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무대에 오른 이슬람주의자들

Spécial 정치 시험대에 선 이슬람주의

2012-11-12     알랭 그레슈

무슬림형제단과 살라피스트(Salafiste·극단 이슬람주의자), 그리고 중동의 아랍에미리트연방 간 동맹이 체결되며 강력한 이슬람주의 물결이 아랍 세계를 휩쓸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동맹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코란은 아랍 지역의 정치 풍경을 탐색시키는 나침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무슬림형제단이란? "타락의 길로 접어든 소그룹이다." 이집트 혁명이란? "이란의 도움 없이 불가능했으며, 신(新)사이크스피코(SykesPicot)(1) 협정의 전주곡이다." 무함마드 무르시의 대통령 당선은? "불행한 선택이다." 두바이 경찰청장인 다히 칼판 알타밈을 비롯해 아랍계의 많은 경찰 간부들이 내비친 의견이다. 알타밈은 자신의 트위터에 "만약 무슬림형제단이 중동의 안전을 해친다면, 저들은 피를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2년 여름 내내, 두바이 경찰청장은 무슬림형제단을 '종말을 앞둔 범죄 조직'으로 규정하며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공격을 반복했다.(2) 그리고 그는 무슬림형제단의 자산과 자금 동결을 외쳤다. 그의 독설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두바이가 속한 아랍에미리트연방은 무슬림형제단원 60여 명을 국가 전복 기도죄로 법정에 기소했다.

일간지 <알샤크 알아우사트>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살만 가족의 소유다. 이 일간지는 유럽에서 범아랍 신문으로 유명하지만, 자국 정치에 대해선 자율성이 전혀 없다.(3) 하지만 지난 6월 30일 무르시 대통령의 취임식이 끝난 다음날, 이 일간지의 편집국장 압둘 라만 알라시드는 의문- 자신의 의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알사우드(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창립자) 가문의 의문에 가까운- 을 신문에 게재했다.(4) 이집트의 새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펼치며 정말 알카에다와 맞설까? 그는 전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가 담당했던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중재자 역할을 이어갈까? 외국군의 모든 개입에 반대하는 그가 실제로 시리아 저항세력을 도울까? 그가 무슬림형제단 요르단 지부 단원들이(5) 반(反)압둘라 2세(요르단 국왕) 반대 시위를 주도하는데도 요르단 국왕을 지지할까? 이집트 대통령은 중동 국가들이 스스로 동맹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핑계로 무슬림형제단과 오랫동안 강력한 동맹관계였던 이란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할까?

이같은 기사를 내보내고 몇 주 뒤인 9월 편집국장은 또다시 카이로가 시리아 문제 해결 팀(카이로·리야드·앙카라)에 테헤란을 끌어들여, 3개국 모임을 4개국 모임으로 만들려 한다며 규탄했다.(6)

갈림길로 등장한 '아랍의 봄'

서양은 중동 언론에 소개된 이런저런 부정적 보도자료들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이런 보도들이 기존에 통용되던 일반적 시각에 배치됐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수니파 이슬람이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과 다양한 이슬람 세력을 대동단결시켜 사회질서를 종교적으로 엄격하게 통제하며 샤리아(이슬람 율법)를 국민에게 적용하려 한다는 시각과 배치됐다. 이슬람을 보수적 시각으로 보는 이런 서양의 잣대가 아랍 국가 간 정치적 고려와 외교 경쟁, 국가 간 차이와 전략의 다양성마저 없애버린 것처럼 보인다. 일부 역사적 사건들-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이었던 사건들- 이 이슬람에 대한 환상에 자양분이 됐다. 1950~60년대 이집트·시리아·알제리·이라크에서 박해받던 수천만 명의 무슬림형제단 수뇌부들은 중동,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에 정착했다. 무슬림형제단의 한 측근 지식인은 이렇게 말했다. "공식 협약을 맺고 사우디아라비아에 정착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 무슬림형제단은 해체돼 조직화된 지휘부가 없었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에 정착한 단원들이 사우디아라비아 쪽에 무슬림형제단 간부 수천만 명을 지원해, 이들이 반아랍 민주주의 투쟁, 특히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와 좌파 타도 투쟁에 기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1980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이슬람 세력 간 화해의 장을 만들어줬다. 이들이 공산주의 타도 구호 아래 공통 투쟁에 나선 것이다.(7) 미국 정부와 중앙정보국(CIA)이 후원하고 석유왕국들이 자금을 지원하는 이슬람 네트워크가 병력을 소집하자, 자원입대자 수천 명이 소련군과 대적해 싸우겠다며 몰려들었다. 하지만 무슬림형제단은 신중한 자세를 취하며 인도적 지원에만 나섰다.(8) 알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의 자유 전투대원들을 돕기 위한 결집의 산물이다.

