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군부독재에서 종교독재로?

Spécial 정치 시험대에 선 이슬람주의

2012-11-12     알랭 그레슈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군부의 견제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무슬림형제단이 이집트 사회 내에서 불러일으키는 거부감과 이들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라는 또 다른 벽에 부딪히게 됐다.

 

"2012년 8월 12일 일요일 오전 10시, 이집트 최고군사위원회의 두 실세, 후세인 탄타위 이집트 국방장관과 사미 아난 참모총장이 대통령궁에 소환된다. '보안실'에 감금된 이들은 휴대전화 사용조차 불허된 상황이었다. 이들이 기다리는 동안, 바로 옆방에선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압델 파타 시시 장군을 신임 국방장관으로 임명한다. 그보다 몇 시간 전에는 대선 1차 투표와 2차 투표 사이 최고군사위원회가 채택한 헌법 부속 조항을 폐기하는 법령을 관보에 게재했다. 폐기된 조항은 최고군사위원회가 무르시 대통령의 당선에 대비해 기존 이권을 지키기 위해 군사위원회에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이어 대통령은 두 장성을 만나 이들의 해임 사실을 알린다. 둘은 당혹스러운 만큼이나 무력한 상태였다."

카이로 거리의 환호 물결

대통령 측근 중 한 사람이 서술해준 그날의 풍경은 군부와 대통령 사이의 권력 대치가 종결됐음을 의미한다. 2012년 6월 30일, 무르시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에도 카이로에서는 군부와 대통령궁 사이에 권력이 양분돼 있었다. 따라서 이는 모두가 예견한 상황이었다. 불안정한 상태의 균형은 곧 깨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서 비운의 후보 압둘 모네임 아불 포투흐는 "국영 언론이 탄타위의 발언에 대해 6단 기사로 싣고,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서는 2단 기사로 게재했다"고 분개한다. "정부 구성을 수락하기 전, 헤샴 칸딜 총리는 사전에 군부의 지지를 요청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최고군사위원회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했다". 그 옛날 마오쩌둥이 했던 말은 이처럼 변형돼 오늘날 카이로 거리를 휩쓸고 있다. 하지만 몇 주 전만 해도 무르시 대통령이 설마 최고군사위원회를 건드릴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최고군사위원회는 1952년 7월 23일 '자유장교단'이 권력을 잡은 이후 줄곧 이집트를 지배해온 집단이었고, 2011년 2월 14일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하야한 뒤에는 이집트 정계를 쥐락펴락하던 조직이었다.

이집트 대선 1차 투표가 이뤄지던 지난 5월 23일과 24일, 좌파 나세르주의를 표방하는 함딘 사바히와 무슬림형제단을 배신한 아불 포투흐, 그 외 2011년 1월 25일 혁명에 활발히 참여했던 몇몇 좌파 인사들은 1차 투표에서 유효표의 40%를 가져갔다. 하지만 좌파 진영의 분열에 따라 2차 투표는 기존 정권을 대표하는 아메드 샤피크와 무슬림형제단에서 세운 무함마드 무르시 두 사람의 대결이 된다. 사바히는 어느 쪽에도 지지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지만, 포투흐는 무르시 후보를 지지했다. 4월 6일 청년운동을 주도한 세력이나 유명 블로거 와엘 그호님, <야쿠비안 빌딩>(1)의 작가 알라 엘아스와니 같은 몇몇 인사들 역시 무르시 편에 섰다. 이슬람주의에 대해 격렬히 비판하는 입장인 알라 엘아스와니는 무슬림형제단을 대표하는 무르시 후보를 지지한 것에 대해 "우리는 무르시와 함께하는 게 아니라 혁명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의 첫 번째 목표는 일단 군부를 밀어내는 것이었다.

