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의 문화톡톡] K-창작동요와 키즈 트로트 경연대회 2
따리아회와 윤극영
색동회 회원인 윤극영은 관동대지진으로 1923년 9월 일본에서 귀국하였고, 1924년에 소년소녀따리아회를 만든다. 따리아회는 다음 보도된 것처럼 우리나라 최초의 어린이 합창단으로 알려져 있다.
“1924년에는 윤극영 씨가 조직한 우리나라 최초의 합창단 따리아회를 통해 창작동요 <반달>과 <귀뚜라미> 등의 많은 동요가 전국에 퍼지게 된 것이다.”
1975년 1월 17일 매일경제
하지만 1925년 당시 신문 기사들을 종합해서 살펴볼 때 따리아회가 단순히 합창단만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따리아회는 어린이 지도단체(1925년 5월 13일 동아일보)이고, 안데르센 사후 50주년 기념 동화회를 열었으며(1925년 8월 5일 조선일보), 조선소년운동협회와 관련이 있으며(1925년 9월 14일 동아일보), 작곡과 반주가 전부 조선 사람의 손으로 된 창가극 ‘파랑새를 찾아서’를 최초로 공연했다. (1925년 9월 14일 동아일보),
「따리아회 조직」
어린이들의 지도단체
기운을 못 펴고 자라나는 조선의 어린이들을 위하여 그들의 예술적 천분(藝術的 天分)을 배양하고 또 이를 발휘시켜 주자는 취지 아래에서 이에 뜻을 둔 유지의 지도로 지나간 10일에 따리아회라는 소년소녀단체가 조직되었는데 이 단체는 순전히 어린이의 예술적 방면의 수양을 목적하고 아동극(兒童劇), 자유화(自由畵), 동요(童謠) 등 과목을 연구한다는 바 단체 조직되기 전부터 연습한 바가 있었음으로 멀지 아니하여 아동극의 제 일 회 발표 공연이 있을 것이라는데 따리아회의 각본, 작곡, 의상, 배경 등 각 부문을 맡은 책임 원 아홉 사람의 씨명은 아래와 같다더라
1925년 5월 13일 동아일보
「세계 어린이의 은인 <안> 씨 승천 후 50년 기념 따리아회에서 성대하게 거행」
8월 4일은 덴마크(丁抹)의 동화 대가로 그 이름이 다만 자기 나라에뿐만 아니라 널리 세계에 전파되어 있는 ‘핸쓰 크리쓰티안 안더-쎈’ 씨가 세상을 하직한 지 만 50년이 되는 날임으로 사람의 세상에서 어린이의 인격적 존재를 분명히 하여 놓은 어린이의 은인인 ‘안더-쎈’ 씨를 생각하고 기념하는 의미로 소격동 42번지에 있는 소년소녀예술단체인 따리아회에서는 ‘안더-쎈 승천 후 50년 기념 동화회’를 개최하였다.
1925년 8월 5일 조선일보
안데르센은 1805년 4월 2일 출생하여 1875년 8월 4일 숨을 거두었고, 1925년은 안데르센 사후 50주년이 되는 해이다. 세계 어린이의 은인을 안데르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과 안데르센 사후 50주년이 되는 날을 기념하여 동화회를 진행하였다는 것이 현재 시점에서는 놀랍고 신기하다.
「동요와 창가극 따리아회의 주최로」
소격동에 있는 소녀단체 따리아회에서는 동요와 창가극을 공개할 목적으로 제 일회 공연을 조선소년운동협회의 후원으로 오는 26일 27일 이틀 동안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거행할 예정. 프로그램은 조선 정조가 농후한 여러 가지 동요와 피아노 연탄과 작곡과 반주가 전부 조선 사람의 손으로 된 창가극 ‘파랑새를 찾아서’ 등이라더라
1925년 9월 14일 동아일보
따리아회의 정체는 윤극영이 독창회를 하게 되었을 때(1934년) 그간의 활약을 정리한 내용의 기사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윤극영이 따리아회 어린이들을 직접 가르쳤고, 매월 ‘따리아곡보집’을 발간하여 새로운 동요보급에 힘썼으며, 조선 최초로 ‘파랑새를 찾아서’라는 오 막짜리 동요극을 공연하였고, 따리아회 소속 어린이가 윤극영의 곡을 녹음하여 최초로 조선동요레코드 음반이 나왔으며, 『반달』이라는 조선 최초의 동요작곡집을 출간했다는 것이다. 동요 10곡을 수록한 『반달』동요집은 1926년 발간되었다.
