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국민스포츠 크리켓의 이면
황금알을 낳는 거위에서 힌두교 민족주의 도구로
영국에서 인도로 건너간 크리켓은 어떻게 국민 스포츠가 되었을까? 크리켓은 2028년 LA 올림픽에서 정식 종목으로 부활된다. 크리켓이 불러일으키는 열광은 실로 엄청나다. 인도에서 크리켓은 단순히 스포츠 차원을 뛰어넘는다. 정체성 강화를 통해 국민을 결속시키고 외교적 출구전략이 되기도 하지만 힌두교 민족주의의 정치적 도구로도 이용되고 있다.
인도에서 크리켓 경기장을 직접 찾는 사람들은 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문 크리켓 TV 채널을 통해 국가 대표팀의 활약을 지켜본다. 인도 대표팀을 이끄는 주장은 비라트 콜리(Virat Kohli)로, 그는 볼리우드 영화(뭄바이의 옛지명 봄베이와 할리우드의 합성어로 인도 영화산업을 의미함—역주)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콜리의 생일인 11월 5일, 인도가 콜카타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팀을 물리친 날, 에덴 가든스 스타디움에서는 콜리의 팬들이 “당신을 낳아준 어머니께 경의를”이라는 현수막을 들고 열광했다. 팬들은 “생일 축하해, 콜리 왕”을 외치며 열광했고, 카메라들은 그 장면을 생중계로 송출했다. 군중 속에 묻힌 콜리의 모습은 디즈니 <스타 스포츠 1>과 <스타 스포츠 2> 채널을 통해 계속 반복해서 방송되었다.
크리켓은 16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귀족 스포츠로 영국 제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특히 인도에서는 영국인 식민 지배자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인도인 엘리트들에 의해 받아들여져 인도 고유의 스포츠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문명학자 아르준 아파두라이(1)는 이를 “크리켓의 토착화”라고 설명하며, 인도에서 크리켓이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국민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분석한다. 크리켓과 거리가 있는 나라, 특히 그 경기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규칙이 난해한 게임으로 여겨지지만, 영연방(Commonwealth)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많다. 2023년 월드컵에 출전한 10개 팀 중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팀이 대영 제국의 식민지 출신 영연방 국가들이었다.
크리켓, 2028년 LA 올림픽에 정식 종목 포함돼
그러나 이 스포츠는 각 지역에서 상반된 진화를 겪어왔다. 인도, 파키스탄,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에서는 대접받는 국민 스포츠로 매우 인기가 높은 반면, 그 기원지인 영국과 남아프리카, 호주, 뉴질랜드 같은 나라들에서는 오히려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 레스터 대학교 국제 스포츠 역사 및 문화 센터의 연구원인 스티븐 웨그는 “특히 영국에서 크리켓은 위협을 받고 있다. 공공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크리켓이 사립학교의 체육 시간에 일부 학생들만이 즐기는, 소수의 엘리트 스포츠로 점점 더 전락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1975년 잉글랜드 개최를 시작으로 4년마다 진행되어 온 크리켓 월드컵은 25억 명의 시청자를 보유하며, 올림픽(30억 명 이상)과 축구 월드컵(약 50억 명)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이 시청되는 국제 스포츠 대회이다. 크리켓은 2028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128년 만에 정식 종목으로 다시 포함된다. 국제 크리켓 협회(ICC)는 이 기회를 통해 크리켓에 대한 관심과 관람 열기를 더욱 확장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에는 상황이 만만찮다. 왜냐면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서는 더 빠르고 역동적인 야구가 사촌이자 선조였던 이 크리켓을 대신하였기 때문이다. 라틴 아메리카, 유럽, 또는 구소련권에서는 크리켓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자메이카나 트리니다드토바고 같은 일부 영국의 카리브해 식민지 출신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인기가 있다. 프랑스에서는 약 200명의 선수만이 등록되어 있을 뿐이다.