'아랍의 봄'은 이 거룩한 동맹(사우디아라비아와 무슬림형제단 간)의 세 번째 단계가 될까? (첫 번째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박해받던 무슬림형제단 수뇌부들에게 자국 이주를 허용했을 때고, 두 번째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이다.) 이같은 솔깃한 가설은 냉전 이후에 생긴 미묘한 현실을 은폐시킨다. 우선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할 무렵인 1990년대 초반 사우디아라비아와 무슬림형제단 간 관계 단절이 발생한 시기다. 쿠웨이트의 막강한 권세가이자 당시 내무부 장관인 나예프 왕자는, 2002년부터 자국 일간지 <알시야사흐>에 무슬림형제단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소상하게 소개했다.(9) "무슬림형제단은 아랍권에서 일어나는 대부분 문제의 원인이며,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에 광범위한 피해를 유발했다. 우리는 이 단체를 너무 지지했다. 그래서 이들이 아랍 세계를 파괴했다."

1990∼91년 중동 위기 때, 왕자는 튀니지의 라셰드 간누시(현 이슬람주의 제1당 엔나흐다당의 총수), 수단의 야당 지도자 하산 알투라비와 예멘의 지도자 압둘마지드 알진다니, 그리고 전 터키 총리 네지메틴 에르바칸 등 무슬림형제단 소속 지도자들로 구성된 사절단을 접견한 적이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저들에게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승인할 것이냐?'라고 묻자, 저들은 자신들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찾은 것은 우리 쪽 의견을 경청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한데 곧장 이라크로 건너간 이들은 놀랍게도 쿠웨이트 점령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왕자는 자신이 무슬림형제단에 분노하는 또 다른 이유, 다른 아랍에미리트연방도 그처럼 무슬림형제단에 분노하는 이유에 대한 언급은 회피했다. 예컨대 중동 사회 내 무슬림형제단의 정치 비전과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에 입각된 군주제의 정치 비전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무슬림형제단의 정치 비전도 이슬람 국가 창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충성이 아닌 선거를 토대로 한 국가 창설이었다. 게다가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은 다양한 살라피스트 세력에게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세력들이 정계 개입은 거부한 채 현 정권, 그 형태가 어떻든 간에- 그게 설령 이집트 무바라크 왕가의 정권이라 하더라도- 지지하고 있어 안심하고 있다.

2000년대 리야드와 무슬림형제단 간 골이 더욱 깊어졌다. 무슬림형제단이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저항운동 단체 하마스를 통해 '저항의 축'에 가담해 이란·시리아·레바논의 이슬람 저항단체 헤즈볼라와 함께 미국과 이스라엘과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랍 혁명을 기점으로 패가 다시 갈렸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방은 아랍 혁명에 반대했다. 이들에겐 무슬림형제단이 주도한 이집트와 튀니지 혁명 소식이 결코 희소식일 리 없었다. 무바라크와 돈독한 유대관계를 형성했던 와하비파 이슬람 국가의 지도자들은 튀니지에서 축출된 전 대통령 벤 알리의 사우디아라비아 망명도 수락했다. 이후 이들은 튀니지 새 정부가 그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를 거절하며, 저들(무바라크와 벤 알리)을 축출한 무슬림형제단과 저들을 방치한 미국을 비난하고 있다. 반혁명의 중심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군주제가 있고, 이 군주제가 2011년 3월의 바레인 혁명도 짓밟았다. 또한 리야드는 무슬림형제단이 적극적으로 가담하고 있는 요르단의 반정부 시위대(10)에 직면한 국왕 압둘라 2세를 지지하고 있다.

정치가 누를수록 강화되는 종교적 결속

그럼에도 지난 7월 11일, 무르시 대통령과 엔나흐다 소속의 튀니지 총리 하마디 제발리의 첫 해외 순방지는 사우디아라비아였다. 이들의 순방은 이슬람주의자들의 연대를 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제 관계를 지배하는 현실정치를 내세운 것이었다. 이집트는 리야드의 자금이 절실했다. 이집트는 이미 리야드로부터 15억 달러의 자금을 지원받았고, 25억 달러의 추가 지원금도 약속받았다.(11) 게다가 150만 명을 웃도는 이집트인들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하고 있는데다, 이들이 가족에게 송금하는 돈이 이집트 경상수지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집트에 대한 대비책을 세웠지만 그렇다고 국교를 단절할 수 없다.

