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자유’를 억압하는 어설픈 자기계발
인간의 내면 속 무의식의 가치
생각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일까. 그 자유가 기존의 가치와 질서에 마치 도전장을 내밀 듯 의문을 제기할 때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그렇게 ‘어떤 생각’으로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지식이 탄생하는 과정을 거쳐 진보 지식으로 뿌리를 내렸다. 그 배경에는 무엇보다 우리가 지지하는 ‘생각의 자유’가 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오늘날 정신 건강을 강조하며 투명한 자아를 추구하는 소위 자기계발 전문가들이 무의식속 생각의 자유를 밀어내고 있다.
프로이트와 그의 제자들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 무의식이라는 신비한 존재가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이 무의식은 정신질환을 이해하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눈에도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이 미처 의식조차 할 수 없는 무의식에 의해 좌우된다면 우리의 자유 의지는 어떤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일까. 행위에 대한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이성과 의지에 근거한 인간의 독자성은 정말 그렇다 할 수 있을까?
물론, 인간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은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꿈, 말실수, 갑작스러운 생각, 설명되지 않는 신체적 병, 압도적인 열정 등이 그러한 예다.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는 그간 의학적 관점은 물론 철학과 문학을 통해서도 다양한 버전으로 분석과 설명이 이루어져 왔다.
오래전부터 있어 온 그 설명의 일부는 ‘아담의 후손’에 잠재된 그 어둡고 알 수 없는 고통, 본능적인 욕망과 저항할 수 없는 충동 등이었다. 이러한 내면적 갈등은 종교적 철학적 문학적 해석에서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의 고전주의 극작가인 장 라신(Jean Racine)의 『아탈리아-영적 찬가(Cantiques spirituels)』 (1694)에 언급되는 “오, 하나님, 얼마나 잔인한 전쟁인가! 내 안에 두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라는, 저 유명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인간의 내면에서 선과 악이 싸우고 있음을 말하는 대목이다. 이는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갈등 상황을 지적한 것으로, 내면적 소외감 속에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대한 이러한 고백은 이후 인간의 복잡한 심리구조와 그에 따른 영향을 연구하는 데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나는 다른 누군가다(Je est un autre)”라는 말을 통해 우리 안에 다양한 자아가 있음을 이야기한 것처럼, 프리드리히 니체 또한 『선악의 저편』 (1886)에서 이렇게 말했다. “생각은 그 생각이 원할 때만 찾아오지, 내가 원할 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생각한다’라고 할 때 생각의 주체가 나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나’아닌 어떤 것이 생각하는 것이며 그것을 ‘나’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한 가정일 뿐이다.” 랭보와 니체의 말을 종합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나타나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나는 그 생각들 속에서 다양한 자아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류의 세 번째 나르시시즘적 상처, 그 놀라운 눈속임
그로부터 20년 후, 프로이트는 자아와 생각의 경계를 허문 랭보와 니체의 유산을 확장하여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탄생시켰다. 무의식을 단순히 우리가 모르는 영역의 그 무엇이 아니라 우리 몸을 움직이고 의식을 형성하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가 말한 대로 ‘삶을 지배하는 숨겨진 연출자’와 같은 무의식은 인간 중심의 기존개념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즉, ‘나’가 아닌 무의식이 우리의 몸과 생각을 움직이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혼란과 선택, 능력까지도 새로운 시각으로 읽어내는 혁명적인 방법을 제시했다. 그 영향은 엄청났다. 프로이트는 이를 인류의 세 번째 나르시시즘적 상처라고 표현했다. 첫 번째는 코페르니쿠스가 밝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두 번째는 다윈의 진화론이 준 충격, 즉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르지 않다는 주장이다. 세 번째가 바로 프로이트에 의한 ‘의식이 무의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정신분석학자들의 저서가 일반 출판사를 통해 널리 퍼졌다.
프랑수아즈 돌토(Françoise Dolto)는 1976년부터 1977년까지 프랑스 라디오 방송 <프랑스 엥테르>의 ‘아이의 등장(Lorsque l’enfant paraît)’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스타가 되기도 했다. 그때는 1960년대의 지적 열정과 활기가 살아 숨 쉬던 때였고 많은 인문학 관련 서적들의 출판이 줄을 잇게 되면서 미셸 푸코, 질 들뢰즈, 피에르 부르디외 같은 학자들도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때는 미래가 다채롭고 상상력을 자극하던 시기였다. 혁명적인 아이디어나 개념적인 사고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바꾸고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여졌다. 그 시절의 분위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지금도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요즘에도 그때 당시의 유행, 음악, 아이콘 등이 계속 재활용되지만, 그때의 핵심적인 이슈들은 다시 살아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무의식’이 현재 어떤 분야에서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보면 그 활용도를 보다 실체적으로 알 수 있다. 무의식은 오랫동안 심리치료에 국한된, 즉 성적 억압과 같은 “고통”을 다루는 데 그 활용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1968년 프랑스에서 등장한 “제약 없이 즐기라”는 사회적 슬로건 이후, 금지된 욕망과 억압의 감정을 다루는 영역으로 인식되어온 무의식의 개념은 점차 설득력을 잃었다. 그만큼 무의식이 지니고 있던 파괴적인 힘도 쪼그라들었다.
