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키스탄이 매달리는 ‘아리안주의’의 신화
고귀하고 우월한 민족에 뿌리를 두었다는 생각을 토대로 국가적 우수성을 내세우는 통치 방식은 1945년 나치 패망 이후 사라진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오늘날 이 아리아인의 신화를 재조명하려는 나라가 있다. 바로 타지키스탄이다. 중앙아시아 지역에 있는 이 나라는 아리아인의 뿌리를 바탕으로 국가정체성을 세우려 한다. 유럽에서 태동한 아리아인의 신화가 그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에서 다시 부상하는 것이다.
타지키스탄 수도 두샨베 중앙 광장에는 우뚝 솟은 동상이 하나 있다. 사만 왕조(819~999년)의 에미르(제왕) ‘이스마일 사마니’의 동상이다. 마치 미래를 내다보는 시선으로 웅장하게 세워진 동상 곁에는 사자 두 마리가 나란히 서 있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자리를 지키는 사진사들은 사자 발밑에서 포즈를 취하도록 관광객을 유도한다. 몇 차례 자세 수정이 이뤄지고 나면 사진사들은 동상을 에워싼 아치와 그 위의 화려한 왕관을 프레임 안에 넣는 데 성공한다. 타지키스탄은 구소련 붕괴 이후 극심한 경제난과 이념적 공백 상태에서 벌어진 친공산 보수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남부의 개혁연합세력(The United Tajik Opposition, UTO)간의 끔찍한 내전(1992~1996)을 거치면서 인구 600만 명 중 10만~15만 명이 죽고 100만 명의 이주민이 발생한 나라다. 정부는 이 분열된 나라를 다시 하나로 뭉쳐주는 상징적 인물로 타지키스탄의 국부(國父) 이스마일 사마니를 택했다.
이스마일 사마니는 9세기 초에서 10세기 후반까지 180년 동안 이란,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일대를 다스렸던 수니파 이슬람 사만 왕조의 군주다. 이스마일 사마니의 얼굴은 그의 이름에서 딴 100소모니 지폐에도 등장한다.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며 자국의 정체성 내세워
중앙아시아 지역의 5개 구소련 독립국 중 제일 가난하면서 유일하게 페르시아어를 사용하는 타지키스탄은 (특히 이웃국인 우즈베키스탄과 선을 그으며) 이란 문화권에서 자국의 정체성을 찾았다. 사회 지도층을 중심으로 독립을 얻은 것도, 민중 운동을 통해 독립을 얻은 것도 아닌 이 나라는 이전부터 워낙 지역이나 민족 별로(타지크인 65%, 우즈베크인 25%, 러시아인 2% 등) 격차가 심했던 터라 독립 후 국가로서의 하나 된 정체성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 답을 이란의 민족적 뿌리에서 찾은 것이다.
그에 따른 일환으로 인구 100만 명의 수도 두샨베는 30년 전부터 주요 도로 이름을 페르시아어권 유명 작가 이름으로 교체하고 있다. 그중에는 소비에트 시절부터 타지키스탄 고유의 특징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했으며, 특히 사전학자로서 현대 타지크 페르시아어의 기반을 닦은 사드리딘 아이니(1878~1954)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독립 후 민족 작가의 반열에 오른 경우가 꽤 있는데, 고전 페르시아 문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중세 시인 루다키(859~941)도 그중 하나다. 루다키는 그의 이름을 딴 공원 중앙에 동상도 설치되었으며, 모자이크 아치와 분수대로 꾸며진 동상 주위에선 민요와 시 암송문이 흘러나온다.
라흐몬 대통령, 타지크인을 ‘아리아인의 후예’로 소개
1992년부터 32년째 장기 집권 중인 에모말리 라흐몬 대통령(2016년 개헌을 통해 종신집권가능)은 먼 옛날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구인들을 대거 소환하는 그의 공식 연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레퍼토리는 타지크인을 아리아인의 후예로 소개하는 것이다. ‘아리아인’이란 말은 애초 인종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 문화적, 언어적인 개념의 ‘순수’ 민족을 연상시키는 중립적인 단어였으나 나치는 이를 유럽 백인종의 우월함을 내세우는 근거, 즉 사악한 목적의 인종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켜 유대인 등 타민족을 지배하고 탄압하는 도구로 악용했다.
