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채희의 시네마 크리티크] 세계에 대한 사카모토의 새로운 인식론, <오키쿠와 세계 せかいのおきく>

2024-12-23     김채희(영화평론가)

 

1. 엄행수, 예덕선생 그리고 시모소우지닌

  연암 박지원이 스무 살 무렵에 썼다는 『예덕선생전 穢德先生傳』은 선귤자(蟬橘子)와 자목(子牧) 두 사람의 대화로 구성된 한문 소설이다. 자목은 스승인 선귤자가 똥지게나 지는 엄행수(嚴行首)라는 인물을 "선생"이라고 칭하며 높게 평가하는 것이 못마땅해 그의 문하를 떠나려 한다. ‘穢(예)’라는 글자는 ‘더럽다’ 혹은 ‘거칠다’라는 형용사로 주로 쓰이지만 똥을 에둘러 지칭하기도 한다. 그래서 ‘예덕선생’이란 호칭은 똥 푸는 사람을 극존칭으로 예우한 것이니 신분질서가 엄격했던 조선시대의 선비, 자목 입장에서는 스승의 언행이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선귤자는 발길을 돌리는 자목을 잠시 붙들어놓고 벗을 사귐에 있어서 경계해야 할 것들을 설교한다. 그런 이후에 엄행수의 존경받을만한 점을 친절하게 알려주면서 이야기 말미에 이렇게 덧붙인다.

 

“엄행수를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거의 드물 것일세.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엄행수를 선생으로 모시려고 하고 있단 말일세. 어떻게 벗으로 사귀겠다고 할 것인가. 그래서 나는 엄행수를 감히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고 예덕선생(穢德先生)이라는 호를 지어 바친 것이네.”

 

  행수(行首)는 막노동이나 하찮은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이므로 사실 엄행수는 이름이 아닌 셈이다. 박지원이 선귤자의 입을 빌려 변변한 이름도 갖지 못할 정도로 최하층 직업에 종사한 엄행수를 칭송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일에 충실하면서 본분을 결코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박지원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필요한 일을 하는 이들을 경멸하는 세간의 시선을 선귤자와 자목을 등장시켜 경계하고자 했다. 『예덕선생전』에는 “왕십리의 ‘배추’, 살곶이 다리의 ‘무’, 석교에서 자라는 ‘가지’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는 모두 엄행수의 똥이 필요하다”라는 대목이 등장한다. 똥은 조선뿐만 아니라 농사에 기반을 둔 전근대 국가에서는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는 거름과 동일어였다. 이웃 일본에서는 똥을 푸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거름으로 만들어 파는 직업이 존재했다. 그들은 똥의 품질을 4단계로 구분해서 값을 매긴 완벽한 비즈니스 사이클을 만들었다. 하지만 시모소우지닌(下掃除人)이라고 불리는 전문 분변업자들은 조선의 엄행수처럼 천대받고 조롱당했다.

 

사카모토 준지(阪本 順治)는 1989년 데뷔한 이래로 오시마 나기사(大島渚)의 영향을 받아 사회·정치적인 테마 위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런 그가 에도(江戸) 시대의 ‘예덕 선생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자신의 1998년작 <멍텅구리-상처 입은 천사>로 업계에 발을 들여놓은 미술감독 하라다 미츠오(原田 満生) 때문이었다. 하라다는 작품 제작이 중단되었던 코로나 기간 중에 우연히 한 학자와 대화를 나눈 이후,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00년 후의 자손들에게 깨끗한 환경을 물려주고 그 안에서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YOIHI PROJECT’를 기획했다. 이 프로젝트에는 일본 영화계 인사들과 자연과학 연구진들이 자발적으로 동참했는데 사카모토 역시 오랜 기간 손발을 맞췄던 하라다의 취지에 공감하여 참여하게 되었다. <오키쿠의 세계>는 이 프로젝트가 기획한 첫 번째 작품이다.

