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 평론하며 살아가기

르 디플로 에세이

2012-10-14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 아니 대중음악의견가로 살아온 지 올해로 8년째. 무슨 일이든 10년은 해야 전문가 행세를 할 수 있다고들 하는데, 전문가라고 말하기에 부족한 것은 단지 2년의 시간만은 아니다. 아직도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고, 대중음악계의 갖가지 현상을 챙기기에 하루는 너무 짧다. 한 번 이상 반복해서 새로운 음악을 듣는 일도 쉽지 않고, 뮤지션들의 공연을 가능한 챙겨 보고, 여기저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놓치지 않기에 힘이 부칠 때가 많다. 날마다 나오는 음반은 왜 이리 많고, 공연은 또 왜 이리 많은지, 해도 해도 날마다 새로운 숙제가 쏟아지는 느낌이다.

다른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좋겠다고, 날마다 음악 듣고 공연 보고 좋아하는 뮤지션들 만나니까 좋겠다고 하지만 그게 일이 된다면 문제가 달라진다. 어찌되었건 이름을 걸고 직업으로 하는 일이라면 잘해야 하고, 이 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지금 하는 일로 먹고살기 힘들다면 당연히 생계 유지를 위한 일을 별도로 병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계를 위한 일을 하다 보면 하루에 음반 한 장 듣기도 어려울 때가 많다. 물론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전혀 다른 쪽 일이 아니라 대체로 음악이나 예술 관련 일이기는 하지만, 온전히 음악평론만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음악평론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다른 일을 해야 했다.

게다가 대중음악 평론의 어려움은 단지 생계 때문만은 아니다. 평론하는 자체가 어렵다. 평론한다는 것은 다들 알고 있듯 음악의 완성도를 평가하는 일이고, 음악을 해석하는 일이다. 음악을 현실, 대중, 산업과 연계한 맥락으로 분석하는 일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음악이 좋다, 좋지 않다를 단순 명쾌하게 가르는 일만이 평론가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평론가의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음악을 평가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이해하고 감안해야 할 것은 한둘이 아니다. 수많은 대중음악의 장르 역사와 작품, 뮤지션들에 대해 알아야 하고, 분명한 음악적 기준이 있어야 하며, 예술 일반의 역사와 철학 등 인문학적 소양도 함께 갖춰야 한다.

하물며 단순히 음악이 좋은지 아닌지만을 직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서라도 늘 과거와 현재의 음악을 들으며 대중음악의 흐름을 숙지해야 한다. 그래서 대중음악평론가는 원고 청탁이 있건 없건 절대로 게으를 수 없다. 잠시라도 새로운 음악 듣기를 게을리하면 새로운 음악 언어를 낯설어하고, 과거의 음악에만 익숙해하는 기성세대와 다를 바 없어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귀를 쫑긋 세우고 자신의 감각을 벼리고 있어야 한다.

음악을 직관적으로 좋다, 좋지 않다고 말하는 경우에도 단순히 선언만으로는 평론이 될 수 없다. 그 근거를 최대한 체계적으로 구성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모든 예술 작품이 마찬가지겠지만 좋은 음악과 안 좋은 음악의 기준은 객관화·계량화될 수 없다. 과학처럼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평론가가 어떤 음악을 좋다고 하거나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 판단이 절대적일 수 없고, 주관적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기도 어렵다. 정답이 없는 답을 내놓고 설득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평론가의 운명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신의 주관을 솔직하게 드러내는지이고, 평론가가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 논리 체계로 자신의 감성과 사유, 판단을 설득할 수 있는지의 문제일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말과 글을 구성하고 서술하는 능력과, 음악적 식견, 예술에 대한 가치관과 철학 등이 함께 겸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역시 한 번에 완성되는 일이 아니고, 어느 순간 완성될 수도 없다. 꾸준히 공부하고 쓰고 노력해야 한다. 세상 어느 직업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평생을 한결같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제는 음악평론이 음악 자체에 대한 텍스트 비평만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물론 텍스트 비평에만 집중하는 평론가들도 있지만, 음악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음악 이외에 음악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회적 현실, 기술적 발전, 산업적 현황을 함께 인식하고 파악해야만 한다. 가령 싸이의 <강남스타일>의 성공은 음악적 완성도만으로는 해명할 수 없고, 유튜브(무료 동영상 공유 사이트 www.youtube.com)라는 매체와 국적을 떠나 공감하게 한 음악 안팎의 다양한 코드를 함께 분석해야만 총체적 분석이 가능하고, 음악에 대한 과학적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대중음악 평론을 잘하기 위해서는 알아야 할 것, 감안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어찌되었건 이처럼 하기도 어렵고, 버티기도 어려운 대중음악 평론을 계속하고 있다. 감히 평론이라고 말하기에는 두렵고 '의견을 제시한다'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하지만,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은 아직까지 호출해주는 사람들이 있는 덕분이고, 이 일이 무척 즐겁기 때문이다. 날마다 쏟아지는 음악이 지겹고 부담스러울 때에도 결국 좋은 음악을 들으며 느끼는 행복감은 나 자신을 충만하게 한다.