군부는 마지못해 2차 투표 결과를 받아들였지만 아직 게임은 시작도 안 한 상태였다. 신임 내각이 임명됐으나 기존 체제의 인사들이 대거 내각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르시 대통령이 비록 정권은 잡았으되 통치는 하지 못할 것이란 인상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최고군사위원회 위원장인 탄타위 장군은 지난 7월 15일 '과격한 세력'(암묵적으로 형제단)이 이집트를 지배하진 못할 것이라며 엄포를 놓았다. 8월 24일과 25일에는 신임 대통령에 대한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심지어 <알두스투르> 신문은 쿠데타를 선동했다.(2)

하지만 이는 헛된 희망이었다. 이제 권력에 대한 정당성은 투표소에서 나오고, 거리를 장악한 군중의 힘에서 비롯된다. 지난 6월 말, 이집트 국민은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집어넣기 위해 햇빛이 뜨겁게 내리쬐는 가운데에서도 길게 줄지어 서 있었다. 투표 결과가 발표되던 저녁,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기쁨을 만끽했다. 대개는 정치적 해커 집단 '어노니머스'(익명)의 마스크를 쓰고 있거나 무슬림형제단의 포스터를 내건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무르시 대통령의 당선을 축하하기보다는 기존 정권의 실각과 보통선거의 승리를 환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카리스마도 없는 식상한 노장이라고 했던 신임 대통령 무르시가 실로 굉장한 수완을 발휘해 보인다. 대통령이라는 직권 덕분에 군사지휘권을 장악한 무르시 대통령은 그동안 군부가 암암리에 권력을 주도해온 상황을 간파할 수 있었다. 50대의 장교단 세대는 좀더 큰 역할을 맡고 싶어 했고, 이스라엘에 대한 1973년 10월 전쟁(4차 중동전쟁)의 선례에 따라 자신들 역시 '1973년 세대'가 주도하는 세계를 뒤흔들고 싶어 했다. 전문성 부족, 정실주의, 부패 등 국내의 다른 여러 곳에서처럼 조직 내부를 좀먹는 사회악을 바로잡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새 헌법, 국민투표, 총선… 거대한 개조의 시작

따라서 무르시로서는 어떻게든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상황이었고, 그 기회 역시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8월 5일, 이슬람 무장세력 지하디스트가 시나이반도의 라파에 위치한 군 초소를 습격했기 때문이다. 병사 16명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고, 무장대원은 현장을 빠져나가 이집트 영토 위를 무사히 15km쯤 내달려 국경을 넘으려다 수분 만에 이스라엘 군대에 제압됐다. 군부가 이렇듯 치명적인 안보 공백을 드러낸 탓에 신임 무르시 대통령은 더 손쉽게 군부를 견제할 수 있었다.

그러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집트 혁명의 한 페이지가 넘어간 셈이다. 즉, 군대가 부대로 복귀한 것이다. 물론 군부는 시나이반도를 둘러싼 보안 문제나 이스라엘, 미국과의 관계에 여전히 입김을 불어넣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권력 전체를 손에 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정권 교체가 완수되려면 상황은 아직 멀었다. 새 헌법이 입안 중이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새 헌법은 11월 말 표결을 거친 뒤 국민투표에 부쳐질 예정임에 따라 새로운 총선의 길이 열린다. 지난 6월 최고헌법재판소가 의회를 해산시켰기 때문이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몇백m쯤 떨어진 이집트 상원에서는 수많은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헌위원회가 회기를 열었다. 제헌위원회는 수많은 우여곡절과 법정 공방 끝에 100여 명의 위원으로 구성됐고, 그 가운데 절반은 무슬림형제단이나 이슬람 원리주의 살라피스트 소속이었다. 일부 야당 세력은 간간이 제헌위원회 참여를 거부했는데, 일간지 <알아흐람>에 재직 중이기도 한 제헌위원회 대변인 와히드 압델 메기드 전 의원은 위원회 내의 분위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가끔 보면 중세시대에나 나올 법한 얘기가 오고 간다. 하지만 일이 진전되고 있고, 살라피스트파 역시 우리 법제 가운데 그 무엇도 이슬람 계율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이집트 파라오 벽화들로 장식된 건물 안, "종교 문제는 헌법의 영역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암르 무사 전 아랍연맹사무총장, 살라피스트 정당 누르(Nour)당의 대변인으로 언론에 자주 노출된 나다르 바카르, 이슬람 머릿수건을 쓴 여자들과 이를 쓰지 않은 여자들, 장성, 그리고 몇몇 청년 혁명 세력, 이집트 기독교인 콥트파 사제, 알아즈하르대학 대표, 이집트 전통 의상 갈라비야를 입고 와서 농가 지원을 호소하는 농민 등 각계 인사들이 서로 어깨를 마주하며 앉아 있다. 어떤 의회에서든 볼 수 있는 광경이고, 서로 이해관계가 다양함에도 존경받는 판사 호삼 엘게리아니가 근엄한 목소리로 주재하는 토론 중에는 경청하는 분위기가 조성된다.