 

 

2. 왜 똥 이야기인가

  18세기 초 일본 인구는 대략 3천만 명 정도였고 막부 시대 수도 노릇을 했던 에도에는 100만 명 이상이 살고 있었다. 근대 이전의 도시에서 발생한 가장 큰 문제는 도둑질, 살인, 방화와 같은 범죄가 아니라 분변(糞便) 처리였다. 똥은 사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왕조를 괴롭혔다. 제대로 된 공중화장실이 없던 당시에는 똥을 길거리에 투척하기 일쑤였고 비가 오면 거리는 그야말로 똥 천지가 되었다. 목욕 문화가 발달한 일본은 다른 나라보다 상황이 나았는데, 이는 전적으로 시비법(施肥法)과 시모소우지닌이라고 불리던 똥지게꾼들 덕택이었다. 시비법은 주로 퇴비를 이용했지만 인분을 일정 기간 삭혀 식물의 거름으로 이용하는 방식이 더 각광받았다. 향촌에서는 농부가 집안의 분변을 따로 모아 나중에 거름으로 이용한데 반해 에도와 같은 대도시는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의 비율이 낮아 분변을 처리하는데 무척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시모소오지닌은 어떤 의미에서는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각 가정의 똥을 처리해주고 무게에 따라 값을 치렀다. 이 전문적 분변 처리반은 주로 에도 동쪽에 발달했던 수로를 이용해 작은 배로 분변을 옮겼고 인적이 드문 곳에다 일정 기간 보관하여 발효되기를 기다렸다. 비료로 쓸 만한 상태가 되면 시모소우지닌은 숙성된 분변을 농민들에게 거름으로 팔았다.

 

<오키쿠의 세계>에서 두 바보로 등장하는 야스케와 츄지는 에도에서 활동하던 시모소우지닌이다. 우리는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잊지 말아야 한다. 1850년대 후반으로 설정된 당시는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기 10년 전이다. 이 때, 일본은 여전히 신분제 사회였고 이는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쳤으며 심지어는 똥의 등급까지 결정했다. 에도에는 지방의 번주가 자신과 식솔들의 거처로 마련한 다이묘 저택(大名屋敷)들이 꽤 여러 채 존재했다. 최상층 귀족이었던 번주와 가신들은 좋은 식재료로 만든 식사를 했기 때문에 다이묘 저택에서 입수한 똥은 1등급으로 대접받았다. 여기에 더해 큰 세력을 가진 사무라이의 저택인 하타모토(旗本屋敷), 대규모 상점을 의미했던 오오다나(大店)에서 퍼온 똥 역시 최고 품질로 인정받았다. 일반 무사의 저택과 조닌(町人)들이 주로 거주했던 마치야(町屋)에서 분출된 똥은 2등급이었으며 3등급은 서민들의 똥이었다. 소변의 비율이 높은 분변은 '원산지'가 아무리 지체 높은 집안일지라도 하급 취급을 받았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분변의 양이 예상치를 밑돌 때, <오키쿠의 세계>에서 야스케가 그랬듯이, 당시의 분변업자들은 때때로 물을 섞어 무게를 부풀리기도 했다. 하지만 구매자 입장에서는 농도가 옅은 분변을 받게 되면 소변이 다량 섞였다는 의심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분변 값은 말 그대로 똥값이 되는 것이다. 이를 염려한 츄지는 그런 이유로 야스케의 행동을 저지한다. 3등급 똥보다 못한 불가촉 똥도 있었다. 바로 감옥에서 배출된 똥이었다. 범죄자들을 가두어놓은 감옥에서 주는 음식은 그 자체로 형편없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생산된 똥 역시 상품 취급을 받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범죄자의 똥은 개도 쳐다보지 않는다는 인식이 강해 도덕적인 혐오까지 똥에 덧씌워졌다. 신분제 사회에서 똥의 운명은 주인에 따라 결정되었기에 시모소우지닌은 대저택을 방문할 때면, 언제나 굽실거려야 했다. <오키쿠와 세계>에서 하타모토에 거주하는 사무라이들이 자신들의 똥은 서민들의 그것과 질적으로 다르다면서 돈을 더 달라고 윽박지르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고증이 잘된 예시라고 할 수 있다.