혼자서 음악을 듣건 함께 음악을 듣건, 음악 듣는 행위는 지극히 사적인 행위이다. 자신의 귀로 듣고 가슴으로 느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예민한 청소년기에 충격처럼 큰 감동을 받은 음악을 만나 음악에 빠져들게 된 이후, 좋은 음악은 늘 곁에서 위로와 눈물이 되고 평화가 되고 격정이 되었다. '들국화', '할로우 잰'(Hollow Jan)의 음악을 들으며 나는 얼마나 물컹거리고 얼마나 뜨거웠던지. 세상의 공기처럼 많은, 좋은 음악 덕분에 듣는 재미를 느끼며 음악이 보여주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만날 수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먼지만큼이라도 넓어지고 깊어질 수 있었다. 음악을 듣는 것은 그냥 나 자신 밖에 있는 음악이라는 객체를 소비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을 끊임없이 드러내며 확인하는 일이었다. 내가 경험한 것과 경험하지 못한 것, 그리고 내가 알던 나와 내가 알지 못했던 내가, 수많은 감정과 사건과 메시지와 관점들이 모두 음악을 통해 드러났다. 물론 나를 드러내게 하는 것, 나를 나 밖의 것과 이어주는 것이 오직 음악만은 아니지만 음악은 가장 쉽고도 가깝게 곁에 머무르며 나를 거울처럼 비추고 보살펴주었다.

음악에 대한 글을 쓰는 일 역시 즐거움이 있다. 글 쓰는 일은 늘 어려운 일이지만,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있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하게 표현할 때 느끼는 즐거움은 내가 하는 일에 대한 만족감을 주었고, 더 열심히 글을 쓰게 만들었다. 물론 만족스러운 글을 쓰는 경우는 많지 않았지만, 내가 쓰는 글의 첫 번째 독자로서 하고 싶은 이야기와 누구도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할 때의 만족감은 자신에 대한 충분한 피드백이 되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씩이라도 부족한 글에 대한 반응이 오고, 글이 도움이 되었다는 호평을 얻을 때 느낀 보람도 적지 않은 힘이 되었다.

내가 음악 관련 글을 쓰는 것은 단순히 음악평론을 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내가 쓰는 음악 평론 글은 당연히 음악에 대한 글이지만, 이를 통해 나는 음악과 세계와 사회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나누고 싶다. 아직 내 글을 읽는 사람보다는 읽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고 앞으로도 그렇겠지만, 내 글을 통해 더 많은 음악적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고, 음악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리고 음악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오늘 이곳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고,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다면 이 역시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음악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음악이 태어나고 향유되는 세계에 대해 말하고 싶고, 개입하고 싶고 더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것이 내 꿈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쓰고 대중음악의견가로 살아간다. 글은 내가 말을 거는 방식이고, 내가 실천하는 방식이다. 대중음악 평론은 나의 운동이다.

글•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대중음악웹진 <가슴> 편집인. 대중음악웹진 <보다> 기획위원 지냄. 'Red Siren', '권해효와 몽당연필' 콘서트 등의 공연 기획 및 연출. 네이버, 다음, <보다> <백비트> <재즈피플> <고래가 그랬어> 등에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