긍정 심리학,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와 일치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에 대한 비판은 지속적으로 이어져 그 위상이 점점 줄어들었다. 대신, 인지 신경과학과 같은 실증적 접근법이 뇌의 기능과 구조를 설명하면서 주목을 끌었다. 미국 정신의학회가 발행한 『정신질환 진단과 통계 편람』(DSM)은 정신질환을 생리적 원인과 증상에 따라 정의하는 등 정신질환의 진단 기준을 제시하였고, 제약 산업은 이러한 변화에 일조했다. 무의식의 개념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대신, ‘투명한 자아’라는 새로운 개념이 부상했다. 이는 인간의 심리적 복잡성을 단순화하고, 명확하고 직관적인 자아상을 강조하면서 인간을 무의식의 심연에서 벗어나 상식과 합리성, 투명성에 기반해 해석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상식’은 오래된 진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와 문화에 의해 형성된 이데올로기적인 개념이다. 우리의 내면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감정이나 생각 등은 명확히 드러나지 않지만, 사회는 이를 규범적인 틀 안에 넣어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즉, 우리의 복잡한 내적 움직임은 ‘상식’이라는 형태로 규명되고, 그 기준에 맞춰진 해석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철학자나 심리학자 같은 전문가들의 해석과 도움을 받는다.
유튜브에서 인기 있는 정신과 의사이자 겸손한 현자 역할로 알려진 크리스토프 앙드레는(1) 무의식에 대해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으며, 꿈이나 실수 같은 것들은 우리가 환경에서 받은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떤 오류라고 말한다. 그는 “여러 가지 무의식”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무의식이 하나의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여러 행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의식을 잠재의식으로 희석시켜 버리고, 나 자신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요소로 여기는 것도 그리 놀랍지 않다. 그야말로 멋진 눈속임이다.
이제 사람들은 정신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보다 각자의 행복과 성공, 건강을 관리하는 수준의 도구로 인식하는 데 익숙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우울증을 침입자로 간주하고 나의 동의 없이 들어왔으니 우울증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식이다. 즉, ‘나는 우울증에 빠진 게 아니라 우울증이 내 안에 들어온 것’(2)이라고 생각하면서 약간의 의지와 노력만 있으면 우울증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모든 상처는 (…) 사랑의 부족과 관련되어 있거나 그로 인해 더 커진다.(…)”(3) “그 상처들의 치유는 모든 형태와 모든 표현의 연민과 연관될 것이다. 그만큼 간단하다.” 간단함은 계속 반복된다. “내 분노나 슬픔을 일으키는 것을 먼저 받아들이고, 불평이나 짜증보다는 더 중요한 일에 내 에너지를 쓰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행복, 내적 평화, 그리고 자기 발전이다.(4)
크리스토프 앙드레는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긍정 심리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명상과 마음 살피기(마음챙김)를 활용해 사람들의 정신건강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 긍정 심리학은 연구결과에 기반하여 사람들이 역경에 더 잘 대처하도록 도와준다. 그는 ‘마음 챙김 명상’을 통해 불안의 원천에 매달리지도 않고 세상을 바꾸려 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현재의 자신과 현실에 적응하는 쪽으로 유도한다. (<프랑스 엥테르>, 2023년 5월 6일).
그러나 이러한 긍정 심리학이나 마음 챙김과 같은 것들은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무엇보다 개인의 고유한 역사나 차이를 무시하고, 모두가 동일하게 ‘관용’을 배우고 갈등을 부드럽게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개인의 다름을 고려하지 않고, 모두가 같은 고통을 겪고 평등하다는 생각을 강조하며,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진통제 같은 지침들, 원인을 무시하고 증상만 완화시켜
예상한 대로 이 접근 방식은 성공을 거두고 있다. 삶의 근본적 어려움에 대해서는 손도 대지 못하고, 원인을 무시하면서 증상만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진통제 같은 지침들이 여전히 인기를 끌고 있다. 크리스토프 앙드레는 책, 영상, 강연뿐만 아니라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명상 세션도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 영국에서 발행되는 철학 전문 잡지<필로소피 매거진>(2018년 1월 10일자)는 “ 중도파 의원들과 프랑스의 앙마르슈(LREM) 소속 의원들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현실에 적응하는 미덕의 태도를 보였다”고 밝혔다.