논의의 핵심은 이슬람 율법 '샤리아'의 지위, 그 가운데에서도 헌법 제2조에 관련한 부분이다. 1971년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은 "샤리아가 입법의 한 주된 원천이 될 것"이라고 분명히 못박으며 이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1980년 수정안을 통해 샤리아는 그냥 '입법의 주된 원천'이 되었다. 제헌위원회에서 살라피스트들은 샤리아를 '샤리아의 원칙'으로 바꾸자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 문장이 더욱 모호해져 법 해석에서 우려할 만한 수준의 왜곡이 가능해질지 모른다. 그러자 이를 포기한 살라피스트들은 법 조항과 샤리아의 일치 여부를 판단하는 권한을 기존의 최고헌법재판소가 아닌 알아즈하르에 부여하자고 요구했다.(3) 알아즈하르는 수니파 이슬람의 최고 권위 기관이다. 그 자리에 참석한 한 사람은 "이는 이집트의 '시아파화'가 될 것"이라며 비꼬았다. "그 개혁안대로라면, 종교기관이 국내의 법에 관한 최종 결정 권한을 부여받게 되고, 결국 (시아파 국가인) 이란과 같아지는 셈"이라는 것이다. 시아파에 대한 적대감이 심한 살라피스트들로서는 치명적인 반론이다. 더욱이 알아즈하르는 이런 역할의 수행을 거부했다.

합의가 가능한 상황일까? 이슬람주의자들에게 적대적인 한 위원은 이렇게 지적한다. "무르시로서도 제헌위원회가 균형을 이루는 게 이득이다. 그래야 대통령직 수행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반이슬람주의 세력이 항의의 뜻으로 제헌위원회를 떠난다면, 이는 무르시에게 아주 안 좋은 상황이 될 것이다."

종교적 측면이든 시민평등 및 남녀평등 문제이든 중요한 원칙을 정하는 토론임에도, 여론은 이 토론에 별 관심이 없다. 간접적으로 다른 문제들이 점점 더 불거지는 상황이다. 무슬림형제단이 정권을 장악할 것인가?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화'가 진행되고 있는가? 아니면 일각의 우려대로 이집트는 또 하나의 이란처럼 변모하는 것인가?

무슬림형제단은 사실 국민들 대부분에게서 강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무슬림형제단 대다수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왜곡된 정보의 확산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다. 놀라울 정도로 탄탄한 조직력에, 때로 감옥행까지 불사할 정도의 충직한 단원을 보유한 무슬림형제단은 교인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냉소적이며 정치적 술책에 연루돼 있다는 인상을 주고, 국가보다는 조직의 이해관계에 더 관심이 많다는 평가를 듣는다. 살라피스트들조차 이들을 강하게 비판한다. "종교라는 이름을 내세워 자신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4) 비록 뒤늦게 혁명이라는 열차에 올라타긴 했어도, 혁명에서 이들이 담당했던 역할은 반론의 여지가 없으나, 2011년 군부와 손잡은 건 상당히 유감스러운 행보였다. 애초의 약속을 깨고 대선 후보를 내세운 것 역시 사람들의 불만을 자극했다. 이들을 비춰주던 후광 역시 빛이 바랜 상황이다. 대선 1차 투표에서 무르시 후보는 570만 표를 획득했지만, 그보다 먼저 실시된 2011년 말∼2012년 초 총선에서 무르시의 정당인 자유정의당은 그 2배 가까이를 긁어모았다.(5) 2차 투표에서 샤피크 장군은 1200만 표를 얻었는데, 이는 기존 체제에 대한 향수라기보다는 무슬림형제단을 거부한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정치는 '이슬람 해법'만으로는 성공 못한다"