타지키스탄의 아리아인 이데올로기는 19세기 중엽 유럽에서 번성한 인종 이데올로기의 한 변형으로, 당시 유럽에서는 인도유럽어의 기원과 뿌리에 대한 연구가 이뤄지면서(엉뚱하게도) 이 같은 인종 이데올로기가 기승을 부렸다. “인도-유럽어는 곧 과거의 ‘인도 및 유럽’ 사람들이 쓰던 조상언어라는 인식이 자리잡았고, 이어 ‘인도 및 유럽’ 사람들이 ‘정복의 민족’으로 격상되어 ‘우월한 민족’이 되었다”는 것이다.(1)
19세기 프랑스의 외교관이자 고고학자였던 아르튀르 드 고비노(1816~1882)도 그의 저서 『인종불평등론』에서 아리아 인종의 우월성을 주장했다. 즉, 산스크리트어로 ‘고귀하다’는 뜻의 ‘아리아’에서 파생한 형용사 ‘아리아인’을 백인 ‘인종’을 가리킨 것이다.
타지키스탄 정부는 자국의 아리아인에 대한 열정이 서구권의 인종 이데올로기로 오인되지 않도록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타지크인들의 아리아인 혈통이 분명한 만큼, 나치의 인종 이데올로기 때문에 타지크인이 원시 아리아인의 한 갈래라는 사실이 부인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를 토대로 타지키스탄 정부는 2005년 ‘만卍’자를 국가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으나, 해당 글자가 나치의 십자가 모양 ‘하켄크로이츠’와 비슷해 보인다는 이유로 유럽과 미 대사관 측이 우려를 표했다. 타지키스탄의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 전우회에서도 반기를 들고 나서자, 정부는 결국 이를 철회했다. 하지만 국내외의 이 같은 압박에 불만을 표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아리안주의에 ‘고귀한 조상언어’의 옷을 입히려 하고 있다.(2)
겉으로 국가 정체성이 드러나는 모든 곳에는 아리안주의의 흔적이 나타난다. 도시만 한 번 둘러보더라도 (를 둘러보면) 호텔이나 은행, 재단 등에서 ‘오리요(타지크어로 ’아리안’을 의미)’, ‘아리아나(그리스어로 아리아인의 영토를 의미)’ 등과 같은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몇 년 전부터는 에모말리 라흐몬 대통령 본인도 타지크인이 아리아인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다녔다. 심지어 그는 “타지크란 단어가 ‘고귀한 혈통’을 의미하는 ‘아리안’과 동의어”라는 주장까지 펼쳤다.(3) (‘타지크’와 ‘아리안’을 동일시하는 경우는 역사책과 박물관에서도 종종 확인된다.)
30년 이상 장기 집권 중인 라흐몬 대통령은 재임 중 집필한 저서만도 20권에 달하는데, 그중 가장 성공을 거둔 책은 1999년에 출간한 『역사 속에 비추어 본 타지크인 : 아리아인에서 사만 왕조에 이르기까지』였다. 타지키스탄에서 이 책을 우수한 역사 학술서로 이야기하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고, 몇몇 대학에서는 여러 언어로 번역이 이루어진 이 책의 주요 대목 일부를 통째로 외우도록 하는 시험도 치러진다.
타지키스탄의 아리안주의가 나치의 인종 이데올로기와 다르다고는 해도 19세기와 20세기의 인종주의 사상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니며, 특히 러시아 쪽 인종주의와의 연관성이 확인된다.(4) 제정 러시아에서 아리안주의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정복하는 명분으로 사용됐다. 즉, 유럽의 광활한 문명과 아리아인의 뿌리를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저들의 정복 논리였다. 따라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투르크족을 예속함으로써 이 지역과 유럽 문명을 하나로 이어버린다.