원래 크리켓 경기는 최대 5일 동안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러나 텔레비전 방송사와 광고주들의 요구에 따라 경기 시간이 단축되는 추세이다. 이제 월드컵 경기는 두 가지 유형으로 진행된다. 첫째는 2023년 11월 대회처럼 하루에 끝나는 원데이 인터내셔널(One Day International) 유형으로, 실질적인 경기 시간이 7시간이다. 둘째는 인도가 우승했던 2023년 6월 대회처럼 3시간짜리 경기 유형이다. 이 짧은 경기 유형은 그동안 느리고 심지어 지루하다는 이미지의 크리켓을 더 화려하고 역동적인 스포츠로 만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우리가 관람한 뉴질랜드와 파키스탄 간의 경기 첫 번째 이닝은 4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파키스탄 볼러(투수)가 위켓을 쓰러뜨릴 때(박스 기사 참조) 파키스탄 관중석에서 “내 마음은 파키스탄(Dil Dil Pakistan)”이라는 응원가가 휘파람에 가려지지 않고 크게 울려 퍼졌다. 이후 파키스탄 수비수가 멋진 다이빙으로 공을 잡아내자 파키스탄 지지자들의 환호가 이어졌고, 경기장 전체에 “파 파키스탄(Pa Pakistan)”이라는 후렴이 울려 퍼졌다. 인도 및 아시아대륙의 음악과 서구의 팝 음악이 경기장의 순간순간을 장식했다.
뭄바이 오벌 마이단, 식민지 시대 세워진 크리켓 훈련장
그러나 응원 열기는 뉴질랜드가 압도적이다. 예를 들어, 파키스탄 배트맨(타자)이 강하게 쳐낸 공을 뉴질랜드 볼러가 공중에서 잡아냈을 때 관중들이 보였던 폭발적인 열광이 그렇다. 블랙 캡스(Black Caps)의 전설적인 배트맨 마크 리처드슨의 유니폼을 입은 인도 태생의 미국 관중은 박수를 치며 “정말 좋은 팀이다!”라고 뉴질랜드 팀의 활약을 칭찬했다.
뭄바이의 오벌 마이단(Oval Maidan)은 팔각형 탑을 가진 대법원을 비롯해, 영국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우아한 아르데코와 신고딕 양식의 건축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오후 늦은 시간과 주말이 되면, 아마추어 크리켓 선수들이 이 공원에서 연습을 한다. 공원 여기저기에는 나무 기둥 네 개로 고정된 그물망이 있어 배트맨과 볼러 지망생들이 연습할 수 있는 훈련용 울타리 역할을 한다.
한쪽에서는 청소년 배트맨이 보호용 패드를 착용한 채 머리가 희끗희끗한 볼러가 던진 공을 되받아쳤고,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한 청년이 빈 울타리 안을 정리하고 있었다. 흰색 옷을 입은 어린이들은 조끼도 없이 여섯 명씩 모여 코치의 지도 아래 훈련했다. 오벌 마이단 한가운데에서는 어른들이 우승컵과 메달을 열광적인 젊은이들에게 수여했다. 공원 한쪽에서는 롤러가 오렌지빛 흙과 드문드문 자라난 잔디를 평탄하게 만들고 있었고, 물탱크 트럭에 연결된 호스를 통해 물을 뿌리고 있었다. 공을 열심히 차며 축구를 하던 네 명의 소년들만이 크리켓의 지배적인 존재감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었다.
“크리켓은 영국인들이 우연히 발견한 인도의 스포츠”
뭄바이 남부의 마이단(maidans) 광장에서 크리켓의 지배력이 자리 잡았다. 19세기 중반부터 자발적으로 크리켓을 처음으로 시작한 원주민들은 봄베이(현재의 뭄바이)의 파르시(Parsis)(2)들이었다. 인도에서 크리켓에 대한 첫 언급은 17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영국인들은 이 스포츠를 원주민에게 가르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고 역사가 라마찬드라 구하는 설명했다(3). 따라서 인도인들은 자발적으로 이 스포츠를 익히기 시작했다. 정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아시스 난디는 인도 식민지 주민들이 이 스포츠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문구를 들려주었다. “크리켓은 영국인들이 우연히 발견한 인도의 스포츠다.”
