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조합은 한국 자본주의를 개량할 수 있는가?

Corée

2012-10-14     김성오

2012년 어디에선가 갑자기 협동조합이 나타났다. 금융자본의 세계화에 앞장서면서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열심히 제거하는 데 헌신해온 유엔이 올해를 '세계협동조합의 해'로 선포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명박 정부, 새누리당과 노선을 같이하는 국회의원이 3분의 2를 차지하던 지난겨울 국회에서 협동조합기본법이 통과되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20년 전부터 협동조합주의자로 '한가하게' 살아온 필자가 한 달 10회 이상 협동조합을 강의하러 전국을 돌고, 3회 이상 각종 신문과 잡지에서 원고 청탁을 받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는 사실이다.

왜 협동조합인가

지구상에서 협동조합이 보편적 경제현상이 된 지는 오래다. 150년 전 영국에서 시작된 이후 현재 전세계 경제활동인구의 약 5분의 1이 어떤 종류의 협동조합이든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미국 신용협동조합에는 미국 경제활동인구의 40%가 참여하고 있고, 일본은 전체 가구 중 3분의 1이 생활협동조합 조합원에 가입되어 있다. 네덜란드 농산물의 약 75%를 협동조합이 생산하고, 스웨덴의 동네 진료소 중 60%가 협동조합이다. 노르웨이 사람의 99%는 협동조합이 만든 우유를 마신다.

어디에선가 갑자기 나타났다기보다는 사람들이 새삼스럽게 협동조합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오래전부터 옆에서 묵묵히 살고 있는 친구가 새삼스럽게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친구가 되었다고나 할까 ?

무엇을 기대하는가

2008년 뉴욕발 금융위기 이후 세계경제는 일정 기간 저성장 국면에 돌입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나 유럽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성장세도 둔화되기 시작했다. 대외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들어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이 국면이 지난 10여년 동안 심각한 양극화가 진행된 뒤에 닥쳤다는 점이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일시적 저성장 시기는 부자든 가난한 사람이든 국민 모두를 어렵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양극화에서 밑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에게 재앙으로 찾아올 가능성이 높다. 한국뿐 아니라 복지예산을 계속 삭감하는 유럽이나 미국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1998년 직후 저성장 국면에서 김대중 정부와 힘센 경제주체들은 한목소리로 "파이를 키우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자"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를 기꺼이 수용했다. 몇 년 후 성장세가 회복되고 한국 경제는 세계화의 격랑을 헤쳐나가기 시작했다. 국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대기업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기회를 누렸는데, 사람들은 낙수 효과를 기대하며 기다려줬다. 하지만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졸라맨 허리가 더 줄어든 것을 발견하는 데는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양극화라는 괴물이 이들을 덮쳐 이미 삼켜버린 뒤였다.

지금 또다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더 졸라맬 허리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새로운 말씀이 필요하다. 어려운 시절 부모님이 우리 형제를 불러놓고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이다. "형제지간에는 어려울수록 콩 한 쪽도 나눠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협동조합은 이런 국면에서 훨씬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업 방식이다. 저성장 국면에서 협동조합에 기대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첫째, 협동조합의 잉여금(Surplus)은 주식회사의 이익(Profit)과 달리 소수 대주주 가문에 배당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 조합원들에게 배당된다. 부의 재분배 효과가 주식회사에 비해 훨씬 뛰어나다.

둘째, 협동조합은 같은 업종, 같은 규모의 주식회사에 비해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다. 회사가 어려워질 경우 조합원들은 일자리를 줄이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뉴욕 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 자본수익률 족쇄에 묶여 있는 많은 대기업들이 노동자들을 해고할 때 협동조합은 이 움직임에 동참하지 않았다. 협동조합에서 자본은 스스로 수익을 창출하는 독립주체가 아니라 생산과 유통의 수단 정도로 취급되기 때문이다.

셋째, 협동조합은 노동시장에서 소외된 취약계층의 일자리 창출과 사회 서비스 제공을 위한 해법을 가지고 있다. 바로 사회적 협동조합이다. 유럽에서 1980년대 이후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은 복지예산이 줄어드는 유럽이 선택한 대안이다. 한국에서 협동조합기본법을 통과시킨 보수파들이 오매불망 기대하는 것이기도 하다.

넷째, 협동조합 금융은 자본수익률과 머니게임에 매몰된 파생상품 거래를 기피하고 상호 금융을 중심으로 건실한 금융 활동을 하는 경향이 강하다. 작년 말부터 금융위기의 주범들을 손보기 위해 전개된 월가 점령시위에서 시위대들은 "월가의 계좌를 신용협동조합계좌로 바꾸자 !"는 구호를 내걸었다. 미국 신협의 계좌 수는 1년간 약 70만 개가 늘어났다.

경제민주화의 한 얼굴인가

저성장 국면을 이겨내기 위해, 혹은 그 이후를 위해 이 기회에 아예 기존 한국 경제의 틀을 바꿔보자는 주장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최근 3명의 유력 대선 후보들이 유권자들에게 약속한 경제민주화가 그것이다. 요약하면, 시장에서 경제권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는 대기업의 횡포를 막고 대주주 가문의 독점적 기업 지배권 행사를 제한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 경제의 성과를 압도적 다수의 중소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에게 돌리자는 것이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

협동조합은 오랜 시간 경제민주화의 첨병 역할을 해왔다. 협동조합은 구조상 기업 내에서 권력 독점이 불가능한 체제로 되어 있다. 협동조합 내에서 주도권은 주식 수에 비례한 게 아니라 더 많은 조합원들의 동의에 의해서 행사된다. 이것이 바로 주식회사의 1주1표 원리와 구별되는 협동조합의 '1인1표 원칙'이다. 돈 많은 사람보다는 조합원의 마음을 얻는 사람이 지도력을 행사하는 원리다.

