갈등으로 미국과 그 지역 동맹국을 자극해 내부 반정부 봉기로 이어질 위험을 감수하기를 꺼리고 있었다.
이제 남은 의문은 10월 1일 이란의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응이다. 네타냐후는 이란의 핵 프로그램을 수년간 지연시키고 시온주의 영웅 목록에 자신의 이름을 남길 큰 공격을 꿈꾸고 있다. 또한 그는 극우 동맹의 압력을 받고 있다. 그들의 입장에서 핵 시설 외 다른 목표를 겨냥하는 것은 약점의 징표로 보인다. 하지만 이란의 석유 시설을 공격할 경우, 이란의 걸프 지역 반격으로 인해 세계 경제 위기와 아랍 산유국들과의 관계 악화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
이란의 핵 시설을 공격하려면, 가자지구나 레바논에서처럼 미국의 간접적 지원이 아닌 직접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10월에 고고도 요격용 미사일 시스템인 사드(THAAD)를 이스라엘에 배치하고, 이를 운용할 미군 수백 명을 파견해 이란의 반격에 미국 병력이 노출될 가능성을 높였다. 이처럼 바이든 행정부는 이스라엘을 무장하고 보호하면서,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해 억제 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이전 주장과는 모순된 행동을 취했다.
이란의 지하 핵 시설을 효과적으로 파괴하려면, 네타냐후가 하산 나스랄라를 제거할 때 투하했던 수 톤의 폭탄이나 오바마 미 행정부가 제공한 GBU-28 대벙커 폭탄보다 훨씬 강력한 무기가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 12~15톤에 달하고, 60미터 깊이까지 관통할 수 있는 GBU-57 같은 폭탄과 이 폭탄을 운반할 전략 폭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폭탄이나 이를 투하할 전략 폭격기를 보유하지 않고 있다.(14) 따라서 네타냐후와 이스라엘군이 이란의 방어 시스템을 겨냥한 새로운 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이 커졌다. 이는 4월에 이루어진 간접적인 핵 시설 공격을 더 큰 규모로 반복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그다음 행보는 11월 5일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트럼프가 당선됨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다. 트럼프가 내년 집권하면 미국과 이스라엘이 공동으로 이란을 공격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글·질베르 아슈카르 Gilbert Achcar
런던 대학교 SOAS 교수, 저서 『아랍과 홀로코스트: 이스라엘-아랍 이야기 전쟁』(신드바드/악트 쉬드, 2009년)
번역·강태호
번역위원
(1) Akram Belkaïd, 「이스라엘-이란, 다가오는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4년 5월.
(2) David E. Sanger, 「미국, 이란 핵 시설 공격에 대한 이스라엘의 지원 요청 거부」, <뉴욕 타임스>, 2009년 1월 10일.
(3) Eli Lake, 「오바마, 이스라엘에 무기 지원」, <뉴스위크>, 뉴욕, 2011년 9월 25일.
(4) 「이란과 미국 간의 검의 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0년 2월.
(5) 「미국의 구원,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상처받은 땅」, <마니에르 드 부아르> 프랑스어판, No. 193, 2024년 2~3월.
(6) Jack Mirkinson, 「바이든이 네타냐후에게 화가 났다고? 웃기는 소리」, <더 네이션>, 뉴욕, 2024년 2월 13일.
(7) Colleen Long, 「바이든, 이스라엘이 2024년 미국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평화 협정을 지연시키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말해」, <AP 통신>, 2024년 10월 4일.
(8) Tovah Lazaroff, 「네타냐후, 바이든에게: ‘한 시온주의자에서 다른 시온주의자에게, 50년간의 우정에 감사드립니다’」, <예루살렘 포스트>, 2024년 7월 25일.
(9) 「가자의 미래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4년 6월.
(10) Gilbert Achcar et Michel Warschawski, 『33일 전쟁: 이스라엘의 레바논 헤즈볼라와의 전쟁과 그 여파』, 파리, 텍스투엘, 2007년.
(11) Adam Raz, 「네타냐후-하마스 동맹의 간략한 역사」, <하아레츠>, 예루살렘, 2023년 10월 20일.
(12) Muhammad Dayf, 「알악사 홍수의 시작을 선언한다」, <오아시스>, 2023년 11월 8일, www.oasiscenter.eu.
(13) 「이스라엘, 87억 달러 미국 지원 패키지 확보 발표」, <로이터 통신>, 2024년 9월 26일.
(14) John Paul Rathbone, 「이스라엘이 단독으로 이란의 핵 시설을 파괴할 수 있을까?」, <파이낸셜 타임스>, 런던, 2024년 10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