「푸른 하늘의 작자 윤극영씨 처녀독창회」
조선 동요계에 끼친 공적
18세 때에 동경으로 건너가 성악을 전공하면서 그 당시 동경 유학생이던 고 방정환 씨 등과 함께 아동문제 연구단체인 색동회를 창립하였고, 돌아와서는 조선 최초의 동요단체인 따리아회를 조직하여 손수 어린이들을 지도하며 매월 따리아곡보집을 발간하는 등 신 동요보급에 전력을 다하였고 1925년에는 조선서 첫 시험인 여수 박팔양 씨 작 ‘파랑새를 찾아서’라는 오 막짜리 동요 극을 작곡 상연하여 대 갈채를 받았으며 따리아회소녀회원들이 이 씨의 작곡을 취입하여 조선 동요 레코드의 효시를 지었고 ‘꾀꼬리’ 등 회심작 십여 곡을 모아 『반달』이라는 조선 최초의 동요작곡집을 내었다.
1934년 4월 27일 동아일보
라디오 학교와 정순철
1927년 2월 16일 경성방송국이 개국하였다. 1933년 한국어로 방송하는 경성 제2방송이 생기기 전까지는 일본어와 한국어가 나뉘어 방송되었다. 이런 환경에서 동요 연주 및 동요 부르는 법을 가르치는 시간이 생각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그중 몇 개의 기사를 인용해 보면 “경성 여자 상업학교 생도 합창 피아노 반주 정순철 (1931년 7월15일 동아일보), 가정 강좌 ‘동요와 아동에 대하여 실연임’ 정순철 (1931년 9월5일 동아일보), 음악 강좌 정순철 (1932년 6월17일 동아일보), 라디오 학교(조선어) ‘동요의 노래하는 법’ 정순철(1932년 9월7일 동아일보), 라디오 학교(조선어) 동요의 가법(歌法) 실연 정순철 (1932년 9월9일 동아일보), 라디오 학교 어린이의 노래 정순철 (1933년 6월6일 조선일보)”등이다.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 편성 순서는 신문에 실렸는데 ‘라디오 학교’라는 정규 시간이 있었고, 주로 그 시간을 통해 동요 부르기, 동요 부르는 법, 동극 등을 방송한 것으로 나와 있다. 그 중심에 정순철이 있는데, 자료에 따르면 정순철은 1935년까지 총 53회에 걸쳐 직접 출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라디오 프로그램 하나를 소개해 보면 ‘동요제창과 독창 순서’라고 하여 그날 방송될 예정인 곡목들을 일일이 알려주고 있다.
“봄노래 정순철 작곡, 우산 윤극영 작사 정순철 작곡, 성냈다 불냈다 김태철 작곡,
여름비 정순철 작곡, 달팽이 윤희영, 귀뚜라미 김태철” (1933년 8월3일 조선일보)
한국어로 방송하는 경성제2방송이 생기면서 청취률이 증가하였고, 라디오의 보급 대수가 급격하게 늘어났으며, 이와 맞물려 창작동요는 1942년 한국어 방송이 중단되기 전까지 황금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시기 반달의 윤극영, 짝짜꿍의 정순철, 오빠 생각의 박태준, 봉선화의 홍난파는 1920~1930년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4대 동요 작곡가로 꼽힌다.
처음 발표될 때 제목이 <우리 애기 행진곡>(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이었던
<짝짜꿍>과 <졸업식 노래>(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를 작곡한 정순철은
벗이자 동지였던 방정환((1899~1931)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동요를 알리는 일에 더해 다양한 활동들을 하였는데 이제라도 업적이 재조명되어 재평가가 이루어지면 좋겠다.
엄마 한 숨은 잠자고 아빠 주름살 펴져라
일제는 1938년 3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하고, 내선 일체를 강령으로 내세우면서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를 고등여학교로 모든 학교 명칭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다. 사실상의 조선어 수업을 폐지한 뒤, 학교에서 조선어 사용을 금지하였고, 황국신민서사를 강제로 암송하게 하는 등 황민화 정책에 부응하고자 했다.
1943년 4차 교육령이 발표되었고,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 우리 말 교육과 역사교육이 금지되었다. 방송에서도 우리말로 된 동요가 금지되었다.
일제 강점기 우리말로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 노래를 부르는 행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어린이들과 함께 등사기로 인쇄, 각 학교에 보낸 <반달>이 불러진 때가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어요. 일본인들 사이에서까지 <반달>이 불러질 때 나는 일본을 이겼다 라고 생각했죠.” (1986년 5월1일 경향신문) 라는 윤극영의 회고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고 부르는 많은 동요가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배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말도 쓸 수 없는 시기에 만들어지고 불리기 시작했다. 어릴 때 먹었던 음식, 익숙한 냄새, 듣고 배웠던 노래는 성인이 되어서도 잊히지 않는다. 당시 어린이들은 학교에서는 우리말을 사용할 수도, 배울 수도 없었지만, 집에서 듣고 익혔던 우리 동요들을 통해서 우리말과 우리 정서를 기억할 수 있었고, 우리 말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광복이 되었을 때 다음 세대에 우리 말을 자연스럽게 전해줄 수 있었다.
글·김정희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