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욱의 시네마 크리티크] <아사코>의 아사코가 깨달은 것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2018)에는 상반된 남성 인물 두 명이 등장한다. 먼저 바쿠는 충동적이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예를 들면 빵을 사러 나갔다가 우연히 만난 사람을 따라가 밤을 새우고 돌아오거나, 오토바이 사고가 나도 바닥에 널브러진 상태로 낄낄거리는 식이다. 반면 료헤이는 성실하게 일하는 회사원으로, 이해심 많고 반듯한 인물이다. 바쿠와 료헤이는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1인 2역을 했다.
아사코는 사진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난 바쿠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해 열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바쿠는 신발을 사러 간다며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 바쿠를 잊지 못한 상태에서 아사코는 바쿠와 너무나 닮은 료헤이를 만나게 된다. 료헤이가 바쿠와 똑같이 생겼다 해도 둘은 다른 사람인데, 아사코는 끈질기게 료헤이가 바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가까워지지만, 아사코는 바쿠가 아닌 료헤이는 만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도쿄까지 흔들리며 도시 전체가 불안에 휩싸인다. 이때 아사코는 료헤이를 찾아오고, 두 사람은 이후 5년 동안 안정적인 동거생활을 하게 된다. 그런데 바쿠가 영화배우가 되어 나타나면서, 아사코는 다시 혼란에 휩싸인다. 아사코는 료헤이와 함께 하려고 애를 쓰지만, ‘아사코’하고 부르는 바쿠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걸 떨쳐버리지 못한다. 결국 료헤이와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는 음식점에 바쿠가 등장해 손을 내밀자 아사코는 그들 모두가 보고 있는데도 바쿠를 따라나선다. 아사코는 절규하며 붙잡으려는 료헤이를 외면하고 떠나간다.
바쿠와 료헤이 사이에서 아사코가 현실적인 후자가 아니라 환상적인 전자를 선택한 이유는 충동에 따라 자유롭게 살던 젊은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쿠와 함께 한 순간부터 아사코는 예전과 다름없이 멋대로 행동하는 바쿠에게서 어떤 이질감을 느낀다. 두 사람이 함께 차를 타고 가는 다음 장면에서, 바쿠의 무심한 말과 표정을 보면 너무나 그리워하던 연인을 다시 만난 남자의 모습이 전혀 아니다. 이 장면의 바쿠는 객관적인 시선에서 바라본 바쿠가 아니라 아사코의 주관적인 시선에서 뭔가 낯설게 느껴진 바쿠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음 장면에서 밤 동안 달리던 바쿠의 차는 새벽에 센다이 지역에서 멈춘다. 바쿠는 “바다가 보고 싶어” 차를 세웠다고 하는데 바다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쓰나미를 막으려고 바닷가에 거대한 방파제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때 아사코는 바쿠와 행복했던 시간으로 결코 되돌아갈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바쿠가 예전의 바쿠와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니라 아사코 자신이 많이 변해서 더 이상 예전의 아사코가 아니기 때문이다(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ASAKOⅠ& ASAKOⅡ>다). 그래서 멋지게 보였던 바쿠의 일거수일투족이 이제는 아사코의 환상을 만족시켜 주기는커녕 오히려 료헤이와의 차이만 부각시키게 된다. 또 예전에 아사코와 바쿠는 바다를 보며 신나게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는데, 이제 그런 풍경은 방파제에 막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되돌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너무나 뼈아프게도 동일본 대지진 이전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환상을 포기하고 현실을 받아들이고 계속 살아갈 수밖에 없다. 아사코는 바쿠와 헤어지고, 료헤이에게 돌아가기로 한다. 여기서 혜성 충돌로 인한 재난을 다룬 신카이 마코토의 <너의 이름은.>(2016)을 언급하고 싶다. <아사코>와 달리, 이 애니메이션에서는 시간을 되돌리고 재난으로 죽은 자들을 살려내는 판타지를 선사함으로써 재난의 현실을 부정한다.
아사코가 현실을 직시하게 될 때 비로소 타인을 생각하는, 일종의 성장을 하게 된다. 아사코는 료헤이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줬는지 깨닫는다. 료헤이를 찾아간 아사코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명확하게 알게 되었기에 “내가 아무리 사과를 한다 해도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저질렀어. 그러니까 사과 안 할 거야”라고 말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료헤이는 아사코를 거부하지만, 끝내 내치지는 못한다. 두 사람은 베란다에 나란히 서서 빗물로 물살이 불어나 흙탕물이 되어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크게 상처받은 료헤이는 “정말 더러운 강”이라고 말한다. 예전의 아사코라면 맑고 깨끗했던 강물을 되찾고 싶어 했겠지만, 지금의 아사코는 “그렇지만 아름다워”라고 답한다.
영화는 아사코와 료헤이가 나란히 서서 앞을 바라보는 쇼트로 끝난다. 이 쇼트는 아사코가 보았던 사진전에서 쌍둥이 자매가 나란히 서 있던 사진을 생각나게 한다. 시게오 고초 작가의 사진전의 제목은 ‘Self and Others’이다. 자아의 본질적 특성이 타인들과의 근본적 분리라면, 이 쇼트의 이미지는 의미심장하다. 아사코와 료헤이는 분리된 존재지만, 나란히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울러 이 장면은 한강 작가가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했던 말과 통하는 것 같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폭력적이고 고통스럽고 진흙탕 같은 세계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면, 멈추지 않고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네이버
글·김경욱
영화평론가. 세종대에서 영화 관련 강의를 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