카이로 중심에 위치한 19세기풍의 한 동네에는 파리의 도시 미화 사업을 추진했던 오스만 양식의 건축물과 프랑스 문화의 오랜 영향을 연상시키는 건물들이 즐비한데, 그곳에 카페 '리슈'가 있다. 기자와 지식인이 즐겨 찾는 회합 장소로 제1차 세계대전 직후가 전성기였는데, 비밀문으로 연결되는 내실 가운데 한 곳에서 조국의 독립을 추구하는 혁명가들이 모여들곤 했다.

현대적이고 세련된 방식을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 모하메드 아불 가르 박사가 자리잡고 앉은 곳도 바로 거기였다. 70살임에도 정정한 그는 사회민주당 총재로, 국제사회주의자 회의가 열린 케이프타운에서 돌아오는 길이다(국제사회주의자 회의에서는 결국 무바라크의 정당을 배제하기로 정했다). 그는 무슬림형제단과의 끝없는 싸움을 회고하며 대학에서 이들과 대치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나는 샤피크에게도, 무르시에게도 표를 던지지 않았다. 하지만 샤피크가 당선됐다면 다시금 폭력 사태와 새로운 민중봉기로 이어졌을 테고, 이제 그건 무슬림형제단이 주도했을 것이다. 무슬림형제단이 정부로 들어가는 게 모두에게 이득이다. 정부로 들어가면 저들은 뭐든 해야 한다. 결국 그들은 헛발을 디디지 않을 수 없음에 따라 민심을 잃게 될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전, 무르시 대통령은 올해 말까지 국제통화기금(IMF)에 1.1% 금리로 48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합의문에 서명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원칙적으로 이를 비난했던 무슬림형제단과 살라피스트들은 대출시 이자를 받지 않도록 정하는 이슬람 율법을 어긴 행위에 대해 예수회 특유의 위선적인 방식으로 정당화한다.

수십 년간 무슬림형제단은 '이슬람이 해법'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대부분의 현안에 대한 발언을 회피했다. 농지개혁 처리를 위해 무바라크 대통령 편에 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6) 이제 국내의 현안을 주도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하는 처지인 무슬림형제단은 경제와 사회 분야의 심각한 현실에서 교묘히 발뺌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공장과 학교, 병원 등지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파업이 현 이집트의 악화된 경제적·사회적 상황을 말해준다. 그런데 형제단은 경제자유주의를 제안하는 것 말고는 다른 해법이 없는 상태다. 물론 자신들이 늘 옹호했던 무바라크 전 대통령의 자유주의보다는 덜 부패한 방식을 쓰겠지만 말이다.

무르시에게 호재라고 할 만한 상황 가운데 남은 건 야당의 분열이다. 시간이 갈수록 이집트 야당은 점점 잡다한 연합 전선을 구축하고 있으며, 한 인물이 동시에 여러 조직에 얼굴을 내미는 건 아니지만 대표적 인물들이 한 조직에서 다른 조직으로 옮겨가는 상황은 빈번히 나타난다. 대선 기간에 진보 진영 여론을 흥분시켰던 후보인 함딘 사바히 역시 일관된 계획을 제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누군가는 이렇게 지적한다. "사바히의 조직 '민중의 흐름' 중앙위원회에는 자유주의 정당 대표, 사회주의자, 나세르주의자 등이 모두 포함돼 있고 이들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합의를 이루지 못한다. 민간부문의 역할에 대해서도, 사회 정의의 지위에 대해서도, 미국 및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도 모두 의견이 제각각이다." 독립적 위치에 있는 한 나세르주의 운동가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한다. "그 어떤 것도 합의를 보지 못하는데, 자유주의자와 나세르주의자가 이슬람주의자에 대항해 연합할 수 있겠는가?"(7) 무슬림형제단까지 정치판으로 끌어들인 상황에서, 사회개혁이나 외교정책도 제각각 내놓으며 어떻게 민주적 제도를 꾸려나가겠다는 것인가? 이집트 좌파는 늘 이같은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해왔다.

