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의 1967, 사다트의 이유 있는 동맹
Spécial 정치 시험대에 선 이슬람주의
에리크 룰로 <르몽드> 기자는 1967년 6월 전쟁(이스라엘과의 제3차 중동전쟁)을 전후로 중동의 변화를 추적해왔다. 그는 최근 출간한 저서 <중동의 무대 뒤에서>(Fayard)에서 아랍 국가의 대패 이후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등장과, 무슬림형제단과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 사이의 동맹 양식을 서술했다.
당시 많은 관측통들은 가말 압델 나세르(1) 정권이 몰락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1967년 6월 19일, 명석한 나세르는 첫 내각회의를 소집해 들릴락말락한 목소리로 이렇게 선포했다. "구체제가 붕괴되고 오늘 새로운 체제가 탄생했다." 하지만 그는 사실상 1967년 6월 5일 이미 구체제가 붕괴됐다는 것은 밝히지 않았다. 이날은 나세르 지지 세력인 바스(Baas)당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세력 등 모든 좌파 민족주의 세력에겐 치욕의 날이다. 군의 대패와 정치 시스템의 실패 책임이 이들에게 전가됐기 때문이다. 비이슬람 세력인 이들이 정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자, 곧바로 이슬람 정치세력이 이들의 빈자리를 파고들었다.
진풍경이 일어났다. 무슬림들이 회교사원을 찾는 빈도수가 늘면서 사원에 들어가지 못한 무슬림들이 사원과 인접한 인도나 길에다 한없이 길게 카펫을 깔아놓고 예배를 드리는 바람에, 보행자와 자동차가 통행에 불편을 겪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상적인 현상이다. 종교는 비탄에 빠진 사람들의 안식처이자 이들에게 희망의 동기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 정치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궁여지책으로 채택한 슬로건 '이슬람이 해결책이다'가 꾸준히 좋은 평판을 얻고 있다. 필자가 인터뷰한 많은 무슬림들은 이스라엘의 중동전쟁 승리를 유대인의 전통 종교에 대한 애착, 즉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있었음을 정당화한 성서에 대한 믿음의 공이라 했다. 한편 무슬림들은 자신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것은 이슬람이 정교분리 이데올로기, 나세리즘(Nasserism·나세르가 주창한 범아랍 민족주의), 바티즘(Baathism·사담 후세인이 신봉했던 무신론적인 범아랍 이데올로기),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물들어서라고 했다. 물론 나세르는 사회 내부에서 일고 있는 이같은 변동을 간파하지 못할 정도로 꽉 막힌 정치인은 아니었다. 그는 놀랍게도, 무슬림형제단의 정신적 지도자이자 지하드의 이론가·사상가인 사이드 쿠틉을 처형한 당국에 복수하기 위해 역모를 꾸몄다가 2년 전 체포된 무슬림형제단원 1천여 명을 모두 석방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국가 통합을 달성하기 위해 해외에 있는 무슬림형제단 수뇌부들과 대화도 시도했다. 유일 정당인 나세르당이 쇠락하며 역동적 조직력을 갖춘 무슬림형제단이 유일한 정치세력이 됐다. (무슬림형제단의 지시로)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정기적으로 코란의 가르침을 방송했고, 방송 기회도 되도록 보수 성향의 이맘들에게 제공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이 나일계곡(이집트) 쪽으로 유입돼 회교사원과 코란학교, 그리고 이슬람 단체 등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이 단체들은 테러리즘 산실의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할 수밖에 없었다. 아랍 지역의 다른 국가들 또한 와하비파 이슬람 국가(Wahhabi Islam·사우디아라비아를 지칭함)의 만나(자금) 혜택을 누렸다. 따라서 아랍 세계의 얼굴은 지속적으로 변할 것이다. (중략)