우즈베키스탄 등 투르크족을 미개한 존재로 내려 봐
그리고 오늘날 타지키스탄 당국의 시각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느껴진다. 유럽에 민족적 뿌리를 두고 있다는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도심의 교양 계층인 페르시아 민족은 높이 평가하고 유목민인 투르크족은 미개한 존재로 폄훼하는 것이다. 타지크인들은 아리아인의 뿌리를 내세우며 스스로를 (야만족의 침입 이전에 존재했던) ‘순수’하고 고귀한 토착 ‘인종’으로 소개한다. 두샨베 역사연구소의 전 소장이었던 라크임 마소브 또한 우즈베키스탄인에 대해 “신체적 외양에 있어서나 인종적 뿌리에 있어서나 (타지크인들과) 비슷한 부분이 전혀 없는 것 같다”고 썼다.
“아리아인들은 파란 눈의 금발에 신장도 크다. 그에 반해 투르크족은 눈도 작고 코도 낮으며 얼굴도 넓적한 편에 수염도 적은 몽골인의 외양”(5)이라는 것이다. 아리안 ‘카드’를 내밀면 러시아나 유럽과도 쉽게 연계될 수 있으며, 인구도 많고 국력도 위인 이웃 국가 우즈베키스탄에 대한 모종의 우월감도 가질 수 있다. 그러니 마소브 전 소장이 대통령 측근의 극우 사상가 알렉산드르 두긴 주축의 ‘국제 유라시아 운동 본부’ 일원이란 사실도 그리 놀랍지는 않다.(6) 라흐몬 대통령의 측근이기도 한 마소브 전 소장은 ‘아리아인’으로 묶이는 두 민족, 타지크인과 러시아인이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국가 정체성 문제에 매달리는 타지키스탄의 정책은 구소련 체제하에서 있었던 일과도 무관하지 않다. 우선 지금의 국경을 확정한 것부터가 볼셰비키 지도부였다. 제정 러시아와 선을 긋고 1917년 혁명 중 터져 나온 국내의 요구사항에 부응하고자 혁명 세력은 민족 정책을 통해 중앙아시아 지역에 5개 민족 공화국을 만들었고 그러면서도 각국 내부에 일부 소수민족을 위한 자치 지역을 별도 마련하거나 문화적인 예외를 인정했다.
이에 따라 타지키스탄은 우선 우즈베크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내의 자치 공화국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1929년, 페르시아어권 타지크인들이 튀르크어권 우즈베키스탄 사람들과 분리된 별도의 공화국을 다시 구성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양측은 서로 완전히 분리된 두 개의 민족 집단이라는 인식이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다. 타지크인들의 언어와 문학, 문화가 자리잡은 부하라와 사마르칸트도 우즈베키스탄 쪽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내부의 정치적 상황이 둘을 분리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우즈베키스탄 공산당의 페르시아어권 당원들이 투르크족과의 동맹을 내세워 모스크바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페르시아어권의 새로운 공산당 분파가 다스리는 타지키스탄 공화국을 수립하여 이에 맞설 대항 세력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수도 내부의 상황만 보더라도 두 개의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 민족이 함께 섞여 사는 게 확인된다. 타지크어는 주류 언어와 거리가 멀고, 따라서 비즈니스 업계는 물론 카페나 공연장, 택시 안에서도 우즈베크어가 들린다.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양쪽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2개 언어 모두를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다. 타지키스탄 인구의 최소 11%는 우즈베크 민족에 속하기 때문이다.(7) 게다가 타지크인 다수는 (특히 우즈베키스탄과 가까운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우즈베크어에 능통하다. 이에 우즈베키스탄 초대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집권 1991~2016)도 (비록 논란이 많은 말이긴 하지만) “타지크족과 우즈베크족은 두 개의 언어를 쓰는 하나의 민족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이후 양측이 각각 독립을 하면서 (소비에트 통치 60년간 잠재된) 내부 분열이 차츰 심화되고 양국의 사학자들도 각기 서로가 과거를 왜곡한다며 비난한다.(8) 타지크 정부는 아리아인 혈통과 조로아스터교라는 민족적 특징을 내세우지만, 타지키스탄에서는 조로아스터가 사실상 소멸된 종교이기 때문에 우즈베키스탄은 이러한 타지키스탄 쪽 주장을 반박한다. 반면 우즈베키스탄 정부는 2003년 9월, 유네스코 지원으로 ‘아베스타의 해’를 제정하기로 했는데, ‘아베스타’란 조로아스터교의 경전 일체를 일컫는 말이다.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이 같은 움직임은 타지크인들의 심기에 거슬렸고, 역으로 2006년 타지키스탄에서 ‘아리아 문명의 해’를 조직한 것 역시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렸다.
