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혜의 문화톡톡] 내한하기 좋은 나라: 팬덤은 왜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는가?

응원봉을 든 오타쿠 – '방송국'에서 '국회의사당'으로

2024-12-30     이지혜(문화평론가)

시끄럽고 어수선한 12월이다. 월 초, 윤석열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청년들이 응원봉을 들고 여의도로 나선 모습이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향한 곳은 방송국이 아니라 여의도 국회의사당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응원'하는 팬덤 문화가 '좋은 나라'를 '응원'하는 정치적 사인으로 확장되는 상징적 장면이었다. 팬덤의 열정이, 사적 영역에서 공적 영역으로 이동하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다.

 

국회의사당

덕질하던 팬들은 왜 거리로 나섰을까?

여의도는 상암동 시대가 열리기 이전까지 원래 방송국이 밀집되었던 지역으로, K-팝 팬덤들에게는 공개방송이나 팬미팅을 위해 찾는 '성지' 같은 장소였다. 그러나 이번 시위에서 청년들, 특히 소위 '빠순이' 취급 당하던 여성들이 방송국이 아닌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사실 K-팝 팬덤은 단순한 '아이돌 응원'을 넘어, 연대와 공동체 의식이 강한 집단이다. 특히 팬덤은 '좋아하고 동경하는 대상'을 응원하는 마음을 기반으로 한 조직력과 결속력이 높다. 따라서 이러한 대상의 안위가 위협 당할때 사회적 불의와 불평등에 대한 감수성이 강하게 작동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 혐오, 성차별, 젠더 갈등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가 부각되었다. 팬덤은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자신들이 사랑하는 아티스트조차 차별받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목격하며 정치적 감수성을 높여왔다.

또한, K-팝 팬덤은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정보와 감정을 공유하며 빠르게 조직되는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정치적 이슈에 대해 실시간으로 대응하고, 필요할 경우 집단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한다.

 

팬덤 아이템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응원봉은 단순한 응원의 도구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내가 가진 가장 밝고 빛나는 도구로 지킨다'는 상징성을 지닌다. 이는 점차 확장되어, 자신들이 살아가는 사회를 지키고 변화시키기 위한 상징적 도구로 변화했다. 응원봉을 들고 시위에 나선 팬들은 단순한 정치 참여자가 아니라,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과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실현하는 존재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팬덤은 '단순한 덕질'을 넘어 사회적 인정과 존중을 요구하는 집단으로 성장해왔다. 이러한 연유가 거리에서의 시위로 연결되지 않았을까?

사전적 의미에서 '기호'란 '어떠한 뜻을 나타내기 위해 쓰이는 부호, 문자, 표지'를 말한다. 또 다른 뜻으로는 '즐기고 좋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는 이 '기호'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는 '기호'가 현실을 초월해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창출해낸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응원봉은 원래 K-팝 공연장에서 사용되는 기호의 도구다. 그러나 시위 현장에서 사용됨으로써 새로운 정치적 의미를 획득했다. 이는 실재와 상징이 결합된 상태에서, 응원봉이라는 기호가 단순한 팬덤 아이템을 넘어 사회적 저항의 상징으로 전환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악셀 호네트의 '인정투쟁' 개념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호네트는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과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투쟁한다고 보았다. 응원봉을 들고 거리로 나선 팬들은 자신들이 속한 문화와 세대가 단순한 하위문화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존중받아야 하는 정체성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적 무시와 배제로부터 벗어나려는 팬덤의 정치적 표현이자, 공적 영역에서 인정받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정치적 무관심으로 비춰지던 팬덤 문화가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적극적인 개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례다.

 

기사

응원봉 흔들며 외치는 민주주의

시위 참가자들은 응원봉을 흔들며 아이돌 응원가를 부르고, 춤을 추며 국회의사당 앞을 가득 메웠다. 사실 이는 기존의 진지하고 규율적인 시위와는 결이 다르다. 시위 현장은 축제의 장으로 변화했고, 이는 시위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춰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역설적으로 '즐거운 저항'이라는 새로운 정치 문화가 탄생했다. 시위 참가자들에게 연대감을 형성하고 지속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K-시위는 놀이와 저항이 결합된 새로운 형태의 시위다. 응원봉을 흔들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이들의 모습은 기존의 진지하고 규율적인 시위와는 결이 다르다. 시위 현장은 축제의 장으로 변화했고, 이는 시위에 대한 심리적 장벽을 낮춰 더 많은 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이러한 방식은 '즐거운 저항'이라는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며, 시위 참가자들에게 연대감을 형성하고 지속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X(구 트위터)에는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1세대 아이돌 H.O.T. 빠순이 성시원이 <응답하라 1988>의 민주화 운동권 학생 성보라가 되었다."는 요지의 메시지가 공감의 의미를 담은 리트윗과 좋아요 수만개를 기록했다. 방송국에서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현실을 풍자하는 서글프고 씁쓸한 농담이다. 발길이 닿는 곳은 달라졌지만, 오직 좋아하는 것을 지키겠다는 마음만은 같다.

응원봉을 든 오타쿠들에게, 청년 세대에 주목하라. 기존의 권위적인 정치 문화와 차별화되는 중요한 흐름의 갈림길, 지금 여기에 이들이 서 있다.



 

글·이지혜(이해이)
문화평론가. 2022년 문화전문지 《쿨투라》 제16회 영화평론 신인상으로 등단.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글쓰기를 강의하며 한국문화콘텐츠와 문화현상을 연구한다. 월간 《쿨투라》에 영화평론을, 르몽드 문화톡톡에 문화평론을, 서울책보고 웹진 <e-책보고>에 에세이를 기고 중이다.

· 인스타: @leehey_cine · 이메일: leehey@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