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근애의 문화톡톡] 찢어짐에 저항하는, ‘걷는 연극’
‘배리어프리(barrier-free)’는 1974년 유엔 장애인 생활환경 전문가 회의에서 ‘장벽 없는 건축 설계(barrier free design)’에 관한 보고서가 나온 이후로 건축학 분야에서 사용된 개념이다. 지금은 건축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 폭넓게 적용되고 있으며, 연극이나 영화 등 문화콘텐츠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연극계에서는 배리어프리보다 접근성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장벽을 없앤다는 뜻의 배리어프리가 도리어 장벽을 의식하게 되는 언어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접근성(accessibility)이 더 포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접근성은 극장에 오는 다양한 몸들, 구체적으로는 장애인뿐만 아니라 노인, 어린이, 기타 질병으로 인해 극장에 오기 쉽지 않은 취약한 몸들을 상상하는 일에서 출발한다. 반대로 말하면 그동안 극장은 이와 같은 취약한 몸들에 열려 있지 않은 곳이었다는 의미가 된다. 2018년 0set프로젝트가 관객과 함께 ‘극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가’라는 명제를 두고 ‘걷는 인간-대학로 공연장 및 거리 접근성 조사’를 실시했을 때, 대학로 120곳 공연장을 확인한 결과 휠체어 이용자가 활동 보조 없이 접근 가능한 공연장은 14곳, 부분적으로 도움을 받으면 접근이 가능한 공연장까지 포함하면 21곳이었다고 한다(신재, 「극장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가」, 『춤in』, 2018. 6. 12.).
로즈메리 갈런드 톰슨은 장애인이 자기 몸과 세계 사이의 불일치를 경험하는 문제를 ‘미스핏(misfits)’이라고 개념화하여 휠체어가 오르기 어려운 계단,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점자블록이 끊긴 인도, 자막이나 수어 통역이 없는 방송 등 장애인의 몸에 부합하지 않는 물질적인 배치와 환경이 사회가 비장애인의 몸에 맞게 설계되고 구성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물리적인 장벽을 낮춘다고 해도 근본적으로 차별된 구조를 개선하지 않는다면 심리적인 장벽의 문제가 남을 수밖에 없다.
최근 많은 공연이 접근성 매니저를 고용하여 휠체어석을 마련하고 수어통역, 자막, 음성해설, 이동지원 등을 구비하여 극장에 미스핏을 느끼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최소화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공공극장이나 제작극장에서는 어느 정도 시스템을 갖추어 제도적으로 접근성을 실천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이는 많은 관객에게 접근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민간극장에 올라가는 많은 공연 중에는, 비록 예산이 부족하거나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더라도 극장에 오는 ‘다른 몸’들을 위한 접근성을 마련하는 의미 있는 사례들이 있다. 누구나 관람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야만 접근성을 갖춘 공연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모두를 위한 공연’이라는 좇을 수 없는 이상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가능한 방법을 찾아 구체적인 관객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더 중요한 것이다.
0set프로젝트의 공연은 관객을 움직이게 만든다. 0set프로젝트 공연의 관객이 되면 극장 주변을 걷고 혜화동 일대를 걷고 안산을 걷게 된다. 다른 관객들과 함께 걷는 공연이 있는가 하면, 자기만의 속도로 자기가 보고 싶은 순서대로 관람하는 연극도 있다. 이와 같은 신재 연출의 공연을 ‘걷는 연극’이라고 부르고 싶다. 이때 ‘걷는다’는 말은 두 다리를 이용하여 걸을 수 있는 능력을 특권화하거나 장애를 배제한 말이 아니라 여기서 저기로 자기만의 속도와 보폭으로, 자신의 이동수단을 통해 자리를 옮겨가는 행위를 통칭한다. 그러니까 ‘걷기’는 몸의 일이며, 오로지 자기 몸으로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를 ‘이동하는 연극’이라 쓰지 않고 굳이 ‘걷는 연극’이라 쓰는 이유는 리베카 솔닛이 강조한 걷기의 사유가 0set프로젝트의 공연에 깃들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이며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이라고 언급했다. 또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소설가 김연수의 문장은 이렇다. “리베카 솔닛이 말하는 걷기란 바로 그처럼 이 세계를 좀 더 높고, 먼 곳으로 보내는 일, 즉 ‘진보(進步)’를 뜻한다.” 이 말들을 빌려 말해보자면, ‘걷는 연극’은 찢어진 세계를 이어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고 걷는 연극과 접근성은 어떻게 이어지는 것일까.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광화문에 모여 함께 차를 타고 안산화랑유원지로 이동하는 공연이었다. 열흘 전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들려온 후 광화문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내게 다가와 교보문고에 한강 책을 사러 왔다가 공연 깃발을 보았다며 말을 거는 사람도 있었다. 낯설고도 반가워서 나도 모르게 긴 대화를 나누었다. 세월호 기억 공간이 있었던 곳에는 한강을 비롯한 여러 작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세월호 참사와 5.18과 4.3을 다룬 한강의 소설들이 겹쳐졌다. 잊을 수 없는 기억과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 살아 있는 광장에 이상한 활기가 돌았다. 공연 소개글은 이렇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은 지금을 살게 하는 마음, ‘가냘픈’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다. 산 자와 죽은 자, 여기와 저기, 지금과 그때의 경계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이야기는 지금 여기의 삶을 조금이라도 고쳐나갈 수 있게 하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우리는 희미해진 기억의 장소에서 출발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 만남의 장소로 향한다.”
