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재의 시네마 크리티크] 먼 곳으로부터 〈그랑 블루〉

2024-12-27     이현재(영화평론가)
〈그랑

영화는 회색의 바다를 창공위에서 시원하게 가로지르며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는 깊은 바다 속에서 아련하게 돌고래를 마주하며 끝난다. 바다와 바닷속. 영화는 이 두 곳의 간격을 엔조와 자크를 통해 매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이 두 세계는 서로 마주하지 못한 체 상흔으로서 남게 될 조안나만 육지에 두고 모두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이다. 어째서 영화는 바닷속에서 끝났을까? 왜 영화의 시선은 엔조와 자크 그리고 조안나의 괘적을 따라 빙빙 돌다가 다시 바다로 사라졌을까? 영화가 선택한 것은 어째서 육지에 남게 된 조안나가 아닌 바다속으로 사라지는 자크, 정확히 말하면 그토록 거대한 푸름(Grand Bleu)을 마주했는가? 나는 그것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그리고자 한 것이 '먼 것'(Distance)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첫번째 장면에서 영화의 바다는 회색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다와는 기시감이 있다. 그리고 카메라가 위로 올라가면 인간의 시계를 벗어나 광각렌즈로 자크와 엔조가 사는 곳을 굽어본다. 그곳에는 아버지를 잃어버린 자크와 누군가에 쫒기듯 공격적이고 경쟁적으로 잠수하는 엔조가 있다. 이곳에서의 서사는 어떤 상실로 맺어진다. 엔조에게는 자크로 상징되는 성장의 가능성을 잃어버리는 곳이고, 자크에게는 자신이 발붙일 집을 상징하던 아버지를 잃어버리는 곳이다. 그러니까, 이 회색의 해변은 다시 되찾을 수 없는 곳이다. 이미 지나가버려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이미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더이상 잡을 수 없는 물질과 기억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잠수를 통해 지속된다. 즉, 엔조와 자크에게 지속되고 있는 것은 확인할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그 자체로서의 힘은 지닌 유령같은 존재들이다.

영화는 그 상실을 상정하고 지속에서 더 이상 다른 지속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성장이 멈추어버린 엔조를 비추어본다. 그는 여전히 잃어버린 성장을 안경과 허세로 대신한 체, 경쟁적인 잠수를 하고 있다. 그 반면 자크는 자신이 잃어버린 집을 인어와 돌고래로 마음 속에 품어둔 체 여기저기를 떠돈다. 그리고 그런 자크를 조안나가 본다. 조안나는 자크에게 반하고, 지반이 없는 자크에게 자신의 지반을 뿌리내리려는 시도를 계속한다. 조안나의 그런 안쓰러운 시도가 계속되는 가운데, 엔조는 자신을 잃어버린 성장을 되찾아줄 것이라 믿고 있는 자크를 만난다. 정확히 말하면 되찾는다. 그러나 그들의 재회가 진짜로 이루어지는 곳은 연회장의 풀장 안이다. 그들은 풀장 안에 들어가고 나서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인정한다. 그리고 거기에 조안나는 부재되어있다.

조안나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 엔조와 자크를 보며, 다르게 말해서 엔조와 자크의 다이빙을 보며 자신이 그들에게는 부재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조안나는 자크를 떠난다. 조안나는 잡지 못한 자크는 그제서야 어쩌면 자신의 지반이 조안나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조안나는 이미 자신의 지반을 자크에게 내렸음을 깨닫고 자크에게 돌아간다. 둘은 다시 재회하고 그 재회는 땅에서 이루어진다. 고백은 하강이 아닌 상승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자크가 조안나에게 키스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크는 조안나와 관계를 가지면서 자신의 지반이자 모태인 바다를 보며 자신을 부르고 있는 돌고래소리를 듣는다. 자크는 조안나에게 자신의 지반을 내릴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크는 다시 돌고래에게, 바다에게, 엔조에게 돌아간다.

그런 자크를 보면서도 조안나는 이미 자크에게 지반을 내려버렸기 때문에 그를 내칠 수 없다. 그런 조안나를 보며 자크는 말한다. "바다에서 육지로 다시 올라올 이유를 찾기 힘들어" 그 말은 들은 조안나는 자크의 모태인 그리스의 바다를 바라보며 말한다. "내가 왜 당신 곁에 머물러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자크는 자신의 지반이 보고 있는 바다 앞에서 조안나에게 키스한다. 그리고 조안나는 "다시 이유를 찾은 것 같다"며 그의 키스를 자신을 승인한 것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자크는 그녀를 승인하지 않았다. 키스를 나눈 뒤 자크는 자신이 어렸을 때 잠수하던 해변으로 데려간다. 이제야 상황파악된 조안나. 그녀는 바닷속에 뛰어들어간다. 그 곳, 자크의 지반에서 조안나는 고백한다. "난 당신이 필요해요. 사랑해요. 당신의 아이를 가졌어요. 당신이 전부에요" 그 말을 듣는 동안 자크는 바닷속으로 헤어쳐간다. 그는 조안나의 지반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자크가 조안나로 인해 자꾸 바닷속으로 들어가던 것에서 성장을 찾았던 엔조는 120미터라는 한계에 부닥쳐서야 그 자신을 받아드린다. 그리고 그 한계에서 자신을 마주한 엔조는 그제야 자기자신을 인정하고 성장한다. 그리고 자크에게 그 깨달음을 이야기한다. "자네가 옳았어. 저 바닷속이 더 좋은 곳이야 나를 이제 저 깊은 곳으로 데려다줘" 조안나가 아닌 엔조를 통해 겨우 땅위에 발을 붙이고 있던 자크는 그를 말리려한다. 그러나 이제야 자기자신을 찾은 엔조는 결국 바다 안에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엔조를 잃은 자크는 자신이 묵고 있던 숙소에서 바다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그에게 더이상 육지는 땅의 것이 아니다. 그는 바다로 돌아려하지만, 조안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다. 끝까지 붙잡으려 했던 조안나의 외침. "I’m here. I’m real, my love." 저 바다는 실제가 아니라는 강력한 부정.

그러나 이미 자크에게 조안나는 실체가 아니다. 그에게 남아있는 실체는 오직 바닷속이다. 그에게 가까운것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저 '먼 곳'(Distance)만이 인정된다. 그는 조안나에게 자신을 저 바닷속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그녀에게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끈을 맡기는 것이다. 조안나는 자신에게 자크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쥐어지고 나서야 자크를 인정한다. 그녀는 자크를 인정하고 울며 말한다. "See you from far away. my love" 그리고 자크는 아래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자크는 인어로 표현되는 돌고래를 만난다. 그리고 홀연히 바닷속 저 먼 곳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글‧이현재
경희대학교 K컬쳐・스토리콘텐츠연구소 연구원. △동아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부문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신인평론상 △게임제네레이션 비평상에 당선되어 다양한 분야에서 평론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