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블레어 주식회사
지난 10월 11일 니콜라 사르코지는 미국 뉴욕에서 몸값 비싼 강연자로 첫발을 내디뎠다. 현재 전 프랑스 대통령 사무실에는 강연 제의(강연료 약 11만5천 유로)가 쇄도하고 있다. <렉스프레스> 2012년 10월 3일자 기사에 따르면, 사르코지는 지난 5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지금까지 70여 차례 강연 제의를 받았다.
최고위직에 오르는 것은 이제 개인적 치부를 위해 거쳐가는 한 단계에 불과한 것일까? 사르코지는 아직 재선 도전 계획이 없었던 2008년 비슷한 관점을 피력한 바 있다. "2012년이면 내 나이 쉰일곱이다. 대선에 다시 출마할 생각은 없다. 클린턴이 수십억을 버는 걸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었다. 5년 임기를 마치면 나도 클린턴처럼 돈 벌러 나설 것이다."(1) 2001년 1월 백악관을 떠날 때만 해도 개인 부채가 1100만 달러에 달했던 빌 클린턴은 '작가 겸 강연자'로 변신했다. 그리고 1년 만에 클린턴 부부의 연간 수입은 35만8천 달러에서 1600만 달러로 무려 10배 이상 껑충 뛰었다. 자서전의 선인세와 지나치게 많은 강연료 덕분이었다.
전업한 전직 국가 정상들 중에서 가장 성공한 인물은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다(1997~2007년 재임). 급격한 정치적 변신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노동당 좌파에서 정치 인생을 시작한 블레어는 이라크 전쟁 당시 미국의 요구에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여 '부시의 푸들'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는 퇴임 뒤엔 몸값 높은 강연자로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른바 '블레어 시스템'은 항상 선과 악, 멋진 연설과 위대한 원칙들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자서전(2)에서 "항상 정치보다 종교에 더 관심이 많았다"고 고백했으며, 총리직을 사임하자마자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예방해 영국 국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고 밝혔다. 헨리 8세가 교황이 불허하던 이혼을 강행할 목적으로 세운 영국 국교는 신학적 엄밀성이 부족하다는 게 그의 견해였다. 블레어는 다양한 재단과 자선단체를 설립했다. 그중에는 종교 간 이해와 상호 존중을 촉구하는 '블레어 신앙 재단'도 있고, 정부 효율성 증진을 목표로 하는 '아프리카 거버넌스 이니셔티브'도 있다. 이 단체들은 그 성격이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관계없이 오직 한 가지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전직 영국 총리의 활동을 부각시키고 유로, 달러 혹은 그 밖의 화폐들을 긁어모으기 위해서다.
블레어 퇴직 후 최고 700억원 모아
블레어는 다른 활동들에 대해서는 공개를 꺼리는 편이다. 그는 조류 보호 혹은 신앙심 전파 등과 대비되는 상업적 활동, 즉 수익성 높은 계약을 따내고 고객층을 늘리는 활동에도 종사한다. 그중 하나가 사업적 관점에서 정치·경제적 상황, 국가 개혁 등과 관련된 전략적 컨설팅을 제공하는 '토니 블레어 어소시에이트'(TBA)다. 투자회사 '파이어러시벤처 N°3'도 있다. JP모건, 취리히 파이낸셜 서비스, 쿠웨이트 정부, 아부다비의 무바달라 국부펀드를 비롯한 수많은 국영·민간 금융회사들이 고객이다. 그중에서 블레어가 선호하는 고객은 근동과 아프리카, 옛 소련 지역의 독재자들이다. 이런 사업들을 통해 그동안 블레어가 축적한 재산만 2천만~4천만 파운드(약 350억~700억 원)에 이른다.
블레어는 자신이 지나치게 돈을 밝힌다는 비난 때문에 '상처받았다'고 주장한다. "나는 내 시간의 3분의 2를 자원봉사 활동 혹은 중동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활동에 투자한다. 아무 보수도 주어지지 않는 일들이다." 그는 자신이 원했다면 "얼마든지 돈을 더 벌 수 있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과거 '신노동당'(New Labour)을 선언했던 블레어는 총리직 사임 뒤에도 정치 무대를 완전히 떠나지 않았다. 블레어는 2007년 6월 27일, 1년 전 합의한 대로 고든 브라운 재무장관에게 총리 자리를 양보하고 중동 평화 '4자회담'(미국·유럽연합(EU)·러시아·유엔) 특사를 맡았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 협상 지원, 점령지 주민들의 삶의 조건 개선이 그의 임무였다. 그는 현장을 거의 방문하지 않았으면서도 활동 성과를 '보통'으로 평가했다. 그만의 완곡어법으로 봐야 할까?