바깥 공기와 몸의 경계를 맞대고 걸으면, 안에서는 보이지 않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풍경에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의 역사가 흔적으로 새겨져 있다. 안산의 곳곳을 걷지 않았다면 세월호 참사로 인해 유가족이 잃어버린 일상이 그토록 사무치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눈으로는 역사가 켜켜이 쌓인 풍경을 바라보고 귀로는 세월호 유가족의 이야기를 들으며 걸어가는 동안 내가 이 세계에 연루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걷는 동안 발에 밀착되는 바닥에는 누군가가 이미 걸었던 흔적들이 쌓여 있다. 어제 왔던 관객일 수도 있고 이미 어른이 된 어린이일 수도 있고 다른 도시의 시민일 수도 있고 세월호 참사 유가족일 수도 있다. 누군가 이미 밟은 땅을 재차 밟아 길을 내는 일은 경이롭다. 거기서 내가 경험하지 않았던 기억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기억을 공유하며 또 다른 기억을 만들어가는 일은 걸으며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과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세월호 공연을 극장에서 볼 때보다 걸으며 관람할 때가 훨씬 마음이 편했다. 옆자리에 앉은 다른 관객을 의식할 정도로 밀착된 극장보다 혼자될 수 있어 자유로웠고, 혼자이면서도 함께 걷는 사람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을 지속하는 유가족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을 때, 다른 관객과 적당한 거리를 둔 덕에 울컥 치미는 슬픔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퍽 고마운 일이었다.
신재 연출은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체험을 통해 접근성을 실천한다. 그것은 <관람 모드-만나는 방식>(2020)에서처럼 수어와 구어와 문자처럼 각기 다른 언어의 사용으로도 구성되지만, 이렇듯 관객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환경을 제공하는 일로도 가능해진다. 신재 연출이 강조하는 ‘태도로서의 접근성’은 여기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걷는 연극’의 의미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걷는 연극’은 관객을 이동시킬 뿐만 아니라 극장을 극장 바깥으로 이동시킨다. 관객은 극장 안에서 펼쳐지는 만들어진 세계를 보며 극장 바깥의 현실을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 안팎을 이동하거나 극장 주변을 걷거나 극장이 아닌 곳을 극장으로 느끼며 연극과 현실의 접면을 인지한다. 극장이라는 규율적인 공간에서 무대에 방해가 되지 않는 잘 훈련된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극장 바깥의 거리, 광장, 공공시설을 전유하여 극장이 누구를 위한 곳인지, 연극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질문하는 ‘관람 모드’를 실천한다. 가령 <관람 모드-있는 방식>을 보기 위해 폐지된 시설 ‘향유의 집’으로 이동하는 길에는 지역사회가 과연 탈시설 장애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구름다리 유리창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 바깥을 내다보았을 시설 장애인들의 마음을 상상하는 일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공감 지수가 높았다. 또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건물 전체를 오가며 관람한 <일+일+일=삶>을 통해서는 하나의 삶이 다른 여럿의 삶에 의존하는 일에 관한 질문이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활동지원사 세 명과 함께 꾸려가는 홍성훈의 일상은 상호의존적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 공연 시간 - 약 120분 내외
- 공연은 ‘혼자 관람’과 ‘함께 관람’ 시간으로 구분됩니다. 개별적으로 이동하며 각자의 이야기를 관람한 이후 한 공간에 모여 공동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 티켓팅 장소는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2층입니다.
- 성북장애인자립생활센터 2-4층은 엘리베이터 및 계단을 이용해 이동할 수 있습니다.
- 본 공연은 저마다의 소통방식(문자, 수어, 음성 등)으로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 전 회차 실시간 문자통역(쉐어타이핑 어플)과 수어통역을 포함해 진행됩니다. 전시 영상/음성에는 한글자막과 수어통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 공연 장면 이해를 위해 음성 해설이 필요할 경우, 진행스탭 또는 동반인이 옆에서 위스퍼링(속삭임) 안내를 할 수 있습니다.
- 공연장까지 이동 지원(안내 보행)이 필요하거나 공연 공간 이동 및 장면에 대한 위스퍼링(속삭임) 안내를 받고자 하는 분은 티켓 예매 후 문의처로 신청 바랍니다.
물론 인용된 <일+일+일=삶>의 관람 안내문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처럼, 공연에는 한글자막, 문자통역, 수어통역, 위스퍼링 등 접근성도 잘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신뢰가 가는 것은 ‘저마다의 소통방식’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접근성은 장애가 있는 몸이 구성하는 새로운 공간 배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살피는 일이기도 하다. ‘걷는 연극’은 능력주의(ableism)의 속도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 생각의 보폭으로 소요(逍遙)하면서 나와 타자를 잇는다. 나와 타자의 자리에 장애와 비장애가 들어갈 수도 있고 사회적 규범에 의해 통제되는 다른 빗금의 세계가 들어갈 수도 있다. 그 빗금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양하고도 구체적인 존재들로 인해 흔들린다. 각자의 고유성을 존중하는 마음이 접근성의 전제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면, 더 자유롭게 더 새로운 공연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공연예술비평활성화로 선정, 지원을 통해 제작된 원고입니다.
글·양근애
문화평론가.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이후’의 연극, 달라진 세계』(연극과인간, 2020)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