 

 

3. 순환경제와 인간 그리고 사랑

  순환경제(Circular Economy)란 '생산-소비-폐기'라는 구조로 이뤄진 기존의 선형적인 물질 흐름과는 달리, 사용된 물질이 경제 생태계 내에서 유용한 자원으로 재사용되는 시스템을 일컫는다. 이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도적인 설계라고 할 수 있다. 물질이 순환될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하게 되면, 자원 활용이 극대화될 수 있고 이에 따라 물질을 대하는 인간의 행동 변화까지 유도할 수 있다. 사카모토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에도 시대는 자원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사용해야 했고 그것들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는 문화가 자리 잡았습니다. 인간도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 자연의 비료가 됩니다.” 그의 말대로 에도에서 똥은 순환 경제의 중심축이었다. 사람들은 음식을 소비하고 이를 똥으로 배출한다. 이 똥을 시모소우지닌이 수거해가면서 적절한 값을 생산자에게 지불하고 그들은 이것을 발효시켜 농부에게 되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농부는 분변을 먹거리 작물의 거름으로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고 이내 풍성한 결실을 거둬 시장에 내다 판다. 사람들은 농부가 수확한 작물을 식탁위에 올린다. 이렇게 인간들 사이를 순환하는 물질은 순환경제의 구조 속에서 똥이 되었다가, 돈이 되었다가, 거름이 되었다가, 다시 먹거리가 된다. 이처럼 아름다운 방식의 재활용, 거창하게 말해 순환경제 시스템을 나는 <오키쿠와 세계>를 보기 전까지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순환되는 것은 똥만이 아니다. 에도인들은 거의 모든 물질을 순환적 관점에서 바라보며 심지어 인간마저 그 안에 포함시킨다. “인간은 결코 자신이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의 몸은 자연으로 돌아가 거름이 된다.” 극 중 장의사가 한 말이다. 돌이켜보면 물질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순환한다. 똥지게꾼을 차별하지 않았던 겐베에의 고매한 정신은 딸, 오키쿠에게 유전되어 그녀가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된다. 겐베에는 츄지에게 ‘세계’라는 말을 아느냐고 물어본다. 츄지가 모른다고 답하자, 그는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츄지에게 선문답 같은 말을 남기고 자리를 뜬다.

 

“이 하늘의 끝이 어디인지 아나? 끝 같은 건 없어. 그게 세계지. 요새 나라가 어수선한 건 이제 와서 그걸 알아서야. 그야말로 우물 안 개구리지. 이보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이 세계에서 당신이 제일 좋다고 말해주게.”

 

츄지는 세계의 추상적인 의미도 실체적인 개념도 이해하지 못한다. 순환론적인 관점에서 ‘끝이 없다’라는 말은 ‘그것이 곧 시작’이라는 말과 동의어란 사실을 그 때의 츄지는 깨닫지 못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세계’는 계속해서 츄지를 괴롭힌다. 숫기 없는 그는 글도 배우고 오키쿠도 볼 겸 서당으로 활용되는 산사로 향한다. 그곳에서는 츄지 뿐만 아니라 아이들과 동네 사람들이 모여 글을 배우고 있다. 오키쿠가 꺼내든 오늘의 주제는 ‘세계’다. 츄지는 그녀가 종이에 쓴 멋진 글씨를 보면서 조심스레 발음해본다. 그러다가 하늘을 쳐다보더니 “청춘이구나!”라고 말한다. 스님은 오키쿠가 쓴 글자를 보면서 “세계라는 말의 의미는 그 방향으로 나갔다가 다시 그 방향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설명한다. 아이들과 주민들 그리고 글자를 썼던 오키쿠도 그 말의 진의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린다. 에필로그에서 또다시 ‘세계’가 등장한다. 똥을 푸다가 지쳐서 잠든 츄지와 야스케가 보이고 그 다음 장면은 오키쿠가 밖으로 나와 허공에다 귀를 대고 어떤 소리를 듣는 자세를 취한다. 엔딩 크레딧을 배경으로 저 멀리 오키쿠와 바보 두 사람이 숲 속에서 걸어온다. 야스케가 묻는다. “오키쿠씨 어디로 가는 겁니까?” 그녀는 하늘을 가리키며 꽃으로 원을 그린다. ‘세계’라는 자막이 화면에 새겨진다. 그 모습을 보면서 츄지가 “청춘이구나!”라고 또다시 외친다. 야사케는 “그 말을 도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라고 핀잔주듯이 츄지에게 말하면서도 오키쿠의 몸짓을 따라 허공위에 원을 그린다. 세 사람은 그들이 왔던 길처럼 보이는 곳으로 점이 되어 사라진다.