구소련 시절부터 줄곧 언어는 타지크인의 민족 국가 건설에 있어 그 핵심에 놓여있었다. 대통령 본인도 자신의 저서를 통해 이란어와 다른 타지크어만의 특성을 내세웠다. 더욱이 그는 “아리아인의 생생한 언어를 말하는 마지막 민족”으로서 타지키스탄 사람들을 소개하는 국내 학자들의 연구를 근거로 삼는다.(9) 그런데 타지크어의 순수성과 고대어의 뿌리를 내세우기에는 무리가 좀 있다. 다른 이란어 계통에서 사라진 고대의 원형이 남아있다고는 해도 타지크어는 우즈베크어의 영향을 꽤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어에서 차용한 표현도 많고 1940년부터는 아예 키릴문자를 채택하는 등 러시아어의 영향도 남아있다.
이런 상황을 의식한 타지키스탄에서는 최근 몇 년간 언어 개혁을 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이란은 타지키스탄 집권당 대신 제1야당을 지지
가령 2020년 이후 태어난 타지크인 아이들은 (러시아어가 아닌) 순수 타지크어 계열 접미사를 이름에 붙이도록 법적으로 의무화되었다. 2007년부터는 대통령 본인도 자신의 성에 (러시아어 성향이 강한) ‘-ov’ 접미사 부분을 빼버리고 ‘라흐모노프’에서 ‘라흐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또한 이란어와 가깝거나 혹은 이란어에서 차용한 단어들이 공문서나 음식점 메뉴, 신문 등 법적으로 그 쓰임이 의무화된 곳곳에서 등장한다. 고대의 ‘순수’ 타지크어 특징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이렇듯 정부의 ‘공식’ 언어에서는 규제 수준이 점점 높아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일상에서 이전부터 써오던 방언을 사용한다. 따라서 정부 표준어와 국민들의 일상어 사이에 점점 격차가 커지면서 공문서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많다. 타지크어와 우즈베크어, 러시아어 등 타지키스탄 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3개 언어의 사용자들조차도 갈피를 못 잡는 경우가 점점 늘고 있다.
타지키스탄이 집착하는 아리아인의 민족적 혈통은 그 역사적 서사(인도, 페르시아 중심지였던 이란 및 유럽 전역에 정착한 인도—유럽 또는 인도—게르만 민족을 아리아인이라 부름)가 있는 만큼 이란 쪽에서도 물론 중시하는 부분이다. 따라서 라흐몬 대통령은 타지키스탄이 자칫 이란의 정치적 문화적 영향에 흡수되진 않을까 불안해한다. 이에 대해 유라시아 전문가 스테판 뒤두아뇽은 양국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기이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양국이 문화적으로는 서로 유사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상반된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란은 사실 시아파 이슬람 국가임에도 타지키스탄의 제1야당 이슬람부흥당을 지지하고 있다. 이 정당은 타지키스탄 국민들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수니파 계열의 조직이다. 또한 이란은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1990년대 타지키스탄 내전에서도 라흐몬 대통령 진영과 대치한 전력이 있다.