그런데 블레어가 맡은 이 직책은 자발적 활동이 영리로 연결되는 현실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4자회담의 의제는 정치·경제적 영역 전반을 포괄한다. 블레어가 원한다면 어떤 지도자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그중에는 팔레스타인에 중요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는 걸프 지역의 재력가들도 포함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다우닝가 10번지(총리 관저)에 머물던 당시 구축한 인맥도 있다. 비영리단체 활동을 핑계로 유력 인사들에게 접근할 수도 있다. 혼합적인 장르 위에 구축된 '블레어 브랜드'는 인맥 접근권을 이윤화하는 자본주의의 가장 완성된 형태를 보여준다.
"전화 한 통에 100만 파운드"
2012년 9월 19일자 <르몽드>는 블레어가 세계 최대 원자재 중개업체 글렌코어와 국부펀드 카타르홀딩 사이에서 광산회사 엑스트라타 인수 과정을 어떻게 도왔는지 설명한다. 글렌코어의 최고경영자(CEO) 이반 글라센버그는 블레어에게 "제발 카타르가 마음을 돌리도록 도와달라"고 애원했다. 블레어는 '지체 없이' 자신의 친구인 카타르 총리이자 카타르홀딩 회장 셰이크 하마드 빈 자심 알타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끝나고 곧바로 런던에서 양쪽 간 미팅 약속이 잡혔다." 엑스트라타 인수 과정은 11월 말 마무리될 예정이다. 블레어는 그 대가로 얼마를 받게 될까? "3시간 일한 대가로 100만 파운드(약 17억7천만 원) 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블레어는 민간 기업에서 한 번도 일한 경험이 없음에도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수익성 높은 계약을 따내고 싶어 하는 기업이나 유용한 정보(혹은 내부자거래)가 절실한 투기 펀드들에 인기가 높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블레어라는 브랜드 이면에는 그를 위해 일했던 100여 명의 '작은 일꾼들'의 노고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중에는 다우닝가에서 일했던 측근부터 유명 컨설팅 회사에서 파견된 직원들도 포함된다.
블레어는 총리 시절 "무아마르 카다피를 대화가 통하는 국가 지도자로 변모시켜놓겠다"고 공헌했고 실제로 성공했다. 그 뒤 총리직을 사임하고 중재자 역할을 맡은 블레어는 카다피 가족의 금융자문이자 JP모건 컨설턴트 자격으로 리비아 트리폴리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그 대가로 그는 200만 파운드가 넘는 연봉을 챙겼다. 더 최근에는 95% 이상 득표율로 재선된 카자흐스탄의 철권 통치자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고 있다. 내각 구성과 정부 개혁에 관한 조언을 해주고 1년에 800만 파운드를 챙기는 그는 이 모든 일을 선의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직이 퇴임 뒤 개인적 치부를 위한 경력이 된다면 공화주의적 이상이라는 게 가능할까?
공직 근무가 훗날 개인적 치부를 위해 거쳐야 할 경력상의 단계쯤으로 간주된다면 공화주의적 이상이라는 게 여전히 가능할까? 몰락한 '슈퍼 로비스트' 잭 아브라모프는 "기업이 정치인을 부패시키는 첩경은 그에게 퇴임 뒤 일자리와 엄청난 연봉을 보장해주는 것"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5)
최근 블레어는 박애주의를 옹호하는 어느 글에서 "총리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일한 경험은 매우 발전적이고 유익한 자극이 되었고, 정치인이었을 때보다 잠재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었다"고 밝혔다.(6)
*
글 이브라힘 워드 Ibrahim Warde <테러리즘에 대항한 제국적 프로파간다와 금융전쟁>(Agone-Le Monde diplomatique·마르세유-파리·2007)의 저자.
번역 정기헌 guyheony@gmail.com
(1) <Le Point>, 파리, 2008년 7월 3일.
(2) Tony Blair, <A Journey: My Political Life>, p.654, Knopf, 뉴욕, 2010,
(3) <The Daily Telegraphe>, 런던, 2011년 9월 30일.
(4) <The Daily Telegraphe>, 2011년 10월 22일.
(5) Jack Abramoff, <Capitol Punishment: The Hard Truth About Washington Corruption From America’s Most Notorious Lobbyist>, WND Books, 뉴욕, 2011.
(6) huffingtonpost.com, 2012년 4월 1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