 

계절도 똥도 사람의 마음도 순환한다. 아비를 잃은 오키쿠를 가련하게 여긴 공동 주택 주민들은 번갈아가며 그녀를 방문한다. 그들의 손에는 술과 음식이 들려있다. 오키쿠와 아버지는 높은 신분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을 격이 없이 대했다. 부녀가 주민들에게 보낸 따듯한 마음은 이렇게 유형의 물질로 순환되어 돌아온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고 시나브로 세계의 의미마저 깨달아 가는 똥지게꾼 츄지는 여러 차례 “청춘이구나!”라는 말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는 인생의 봄, 즉 청춘 한가운데 있는 츄지 자신이 발화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사랑하는 두 남녀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눈 내리는 거리에서 하염없이 상대방을 껴안았다. 그들은 서로에게 글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지금까지 알지 못하던 ‘세계’의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알아간다. 그러므로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삶을 개척해가는 젊은이들을 흡족하게 바라보며 츄지가 아닌 나이든 누군가가 부럽다는 듯이 “청춘이구나!”를 읊조려야 한다. 그러니 이 대사의 주인은 츄지일리 없다. 우리는 이미 진짜 발화자를 알고 있다. 오키쿠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매번 좋은 뜻을 가진 글자를 골라 정성을 다해 종이 위에 옮긴다. 그녀가 오늘 책에서 본 글자는 일본어로 ‘츄기’라고 발음되는 ‘忠義’이다. 오키쿠는 忠義를 속으로 웅얼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츄지(ちゅうじ)라고 쓰고 만다. 홀로 있는 방안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오키쿠는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어찌할 바를 모른다. 부끄러움에 겨워 그녀는 방바닥을 뒹굴던 중 책상을 발로 살짝 건드린다. 그러자 ‘知月明有居士’라고 새겨진 위폐가 뒤로 넘어간다. 위폐의 주인은 마츠무라 겐베에, 오키쿠의 아버지다. 이름 대신 위폐에 새겨진 문구는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러니 겐베에는 딸과 츄지의 마음 속 변화를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셈이다. 어쩌면 츄지에게 “세계의 의미를 물으면서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 이 세계에서 당신이 제일 좋다”라는 말로 고백하라고 충고할 때부터 겐베에는 두 사람에게 일어날 미래의 변화를 예감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라는 말을 아무도 모를 때에도 겐베에는 그 뜻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겐베에는 죽어 흙이 되어 ‘세계’로 돌아갔다. 그는 돌아갔지만 다시 돌아왔다. 왜냐하면 세계는 “끝 같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죽음과 삶이 서로의 꼬리를 무는 이 세계에서 오고 가는 것은 같은 개념에 속하는 말인 것이다. 세계가 순환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가 어찌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겠는가? 그러므로 “청춘이구나!”의 발화자는 ‘知月明有居士’, 마츠무라 겐베에다. 극 중에서 오키쿠가 갑자기 문밖으로 나와 허공에 대고 귀를 기울이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분명 어떤 소리가 그녀에게 들렸다. 하지만 소리의 발화자는 화면 안에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들었던 소리는 무엇이었을까? 겐베에는 눈이 되었다가, 바람이 되었다가, 비가 되었다가 세계가 되었다. 이렇게 세계와 하나가 된 겐베에는 장성한 딸이 처음으로 이성에 눈뜬 장면을 바라보면서 흐뭇하게 읊조린다. “청춘이구나!”

 

4. 사카모토 준지, 세계를 영화로 완성하다.

