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의 어두운 뒷면, 비주류

2012-10-14     김동원

산업혁명 이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유럽에서는 합리성의 이념에 철과 유리라는 새로운 자재로 살을 붙인 건축양식이 태동되었다. 전통과의 단절을 모토로 한 이 모더니즘의 태동기에 고딕과 르네상스의 전통에 동양적 양식을 더하고, 때론 석기시대로부터 모티브를 얻다가 급기야 곤충의 모양까지 본뜬 양식을 고집한 건축가가 있었다. 이런 고집으로 그는 사후에 몇몇 예술사가들이 모더니즘을 논할 때 언급되지도 못하다가,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언급되는 아이러니를 맞게 된다. 그가 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로 유명한 에스파냐 카탈루냐의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 이 코르네트다.

1880년대 말 프랑스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르. 매춘부, 댄서, 광대들의 틈에서 술에 절어 밤을 보내던 한 사내가 그려낸 짙은 색채의 그림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 '물랭루즈 카바레, 매일 저녁 댄서 라 글뤼의 무대가 있음.' 석판화로 제작된 이 그림은 파리 전역에 3천 장이 뿌려졌다. 환락가의 갖은 인간 군상들을 그려낸 이 화가의 이름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였다. 그는 고흐, 고갱, 드가 등과 교류했지만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또 그렇게 구분되기 원하지도 않았다. '퇴폐적 화가'라는 수식어를 꼬리표처럼 붙이고 다니던 로트레크는 결국 알코올중독에 따른 정신착란으로 투병과 요양을 반복하다 37살에 생을 마감했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어떤 유파와 계보에 들지 못했지만 로트레크는 오늘날 광고 전단지와 포스터의 디자인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화가로 불린다.

주류의 경계, 비주류

정신병으로 아버지를 잃었으며, 어머니마저 같은 병원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 자신 또한 잦은 신경발작으로 한때 은둔 생활을 해야 했고, 그로 인해 '기이한 은둔자'로 불리던 작가가 있었다. '포(에드거 앨런 포)의 후계자'라는 별명은 얻었지만 저명한 작가는 아니었던 그는, 싸구려 장르 소설 잡지를 뜻하는 몇몇 펄프 잡지에 기이한 공포소설들을 다수 연재했다. 그러나 1934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아마추어 작가들과 소수 독자에 국한된 그의 팬들은 현재 호러의 제왕 스티븐 킹, 공포영화의 거장 존 카펜터, 그리고 에일리언 캐릭터 디자인으로 유명해진 H. R. 기거로 이어진다. 이 작가가 바로 오늘날 영화·음악·게임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의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한 H. P. 러브크래프트이다.

세 인물은 생전에 독자적인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지만 당대의 예술계에서는 그에 걸맞은 인정(Recognition)을 받지 못한 '비주류'였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비주류라고 해서 사후에야 그 지위를 인정받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생전에 모국인 미국보다 프랑스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포나,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한반도의 상황으로 인해 일본과 미국에서 더 주목을 받은 이중섭 같은 이들도 있다. 인정을 획득하게 되는 시·공간상의 거리로 본다면 자신이 속한 시대가 지난 이후에야 인정받은 시대상의 비주류와, 동시대에 자신이 속한 공간(지역) 밖의 다른 공간에서 인정받은 공간상의 비주류로 나눌 수 있다.

인정의 '거리'라는 점에서 본다면, 흔히 비주류라는 단어는 그와 유사한 '아웃사이더'나 '언더그라운드' 같은 표현과 미묘한 차이를 갖는다. 단지 인정의 시점과 공간이 달랐을 뿐 어느덧 가우디와 로트레크, 그리고 러브크래프트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또 다른 부류이기 때문이다. 반면 아웃사이더나 언더그라운드는 주류와 동떨어진, 그 존재 여부는 알 수 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이들인지 파악할 수 없는, 주류에 포함되지 않는 잔여(Residual)이자 여집합과 같은 영역에 위치한다. 이런 점에서 적어도 문화예술계의 비주류란, 지금 여기서 주류에 필적할 영향력은 행사하지 못하나 대중의 주목을 받는 이들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비주류란 '주류의 경계에 아스라이 위치한 이들'이라고.