역사학자 라마찬드라 구하는 “축구와 달리, 크리켓은 (20세기 전반기 동안) 모든 사회 계층에서 인기를 누렸다. 축구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노동계급 출신이었고, 그들의 팬들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럭비와 테니스는 공개적으로 엘리트 스포츠였다. 오직 크리켓만이 귀족과 서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 역시 극히 일부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오랫동안 인도 카스트 제도에서 브라만 출신이 대표를 거의 독차지해온 것에 비해 달리트(불가촉천민)는 여전히 배척되고 있다. <프라디프 매거진> 기자는 “지금까지 단 네 명만이 국가 대표팀에서 뛰었다“라고 한탄했다. 2023년 6월에도 카스트 상위층 출신 선수들이 불가촉천민 소년의 손가락을 절단한 사건이 있었는데, 소년이 크리켓 공을 만졌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4)
영국 제국이 남긴 ‘분할 지배’의 도구, 간디가 분노한 이유
영국 식민 당국은 인도 사회를 고의로 분열시키기 위해 선수들을 종족과 종교 그룹으로 나누었다. 이 그룹 중 일부는 공공 생활에서 서로 적대적 관계였다. 아르준 아파두라이는 “크리켓은 광범위한 전쟁터가 되었으며, 여기서 선수들과 관중들은 자신들이 속한 그룹에 따라 자신을 힌두교도, 파르시, 무슬림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유럽인들과는 반대되는 정체성을 형성하게 되었다”라고 분석했다. ‘분할 지배’라는 전략은 스포츠 분야를 넘어 영국 식민 정책의 주요 도구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전략이 극명하게 반영된 사례가 바로 매년 파르시, 힌두교도, 무슬림, 유럽인 팀들이 토너먼트로 맞붙는 봄베이 4개국 대회였다. 마하트마 간디는 이 대회를 강하게 비판했다. 간디는 종교적 다양성을 존중하는 통일된 인도를 옹호하며, “힌두교도, 파르시, 무슬림과 다른 공동체 팀들이 맞붙는 경기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분열은 반스포츠적이며, 금기시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5)
‘인도 독립의 아버지’, 간디가 암살된 지 76년이 지난 현재, 크리켓은 인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족, 문화, 언어적 분열을 가진 나라에서 국민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고 있다. 모히트 아난드는 “인도처럼 다양한 사회와 문화를 가진 나라에서 크리켓은 일관성과 통합이라는 매우 희귀한 기회를 선물하며, 이를 통해 국민을 결속시킨다”라고 설명했다.(6)
크리켓이 항상 집권당과 연결되어 있던 것은 아니지만, 1990년대부터 이러한 경향이 강화되었고, 2008년 인도 프리미어 리그(Indian Premier League, IPL)가 창설된 이후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샤시 타루르 전 외무부 차관은 “경제가 점진적으로 자유화되면서 크리켓 연맹은 점점 더 많은 텔레비전 중계권 수익을 올리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IPL은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크리켓 리그로 자리 잡았으며, 크리켓은 인도 스포츠 수익의 85%를 차지하게 되었다.
크리켓, 인도 스포츠 수익의 85%를 차지해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인도 국민당(BJP)을 이끌고 정권을 잡은 이후, 그의 정부는 약 1억 7천 5백만 명에 이르는 인도 무슬림 인구(전체 인구의 약 15%)에 대한 차별 정책을 펼쳐왔다.(7) 모디는 인도를 힌두화하려는 의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며, 심지어 국가대표 크리켓팀의 유니폼 색상을 전통적인 파란색에서 힌두교를 상징하는 주황색으로 바꾸려는 계획까지 고려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슬림 크리켓 팬들의 행동은 당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2017년에는 파키스탄이 인도를 이기자 이를 축하한 19명의 무슬림 팬들이 “공동체 불화를 조장했다”는 이유로 기소된 바 있다.(8) 아카르 파텔 전 인도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회장은 “파키스탄을 응원하는 것 자체가 불법은 아닌데도 인도 경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라고 지적했다.