  사카모토는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스탠다드 비율이라는 1.33:1 화면비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회적 이슈를 주로 다루던 그에게 시네마스코프와 같은 가로가 넓은 화면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관성적으로든 아니면 유행에 편승하려 했든지 간에 줄곧 스펙터클 위주의 화면으로 영화를 제작해왔다. 짐작해보면, 그가 넓은 화면비를 선호한 이유는 좁은 화면 속에 진실을 가두기 싫어서였을 수 있다. 그런데 세계의 진정한 의미를 파헤치겠다고 야심차게 뛰어든 <오키쿠와 세계>에서 사카모토는 기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왜 이 좁은 비율의 화면으로 '세계'를 재현했을까? 답은 역시 순환경제에 있다. 이 시스템에서 물질을 페기하거나 낭비하는 것은 죄악이다. 더럽다고 버린 똥은 그 만큼 수확량의 감소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그 동안 스펙터클에 복무한 여분의 화면들은 버려진 똥이 된 것이다. 그는 이 똥을 뭉쳐 질 좋은 거름을 만들었고 이 거름으로 우리에게 세계를 보여주었다. 과거의 방식에 의존해 진짜 ‘세계’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비스타비전이나 시네마스코프로는 어림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스탠다드 화면 3개를 이어붙인 아벨 강스의 폴리비전 같은 장치로도 세계의 크기를 가늠하기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어리석게 ‘더 많이 더 길게’를 외쳤더라면, 그는 지구 끝까지라도 화면을 늘려야 하지 않았을까? ‘끝은 시작이고 시작은 곧 끝’이라는 명제는 순환론을 지탱하는 단 하나의 법칙이다. 이 법칙을 풀어쓰면 ‘저 멀리 갔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다. 사카모토는 상상 속에서 세계를 한 없이 넓게 바라보려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물리적 한계를 깨달아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이 영화의 가장 앙증맞은 장면은 오키쿠의 방바닥 구르는 모습이지만,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눈 오는 거리에서 벌어진 사랑 고백 씬이다. 먼저 용기를 낸 이는 사무라이의 딸답게 오키쿠였다. 그녀는 글도 모르고 똥냄새나 풍기는 츄지를 위해 주먹밥을 정성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무심한 수레꾼은 마음이 들떠있던 그녀를 보지 못하고 그만 부딪히고 만다. 그녀와 함께 주먹밥이 길가에 나동그라진다. 하지만 오키쿠는 빈껍데기만 남은 포장지를 들고서 연인을 찾아 나선다. 말을 할 수 없는 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온몸으로 재현한다. 츄지도 몸짓의 의미를 알아듣고서 오키쿠의 볼에 묻은 밥알을 떼어주는 것으로 응대한다. 그녀는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에 스스로를 질책한다. 그러다가 빈 주먹밥 포장지를 그에게 내민다. “어쨌든 오키쿠씨는 무사의 딸이에요. 신분 차이 때문에 불가능해요” 무정한 것인지 용기가 없는 것인지 츄지는 오키쿠를 거절한다. 머리를 가로 젓는 오키쿠를 보면서 츄지는 “나 같은 사람도 괜찮아요?”라고 묻는다. 이내 그녀는 머리를 힘차게 끄덕인다. 츄지는 화답하듯 “말로는 못 하겠네요”라고 외치며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자신의 가슴팍을 두드리고 곧이어 땅을 향해 주먹을 내리치다가 허공에 원을 그린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두 팔을 벌린다. 그녀가 못 알아듣자 츄지는 이 동작을 연이어 반복한다. 사카모토는 관객을 배려해 화면 위로 “이 세계에서 당신이 제일 좋아요”라는 자막을 띄워준다. 자막을 볼 수 없는 오키쿠는 여전히 그의 몸짓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때 눈이 내려 천천히 주변을 하얗게 물들인다. 거리에 눈이 쌓여 가지만 츄지는 여전히 그가 만든 사랑의 언어를 반복하는 중이다. 아마도 수십 번 넘게 그렇게 하고 있지 않았을까? 드디어 오키쿠가 몸짓의 의미를 깨닫는다. 그녀도 곧장 무릎을 꿇는다. 이제 두 사람을 가로막던 신분의 벽은 사라졌고 그들은 평등해졌다. 오키쿠와 츄지는 그 상태에서 서로를 감싸 안는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아무런 음악도 들리지 않는다. 시대극이니만큼 최소한 샤미센 소리는 들려야 하지 않을까? 사카모토는 감동적인 이 씬 전에 “눈이 오겠네요. 눈이 오면 세상이 고요해지죠. 난 눈이 좋아요”라고 했던 츄지의 대사를 잊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츄지의 고백을 인위적인 음악 따위로 방해할 수 없다고 여겨 눈 오는 소리, 멀리서 어린 아이 우는 소리, 오키쿠의 옷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들로 뭉쳐진 ‘세계의 소리’를 음악 대신 삽입한다. 바로 이 순간 ‘모든 물질을 오롯하게 활용하라’는 순환경제의 정언명령이 그가 창조한 영화라는 세계에 온전히 하달된다. 사카모토는 순환경제를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다가 하라다 마츠오로 인해 생태적 관점으로 이동했다. ‘YOIHI PROJECT’의 일환으로 제작된 <오키쿠의 세계>는 그의 사유를 세계에 대한 인식론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켰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카모토는 사회 문제에 집중하던 액티비스트에서 환경운동가로 이제는 철학자로 나아가는 중이다.

 

 

 

글·김채희
영화평론가, 부산대 영화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