최근 베를린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김기덕 감독을 두고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트위트를 통해 그를 "한국에서 유독 비주류 아웃사이더"라고 지칭한 점은 그래서 흥미롭다. 수상 이후, 이전과는 다른 시선을 받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할 정도로 대중의 더 많은 주목을 끌고 있는 김기덕 감독에게 자신의 이름이 대중에 회자되는 건 낯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단지 시선의 온도와 주목하는 대중의 수만 달라졌을 뿐이다. 그래서 그가 봉준호 감독의 영화가 왜 '영화계의 괴물'인지 성토했던 때처럼, 최근에 1천만 관객을 훔쳐가는 <도둑들>에 대한 발언을 주저하지 않는 것은 결코 이상하지 않다. 이런 태도의 지속이야말로 베를린영화제 수상에도 불구하고 그가 여전히 영화계에 대한 영향력에서 주류에 속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제도 예술계와 주류·비주류의 '거리'

다시 서두의 세 인물로 돌아가보자. 어떤 범주에도 들지 않는 자신만의 양식을 만든 가우디, 환락가를 소재로 삼고 그 행실에서도 퇴폐적 화가라 불린 로트레크, 그리고 미지에 대한 공포가 왜 미적 소재가 될 수 없는지 물었던 러브크래프트. 이들 비주류의 또 다른 공통점을 찾으라면 그들의 작품이 대중에게 당대 예술의 흐름에서 벗어난, 그리하여 대다수의 취향에 걸맞지 않은 점이다. 요컨대 이들의 작품과 삶의 태도는 동시대 예술가나 평론가, 대중에게 낯설 뿐만 아니라 때로는 불편함마저 느끼게 했다. 그러나 작품이라는 텍스트 자체가 감상자들에게 주는 느낌이나 취향 문제만을 비주류의 변별점으로 볼 수는 없다. 충분히 대중적이며 당대의 취향에 부합하려는 예술가들의 다수 또한 주류로 편입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앞서 비주류를 주류의 경계로 보자는 제안에서 한발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주류와 사회적 인정에서 멀어져 있는 '거리'가 왜 발생하는지의 물음으로 말이다.

이제는 예술철학의 고전이 되었지만 조지 디키의 예술제도론은 이 물음에 단서를 던져준다. 그는 예술에 대한 철학적 정의를 시도해온 모방론의 전통을 '거리'의 문제로 본다. 예술은 언어와 같이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Real)과 동일하지 않은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표상이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실재와 거리를 둔다는 점에서 바로 '예술'이 된다. 그러나 디키는 이런 정의란 "예술 작품이라는 텍스트 안에서 그 종별적 속성을 찾아내려는 편협한 시도"라고 비판한다. 그는 예술이란 작품의 속성(미적 대상의 문제)뿐 아니라, 문화 실천상의 관행을 뜻하는 제도(Institution) 내에서 획득하는 지위로 볼 것을 제안했다. 이런 제도로서의 예술계(Artworld)는 예술가, 예술 작품, 그리고 대중이 서로를 전제함으로써 각자를 완성하는 상호 의존적 구성물이며, 이들이 다시 회화·연극·음악과 같은 예술계 내 하부 예술 체계를 이룬다. 따라서 디키는 예술과 예술이 아닌 것을 예술계와 그 외부 사이의 거리로 판단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제도로서의 예술이란 특정한 법이나 기관이 어떤 작품에 예술의 지위를 부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언어와 같이 한 개인이나 집단이 변경할 수 없는 사회적 규칙을 뜻한다. 어떻게 보면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사회적 약속이 작용해 예술가와 대중에게 그들이 예술이라 간주하는 것의 영역을 의식적·무의식적으로 형성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디키의 제안대로 예술 작품 자체뿐 아니라 예술가와 대중이 함께 만들어내는 사회적 관계로 예술을 본다면, 여기서 나아가 예술계 내 주류와 비주류의 거리 또한 동일한 방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주류 예술계란 예술가와 대중, 그리고 예술가가 주류 예술에 대한 특정한 이해를 갖고, 그러한 이해를 갖춘 대중에게 작품을 제시하는 공간으로 말이다. 문제는 '주류'의 개념이 어떻게 사회적 약속으로 자리를 잡는지에 있다. 이 약속이 마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이 형성된다면, 적어도 그 약속을 확인해주는 기구(Apparatus)는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1840년대 미국 문학계의 비주류였던 포가 자신의 한 작품에서 신랄하게 풍자하던 대상인 문학평론지들이 바로 그런 기구였을 것이다. 포의 눈길을 오늘날로 돌린다면, 제도로서의 대중예술계에서 주류에 대한 사회적 약속을 확인시키는 기구는 다름 아닌 대중매체이다.