시장에서 작고 힘없는 협동조합들은 연대와 네트워크를 통해 대기업과 경쟁한다. 개별 협동조합은 약하지만 연합된 협동조합의 힘은 약하지 않다. 이것이 바로 '협동조합 간 협동의 원칙'이다. 이 원칙은 1960년대 다국적기업이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 시절, 국제협동조합연맹(ICA)에 의해 채택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오는 12월 협동조합기본법이 발효된 후 생겨날 수많은 협동조합이 연대와 네트워크를 통해 시장에서 대기업과 경쟁하는 협동조합의 힘을 보여줄 수 있다.

협동조합 중에서도 노동자협동조합은 경제민주화의 핵심 영역인 기업민주화에 크게 공헌할 것이다.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 본부를 둔 세계적인 노동자협동조합 기업집단 '몬드라곤'은 평범한 3만5천 명의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직접 일하면서 경영전문가를 고용해 자산 약 50조 원, 매출 약 30조 원의 기업까지는 별 문제 없이 경영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이들은 기득권을 내려놓음으로써 대주주들이 지배하는 같은 규모의 주식회사보다 약 1.6배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노동자협동조합의 숭고한 미담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제 얼마 안 가 한국에서 대기업은 능력이 출중한 특정 가문이나 최소한 정부가 경영해야 한다는 공식이 깨질 것 같다. 이들이 경영할 때보다 노동자들이 경영하거나 경영에 참여할 때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만 몇몇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면, 한국의 자본시장은 예상하기 힘든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즉, 더 많은 일자리를 위해 노동자들에게 전체 혹은 일부의 경영권을 맡기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 미국에서 종업원지주제를 통해 노동자들이 51% 지분을 인수한 노동자 기업들의 주식 가격이 이전보다 더 비싼 가격에 거래된다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한국에서 미국 기업에는 존재하지 않는 대기업 '오너리스크'를 최소화할 경우 해당 기업의 주가는 더 큰 폭으로 올라갈 수 있다.

한국 협동조합의 과제

협동조합이 저성장 국면에서 큰 역할을 하는 구조적 장점이 있고, 경제민주화에서 큰 이점이 있다고 해서, 한국의 협동조합이 실제 이런 역할을 잘 수행하리라 자동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과제가 한국의 협동조합운동 앞에 존재한다.

첫째, 협동조합 인지도가 매우 낮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 협동조합은 갑자기 나타난 것처럼 느껴진다. 한마디로 너무 생소하다. 어떤 일이든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면서 그 일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는 12월 이후 협동조합 진영이 첫 번째로 겪게 될 문제이다. 더 많은 국민이 협동조합에 관심을 갖고 알아나갈수록 협동조합의 성공 가능성은 높아진다. 이를 위해 공격적인 협동조합의 교육과 홍보가 필요하다. 정부는 국공립대 안의 학부든 대학원이든, 아니면 평생교육원에라도 협동조합 교육과정을 설치해야 한다. 그리고 기존 협동조합들은 협동조합을 알리고 전파하는 데 초기 승부수를 두어야 할 것이다.

둘째, 급격하고 거칠게 진행된 한국의 산업화 과정은 경제 영역에서 사람 간의 관계를 '저신뢰 관계'를 기반으로 고착시켰다. 저신뢰 관계에서 협동조합은 성공하기 힘들다. '아비 자식 간에도 동업은 하지 마라'든가, '진정한 친구를 잃기 싫은가? 그러면 동업하지 마라'라든가, 동업에 대한 안 좋은 속설과 선입관은 협동조합 운동의 발전에 가장 큰 질곡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협동조합은 오랜 세월 다져지고 다듬어진 동업의 규칙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다소 걸리더라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뼈저린 노력이 필요하다.

셋째, 협동조합 간 협동, 협동조합 네트워크 건설을 위한 초기의 사회적 중심이 필요하다. 협동조합이 연대와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려 할 때, 초기부터 이 중심을 세우고 잡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필자는 얼마 전 이를 위해 <한겨레> 지면을 통해 한겨레신문을 협동조합으로 전환해 한국협동조합 네트워크의 중심으로 세울 것을 제안한 바 있다.

12월 이후 '협동조합기본법 시대'를 맞이한 한국의 협동조합 운동 진영이 위에서 말한 과제들을 슬기롭게 해결해나간다면, 한국에서 협동조합은 유럽에서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것을 의심치 않는다. 한국은 협동조합의 신흥 중심국, 아니 세계 중심국의 지위를 차지할 수도 있다. 두레와 계, 향약을 통해 전통사회에서 다져진 한국인들의 협동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 여기에 한국 사람들의 진취적 역동성이 더해진다면, 단 10년 만에 세계 최고의 정보기술 강국으로 우뚝 선 경험이 협동조합에서도 반복될 것이다. 이 경우 협동조합 운동은 한국 자본주의를 좀더 인간적으로 개량하는 데 뚜렷한 족적을 남길 것이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이후에 대한 고민과 토론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데 기여할 것이다.

글•김성오 서울대 철학과 졸. 아이알씨조사연구소 대표,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 연구위원. 저서로 <몬드라곤의 기적>(2012), <경제민주주의<(1994), <일하는 사람들의 기업>(199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