그러므로 타지키스탄 정부 입장으로선 이슬람 국가로 나서는 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라흐몬 대통령이 비록 메카 성지까지 다녀올 만큼 신실한 무슬림이지만, 타지키스탄에서는 수염을 기르거나 히잡(이슬람 머릿수건)을 착용하는 게 경찰의 단속 대상이다. 2015년, 이슬람부흥당이 테러 조직으로 분류된 뒤로는 극단적 이슬람주의에 대한 척결이 곧 정부의 강압적인 단속의 명분이 되었다. 사실 IS 테러 행동 조직원 가운데 타지크인 망명자가 종종 끼어있긴 하나, 이들은 대개 해외에서 채용된 경우다. 국내에서 이슬람 극단주의로 체포된 경우는 대개 그리 극단적이지 않은 일반 신도들일 때가 많다. 지난 2년간 타지키스탄 내에서는 기록적인 수의 검거 열풍이 불었지만, 대부분은 정부 방침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거나 반대 시위에서 과격 진압으로 검거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극단적 이슬람주의를 단속하는 한편, 정부는 아리안 축제 같기도 하고 조로아스터교 축제 같기도 한 고대 행사를 다시 부흥하려 노력한다. 10월로 정해진 축제일, 두샨베의 피르다우시 공원에서는 각종 과일과 음식이 성대하게 차려졌다. 피라미드처럼 쌓인 음식 앞에서 전통 악단과 무용수들이 공연을 선보였고, 관객들은 드문드문 그 앞에 자리했다. 미트라 신을 기리는 감사제 ‘메흐레간’을 타지크어 식으로 바꾼 ‘메흐르곤’ 가을제를 개최한 것인데, 같은 식으로 1월에는 ‘사다’제를 연다. 불의 발명을 기리는 제의(祭儀) ‘사데흐’를 타지크어 식으로 바꾼 명절이다. 축제에 온 사람들은 대체로 즐기는 분위기였으나,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역사 논란에 무관심한 타지키스탄 사람들
약간 가소롭다는 듯 쳐다보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대놓고 행사를 욕하진 않았지만, 뒤에서 따로 조용히 물어보니 “몇몇은 진심으로 이 축제를 반기겠지만, 제대로 된 무슬림들은 아마 아닐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타지키스탄 사람들은 이러한 문화 행사나 역사 논란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한 편이다.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이나 현지의 관습에 그 흔적을 남기긴 했어도 그 창시자인 차라투스트라를 섬기고 과거의 이 같은 명절까지 기리는 건 무슬림 신도에게 있어 인위적인 종교 이식이자 나아가 이단에까지 이를 수 있는 행동이다. 라흐몬 대통령도 더는 조로아스터교의 창시자를 “무수한 시간과 수많은 혈전으로도 그 흔적이 지워지지 않은 최초의 타지크인 선지자”로 내세우지 않는다. 차라투스트라는 그 종교적 색채가 차츰 지워지고 지금은 윤리 사상을 대표하는 한 인물이 되었다. 이슬람 이전 시대의 종교를 다시 되살릴 수 없게 되자 정부는 그럼에도 국내 이슬람에 ‘타지크’의 색을 더하고, 시아파든 수니파든 외부 영향에 덜 노출된 종교로 만들고자 애를 쓴다.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탈레반 정권이 들어섰을 때 역내 국가 중 가장 강경하게 반발한 타지키스탄은 (2016년 개혁주의 성향의 샤브카트 미르지요예프가 집권한 후로 이미 완화되는 양상을 보였던) 우즈베키스탄과의 문화적 분쟁을 뒤로 하고 테헤란과 가까워지려는 모습을 보인다. 아프가니스탄에는 (타지크인 탈레반 조직 ‘자마트 안사룰라’를 포함해) 이십여 개의 다른 테러 집단이 존재하고, 따라서 이에 대한 타지키스탄 당국의 우려가 크다. 생활 기반이 취약하고 미래에 대한 전망이 없는 해외 주재 타지크인들은 아프가니스탄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IS 코라산 분파의 테러 공격에 가담하는 경향이 높다. 90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1월 3일 이란 케르만 주에서의 테러 공격에는 다수의 망명 타지크인이 연루되었으며, 2024년 3월 22일 145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모스크바 남부 교외 지역 크로커스 시청 테러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10)