적어도 2012년 한국에서는 대중매체가 말하는 주류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듯하다. 최근 열풍을 일으킨 싸이(PSY)를 보자. 마약 사범에 군대를 두 번 갔다 온 가요계의 문제아가 일순간에 한국 가요계의 주류로 떠올랐다. 영국 차트 1위, 빌보드 차트 2위에 3억의 유튜브 조회 수라는 수치들은 곧바로 1천억 원이라는 싸이 본인조차 부인하는 액수로 환산됐다. 극단적 사례일 수 있다. 하지만 서슴없이 1천억 원이라는 액수로 싸이의 가치를 평가하는 한국의 대중매체는 포가 풍자한 19세기 말의 문학평론지들의 허영을 훌쩍 뛰어넘은 또 다른 사회적 기구임이 분명하다. 자본의 지위를 열망하는 대중매체들이 예술계의 주류를 확인시킨다는 말은 곧 주류와 비주류의 거리, 혹은 그 경계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이윤을 창출하는 자본이라는 사회적 약속으로 자리잡았음을 뜻한다. 김기덕 감독의 수상을 두고 "축하의 의미에서 멀티플렉스 한 개 관은 <피에타>에 자리를 내주자"는 한 감독의 제안이 있었단다. 발언자의 의도가 어땠든 이 말은 자본이라는 사회적 약속을 성취하지 못해온 비주류에게 주류만이 줄 수 있는 시혜를 베풀자라는 말로밖에는 이해되지 않는다.

김기덕과 싸이… 비주류라는 존재의 의미

비주류가 주류의 아스라한 경계에 자리한 존재라면, 이들에게 '문화 다양성'을 얘기하고 '육성과 지원'이란 구호를 외치는 짓은 무의미하다. 주류와 함께 거하고 있는 문화예술계에 비주류가 줄 수 있는 기여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그들의 존재 자체일 것이다. 주류의 경계란 곧 주류의 한계와 그 본질을 확인시키는 지점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문화예술사에서 수많은 비주류 예술가들이 당대 주류들의 모순과 한계를 온몸으로 보여주었듯, 오늘날의 이들 또한 주류의 거울이자 어두운 면이다. 그래서 비주류 김기덕 감독의 수상이 던지는 의미가 있다면, 그의 험난한 역경에 대한 주류의 '인정'은 아닐 것이다. 자본으로 점철돼가는 한국 문화예술계의 한계를 보여주었음에 대한 감사의 인사, 곧 그에 대한 '존중'(Respect)은 언제쯤이나 가능할지.

글•김동원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디어 정치경제학과 문화연구를 공부했다. '한국방송산업의 유연화와 비정규직의 형성'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과학적 커뮤니케이션과 정치적 주체의 형성', '한국 방송산업의 계급구성과 디지털 테크놀로지'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