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징벌적 웃음, 〈하인〉
조셉 로지의 <하인>은 기계와 명령자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우화로, 구성적인 연출과 미학적인 정교성이 돋보이는 영화로 평가받는다. <하인>의 이러한 특성은 관객을 거북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며, 영화의 여러 행동에 많은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하인>을 보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으로 느낀 것은 이런 미학적 완결성이 아닌, 관계성에서 나오는 '징벌적 웃음'이다. 이것은 기계적 관계에 대한 조셉 로지의 풍자이자, 관객을 거북하게 만드는 힘의 근원처럼 느껴진다.
영화의 초반, 배럿과 토니의 관계는 전형적인 지배-피지배의 관계이다. 영화의 초반에 흘려지는 음침한 유머는 바로 이런 기계적 자동주의적인 관계에서 나온다. 배럿은 토니가 시키는 데로 움직이며, 실수 또한 자기 스스로 용납하지 않는다. 이런 기계적 자동주의의 관계는 토니의 여자친구인 수잔을 통해 증폭된다. 수잔은 토니, 즉 하인의 소유자보다 더욱 예민하게 피지배자의 행동에 반응한다. 이렇게 증폭된 기계적 자동주의는 수잔을 중심으로 주인이 불명하나 어디서라도 명령이 떨어지면 반응하는 배럿을 통해 유머를 만든다. 이 지점에서 이 독특한 지배 관계는 60년대 이전의 유럽계층 사회를 풍자하게 된다. 60년대 이전 유럽 사회는 비교적 명확한 계층이 구분된, 고정적인 계급사회였다. 안정적으로 고정된 만큼, 그들의 시계와 사회도 분리되어있었다. 그러나 같은 계층이라는 이유로 다른 세계에 일종의 참견을 하는 경우는 잦았다. 그들은 계급과 개인의 이름으로 스스로 그들의 세계를 분리하였으나, 서로의 세계에 대해 상호 침범 중이었던 것이다. <하인>의 영화 초반의 우스운 상황들은 대부분 이런 모순성을 지닌 관계에서 비롯된다.
영화가 전환점을 맞이하는 지점은 배럿이 베라라는 여자를 토니의 집으로 들이면서부터다. 영화중반부 배럿에 의해 배럿의 여동생이라 소개되는 배럿의 약혼녀 베라는 영화 내내 배럿의 의미심장한 표정과 초반부와는 다른 행동, 미묘하게 다른 표정을 추동함으로서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중요한 틀이 된다. 이렇게 추동된 행동은 영화의 중반부터 배럿은 토니가 집에 없을 때, 즉 지배자가 부재하는 시간동안 토니의 세계의 주인이 된다. 이때부터 배럿과 토니의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를 흔드는 중심에는 베라가 있다. 베라는 토니의 성적 욕망 또한 자극해, 이들의 관계를 결국에 성-정치성을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은 주류들의 관계를 흔드는 어이없는 섹슈얼리티로 희극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희극성의 타겟은 이번에는 토니로 넘어가 부르주아계층의 나약한 내면을 풍자는 도구로 쓰인다. 이들은 어찌보면 피지배쪽에 속해 있는 이들보다 더 지난해 보이며, 그들의 이런 내면은 관객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마저 준다.
그러나 영화가 본격적으로 전환을 맞는 '계단에 비친 배럿'을 보여주는 장면에 들어서면 이 카타르시스는 순식간에 증발되고, 토니와 배럿의 관계는 역전되어 토니의 당당했던 위상은 말그대로 파멸한다. 이렇게 첫번째 클라이맥스를 지나고 나면, 이 영화의 촬영 감독인 더글라스 슬로컴 특유의 과감한 생략 속에서 베라와 이별을 통해 배럿은 다시 피지배의 관계로 전락하여 토니에게 자신을 지배할 것을 부탁한다. 이 쳅터에 들어서면 바로 직전의 쳅터와 연결되며 지배-피지배의 고정적 관계성의 매커니즘을 대변한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씩 던져지던 텍스트들은 후반부에 와서 통합되기 시작한다. 토니는 결국 명분적으로는 자리를 되찾아 배럿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정작 집안에서 공간을 지배하는 자는 배럿이다. 하지만 배럿 또한 토니의 지배하에서만 그 공간을 통제할 수 있는, 복잡한 관계성을 만들게 된다. 동시에 그들이 사는 집은 그들이 서로에게 묶여있는 거대하고 우아한 우리로 전락되며, 기괴한 유머를 발산시킨다.
이런 기괴한 유머이자 희극성은 관계의 상호 지배성, 우리가 미시적 권력 하에서 자기도 모르게 일상적 차원에서 행하는 순종적 행동들, 그 기계적 자동성에 내재한 희극성을 향한다. 이는 억압적 권력과 그에 상호적으로 순종하는 피지배자들을 알레고리로 만들며, 결국 <하인>은 우리의 미시적인 권력의 효과로서의 일상적 삶을 묘사하는 영화로 보이게 된다. 그것은 내용의 차원에서 실제의 삶을 유사하게 재현하는 방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기계화된 인물의 제스처에 기반한 희극의 형식에 근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인>의 미학적 완결 또한 이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하인>은 이러한 완전한 작위성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우리의 삶과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를 지닌 것만큼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 현실성은 우리는 이 희극에서 거북함을 느끼고 결국 희극적 관계는 비극성을 느끼는 배경이 된다.
결국 <하인>은 희극적 상황이 비극의 원인이 되는 희비극이자 부조리극이다. 이러한 면에서 배럿과 토니를 보고 웃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징벌적 웃음’이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의문을 거세당한 채, 심지어는 그 사실 자체도 깨닫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에게 가해지는 비웃음이라는 징벌. 이러한 면에서 <하인>은 분명 풍자적이면서도 교훈주의적인 작품일 것이다. 하지만 그 교훈은 단지 권력의 비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권력에 길들여진 일상의 순종성을 희극화함으로써 얻어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자신에게 흘리는 웃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인>이 지닌 희극적 관계의의 비극성이며, 지금도 이 영화가 거북해지는 이유다.
글‧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신인평론상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