테헤란과의 관계가 호전되는 상황에서, 페르시아 문화권에 대한 소속감을 표명하는 것은 두샨베 입장에서 딱히 문제가 될 게 없다. 그런데 아리안 ‘신화 팔이’는 상황이 좀 다르다. 국토의 45%를 차지하면서도 전체 인구의 3%밖에 살지 않는 고르노바다흐샨 자치주 (타지키스탄 남동부 파미르 고원 가운데 위치하며 중국, 남쪽은 아프가니스탄과 접경하고 있는 자치주) 문제를 다룰 때 상당한 모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주로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에 접한 고산 계곡에 살아가는 이 산악지대 주민들은 사실 그 지위가 꽤 모호하다. 이들은 그 문화적 특성상 완전한 타지크인으로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특히 신앙적인 측면에서 (이스마엘 시아파를 따르기에) 일반적인 타지크 민족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 터를 잡고 살아온 역사적 배경 때문에 타지키스탄의 국가적 정체성 구축 과정에서는 배제할 수 없는 존재다.(11) 이들끼리 하는 말도 서로 상반될 때가 많은데, 혹자는 스스로를 ‘파미리스족’이라는 별도의 민족 집단으로 인식하는 반면 또 다른 혹자는 ‘산악지대 타지크인’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시절부터 이미 이 지역과 수도 두샨베 쪽 사이에는 서로 악감정이 존재했다. 양측의 반목은 특히 고르노바다흐샨 사람들이 타지크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더 우수한 교육 혜택을 받으면서 심해졌다.
‘아리안 직계 혈통’인 파미르 고원 사람들은 잠재적 위협 요소
사실 모스크바는 소비에트공화국의 최남단에서 가장 접근성이 떨어지는 지역 중 하나를 소련 공산주의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보여주고자 했다. 그런데 내전이 발발하면서 양측이 서로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때의 대치 국면은 가족 간의 싸움이면서 동시에 민족 간의 대립이라는 특징을 띤다. 고르노바다흐샨 지역이 라흐몬 진영의 반대파 쪽에서 상당한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1997년의 평화 협정에도, 파미르 고원 사람들은 이슬람부흥당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정부에게는 잠재적 위험이다.
역설적이게도 파미르 고원 지역의 이 소수민족은 나머지 타지크인들보다 더 아리아인의 직계 혈통에 더 가깝다. 하지만 이들은 그러한 부분을 타지키스탄의 주류 집단과 구분되기 위한 논거로 내세운다. 물론 그렇다고 민족적 우월성을 과시하는 건 아니나, 파미르 고원에서는 종종 지역 주민들의 피부색이나 눈 색깔에 집착하는 경우가 눈에 띈다. 기원전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병사들이 이 지역을 지나다 고립된 지형 덕분에 무사히 살아남았고, 지금의 파미르 고원 사람들은 그 병사들의 후손이라는 설도 있다. 이들은 타지크인 못지않게 자신들이 “아리아인보다 더 아리아인”이라고 주장한다. 대통령으로선 안타까운 상황이다. 아리아인의 신화가 여기저기서 별의별 용도로 다 동원되기 때문이다. 라흐몬 대통령이 자기 마음대로 아리아인의 신화를 가져다 쓰고는 있으나, 그렇다고 그 혼자만 갖다 쓰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글·쥐디트 로베르 Judith Robert
언론인
번역·배영란
번역위원
(1) Jean Sellier,『Une histoire des langues et des peuples qui les parlent 언어의 역사, 그리고 이를 말하는 민족의 역사』, La Découverte, Paris, 2019.
(2) Marlène Laruelle,『Aryan mythology and ethnicism : Tajikistan’s nationhood』, ‘Central Peripheries : Nationhood in Central Asia’, UCL Press, London, 2021.
(3) Emomali Rahmonov, 『Les Tadjiks dans le miroir de l’histoire. Des Aryens aux Samanides』, Big Media Group, Bruxelles, 2014. 별도의 언급이 없는 한 대통령의 인용 자료는 모두 이 책에서 가져온 것이다.
(4) Matthias Battis, 「The Aryan myth and Tajikistan : From a myth of empire to one national identity」, <Ab Imperio>, n° 4, Miami, 2016.