또 다른 대표적인 인물은 철학자 샤를 페팽으로, 내면의 평온과 장애물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프랑스 엥테르>에서 진행하는 ‘철학적 질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그는 우리에게 삶의 열쇠를 알려주었다.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되어야 한다.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여러분은 자신의 음표, 내면의 주관적 멜로디를 들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 멜로디를 알 수 있을까? (…) 과거로 돌아가 그것을 들었던 순간을 찾아야 한다.” (2023년 9월 11일) 그 순간 당신은 투명하게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알게 될 것이다. 깨달음의 순간에 진짜 나 자신이 거기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과거의 어느 것도 영원히 결정된 것은 아니다. “과거에 일어났다고 해서 단순히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 위에 개입할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어떤 경험이 특정한 콤플렉스를 만들어냈다면? 그 장면을 다르게 재현함으로써 ‘내면의 아이’는 치유된다.(5)
이러한 접근 방식은 특히 자신을 무엇이 괴롭히는지,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고 있다는 가정에 기반한다. 무의식과 그 환상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는 과정은 필요하지 않다. 그저 자신에게 집중하면 된다. 그리고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면, 우리는 자신을 알게 되고, 자신의 실수를 정화하며, 자신이 되어야 할 존재로 변모해간다. 투명한 자아를 지니게 되고,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가 된다. 자아 성취는 항상 영성이나 철학과 같은 고차원적 가치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때로는 더 직접적이며, 성공을 목표로 하는 자기 측정 기술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6) 하지만 목표는 동일하다. 투명하고 조화로운 자아, 부정적인 경향은 인식되어 사라지고, 행복한 자아만 남게 된다. 의지만 있다면 가능하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온다. 무의식? 그것은 통제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바꾸세요!”, 진정한 해방과는 어긋나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어떤 것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것을 좋다고 판단한다.” 즉, 가치 판단은 항상 순수한 이성에 근거하지 않는다. 법률가이자 철학가였던 에티엔 드 라 보에티 이후로 우리는 어떤 이들이 ‘자유롭게’ 자발적인 복종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마찬가지다. 질 들뢰즈가 1972년 발표한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상기시킨 내용은 이해를 한층 돕는다. “배고픈 이들이 항상 훔치지 않고”, “착취 받는 이들이 항상 파업하지 않는 것”에 놀랄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파괴적인 교리에 동의하고, 그 교리의 승리를 원한다는 사실도 놀랍게 여길 수 있다. 무엇이 이러한 ‘선택’을 부추기는가? 무엇이 지도자의 강력한 지배력을 갈망하게 만드는가?
사람들의 선택과 행동은 항상 이성적이거나 도덕적인 것만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때로 불합리하거나 해로운 선택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것은 이른바 개인의 내면과 사회 구조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내용을 핵심으로 하는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 사상의 고찰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정신분석학자인 빌헬름 라이히(1897~1957)는 파시즘이 대중의 욕망과 결합한다고 주장했다.(7) 이 사상은 좌우의 비판을 피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중요한 테제를 남겼다. 사람들의 무의식은 이데올로기 속에서 은밀한 지지를 찾고, 이데올로기는 무의식의 심연 속에서 다시 힘을 얻는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가 전파하는 가치와 규범은 결코 투명하지 않다. 설령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이더라도, 이것이야말로 최상의 환상이다. 주체는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두 가지 소외의 교차점에 있다. 자기계발의 성공을 추구하는 이들은 이러한 현실을 가리고, 결국은 자기해방이라는 미명 아래 복종을 찬양하는 데 일조한다. “세상을 바꾸지 말고, 세상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바꾸세요!”라는 말은 해방을 가장한, 거짓 해방이다.
미소 지으며 자발적으로 복종하면, 그 복종은 스스로의 자존감을 달콤하게 강화시켜 준다. 결국 경쟁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이런 복종은 언제든지 쓸모가 있을 것이다.
글·에블린 피예에 Evelyne Pieiller
작가
번역·아르망
번역위원
(1) 인터뷰, www.psychologies.com, 2009년 4월 14일.
(2) 크리스토프 앙드레, 『Mon programme contre la dépression 내 우울증 극복 프로그램』, L’Iconoclaste, 파리, 2018.
(3) 크리스토프 앙드레, 『Les États d’âme. Un apprentissage de la sérénité 마음의 상태: 평온함을 배우는 과정』, 오딜 자코브, 파리, 2009.
(4) 크리스토프 앙드레, 『Imparfaits, libres et heureux. Pratique de l’estime de soi 불완전하고 자유로우며 행복하게: 자존감 실천법』, 오딜 자코브, 2015 (최초 발행: 2006).
(5) 샤를 페팽과 이자벨 스파크의 인터뷰, 마담 피가로, 파리, 2023년 9월 4일, 샤를 페팽의 책 『Vivre avec son passé 과거와 함께 살아가기』(Allary Éditions, 파리, 2023). 같은 출판사에서 출판된 그의 다른 책들로는 『La Confiance en soi 자신감』 (2021), 『Les Vertus de l’échec 실패의 미덕』(2018), 『La Joie 기쁨』(2016)이 있다.
(6) 티에리 조바르의 매우 유익한 책 『Crise de soi. Construire son identité à l’ère des réseaux sociaux et du développement personnel 자아의 위기: 소셜 미디어 시대와 자기계발 시대에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기』, 10/18, 파리, 2024.
(7) 빌헬름 라이히, 『La Psychologie de masse du fascisme 파시즘의 대중 심리학』, 파요, 파리, 199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