샤르다 우그라 기자는 인도 크리켓 통제위원회(BCCI)에 대한 BJP의 장악력을 취재하며, 현 BCCI 총무인 제이 샤가 내무부 장관 아미트 샤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9) 아미트 샤는 모디 총리와 가까운 인물로, 2014년부터 2020년까지 BJP를 이끌었고, 모디가 구자라트 주 총리였던 시절 크리켓 연맹을 함께 운영한 바 있다. BCCI의 아시시 셸라르 재무관 또한 BJP 뭄바이 지부 회장을 겸임하고 있으며, 그는 BCCI에서 선출된 후 모디와 아미트 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10) BCCI 전무이자 전 국가대표 선수였던 사바 카림은 “정부의 지원 없이 크리켓 경기를 조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관료주의 장벽이 경기 운영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크리켓은 적대 관계에 있는 형제 국가들 사이에서 중요한 대화의 통로가 될 수도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이슬라마바드와 뉴델리는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두 차례 전쟁을 벌였다.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핵전쟁을 피하게 한 ‘크리켓 외교’
그러나 1978년, 거의 20년간의 갈등 끝에 일련의 스포츠 경기가 대화를 재개하는 데 기여했다. 이를 통해 ‘크리켓 외교’가 탄생했다. 보리아 마줌다르 역사학자이자 기자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양자 관계가 긴장 상태에 빠질 때마다 크리켓은 항상 구원 역할을 해왔다”고 분석했다.(11) 1987년, 두 나라가 카슈미르 전선에서 새로운 전쟁을 준비하던 중, 파키스탄 대통령 무하마드 지아 울하크는 인도의 라자스탄 주 자이푸르에서 열린 경기에 깜짝 참석하여 위기를 완화시킨 바 있다.(12)
그러나 크리켓 외교는 동시에 인도의 외국인 혐오세력들을 극도로 자극했다. 1999년 초, BCCI의 초청으로 12년 만에 파키스탄 대표팀이 인도 순방을 시작했다. 정치학자 아비프수 할더는 “이 순방은 인도 정부의 승인을 받았으며, 크리켓 외교의 일환이었다”고 강조했다.(13) 그러나 이는 마하라슈트라 주의 수도 뭄바이에 본부를 둔 극단적 민족주의 정당인 시브 세나의 분노를 일으켰다. 이 정당은 파키스탄이 카슈미르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한다고 비난하며 원칙적으로 파키스탄과의 모든 대화와 교류에 반대했다. 시브 세나의 활동가들은 순방을 방해하려고 뉴델리의 페로즈 샤 콧라 경기장 잔디를 파헤치고, 파키스탄 외교 시설을 공격했다. 결국 뉴델리에서 열릴 예정이던 경기는 첸나이(마드라스)로 옮겨졌으며, 원래 예정된 3경기가 2경기로 줄어들었다. 크리켓이 평화를 촉진하려는 과정에서 폭력을 불러온 것이다.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었다.
2001년 10월 1일, 잠무-카슈미르 의회를 겨냥한 치명적인 공격이 스리나가르에서 발생했다. 인도 당국은 이를 카슈미르 이슬람주의자들의 소행으로 규정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지만, 양측의 외교적 노력 덕분에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극도의 긴장 상태 속에서 BCCI가 2004년 인도 대표팀의 파키스탄 순방을 제안했고, 이는 중요한 시기에 제안된 적절한 해결책이었다.(14) 당시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인도 총리는 크리켓을 이용해 평화를 강화하는 카드를 꺼내 들었으며, 파키스탄 정부는 수천 명의 인도 팬들에게 비자를 발급하며 호의를 보였다.
다음 해에는 양국 수반이 뉴델리에서 열린 경기를 관람했고, 이 만남은 곧 양자 회담으로 이어졌다. 양국 지도자들은 “따뜻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2008년 11월 26일, 뭄바이가 대규모 테러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인도와 영국 간의 크리켓 경기가 열리는 날을 고의로 선택했으며, 경찰을 포함한 인도 전체가 경기 중계에 집중했다. 테러 이후 양국 간 긴장은 다시 고조되었고, 인도는 파키스탄을 공격의 배후로 지목했으나 파키스탄은 이를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크리켓은 다시 한 번 양국 간 평화의 조짐을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세계 크리켓 수익의 약 70%가 인도 시장에서 나와
그러나 인도 국민당(BJP)의 집권 이후 크리켓 외교는 사실상 끝났다고 샤르다 우그라는 말한다. 이제 크리켓은 인도 대륙의 ‘국민 스포츠’일 뿐만 아니라 공격적인 민족주의의 프로젝트이자 정치적 힘의 도구가 되었다고 아비프수 할더는 덧붙인다. 크리켓 월드컵은 국제 크리켓 연맹(ICC)이 주관하는 대회로, 개최국들은 그 일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도 정부는 BCCI를 통해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친선 경기를 금지할 수 있다. 2023년 아시아컵이 파키스탄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인도의 거부로 스리랑카가 대회를 대신 주최했다. 아시아 크리켓 연맹(ACC) 회장은 제이 샤, 즉 BCCI의 수장이었다. 이 긴장된 분위기를 무시하려 했던 파키스탄 크리켓 연맹의 회장은 2023년 9월 콜롬보에서 열린 인도-파키스탄 경기에서 인도 친구와 동행할 계획이었다. 그 친구는 다름 아닌 아룬 싱 두말이었고, 그는 인도 프리미어 리그(IPL)의 회장이자 BCCI의 전 재무관으로, 인도 스포츠부 장관의 형이었다. 그러나 경기가 시작된 지 15분 만에 뉴델리에서 그에게 경기장을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두말은 IPL과 BCCI의 정치적, 외교적 영향력을 잘 알고 있다. 2018년에는 약 7억 1천 5백만 명이 크리켓 경기를 시청했으며, 이는 인도에서 스포츠 이벤트를 본 전체 시청자 중 93%에 해당한다. 샤르다 우그라는 “이러한 시청률은 국제 크리켓 협의회(ICC) 전체 회원국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으며, 미국 인구의 두 배에 해당한다. 이는 BCCI의 재정적 안정성의 원동력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로 인해 BCCI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국가 크리켓 연맹이 되었으며, “ICC보다도 더 부유하다. 세계 크리켓 수익의 약 70%가 인도 시장에서 발생한다”라고 모히트 아난드는 지적한다. 제이 샤가 12월 1일부터 ICC 의장을 맡게 되면, 인도의 크리켓 세계 지배력이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크다.
