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혜의 문화톡톡] '노화'를 다시 정의하기: '노인혐오'는 빈곤과 맞닿아 있다.
<서브스턴스>(2024)와 '노인혐오'에 대한 문화적 고찰
늙음이라는 이름의 거울
가끔 이런 의문이 떠올랐다. 왜 어떤 배우는 60대인데도 젊어 보이고, 또 어떤 배우는 50대인데도 훨씬 나이들어 보일까?
어떤 날은 똑같은 나이의 두 배우 사진을 붙여두고, 개그처럼 소비하는 게시물의 댓글을, 유저들의 의견을 읽었다. 더 젊게 보이는 것이 더 긍정적으로 갈음되는 세태를 가만히 보다 무심코 공감했다. 왜 그런 결론이 지어지는걸까 고민했다. 나이보다 더 깊게 새겨진 주름, 조금 더 구부정한 어깨, 무심하게 흐트러진 옷차림이 곧 늙음일까? 늙음은 부정의 이미지를 주는 것일까? 그렇다면 ‘늙음’이라는 것이 꼭 연령으로만 규정되는 건 아닌 듯 했다. 그러한 궁금증을 오래 전부터 품어왔다.
우리는 무엇을 혐오하는가?
자신이 선정한 주제로 한 학기 동안 학술 에세이를 쓰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학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다. 스무명 남짓의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주제선정부터 한 편의 연구를 해내기까지를 교수자로써 지도하며 고스란히 지켜보는 수업이다. 학기 초, 한 학생이 다가와 질문했다. “교수님, 사실 우리는 나이 든 사람 자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보여주는 ‘빈곤함’과 ‘피로감’을 싫어하는 거 아닐까요?” 간단하지만 날카로운 통찰이었다.
연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수일 후, 학생은 본론을 통해 아래와 같이 말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늙음이 가난으로 치환된다. 우리는 노인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외모를 꼽을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보다 늙은 것처럼 보인다.”
일리가 있었다. 늙음이 빈곤의 발현이라면, 정작 혐오의 기저에는 늙음이 아닌 다른 대상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혐오하는가? 학생의 말은 내 안에서 꽤 오랫동안 맴돌았다.
타인을 통해 나를 인정하는 지금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서브스턴스>(코랄리 파르쟈, 2024)는 '노화'에 대해 말하는 호러물이다. 한때 주목받던 배우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무어)은 늙음으로 인해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조연에서 주변으로 밀려난 상태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라고 믿으려고 노력하나, 타인의 시선은 그렇지 않다. 그가 일하는 방송국은 더 젊고, 매력적인 얼굴을 찾는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무대에 서기 위해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선택한다. "더 나은 당신을 꿈꿔본 적 있는가?"라는 영화의 카피처럼 약물은 타인의 시선을 기준으로 그가 더 나은 '나'가 되도록 만들어준다. 노화를 멈추고 젊음을 되찾아준 것이다.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다양하지만, 결국 젊음은 내면의 인정욕구를 자극하고, 일종의 권력으로 작동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권력은 내면에서 비롯되지 않고,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 정의된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가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혐오하는 것은 늙음이 아니라, 더 이상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빈곤은 노화의 또 다른 이름일까
인간은 누구나 늙는다. 그러나 현재는 젊음의 일부를 돈으로 살 수도 있는 세상이다. 고급 스킨케어, 레이저 시술, 꾸준한 운동과 영양제. 모든 것이 비용이다. 누군가는 “돈이 많으니까 관리를 잘한 거겠지”라고 말한다. 맞다. 하지만 이 말은 곧 돈이 없으면 더 빨리 늙는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를 통해 늙음을 지우고, 젊은 자아인 '수'(마가렛 퀄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존재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결국 그는 스스로를 유지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무너진다. 이처럼 노화를 늦출 수 있을지언정, 멈출 수는 없다. 그리고 그 멈출 수 없는 과정의 기회를 만들어 낸 것은,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돈'이다.
노인 혐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고민한다. 우리가 싫어하는 것은 정말 나이 든 사람들일까? 아니면 ‘그들이 가진 빈곤함과 피로함’일까?
지하철에서 노인이 큰 소리로 전화할 때, 우리는 불편해하며 눈살을 찌푸린다. 하지만 옆에 앉은 부드러운 향수를 뿌린 노인이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면, 그를 늙었다고 인식할까? 아마 그보다는 ‘우아하다’고 느낄 것이다. 서브스턴스에서 엘리자베스는 단순히 젊음을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타자의 시선이 머무는 사람으로써 인정받고자 했다. 그 수단이 재화로 유지할 수 있는, 외모라는 점은 특히 주지할만 하다.
