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의 문화톡톡] K-창작동요와 키즈 트로트 경연대회 1

2024-12-27     김정희(문화평론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서로 마주 보고 손뼉 치기를 하며 부르던 노래 ‘푸른 하늘 은하수’의 제목은 <반달>이다. 윤극영(1903~1988)이 작사 · 작곡한 동요인데 제목인 <반달>보다는 그냥 ‘푸른 하늘 은하수’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반달>은 1924년 11월 개벽사에서 출간한 어린이 잡지 <어린이> 제2권 11호에 처음 발표되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동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견이 있지만, 대체로 <반달>을 효시로 보고 있어서 <반달>이 발표된 해를 기점으로 100년이 되는 올해를 ‘창작동요 100년의 해’로 기념하여 다양한 행사들이 있었다.

어린이날과 어린이 문화운동

<반달>의 주인공 윤극영은 교동 공립보통학교(현 교동초등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법학전문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바이올린과 성악을 공부했다. 이때 천도교 3대 교주이며 삼일운동 민족 대표 손병희의 사위이면서 일본에 유학 중이던 소파 방정환을 만나게 된다. 당시 천도교에서는 천도교 소년회(1921년 5월 1일)를 결성하고 일 년 뒤 어린이의 날(1922년 5월 1일)을 제정하고 어린이날 행사를 벌이는 등 대대적인 어린이 문화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이 중심에 방정환이 있었다. 이러한 방정환과의 만남으로 윤극영이 어린이 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후 우리 창작동요 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었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다음은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날로 알려진 1922년 5월 1일 상황을 보도한 기사인데

어린 사람에게 ‘헛말로 속이지 말고’ ‘사람답게만’ 하여 달라는 문구를 보면 당시 어린 사람, 어린이들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가로(街路)로 취지선전(趣旨宣傳)

자동차대와 창가대로 나뉘어 ‘어린이의 날’의 대선전」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소년회의 창립 일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으며,

소년회와 형제 관계가 있는 천도교 청년 회원 중의 유지와 소년 회원이 연합하여 조직된 자동차 선전대는 ‘어린이의 날’ ‘소년 보호’등의 문구를 붙이고 종로 큰길을 위시하여 시내 각처를 달리며 선전서를 뿌렸다. 작일에 배포한 선전서는 크고 적은 것을 합하여 네 가지인데 그중에 ‘어린이의 날’이라고 제목한 것을 원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이지 말아주십시오.

2. 어린 사람을 늘 가까이하시고 자주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3. 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4. 어린 사람에게 수면과 운동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십시오.

5. 이발이나 목욕 같은 것을 때 맞춰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6. 나쁜 구경을 시키지 마시고 동물원에 자주 보내 주십시오.

7. 장가와 시집 보낼 생각 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동아일보 1922년 5월 2일

방정환은 ‘사람답게만’ 하여 달라는‘어린 사람’에게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어 주었고, 어린이를 위한 잡지 <어린이>를 선물하였다.

<어린이> 창간사에서 방정환은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도 같은 어린 입술로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노래, 그것은 고대로 자연의 소리이며, 고대로 하늘의 소리입니다.”라고 하였다. <어린이> 잡지는 이렇게 어린이들의 노래를 ‘하늘의 소리’로 인식하고 어린이들을 위한 시와 노래를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어린이> 잡지는 ‘동요란’과 ‘독자투고란’에 현상공모를 비롯해 다양한 방법으로 동요, 동시를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간(1934년 7월)될 때까지 어린이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색동회

색동회

방정환은 <어린이> 잡지가 창간된 해인 1923년 일본에서 어린이 문화운동 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였다.

「소년 문제 연구의 색동회 발회식 5월 1일 동경에서」

경성에서 소년 문제를 일으키기 위하여.... 동경 유학생 간에서도 방정환, 고한승 등 유지 구명이 모여 ‘색동회’라는 어린이 문제를 연구하는 모임을 만들고 5월 1일 어린이날을 기약하여 성대한 발대식을 거행 하리라더라

동아일보 1923년 4월 30일

이 색동회에는 우리가 그의 노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이름은 익숙하지 않고, 인터넷 검색을 해도 위키백과, 나무위키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인물이 하나 더 있다. 「짝짜꿍」, 「졸업식 노래」를 작곡한 정순철(1901~195?)이다. 정순철의 어머니 최윤은 천도교 2세 교조인 해월 최시형 (1827~1898)의 딸이다. 손병희의 사위였던 방정환(1899~1931)과 최시형의 외손자였던 정순철은 천도교 소년회 결성부터 어린이날 제정, 색동회 조직 등 어린이 문화운동을 함께한 벗이자 동지였다. 방정환이 안타깝게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후에도 어린이 문화운동을 넘어서 우리 동요 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다양한 업적을 남긴 정순철은 6 ·25 전쟁 중 납북되어 생사를 알 길이 없다. 북으로 갔다는 이유로 그의 이름은 잊혀졌으나 옥천군과 충북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재조명되고 있고, 최근 평전이 출간되었다.

어린이날이 제정되고, <어린이> 잡지의 창간, 어린이 문제 연구 모임인 ‘색동회’가 만들어지는 시점은 3·1 운동 후 제2차 조선교육령(1922년)이 발표되는 시점과 맞물려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은 1894년 새로운 교육을 담당하는 학무아문(1895년 학부로 개칭)이 설치되고, 1895년 ‘소학교령’이 제정· 반포되면서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소학교들이 세워지면서부터이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고, 일본인이 학부 참정관에 임명되어 우리나라 교육 정책에 간섭하게 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일제는 1906년 일본인과 차별된 학제를 적용하여 ‘보통학교령’ 및 ‘고등학교령’을 선포하였는데, 기존의 소학교 5년제와 중학교 7년제를 각각 보통학교와 고등학교로 바꾸고, 기간은 각각 4년으로 축소하는 내용이었다. 1911년 1차 조선교육령을 통해 고등학교마저 고등보통학교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일제는 일제 강점기 동안 모두 4차례의 ‘조선교육령’을 발표하는데 일제의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의 아동들을 일본인과 차별된 하급 신민으로 육성하려는 것이었다.

일제는 3.1운동 이후 1922년 2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수업연한을 일본과 같이 보통학교 6년제, 고등보통학교 5년제로 연장하는 유화정책을 실시하는데 이것은 결국 교육을 활성화하여 황국신민화 교육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미 일제가 조선어가 아닌 일본어를 국어로 하는 ‘보통학교 규칙’(1911년)을 선포한 상태였으므로 당시 어린이들은 조선어 독본을 제외한 모든 교과서는 일본어로 표기된 것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의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 일본 천황의 생일 노래, 일본의 개천절 노래들을 배워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진 <어린이> 잡지의 창간과 동요, 동시의 발굴 및 보급 등 어린이 문화운동은 ‘어린이날의 제정, 어린이 인권운동’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 우리 말의 보전과 보급이라는 차원에서 강조될 필요가 있다. 근대화와 맞물려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가 독립된 뒤 지배국이었던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나라가 많지 않다는 것을 보면 자신들의 언어를 지켜 나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수 있다. 우리는 일제 강점기를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말을 쓸 수 있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어린이 문화운동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글·김정희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