카슈미르 분쟁지역에서 논란이 된 크리켓 챔피언십
이 막대한 자원을 바탕으로, BCCI는 자신의 규칙을 강요하고 있다. 2021년, 파키스탄 크리켓 연맹이 아자드 카슈미르에서 프로 리그를 창설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때, BCCI는 ICC에 이 리그의 존재를 인정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요청이 거부되자 BCCI는 IPL에 참가하려는 선수들이 카슈미르 리그에 참여할 경우 이후 IPL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위협했다.
영향력 있는 기자 비제이 로카팔리는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이 챔피언십은 분쟁 지역에서 열리고 있다. 인도는 파키스탄이 그 지역을 점령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 땅은 우리의 것이라고 한다. IPL은 자신의 이미지를 보호해야 하며, 그래서 카슈미르 리그든 다른 리그든 선수들이 다른 곳에서 뛰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혜택, 즉 스포츠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은퇴 연금과 같은 혜택을 얻기 위한 대가이다”라고 설명했다.
파키스탄 측은 이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파키스탄 크리켓 연맹 회장 라미즈 라자는 파키스탄 상원에서 청문회를 하며 “우리 수입의 절반이 ICC에서 나온다. 만약 내일 인도 총리가 파키스탄에 대한 자금 지원을 차단한다고 결정하면, 파키스탄 크리켓 연맹은 무너질 수 있다”라고 밝혔다.(15)
BCCI는 또한 파키스탄의 강력한 동맹국인 중국을 겨냥하고 있다. 양국은 아크사이친 영토를 두고 60년 넘게 국경 분쟁을 벌여왔으며, 2020년 충돌로 인해 인도군 20명이 사망한 바 있다. BCCI는 중국 휴대전화 제조업체 비보(Vivo)와의 계약을 중단하라고 촉구했고, 결국 IPL은 비보를 인도 기업 타타(Tata)로 대체했다.
아프가니스탄 크리켓팀이 보여준 희망의 불꽃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외교적으로는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크리켓 외교를 포기하고 강경한 정치적 접근을 취하는 것이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인도의 스포츠 재정력이 막강함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은 여전히 아자드 카슈미르 영토에서 한 치도 양보하지 않고 있으며, 중국은 계속해서 인도 영토를 잠식하고 있다.
이런 어두운 지정학적 상황 속에서도 크리켓 경기는 희망의 불빛을 제공할 수 있다. 2023년 11월 7일 뭄바이에서 열린 호주와 아프가니스탄의 경기가 그 예다. 타자가 공을 경기장 너머로 날릴 때마다, 네 모퉁이에서 물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축제 분위기 속에서 두 팀의 팬들은 따뜻한 박수를 함께 보냈다. 아프가니스탄의 이 수준 높은 경기 출전 자체가 기적이다. 미국의 메시아주의와 탈레반의 어둠에 의해 파괴된 아프가니스탄의 국민은 파키스탄의 난민 캠프에서 크리켓을 배웠다. 덕분에 미디어는 이 고통받는 나라에 대해 긍정적인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샤르다 우그라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그들은 용감하고 정말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라고 칭찬했다.
글·다비드 가르시아 David Garcia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번역·아르망
번역위원
(1) 아르준 아파두라이, 『Après le colonialisme. Les conséquences culturelles de la globalisation 식민지 이후: 세계화의 문화적 결과들』, 작은 도서관(Petite Bibliothèque) 시리즈, 파리, 2015. 아파두라이의 모든 인용은 이 책에서 발췌함.