우리는 왜 빈곤을 두려워하는가: "여유롭게 살고 있다"라는 환상
그렇다면 ‘가난’은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가 아니다. 그건 실패라는 딱지이자, 뒤처진 사람이라는 낙인이다. '가난은 노력하지 않은 자의 몫'이라는 부박한 논리가 너무나도 익숙해진 세상이다. 경쟁에서 이겨야만 살아남는 사회에서, 가난은 무능력의 증거처럼 취급된다.
가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도 느꼈다. 그들이 거리를 떠도는 노인들에게 혐오를 느끼는 이유는, 단순히 나이 든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었다. 저렇게 늙으면 나도 저렇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이 주였다. 자신의 미래가 얇은 점퍼를 걸치고 공원을 떠도는 노인과 당장 겹쳐 보였던 것이다.
지금 가난해 보여선 안된다는 마음은 가끔 '플렉스'(Flex)라는 명사로 포장된다. 비싼 물건을 사고, 오마카세를 먹는다. 그것을 SNS에 올린다. 빈곤은 숨겨야 하는 결핍이 된다. 지하철에서 폐지를 줍는 노인을 보며 눈길을 피하는 건, 그 모습이 자신이 언젠가 마주할지도 모르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짜 두려운 것은 '늙음' 그 자체가 아니다. 혐오하는 것도 '늙음'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유지할 수도 있는 젊음을, 그저 보여지는 외면을 꾸밀 여력이 없게 하는 빈곤함, 즉 가난함이다.
우리는 모두 늙는다.
돈 없는 늙음은 시선을 앗아간다. 사회는 늙음을 외면한다. 시선의 바깥에 위치한 노인은 천천히 사각지대에 자리잡는다. 그러나 누구도 늙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굳이 노화를 늦춰가며 보다 더 젊은 모습을 유지해서, 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 늙음이 어떠한 외면으로 다가올지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사실 우리는 노인이 아니라, 가난을, 상실을, 무력함을 두려워하고 있을 뿐이다. 그 두려움을 외면하고 다른 이들을 혐오하는 대신, 같은 인간으로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늙음은 타인이 아닌 미래의 나 자신이다.
*해당글은 경희대학교 수학과에 재학중인 정승민 학생(jsmdr0303@gmail.com)의 학술에세이 「노인 혐오와 빈곤 기피의 상호관계: 노화는 빈곤의 발현」 (2024)의 동의를 구해 원문 일부를 인용 및 참조해 작성했음을 밝힌다.
아래에 정승민 학생이 쓴 학술에세이에서, 지면의 독자와 함께 읽고 나누었으면 했던 부분이다. 해당 문장을 그대로 옮긴다.
현대 사회에서 제시된 노인의 기준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여러 복지 정책과 경제활동을 마치는 시기 등이 보편적인 기준인 만 65세와 괴리가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제시한 새로운 노인의 기준은 ‘빈곤함’이다. 노인 혐오의 원인이 되는 노인의 특성들은 노화에 따라 발현되는 노인의 특징이라 간주되지만, 빈곤한 사람에게서도 나타나는 특징들이기에 단지 노화를 노인 혐오 현상의 원인으로 두지 않고 빈곤함이라는 속성으로 더 세분화하여 논리를 전개해 보고자 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본문 2쪽)
현대 사회에서는 늙음이 가난으로 치환된다. 연령이 노인의 기준으로써 기능을 상실하며 우리는 노인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외모를 꼽을 수 있다. 외적인 모습으로 노인을 구분한다면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보다 늙은 것처럼 보인다.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으며 외적인 모습을 관리하는 데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보다 대체로 주름이 적고 신체가 건강하기 때문이다. (중략) 요컨대 가난이 연령보다 더 두드러지게 노화의 특성을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 3쪽)
일반적으로 노인 혐오의 이유가 되는 것은 노인과 청년의 사회구조적 대립, 청년이 노인에게 겪는 불쾌감의 두 가지이다. 본 연구는 청년이 노인에게 겪는 불쾌감에 집중해 그 속성을 초점화할 것이다. 청년이 노인을 혐오하는 원인이 되는, 노인에게서 겪는 불쾌감은 노인들의 이기적이거나 무례한 행동과 같은 생활 습관적인 부분과 체취나 외모와 같은 외적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위와 같은 노인의 특성들은 단지 나이만 들었다 해서 발현되는 특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인임에도 청년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현대 사회의 예법과 규칙을 지키며 시대에 따라가려는 노인이 있기 때문이다. (본문 3쪽)
글·이지혜(이해이)
문화평론가. 2022년 문화전문지 《쿨투라》 제16회 영화평론 신인상으로 등단.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글쓰기를 강의하며 한국문화콘텐츠와 문화현상을 연구한다. 월간 《쿨투라》에 영화평론을, 서울책보고 웹진 <e-책보고>에 에세이를 연재했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문화톡톡에 문화평론을 기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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