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식의 시네마 크리티크] <우생순>으로 보는 지도자의 바람직한 리더십
한 편의 영화가 시대의 이데올로기와 대중의 무의식을 반영한다는 말은 상식적이다. 이때 ‘시대’와 ‘대중’은 영화 개봉 시기에 한정되지 않는다. 특정한 시대 상황에 의해 과거에 개봉했던 영화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한 점에서 스포츠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감독 임순례·2008)을 주목할 만하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지도자의 리더십은 최근의 우리나라 상황에 여러 가지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스포츠 영화에는 여러 유형의 지도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각 지도자의 가치관과 행동 유형은 다양하고 상대적이다. 같은 지도자의 행동 방식이 상황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같은 리더십에 대한 평가가 시대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리더십이 선수들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정반대로 나타나는 지도자의 행적은 21세기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리더십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여자핸드볼 국가대표팀이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실화를 각색한 작품이다. 당시 여자핸드볼 국가대표팀은 결승전에서 덴마크와 2차례 연장전을 거쳐 승부 던지기까지 하는 혈투를 벌였다. AP통신이 ‘아테네올림픽 10대 명승부’에 선정할 만큼 멋진 경기를 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그 경기의 생생한 기억을 감동적으로 재현한다. 이 영화의 인물 중에서 지도자의 리더십과 관련해서는 김혜경 감독대행과 안승필 감독의 행적을 살펴볼 만하다.
김혜경은 일본 실업팀에서 활약하다가 국가대표팀의 감독대행으로 부임한다. 김혜경은 감독대행이 되자마자 라이벌 한미숙을 찾아간다. 한미숙은 남편이 진 빚 때문에 아이와 함께 거처를 옮겨 다니고, 사채업자들에게 험악한 욕설까지 듣고, 대형 마트에서 호객행위를 하면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 김혜경 감독대행은 한미숙에게 자신을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또 김혜경 감독대행은 오랫동안 대표팀 생활을 함께한 베테랑들과 친하게 어울려 지낸다.
그런데 김혜경 감독대행은 젊은 선수들에게는 호랑이 감독이다. 선수들의 훈련은 물론 개인 생활도 엄격하게 관리하고 통제한다. 팀플레이를 중시하고, 훈련 시간에 늦은 선수의 머리에 공을 던져서 혼낼 만큼 규율을 강조한다. 그래서 젊은 선수들의 불만이 쌓이고, 팀워크가 깨지고, 연습경기에서 남자고교 팀에 참패한다. 설상가상으로 베테랑과 후배 선수가 머리채를 붙잡고 싸우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김혜경 감독대행의 후임으로 부임한 안승필 감독은 남자핸드볼 최고의 스타 선수 출신이다. 독일 유학파인 안승필 감독은 베테랑 선수들을 ‘아줌마 3총사’라고 부르면서 무시하고, 세대교체를 내세워 젊은 선수들을 중용한다. 또 안승필 감독은 과학적인 프로그램과 독일식 훈련 방법을 도입한다. 그의 훈련 방식은 눈엣가시인 베테랑 선수들을 국가대표팀에서 탈락시키려는 속셈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로 인해 안승필 감독은 ‘아줌마 3총사’와 갈등을 일으킨다.
그런데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 나타난 리더십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똑같은 지도자가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에 서로 대비되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김혜경은 감독대행에서 물러나 선수로 복귀한 뒤에 체육관 마룻바닥을 직접 걸레질하고, 한미숙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 또 베테랑을 “아줌마”라고 부르며 비하했던 안승필 감독은 김혜경과 불암산 마라톤 완주 대결을 한 뒤 소통의 리더십으로 팀을 이끈다. 이로 인해 젊은 선수들은 김혜경과 안승필 감독을 진심으로 따르게 되고, 최고의 팀워크를 이룬 국가대표팀은 아테네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주요 인물들은 초반에 복잡한 갈등 관계에 놓여 있다. 베테랑과 젊은 선수들은 세대 차이로 인해 물과 기름처럼 분리돼 있다. 베테랑들은 서로 어울려 회식을 하고, 보약을 나눠 먹을 만큼 화기애애하다. 반면 안승필 감독은 베테랑 선수들을 괄시하고 한미숙과 언쟁까지 한다. 이로 인해 국가대표팀은 심각한 갈등과 내분에 휩싸인다. 그 결과 감독과 선수, 선수와 선수 사이에 높다란 벽이 세워진다. 그들에게서 정서적 공감이나 연대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갈등이 언제나 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갈등이 창조적인 긴장을 가져오기도 하고, 전화위복이 되면 팀워크를 더 강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도 지도자와 선수들은 갈등을 극복한 후에는 더욱 단단한 팀워크를 구축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이러한 서사는 스포츠 영화의 클리셰이지만, 주제를 구현하는 데는 효과적인 장치이기도 하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서 지도자들이 조직을 운영하는 방식은 각자 다르다. 김혜경 감독대행과 안승필 감독은 초반에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리더십을 보여주지만, 나중에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선수들과 상호 소통하는 관계를 유지한다. 두 지도자는 자신들의 권위적, 독단적인 리더십이 잘못됐다는 점을 깨닫고 이를 즉시 수정한다. 만약 김혜경 감독대행과 안승필 감독이 권위와 카리스마만 내세우고 선수들과 소통하지 않았다면, 국가대표팀은 올림픽 은메달을 획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에는 지도자와 선수의 소통, 정서적 공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한미숙은 안승필에 의해 대표팀에소 쫓겨난 뒤 초등학교 지도자로 변신한 전임 감독을 찾아간다. 두 사람은 벤치에서 어린 학생들의 훈련 모습을 함께 지켜본다. 이때 그들 사이에 엔트리 탈락이나 집안 문제와 관련한 대화는 없다. 그래도 한미숙은 큰 위안과 용기를 얻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사정을 알고, 위로하지 않아도 위로를 받는 이심전심의 순간이다. 전임 감독은 선수 아버지의 기일까지 챙겼던 인물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반면 안승필 감독은 초반에 한미숙의 힘든 가정사를 끄집어내 조롱한다. 남자 코치들이 연습경기에서 부진한 젊은 선수를 비난하는 장면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이때 김혜경은 남자 코치들에게 여성 선수의 생리 현상을 설명하고, 선수들의 상황을 세심하게 관찰할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통해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지도자의 리더십은 힘과 권위, 카리스마와 명령이 아니라 선수들과의 공감과 소통, 세심한 배려에서 나온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진정한 리더십은 선수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미국의 다니엘 골먼, 리처드 보이에치스, 애니 맥키는 『감성의 리더십』이라는 책에서 리더십의 유형을 전망 제시형, 코치형, 관계 중시형, 민주형, 선도형, 지시형으로 분류한다. 저자들은 전망 제시형과 코치형, 관계 중시형, 민주형은 긍정적인 리더십으로 정리한다. 반면 선도형과 지시형은 부정적인 리더십으로 평가한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초반부에서 김혜경 감독대행과 안승필 감독은 강압적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지시형, 선수 위에 군림하는 선도형 리더십을 보여준다.
그런데 김혜경 감독대행과 안승필 감독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지도자의 리더십은 특정 유형에 고정돼 있지 않다. 한 명의 지도자도 상황에 따라 변화하고, 서로 다른 리더십을 발휘한다. 실제로 두 사람은 후반부에 공감과 조화, 소통의 리더십으로 팀을 이끈다. 두 인물의 변화는 현실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대통령을 포함한 우리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진=네이버영화
글·임정식
영화평론가. 영화를 신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작업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