지난 4월 사우디아라비아는 카이로 주재 자국 대사를 소환했다. 이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마약 소지 혐의로 체포된 이집트인 변호사 아메드 알지자비에 대한 규탄 시위를 벌인 뒤 내린 조치였다.

지난 8월 무슬림형제단의 핵심 수뇌부 중 한 명이자 대통령 자문위원으로 일하는 에삼 엘이란(무슬림형제단이 창당한 자유정의당의 차기 당 대표로 거론되는 인물)은 사우디아라비아 대사에게 2009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체포돼 옥살이를 하고 있는 이집트 시민 나글라 와파 여사의 체포 경위와 그녀의 범죄, 그리고 판결에 대해 명확한 해명을 요구하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게재했다. 그녀는 사우디아라비아 왕자와 동업했다가 금전적 불화로 인해 태형 500대와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12)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의 이집트 투자 문제도 논쟁을 키우고 있다. 2011년 6월 중동의 최고 갑부 왈리드 알탈랄 왕자는 공식 성명을 통해 "무바라크 대통령 치하 때(13) 유행하던 부패 시스템 덕분에 헐값에 매입한 땅 10만 에이커 중 4분의 3을 이집트 국민에게 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이집트의 법망을 피해갔다. 하지만 카이로와 리야드가 이런 문제 때문에 생기는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이집트 투자부에 특별 사무실까지 설치했지만, 이집트 검찰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투기 이윤을 겨냥한 수사를 시작했다.(14)

리야드는 이집트가 외교 무대에 복귀하고 있어 불안해한다. 이집트는 지난 10여 년 동안 종종 사우디아라비아의 훼방으로 외교 무대에 나서지 못했다. 무르시 대통령은 우선 미국과 함께하던 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신호로 중국을 방문했다. 이어 그는 이란을 방문해 자신이 무엇을 우려하는지 확인시켜줬다. 테헤란을 방문함으로써 이집트 국민에게서 미국의 압박에 굴하지 않을뿐더러 중동 지도자들의 반이란·반시아파 담론에도 개의치 않는 대통령이란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무르시 대통령은 사우디아라비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외줄타기 묘기를 보여야 했다. 요컨대 그가 이란 수도에 머문 것은 고작 몇 시간에 불과했고, 애초 예상대로 혁명 지도자(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는 접견하지 않은 채 양국 간 외교 정상화 언급을 거부했다. 게다가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1950∼60년대 무슬림형제단을 탄압하는 정치를 펼친 전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그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의 축출을 외치며 시리아에 대한 강경 발언을 구사했다. 동시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시리아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외국군의 개입을 요청했지만 이를 거부했다.

이집트의 중동 외교 복귀에 불안한 사우디 왕정

튀니지 엔나흐다당의 총수 간누시는 리야드보다는 런던을 선호해 그곳에서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했다. 2011년 12월 미국을 순방 중이던 간누시는 "'아랍의 봄'이 중동의 국가원수들을 축출시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예언에 사우디아라비아 일간 <알리야드>는 "엔나흐다당을 강력 지원하고 있는 카타르 국왕도 그 축출 대상에 포함되느냐"는 아이로니컬한 반응을 보였다.(15)

왜냐하면 카타르와 무슬림형제단의 관계가 돈독했기 때문이다. 카타르도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아라비아반도에 출현한 엄격한 이슬람 교육, 이른바 와하비즘(Wahhabism·이슬람 전통주의)을 추종하고 있다. 군대도 외교관도 없고, 아랍 무대에서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만큼 충분한 첩자도 없는 카타르는 독특한 조커인 화수분 같은 달러 보유고를 이용해 자국 정책의 하수인을 무슬림형제단 내에서 찾았다. 1970년대 이후 이슬람 학자 셰이크 유스프 알콰라다위(카타르 정부의 하수인)는 카타르 방송채널 <알자지라>에서 <샤리아와 삶>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아랍 최고의 이슬람 설교자 중 한 명이 됐다. 알콰라다위는 이집트 무슬림형제단 지부의 파벌을 수차례 비난할 정도로 무슬림형제단에서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지만, 그는 종교적으론 자신이 속한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하고 있다.