(5) Rakhim Masov, 「Falsifier et s’approprier l’histoire d’autrui 타인의 역사에 대한 탈취와 왜곡」(러시아어), 2006년 3월 9일, www.centrasia. ru, Marlène Laruelle 인용, 『Aryan mythology and ethnicism : Tajikistan’s nationhood』, op. cit.
(6) Jean-Marie Chauvier, 「Eurasie, le “choc des civilisations” version russe 유라시아주의, 러시아판 ‘문명의 충격’」,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14년 5월호, 한국어판 2014년 6월호.
(7) Fernand de Varennes, 「End of mission statement of the United Nations special rapporteur on minority issues」, 유엔인권고등판무관, 2023년 10월 19일.
(8) Slavomír Horák,「In search of the history of Tajikistan. What are Tajik and Uzbek historians arguing about ?」, <Russian Politics and Law>, vol.48, n°5, NewYork, 2010년 9월-10월호.
(9) Sulton Hasan Barotzoda, 「La langue tadjike et l’identité nationale 타지크어와 국가정체성」(러시아어), Scientific Collection InterConf, n° 71, 2021년 8월 19-20일.
(10) Khursan Khurramov, 「Menaces du sud sur le Tadjikistan. Réalité ou jeux politiques ? 타지키스탄에 대한 남측의 위협 : 현실인가 정치 공작인가?」(러시아어), <Radio Ozodi>, 2023년 11월 13일, https://rus.azathabar.com
(11) Antoine Buisson & Nafisa Khusenova, 「La production identitaire dans le Tadjikistan post-conflit : état des lieux 분쟁 후 타지키스탄 정체성 구축의 현황」,<Cahiers d’Asie centrale>, n° 19-20, Paris, 2011.
지역 균열 구소련 붕괴 직전 타지키스탄 도처에서는 민족 분열과 지역 분열이 일어났고, 국민들은 조국에 대한 소속감을 갖기가 힘들었다.(1) 게다가 부하라와 사마르칸트 두 지역은 타지크인들이 모여 살던 유서 깊은 도시였음에도 우즈베키스탄 영토에 속해 있어 타지크인들이 주권 행사를 할 수 없었고, 아프가니스탄에는 국내보다 더 많은 타지크인들이 살고 있었다. 한 나라의 국민들 사이에 유대감이 자리하기 어려웠던 이유다. 더욱이 독립 초창기에 일어난 내전 역시 국가 정체성이 형성되는데 장애가 되었고, 국민들 간의 분열은 이후 정치적 위기로 비화한다. 1991년 8월, 카하르 마흐카모프 타지키스탄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대통령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서기장에 반대하는 무장폭동 세력을 지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새로 집권한 중앙 정부는 이후에도 몇 달간 공산당의 해체를 요구하는 각계의 반대에 부딪힌다. 1992년 5월, 극단적인 성향의 두 진영 간에 최초의 무장 대치 상황이 빚어졌는데, 한쪽은 친정부성향의 타지키스탄 인민 전선으로, 쿠잔디스(북부 주류 세력), 쿨라비스(남부), 히사리스(두샨베 인근) 등이 모인 연합체다. 반대쪽은 (1990년 창당한) 타지키스탄이슬람부흥당과 바다흐샨 주의 루비스(파미리 자치 운동) 등 4개의 반공산주의 정당이 모인 타지키스탄 야당 연합이다. 러시아와 이란의 중재로 1997년 6월, 내전은 종료됐다. 80%를 넘는 득표율로 집권한 후 계속해서 정부를 수성하는 라흐몬 대통령은 ‘조국의 통일과 평화를 일군 창시자’로서 자신의 직위에 정당성은 부여하지만, 야당에는 그 어떤 자리도 내어주지 않는다. 정부의 강경화 노선이 수년간 이어진 끝에 타지키스탄이슬람 부흥당은 결국 2015년 완전히 해체된다.
글·엘렌 리샤르 Hélène Richard 번역·배영란 (1) Michaël Levystone,『Asie centrale. Le réveil 중앙아시아의 각성』, Armand Colin, Paris, 2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