하지만 무슬림형제단이라고 앞으로 갈 길이 명확히 보이는 건 아니다. 해결해야 할 경제적·사회적 안건이 어마어마하다. 정부기구는 기존 체제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조직의 구조와 기본 마인드를 바꾸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체포한 경찰관에게, 경찰서에서 그가 제일 먼저 할 일은 그 사람을 때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대통령은 정치적 이유로 군부에서 잡아들여 감옥에 가둔 사람들을 모두 사면해주었지만, 그렇다고 이 대통령이 지속적인 인권침해 현상을 모두 척결할 수 있겠는가?

무슬림형제단은 이제 처음으로 (형제단의 지도자) 무르시드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이 보장되지 않는 조직에서 이같은 전쟁을 벌여야 한다.(8) 지난 3월 조직의 최고 의결 기구인 '자문평의회'(Majlis Al-choura)는 대선 참여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 사흘간 회의를 지속해야 했다. 그것도 가까스로 절반을 넘긴 상황이었다. 무슬림형제단은 역사상 가장 중대한 조직 분열을 겪고 있다. 아불 포투흐를 주축으로 한 세력과 (중도를 표방하는) 와사트당을 중심으로 한 세력, 그리고 기존 질서에 반발하는 젊은 세대들로 나뉘는 것이다.

조직이 정부를 장악하는 데 무수한 장애물이 존재하며, 이는 무바라크 대통령의 상황과 별반 다를 게 없다. 경제·법률·사회 자료 연구소(Cedej)의 알라 알딘 아라파트 연구부장은 "무슬림형제단이 이 나라의 패권을 장악하려면 하나의 포괄적인 계획안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한다. "1952년 '자유장교단'은 조국의 독립과 독립적인 경제 건설이라는 목표 아래 자신들의 패권을 구축하고 엘리트층을 규합할 수 있었다. 사다트가 정권을 잡았을 때, 그는 1967년의 패배를 이용하고 경제개방과 다당제를 제안했다. 무슬림형제단은 (심지어 국제적 사안에 대해서조차) 포괄적인 계획을 세우지 못한 상태다. 정부 기구의 각급 인사들을 규합하려면 무슬림형제단은 먼저 포괄적 계획안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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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알랭 그레슈 Alain Grésh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 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역대학원 졸.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

(1) Alaa El-Aswani, <야쿠비안 빌딩>(L’Immeuble Yacoubian), Actes Sud, Arles, 2006.
(2) Hesham Sallam, ‘Morsi, the coup and the revolution: reading between the red lines’, <Jadaliyya>, 2012년 8월 15일자에서 인용.
(3) ‘존재하는 건 오로지 샤리아뿐’(Il y a charia et charia), 디플로 블로그 ‘누벨 도리앙’(Nouvelles d’Orient), 2012년 8월 20일.
(4) Issandr el Amrani, ‘In translation: Salafis VS Ikhwan’, <The Arabist>, 2012년 9월 24일자에서 인용.
(5) 이집트 3개 지역에서 차례로 투표를 하기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총선이 수개월에 걸쳐 이뤄진다.
(6) Beshir Sakr & Phanjof Tarcir, ‘언제나 이집트 농민들에게서 다시 시작되는 투쟁’(La lutte toujours recommencée des paysans égyptiens),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7년 10월호.
(7) Amira Howeidy, ‘Egypt’s policial coalitions: Grande titles and vague platforms’, <Ahram Online>, 2012년 10월 1일.
(8) Alaa Al-Din Arafat, ‘다원주의 덫에 걸린 무슬림형제단’(Les Frères musulmans pris au piége du pluralism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