미국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헤즈볼라를 비롯해 시리아와 이란 등과 잠시 내통했던 카타르는, 아랍의 봄 이후 태도를 바꿔 무슬림형제단의 승리를 기원했다. 카타르 왕실에서 자금을 전액 지원받고 있는 <알자지라> 채널은 영향력도 상실하고, 최고의 기자 몇몇도 잃었다. 이집트에서 무슬림형제단 대변인 노릇을 하는 <알자지라>는 때론 튀니지에서조차 그 임무를 수행한다. 지난 8월 라마단이 한창일 때 카이로를 방문한 카타르 국왕은 이집트의 현금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써달라며 이집트 중앙은행에 20억 달러를 예치함으로써 양국의 돈독한 동맹을 과시했다. 하지만 이것은 전략적 동맹이 아닐까? 최근 이런 동맹에 반대해 엔나흐다당과 카타르 간 긴장이 고조되면서 카타르 정국을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뜨리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드골 장군은 '복잡한 오리엔트(아랍 세계)'란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오리엔트를 방문했지만, 이와 달리 오리엔트는 신비한 곳이 아니라 세계 다른 지역과 똑같은 정치 개념으로 분석이 가능한 지역이다. 따라서 이슬람 교리에서 영감을 얻어 등장한 다양한 무슬림형제단 지부들은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 은둔한 채 지시를 하달하는 수장 말을 따르지 않는다. 이들의 전략은 각 지부가 소속된 국익의 틀에서 짜인다.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에 대한 무르시 대통령의 정책이 하마스 내에서 심각한 불만을 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그림에 살라피스트들의 문제가 덧붙여졌다. 정치적 개입에 줄곧 반대했던(16) 이 세력이 이집트와 튀니지의 정치 무대에 진입하며 새로운 도전을 감행하고 있는데다,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 간 화친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비록 사우디아라비아가 이웃 강대국과 요르단 왕정에 대한 카타르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맺은 화친이긴 했지만, 이제 사우디아라비아는 무슬림형제단을 비호한다고 의심을 샀던 카타르와 함께 시리아 반군 지원을 거부하고 있다. 코란이란 나침반만 가지고 이슬람 지역의 풍경을 탐색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깨닫게 되는 대목이다.

글 알랭 그레슈 Alain Gresh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 조은섭 chosub@ilemonde.com

(1)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프랑스와 영국이 은밀히 맺은 협약.
(2) 2012년 7월 26일 이집트 일간 <인디펜던트>에 게재된 ‘Dubai police chief warns of Muslim Brotherhood, Iran threat’ 참조.
(3) Mohammed El-Oifi, ‘아랍 일상의 중심으로 여행’,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8년 12월호.
(4) Abdul Rahman Al-Rashed, ‘모르시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간 <알샤크 알아우사트>, 런던, www.asharq-e.com, 2012년 7월 2일.
(5) Hana Jaber, ‘요르단의 봄을 향하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8월호.
(6) 일간 <알샤크 알아우사트>, 런던, 2012년 9월 19일.
(7) Christian Parenti, ‘아프가니스탄에서 공산주의 경험 되돌아보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8월호.
(8) Stéphane Lacroix, ‘Osama bin Laden and the Saudi Muslim Brotherhood’, <Foreign Policy>, 2012년 10월 3일.
(9) www.ainalyaqeen.com/issues/20021206/index.htm, 2012년 12월 6일.
(10) Hana Jaber, ‘요르단의 봄을 향하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8월호.
(11) 일간 <아흐람 온라인>, 2012년 9월 19일.
(12) 일간 <알와탄>, 카이로, 2012년 9월 2일.
(13) <로이터통신>, 2011년 6월 11일. 알랭 그레슈, ‘혁명 중인 이집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7월호.
(14) ‘Saudi-Egyptian ties get big boost’, Arab News, Jeddah’, 2012년 9월 14일, ‘Through special office, government to protect Saudi investors’, <AlMasry AlYoum>, 2012년 10월 4일 카이로.
(15)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간누시>, BusinessNews.com, 튀니스, 2011년 12월 15일.
(16) 이집트 살라피스트의 주요 정당인 누르당 내의 갈등 때문에 이들의 정치 입문이 난관에 부딪혀 살라피스트의 일관성 있는 정치 노선이 무엇인지 정의하기 어려운 상태다.