안와르 사다트(2)는 나세르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생긴 정치 무대의 공백이 1967년의 파국(중동전쟁에서의 대패) 이후 득세하기 시작한 이슬람 세력으로 채워지고 있음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는 마호메트의 가르침을 사유화해 점진적으로 사회와 국가를 이슬람화했다. 그의 위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최적이었다. 그는 코란학교에서 코란을 읽고 쓰는 법을 배우며 암송했다. 수차례 메카로 성지순례를 다녀오고, 열성적으로 회교사원을 드나들며 대중 곁에서 겸손하게 예배를 올리며 카메라 세례를 받았다. 이마에 건포도처럼 검게 멍든 자국 이른바 '제비브'(Zebib)를 부각시킨 그의 사진들이 언론매체에 게재됐다. 제비브는 그가 일상적으로 기도할 때 자신의 이마를 얼마나 많이 땅바닥에 찧었는지에 대한 증거물로 쓰였다. 그래서 그는 '국부'와 '독실한 대통령'으로 불렸다. 종교 의식과 설교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프로그램을 장악했다. 종교 교육은 기초과목으로 학교 교육과정에 포함돼 있다. 이런 변화는 1980년 헌법에 '이슬람을 국교로,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법안의 기틀로 삼는다'는 조항을 명문화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이집트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정국가와 다를 바 없는 국가가 건설된 것이다. 나세르 대통령 시대 때 정교분리의 관행은 추억이 돼버렸다. 사다트는 자신의 토대를 공고히 하기 위해 정치적 동맹이 절실했다. 그러나 좌파와의 동맹이 불가능하자, 그는 정권을 잡자마자 자연스럽게 무슬림형제단의 비위를 맞추기 시작했다. 그는 나세르 대통령이 구금한 무슬림형제단원 중 수백 명을 석방하며 저들의 수뇌부와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모든 이가 익히 알고 있는 무슬림 창시자에 대한 자신의 찬양과 깊은 존경심을 상기시키며 저들을 유혹하려 했다. 1940년 그는 하산 알바나(무슬림형제단 창시자)를 만난 적이 있다. 사다트는 당시 수년째 수감 중인 알바나 가족에게 정기적으로 연금을 지급하며 알바나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있다.
그러나 무슬림형제단은, 사다트가 철저히 함구하고 있지만, 그가 1954년 (법원에) 잇달아 의견서를 보내 나세르 대통령 테러 선동죄로 기소된 무슬림형제단 간부 여러 명을 교수형에 처했다는 것을 잊지 못한다. 그는 혁명 법정을 구성하고, 기소된 무슬림형제단원을 능지처참할 목적으로 나세르의 전 가신 출신 1명을 재판관 3명에 포함시켰다.
사다트에 대한 불신에도 불구하고, 무슬림형제단의 이슬람 지도부는 대통령이 제안한 파이에 군침이 돌아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사다트는 자신의 정적일 뿐만 아니라 무슬림형제단의 정적이기도 한 나세르와 공산당 지지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무슬림형제단에 도움을 요청했다. 노동자와 학생들로 구성된 이 정적들은 당시 일부 사회 분야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또 무슬림형제단에 자치권(다른 단체에 금지된)을 부여해 이들이 영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유 있는 사다트의 무슬림형제단과의 동맹은 몇 년 뒤 그가 이스라엘과 평화협상을 구체화하면서 막을 내렸다(사다트는 1979년 3월 대이스라엘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등 중동 평화 문제에도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 이후, 급진 이슬람주의자들의 공분을 사 1981년 10월 피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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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에리크 룰로 Eric Rouleau <르몽드> 기자
번역 조은섭 chosub@ilemonde.com
(1) 1952년 7월 23일 가말 압델 나세르와 자유장교단은 정권을 잡았다.
(2) 나세르 대통령의 후계자 안와르 사다트는 자유장교단 출신이다. 1970년 9월 30일 나세르가 사망하자 2인자인 사다트가 정권을 잡았다. 그는 친미정책을 펴며 인피타(Infitah·사다트 대통령의 경제자유화 개방정책)를 계승하고, 예루살렘을 방문해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의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