(2)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파르시(Parsis)는 서기 8세기에서 10세기 사이 페르시아에서 인도로 이주함.
(3) 라마찬드라 구하, 『A Corner of a Foreign Field: The Indian History of a British Sport』, 런던, 2003. 구하의 모든 인용은 이 책에서 발췌함.
(4) ‘조카가 크리켓 공을 만진 후 달리트 남성의 손가락이 잘림’, 2023년 6월 6일, https://scroll.in
(5) 스티븐 웨그, 『Cricket: A Political History of the Global Game, 1945-2017』, 라우틀리지(Routledge), 2018. 웨그의 모든 인용은 이 책에서 발췌함.
(6) 모히트 아난드, 『인도의 크리켓 지정학』, 시몬 채드윅, 폴 위도프, 마이클 M. 골드만 편저, 『The Geopolitical Economy of Sport: Power, Politics, Money, and the State』, 라우틀리지(Routledge), 2023. 아난드의 모든 인용은 이 장에서 발췌함.
(7) 크리스토프 자프렐로, 「나렌드라 모디, 민주주의의 또 다른 아이디어」,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어판, 2024년 4월.
(8)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파키스탄 승리를 응원한 팬들은 석방돼야 한다」, <더 가디언>, 2017년 6월 21일.
(9) 샤르다 우그라, 「샤의 놀이터: BJP의 인도 크리켓 통제」, <더 카라반>, 2023년 8월 31일. 우그라의 모든 인용은 이 기사 또는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발췌함.
(10) 「아시시 셸라르, BCCI 재무관 선출 후 모디와 샤에게 감사」, <더 타임스 오브 인디아>, 뭄바이, 2022년 10월 18일.
(11) 「크리켓 외교, 다시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다리 역할을 하다」, <르몽드>, 2011년 3월 28일.
(12) 장프랑수아 푸르넬, 「크리켓 경기장에서 만난 인도와 파키스탄」, <라 크루아>, 2015년 7월 24일.
(13) 아비프수 할더, 「자본주의와 스포츠 거버넌스 윤리: 인도 크리켓 통제위원회의 역사」, <스포츠 인 소사이어티>, 제24권, 8호, 테일러 & 프랜시스, 애빙던, 2021. 할더의 모든 인용은 이 논문에서 발췌함.
(14) 프라디프 매거진, 『Not Just Cricket: A Reporter’s Journey Through Modern India』, 하퍼콜린스 퍼블리셔스 인디아, 노이다, 2021.
(15) 모히트 아난드, 『인도의 크리켓 지정학』, 앞서 언급한 책(op.cit.)
크리켓은 어떻게 하나? 크리켓은 두 팀이 각각 11명의 선수로 구성되어,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하며 경기를 진행한다. 공격팀은 배트맨(타자)이 맡고, 수비팀은 볼러(투수)가 주도한다. 경기에서 수비팀 볼러는 공을 던져, 경기장 중심의 직사각형 구역인 피치의 양 끝에 세워진 위켓을 쓰러뜨리려 시도한다. 위켓은 세 개의 나무 막대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위에 두 개의 작은 나무 타겟이 얹혀 있다. 배트맨은 헬멧을 쓰고 위켓을 지키며, 볼러가 던진 공을 쳐서 최대한 멀리 보내려 한다. 이상적으로는 공을 경기장 밖으로 쳐내는 것이 목표다. 배트맨이 공을 치면, 배트맨과 그 파트너는 위켓 사이를 왕복하며 가능한 한 많은 득점을 얻기 위해 달린다. 공을 쳐서 위켓 사이를 한 번 왕복할 때마다 1점이 주어지며, 공이 땅에 닿지 않고 경기장을 벗어났을 경우 6점이 주어진다. 공이 땅에 닿고 나서 경기장을 벗어나면 4점이 주어진다. 배트맨은 위켓이 쓰러지거나, 수비수가 공을 공중에서 잡아낼 때 아웃된다. 수비팀이 10명의 배트맨을 모두 아웃시키거나, 정해진 오버(over)(한 오버는 6개의 공으로 구성) 50회가 끝나면 공격과 수비가 바뀐다. 더 많은 점수를 획득한 팀이 승리한다.
글·다비드 가르시아 David Garcia 번역·아르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